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7월 공주에서는 한국 고고학사에 길이남을 발굴이 있었습니다. 공주 무령왕릉 발굴이었습니다. 배수로 공사중 우연히 현현한 무령왕 '내가 무덤의 주인공'임을 선언하고 나선 첫번째 임금이었습니다. 특히 무덤벽이 완전히 밀봉된채 발견되었기 때문에 도굴의 화를 입지않았다는 점에서도 엄청난 화제를 뿌렸습니다. 무덤벽을 메웠던 벽돌을 들어내자 '1500년동안 밀폐된 공간의 기운'이 바깥 공기와 만나 '쏴아아' 하는 소리를 냈습니다. 무덤에는 '사마왕(무령왕)이 62세를 일기로 돌아가셔서 이 자리에 묻혔다'는 내용을 담은 지석이 확인됐습니다. 그러나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습니다 이 발굴은 고고학 발굴사에 길이남을 흑역사였기 때문입니다. 하루밤에 유물 수습을 끝내고, 빗질까지 해서 말끔히 정리해버린, 아 이런 무자비한 발굴이 어디 있습니까. 이번주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는 100회를 맞아 '고대사의 블랙박스를 연, 그러나 치욕을 안긴 무령왕릉 발굴사'를 더듬어보겠습니다. 다음 주의 주제는 '무령왕 그는 누구인가'입니다. 2회에 걸친 주제입니다.

1971년 7월5일 부여에서 무량사 목조문화재를 점검하고 있던 윤홍로에게 오토바이를 탄 부여군청 직원이 달려왔다. 윤홍로는 문화재관리국 건축기사로 공주·부여지역 문화재공사 감독관직을 맡고 있었다.

“공주에서 긴급전화가 왔습니다. 빨리 전화 받으랍니다.”
윤홍로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슨 사고라도 난 것일까. 그는 부리나케 달려갔다. 

“윤기사님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빨리 오십시요.”

문제의 공사현장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는 5호분(석실분)과 6호분(벽화분)이었다. 무슨 공사냐. 

무령왕릉에서 확인된 지석.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무령왕)이 62살을 일기로 돌아가셨다'는 내용이다.

해마다 여름철만 되면 실내외 온도차이로 인해 이른바 결로현상이 일어났으며 벽면에 물이 흘러 벽화가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문화재관리국은 6호분(벽화분) 봉토 북쪽 3m 떨어진 위치에 깊이 3m의 단수구(斷水溝)를 파 돌리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가지 여담. 이 공사는 원래 고분발굴이 아니었지만 중요한 고분의 바로 옆에서 벌이는 일이었고, 어쨌거나 봉토의 뿌리를 산맥에서 끊어놓는 일이었기에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간단한 위령제를 지내는 등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그런데 바로 그 위령제를 지내기 위해 마련한 제사상 자리가 나중에 보니 무령왕릉 안으로 들어가는 연문(羨門)자리였다. 무령왕이 도운 것일까.

여하간 긴급전화를 받은 윤홍로가 정신없이 현장으로 달려갔다. 전화를 건 이는 공사를 담당한 전일기업의 현장책임자 김영일이었다. 윤홍로의 회고.

“사고인줄 알고 달려가 보니 김영배 공주박물관장과 안승주 공주사대 교수가 인부들을 독려해서 파고 있었어요. 안되겠다 싶어 작업을 중단시켰지요. 김관장이 ‘당신이 뭔데 작업을 중지시키냐’고 한바탕 야단치는 바람에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어요. 그러나 어쩝니까. 공사감독관으로서 이 문제는 짚고 넘어가야 했어요. 정식 발굴 조사를 벌여야겠기에 작업을 중단시킨 거지요.”

알고 보니 내막은 이렇다. 윤홍로는 미리 공사 책임자인 김영일에게 “뭔가 이상한 유물이라도 발견되면 즉시 공주박물관장의 지시를 받아 처리하라”고 신신당부해 놓았다.

그런데 이날 공사인부의 삽날이 전돌, 즉 벽돌의 모서리를 친 것이었다. 지체 없이 김영배 관장에게 연락됐고, 김영배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백제시대 전돌로 만들어진 무덤일 것으로 판단했다.

김영배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안승주를 불러 함께 파내려 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와중에서 현장소장인 김영일이 감독관인 윤홍로에게 긴급연락을 하게 된 것이다.

“국장님, 큰 일이 터졌습니다.”
바로 공사작업을 중단시킨 윤홍로는 문화재관리국장 허련에게 긴급보고를 했다. 1,450여 년의 긴 잠에서 깨어 우리 눈앞에 백제 제 25대 무령왕이 환생하는 순간이었다.

비상사태였다. 보고를 받은 허련은 문화재관리국 학예직원들을 실무원으로 하는 발굴단을 조직하고 그 지휘를 국립박물관(관장 김원룡)에게 맡도록 조치했다.

배수로 공사중 우연히 발견된 무령왕릉 입구. 무덤 입구가 완전히 밀봉된채 발견되어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7월7일
문화재 관리국 장인기 문화재과장, 이호관 학예연구관, 조유전 손병헌 지건길 학예사 등을 급파했다. 현지의 김영배, 안승주, 박용진(공주교대 교수) 등도 발굴단에 편입됐다.

발굴단장인 김원룡도 오후 3시쯤 공주에 도착, 현장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자, 전벽(벽돌벽)과 아치형 구조가 뭔지 확인해야지.” 

오후 4시쯤, 전벽 정상으로부터 약 1m 밑에서부터 아치형 입구를 벽돌로 옆으로 가득 쌓아 막아놓은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 전축분이 확실하다.”

발굴단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짜릿한 흥분감에 몸을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입구 앞 매토부(埋土部)가 너무 단단해서 작업진도가 지지부진한 채로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철야작업이라도 해서 끝내자. 그래야 내일(8일) 아침이면 연문을 열고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조사할 수 있잖아.” 

이 무렵 전축분 발견 소식을 들은 서울의 중앙지 기자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해질녘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어느덧 호우로 변하기 시작했다.

큰일 난 것이다. 입구 앞 수광(竪壙)에 물이 고이게 되고 만약 그것이 불어 버리면 무덤 안으로 역류하는 날에는 끝장이었다. 발굴단은 비를 흠뻑 맞은 채 쏟아지는 빗물을 밖으로 흘려 내보내야 했다.

급조된 배수구가 설치된 것은 밤 11시30분이었다.

밤사이에 소문이 퍼졌다. 비는 새벽이 되서야 그쳤는데 “왕릉의 입구를 파헤치자 천둥번개와 함께 소나기가 내렸다”는 말이 삽시간에 공주시내에 퍼진 것이다. 

무령왕릉을 디지털로 복원한 모습.

◇7월8일, 그 운명의 하루
새벽 5시부터 재개된 발굴은 난공사의 연속이었다.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입구 바닥까지 내려갔다.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인 줄은 까마득하게 몰랐다. 다만 도굴의 화를 입지 않은 처녀분이라는 것은 확실했기에 발굴단의 마음은 들떠 있었다.

막걸리와 수박, 북어 뿐의 간단한 제사상(지금 생각하면 무령왕에게는 너무도 큰 실례였지만)으로 위령제를 끝냈다.

▲4시15분=김원룡과 김영배, 지건길이 드디어 폐색부의 맨 위 전돌 2개를 들어냈다. 원래는 그 안쪽에도 또 다른 벽돌 층으로 막아놓았거나 아니면 문짝 같은 것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냥 뻥 뚫린 연도의 터널이었다.

두 사람은 벽돌을 한장 한장 들어냈다. 그러자 기괴한 현상이 얼어났다.

“쏴아아.” 자동차 에어컨을 틀었을 때 뿜어지는 하얀 수증기. 천수백년 묵은 안 공기가 바깥의 따뜻한 공기와 만나면서 일어나는 일순의 결로현상. 이 현상은 또 한 번 억측을 낳았다.

왕릉의 문을 열자 오색의 무지개가 섰다느니, 바깥 공기 때문에 안에 있던 모든 유물이 일시에 썩었다느니 하는 갖가지 소문들….

김원룡과 김영배 등은 벽돌 틈으로 무덤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어, 저게 뭐지?”

둘은 속삭였다. 연도 바깥쪽을 향해 서 있는 일각(一角·뿔 하나)의 돌짐승(石獸). 기기묘묘하게 생긴 짐승상이 두 사람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섬뜩했다. 그 앞에는 두장의 석판(石板)이 보였다.

김원룡은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무덤 밖에서 침을 꿀꺽 삼키면서 서있는 발굴관계자와 보도진, 그리고 운집한 구경꾼들…. 그는 김영배에게 속삭이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 흥분한 표정 짓지 말고, 침착하게.’

두사람이 흥분하면 군중도 흥분하게 되고,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아무 말 없이 남은 벽돌들을 걷어낸 두 사람은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연도의 오른쪽(동쪽) 구석에는 청자 사이호(四耳壺·네 귀 달린 항아리)가 보였다. 반대쪽에는 또 하나의 사이호와 동배(동으로 만든 잔) 등 유물들이 있었다.

“단번에 강한 국제성을 느꼈어요. 사이호는 분명 중국의 육조(六朝) 자기였는데 신라토기로만 가득 차있는 경주 고분과는 달랐어요. 무덤의 주인공이 중국과 활발한 교류를 벌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엽전 한 꾸러미가 놓여있는 석판으로 다가갔다. 허리를 구부려 들여다보았다.

심장이 멎는 듯했다. 동쪽 석판의 첫줄에 ‘寧東大將軍百濟斯’의 8자가 달필의 해서로 새겨졌고, 그것은 둘째 줄의 ‘麻王年六十二歲癸’로 이어졌다.

백제사에 밝은 김영배 관장은 가슴이 터지는 듯 했다. 흥분을 애써 감추려 나지막하지만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기자들과 구경꾼이 북새통을 이룬 가운데 발굴작업을 벌였다. 하룻밤 사이에 유물을 모두 수습한 만행을 저질렀다. 

“사마왕? 아아!! 바로 무령왕이다!”

김원룡의 회고담.

“가슴이 덜컹하고 ‘아이구’ 소리를 지를 뻔 했어요. 난 그때까지 여러 번 발굴하는 꿈을 꾸었어요. 너무나 많은 보배들과, 너무나 귀한 명문 자료들이 쏟아져 나오는 꿈. 미쳐 날뛰다가 잠을 깬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솔직히 말해 저는 발굴 운이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특별하게 중요한 발굴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러니 꿈에서나마 그런 꿈을 꾸었나 봅니다.”

그의 회고가 이어진다.

“그런데 그 꿈에도 잊지 못할 명문, 그것도 삼국시대 명문이 눈앞에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둘은 감격에 부르르 떨면서 연도의 끝, 현실(玄室)의 문턱까지 들어가 현실 안을 훑어보았다. 아름답고 또렷한 연화문 현실. 벽마다 벽돌 틈으로 나무뿌리들이 흐트러진 실처럼 늘어져 있었고, 바닥에도 나무뿌리들이 수세미처럼 솟아나와 있었다.

벽면에 만들어진 5개의 하트형 감(龕)에는 타다 남은 심지가 그대로 붙어있는 백자등잔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1,450년 전 이 무덤을 만든 사람들의 체취가 그대로 묻어나왔다. 

등잔에 불을 하나하나 붙이는 백제인의 모습. 등잔에서 올라온 그을음이 감(龕)바깥 머리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야말로 도굴의 화를 입지 않은 처녀분인데다, 주인공이 “바로 나(무령왕)요”하고 손을 든 격인 백제왕릉이 바로 김원룡과 김영배의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4시30분=‘타임머신’을 탄 듯 15분간 백제여행을 끝낸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자 아수라장이 됐다. 몰려드는 기자들로 북새통이 되었다. 

김원룡은 떨리는 목소리로 내부의 광경을 정리했다. 마침 윤홍로가 곁에서 밑줄이 그어진 ‘동양연표’를 들어보였다. 김원룡이 확인했다. 

연도 바깥쪽을 향해 서 있는 일각(一角·뿔 하나)의 돌짐승(石獸). 기기묘묘하게 생긴 짐승상이 두 사람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맞았어. 맞아. 이거야.”
“무령왕의 무덤입니다. 무령왕과 왕비의 지석을 갖춘 완전분입니다. 관재(棺材)와 중국 육조(六朝)의 사이호 등이 보였습니다.”

왕릉이라는 발표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것은 엄청난 기사거리였다. 

“사진 좀 찍읍시다.”

사생결단한 기자들이 아우성 쳤다. 자칫하면 통제 불능의 상태로 변할 수 있었다.

“좋습니다. 사진을 찍게 할 텐데 자, 한사람씩 차례로 찍읍시다.”

혼잡, 그리고 불의의 사고를 감지한 김원룡은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사진도 한 커트씩만 합시다.”

정말 순진한 제안이었다.

사진기자들이 차례로 서서 찍어대고는 ‘다음 다음’으로 넘어가는 촌극이 빚어졌다.

‘새로운 발견 전분(塼墳)은 무령왕릉’이라는 뉴스가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퍼졌다. 그러자 각 신문들은 경쟁적으로 기자들을 증원, 현장에 배치했다.

이 발굴소식을 특종 보도한 한국일보는 부장을 포함해서 무려 7명의 기자가 급파됐다. 얼마나 엄청난 기사거리였는지 다음과 같은 일화를 보면 알 수 있다.

“뒤늦게 달려온 중앙일보의 이종석 기자는 ‘왜 나에게만 늦게 연락을 했느냐’고 문화재관리국 장인기 과장의 뺨을 다짜고짜 때렸다.” 

김원룡은 발굴 20주년 기념으로 펴낸 단행본에서 이례적으로 실명을 거론하면서까지 당시의 상황을 밝히고 있다.

평소에 친했던 두 사람이었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만 이성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사진기자들은 각 사(社)당 1커트씩이라는 취재제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연문을 떠나지 않았다.

누군가는 연도로 들어서서는 안된다는 규칙을 깨고는 안으로 들어가서 근접촬영을 하다가 육이호(六耳壺·귀가 여섯 개 달린 항아리) 옆에 있던 청동숟가락을 밟아 부러뜨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자,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습니다. 이러다 큰 일 나겠습니다.”

무령왕릉 내부. 벽돌로 조성됐다.

취재진이 사진촬영을 하는 동안 긴급회의가 열렸다. 이 아수라장을 정리할 특단의 조치는 과연 무엇인가. 해방이후 이렇게 큰 발굴은 경험해보지 못해 혼란의 연속이었다.

그랬으니 유적보호를 위한 보안조치가 마련되지 못했던 것이다. 유적 발굴 때마다 기자들이 현장에 상주해서 난리를 떨고, 기자들의 극성에 현장책임자들은 문화재관리국의 승인 없이 작업하다 말고 밖으로 나와 생중계하듯 브리핑하는 우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 수 없습니다. 될 수 있는 한 발굴을 빨리 끝내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 결정은 결과적으로 천추의 한을 남겼으니. 삼불 김원룡은 두고두고 참회했다. 

“아무리 기자들이 흥분해서 빨리 공개하라고 졸라대도 신중했어야 하는데. 그만 발굴단 자체가 흥분해서 ‘졸속 발굴’을 결정했으니 이 얼마나 무식한 짓입니까. 그 책임은 모두 발굴단장인 이 김원룡이에게 있었습니다.”  

이 말도 안되는 발굴을 교훈삼아 2년 뒤에 있었던 경주 천마총 발굴은 그야말로 철저한 현장관리와 보도통제 속에서 이뤄졌다. 발굴현장에 대한 ‘보안전통’은 이때부터 생겼다.

▲밤 8시=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무덤 내부에 대한 실측에 들어갔다.

내부의 현상을 실측하려면 무덤방(석실) 안에 서서 북쪽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무너져버린 상태의 관재들이 깔려 있었으므로 넘어가기가 불가능했다. 그러니 날아가지 않는다면 밟고 갈 수밖에. 

고민하던 조유전 학예사가 61㎏의 몸무게를 천천히 실어보았다. 의외로 관재는 튼튼했다. 죽으라는 법은 없었던 것이다. 무령임금은 이 못난 후손들에게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실측은 밤 10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밤10시~9일 아침 9시(11시간 동안 우리 손으로 자행된 실수, 실수들)=10시, 썩어 내려앉은 널판대기를 들어낸 뒤 그 아래에 널린 유물을 모눈종이와 연필 한 자루만 가지고 와서 위치표시를 해가며 수습하기 시작했다. 

전돌바닥과 벽돌틈새로 빽빽이 비집고 나온 잔뿌리에 유물들이 얼기설기 뒤엉켜 한 치 밑도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 밤 12시, 최초의 유물이 반출되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연도에 있던 육이호였다.

다음으로 지석과 석수, 그리고 현실에 들어가 입구 쪽의 사이호, 동으로 만든 잔, 은장식 등을 차례차례 들어냈다.  

상부의 널판들만 비교적 온전했을 뿐, 바깥쪽으로 쓰러진 채, 혹은 주저앉은 채 썩어있던 왕과 왕비의 목관. 목관을 들어내니 왕, 왕비 모두의 금제관식이 입구 쪽 머리근처에서 나타났다. 

철야작업으로 내부조사를 일단 마쳐야 했기에 큰 유물만 대충 수거하고, 나머지는 큰 삽으로 무덤 바닥에서 훑어내 자루에 쓸어 담았다.

세상에. 여러 달, 아니 몇 년이 걸려서라도 사진 찍고, 실측하고, 연구하면서 조심스럽게 했어야 할 작업을 하룻밤 사이에 해치워버린 것이다. 

당시 막내 조사원이었던 조유전 선생의 회고다.

"우리는, 발굴단은 심하게 말해 도굴꾼만도 못했습니다. 유물층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삽으로 긁어낸 것은 무엇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짓이었습니다."

벽면에 만들어진 5개의 하트형 감(龕)에는 타다 남은 심지가 그대로 붙어있는 백자등잔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김원룡 선생의 후회담도 뼈아프다.
“썩은 나뭇가지와 거미줄 같은 나무뿌리의 층막 속이어서 유물수습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유물의 위치를 기록하고 사진촬영과 약도를 그려가며 유물들을 상자에 담아 들어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사진이 선명치 않았어요. 만약 그때 사진과 약도에만 의존하지 않고 정확한 실측도를 작성했다면... 이런 졸속은 더욱 돌이킬 수 없는 잘못으로 남게 됐습니다.”

이쯤해서 한 가지 변명을 하자.

발굴단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일했는지. 당시 발굴단은 야간 경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가 발전기 1대만(그것도 공주군청 공보실용 장비 빌린 것) 갖추었을 뿐이었다. 발굴조사에 필요한 촬영기구 하나 변변히 마련하지 못했다. 카메라는 일본제 아사히 펜탁스 1대뿐. 

이 카메라 역시 실내 촬영 때는 스트로프를 부착하거나, 플래시를 터뜨려야 했다. 그런데 갖추어진 스트로프는 없었고 준비된 플래시 역시 어떻게 장착 하는지 몰라 결국 실패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즉, 카메라에 스트로프와 플래시를 사용할 때 부착하도록 구멍이 상하로 구분돼있었는데 그만 스트로프 구멍에 플래시 코드를 연결시켜 촬영했던 것이다.

카메라 1대를 사면 내구연한이 10년이기 때문에 10년이 지나야 겨우 새 카메라를 살 수 있었으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었다. 이런 지경이니 10년 동안 거의 사용하지 않은 카메라라도 10년이 지나면 다시 새 것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사진기자들에게 촬영을 허락한 것이 부족한 기록을 보충해주는 결과가 되었으니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9일 아침 9시, 11시간의 작업은 현실바닥의 먼지까지 말끔히 청소하는 것으로 끝났다.

고대사의 비밀을 담은 블랙박스는 1,450년 만에 이런 우여곡절 끝에, 숱한 교훈을 남긴 채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11시간 동안, 하룻밤에 쓸어 담다시피 수습된 유물은 108종, 3,000여점에 달했다.(계속)

경향신문 논설위원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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