‘은진미륵’으로 알려진 충남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못생긴 불상’으로 폄훼됐다.
일본의 미술사학자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균형미가 없고, 머리가 지나치게 크며 면상 또한 평범하다”고 혹평했다.
고고미술사학자인 고 김원룡 박사도 “전신의 반쯤 되는 거대한 얼굴은 삼각형이어서 턱이 넓고… 일자로 다문 입, 넓적한 코와 함께 가장 미련한 타입”이라 했다. 김원룡 박사는 특히 “은진미륵이야말로 신라의 전통을 완전히 잃어버린 최악의 졸작”이라고 ‘디스’했다.
1000년 이상 그 자리에 그냥 서있는 죄밖에 없는 은진미륵으로서는 어이없이 당해온 ‘의문의 1패’였다.
지나는 사람마다 ‘삼등신’이니 ‘미련한 대두’니, ‘최악의 졸작’이니 하고 손가락질하다 못해 각종 언론 지상은 물론이고 심지어 학술논문에까지 대놓고 ‘못생겼다’고 비판했다. 굴욕도 이런 굴욕도 없다.
왜 이런 지청구를 당한 것일까. 은진미륵보다 약 200년 정도 앞서 조성된, 그 잘생긴 통일신라시대 석굴암과 비교되었기 때문이다.
장동건·송중기 급인 ‘꽃미남’ 석굴암 본존불과 견주니 ‘오징어’로 취급된 것이다.
김원룡 박사는 “완벽한 신체비율로 인간이 도달하는 최고 수준의 조각품인 석굴암에 비해 예술가의 기백과 기술을 완전히 잊어버린 은진미륵”이라 품평했다. 석굴암에서 정점을 찍은 한국 예술이 은진미륵에 이르러 퇴보의 마침표를 찍었다는 비아냥이다.
“석굴암 조각들은 신라 불공들만이 이룩할 수 있는 자연주의와 표현주의의 신묘한 융합이다. 신라가 멸망한 935년 이후…고려 불공들은 큰 돌을 쪼아서 미술품을 만들어내는 따위의 예술가 기백이나 기술을 완전히 잊어버린다. 그 단적인 예가 유명한 논산의 미륵불(은진미륵)이다.”(김원룡의 <한국미의 탐구>, 열화당, 1978)
오죽하면 얼굴 큰 사람에게 ‘은진미륵 같은~’이란 수식어를 붙이겠는가. 그러나 쏟아지는 온갖 외모비하발언을 묵묵히 견뎌온 보람이 있나보다.
문화재청이 20일 ‘파격적이고 대범한 미적감각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이 은진미륵을 국보(제323호)로 승격지정했으니 말이다.
하기야 광종(970년)~목종(1006년) 사이 고려 임금이 직접 파견한 석공 100여 명이 36년 간이나 힘들여 조성한 불상이다.
아무렴 터무니없는 졸작일리 있겠는가. 일단 자연 화강암 암반 위에 허리 아래와 상체, 그리고 머리 부분을 각각 하나의 돌로 조각해서 연결했다.
키가 18.2m에 돌의 무게만 258t인 거대한 불상을 조성하는데 들인 공력을 생각해보라.
요즘에는 당나라 조각의 영향 아래 있던 통일신라시대와 달리 고려 특유의 독창성을 담은 ‘개성파’ 불상으로 해석되고 있다. 잘 빠진 꽃미남은 아니지만 강한 원초적인 힘을 풍기는 성격파 배우 같다는 것이다.
은진미륵으로서는 다양해진 예술성과 미의 기준에 따라 얻게 된 1000년 만의 명예회복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신은영, ‘관촉사 석조보살입상 연구, 이화여대 석사논문. 2013
김원룡, <한국미의 탐구>, 열화당 1978
조은행, ‘한국의 석재불상 연구:관촉 은진미륵보살입상’ 전주대석사논문,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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