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최근 매우 흥미로운 사진 한 장이 공개됐다.
미국 뉴저지에 사는 수집가(김태진 국제지도수집가협회 한국대표)가 미군 첩보부대(CIC)의 사진첩에 수록된 사진을 언론에 배포한 것이다.
1952년 6월25일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일어난 이승만 대통령 암살시도 장면을 포착한 찰나 사진이다. 6·25 2주기 행사에서 연설 중이던 대통령의 바로 뒤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권총을 겨누기 직전의 극적인 순간이 담겨 있다.
범인은 일제강점기 때 의열단원으로 활약했던 독립투사 출신의 호호백발 노인 유시태(당시 62)였다. 하지만 이 저격사건은 미수에 그쳤다. 유 노인이 방아쇠를 당겼지만 발사되지 않은 것이다.
63년 만에 공개된 사진과 관련된 뉴스는 이렇게 과거의 가십거리 쯤으로 거론된 뒤 마무리됐다.
의열단원 출신 유시태가 연설중인 이승만 대통령을 향해 권총을 겨누려는 순간의 장면을 포착한 사진. 범인은 62살 노인이었다. 또 그와 함께 저격사건을 일으킨 김시현 역시 의열단원 출신의 69살 노인이었다.|연합뉴스
■두 노인의 거사
그런데 필자는 사진을 보면서 한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 사진 밑에 타이핑된 일종의 사진설명이었다.
‘62세인 유시태가 이승만 대통령을 저격하려 하고 있다. 이번 암살 시도는 김시현 의원이 이끄는 12명의 반정부 조직이 선동했다.’
권총을 쥐고 대통령을 저격하려던 사람은 ‘유시태’인데, 12명의 반정부 조직은 무엇이고, 그 조직을 이끈 ‘김시현 의원’은 과연 누구인가. 대체 이 저격사건의 실체는 무엇인가. 필자는 급히 사건 당시의 신문을 검색해보았다.
경향신문 1952년 6월27일자를 보자.
“부산 충무로광장에서 거행된 6·25기념행사에서 이대통령이 훈화하는 도중 돌연 고관석에서 62세의 한 노인이 튀어나와 3미터 거리에서 이대통령을 향하여 권총을 발사했으나 불발로 이대통령은 상해를 입지 않았으며…, 범인의 배후관계는 방금 취조 중에 있다한다.”
그런데 잠시 뒤 발표된 저격사건 2보는 충격적이었다.
“저격현행범 유시태를 취조한 바 전 민국당 국회의원 김시현이 유시태에게 권총사용법을 8회나 교습시켜 권총을 수건에 싸서 모자 속에 넣어 기다리고, 국회의원의 신분을 이용하여 귀빈석에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가…, 대통령 훈화 도중 유시태는 배후 약 3미터 거리에서 저격하고자 휴대한 권총(독일제 엘프르트)의 방아쇠를 두번이나 당겼으니 불발로 인해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채포됐다. 김시현은 소형권총을 얻어 ‘하수인’인 유시태에게….”(<경향신문> <동아일보>)
이 사건으로 민국당(민주국민당) 집행위원인 서상일과 민국당 국회의원 백남훈·노기용 등이 체포됐다. 또 김시현이 대통령 저격을 위해 처음으로 접촉했던 최양옥(인천소년형무소장)과 저격을 모의한 장소를 제공한 안동한약방 주인 김성규, 권총을 김시현에게 판매한 정용환 등을 합해 모두 13명이 붙잡혔다.
1923년 의열단원으로서 폭탄을 국내로 밀반입하려다 잡힌 김시현(왼쪽). 오른쪽은 현역 경찰로서 밀반입에 가담한 황옥. 김시현은 이 사건으로 10년형을 선고받는다.|동아일보
■할복자살해도 시원치 않을…
한 달 여가 지난 8월 22일 세인의 이목이 집중된 저격사건의 첫번째 공판이 열렸다.
당시의 공판 분위기를 전한 신문기사를 보자.
“모여든 방청객으로 입추의 여지없이 초만원을 이뤘다. ‘하수인’인 유시태는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니만큼…’ 운운하여 앞으로 거듭될 공판이 적지않은 파란을 일으키리라는 인상을 주었다.…김시현은 70세 노인이라면 거짓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듯한 정정한 기력이 엿보이면서 명쾌하게 응수했다.”(<동아일보> 1952년 8월23일)
“머리를 빡빡 깎은 피고 김시현은 나즈막한 키에 누르스름한 신사복에 흰 모시노타이를 입고 태연히 재판장 앞에 나섰다.”<경향신문> 8월24일)
김시현은 이 공판에서 범행동기에 대해 분명하게 진술했다.
“언제부터 죽이려 했나.”(재판장)
“과거에도 대통령의 인사행동에 불평이 많았지만 별반 그런 생각은 없었다. 사변이 일어난 후에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김시현)
“그 불평이란?”(재판장)
“괴뢰들이 남침하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6·25를 당하고는 허위보도만 하고 맹랑한 녹음방송만을 국민에게 하고 저이들만 도망질하고 그후 한마디 사과도 안하는 그런 사람이고….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젊은 사람을 많이 죽이고….”
김시현은 이 대목에서 “대통령은 할복자살하기 전에는 대중의 원한을 풀지 못할 것”이라 극언했다. 그러면서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죽었는데, 김윤근과 김종원만 희생시키고 신성모를 살려두어 주일대사까지 시킨 것은 무엇이냐”고 질타했다. 그는 또 “국회의원 소환 같은 헌법무시행위가 많았다”고 주장했다.
“언제부터 살의(殺意)를 가졌나?”(재판장)
“지난해(1951년) 10월부터 그냥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내 한 몸 희생하면 일반국민은 편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김시현)
재판정에 선 김시현(오른쪽에서 세번째)과 유시태.(두번째)
■‘대통령을 없애야겠어.’ ‘내가 할게’
김시현의 진술을 토대로 이승만 저격사건의 전말을 복기해보자.
김시현은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려는 마음을 품는다.
북한의 도발이 예상됐는데도 전혀 준비하지 않았고, 전쟁이 발발하자 혼자 살자고 도망갔으며, 끝내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국민방위병 사건과 거창양민학살사건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에도 불만을 품고 있었다.
김시현은 1951년 10월 쯤 일제강점기에 군자금 모집 등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최양옥(당시 인천소년형무소장)을 만나 거사의 뜻을 밝힌다. “민족을 위해 일하려면 정복을 벗으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최양옥은 “정복을 입고서도 민족을 위해 일할 수 있다”고 답했다. 완곡한 거절이었던 것이다. 김시현은 최양옥의 집 방안에 ‘낙(樂)’이라는 글씨가 걸려있는 것을 보고는 그와 함께 거사를 일으킬 계획을 완전히 접었다.
김시현은 대신 일제강점기에 같은 의열단원으로 활약한 유시태(당시 62살)를 대구 모여관에서 만났다.
유시태는 “대통령을 제거해야 겠다”는 김시현의 말에 “내가 하겠다”고 했다.
1952년 5월26일 벌어진 부산정치파동. 국회의원 50여명이 탄 통근버스가 국제공산당과의 연루혐의로 연행되는 수난을 당했다. 이들은 구속됐다. 이것이 부산정치파동이었다.
■불발로 끝난 거사
그 사이 부산의 정치상황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혼란에 빠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로는 절대 재선할 수 없으리라 여겼다. 이승만 정권은 결국 대통령직선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 직선안이 1952년 1월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되자 이승만 정권은 개헌안을 일부 수정해서 다시 국회에 제출했다. 이것이 발췌개헌안이다.
민국당도 대통령의 정권연장을 저지하고 자신들의 집권을 위해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양측 모두 장담할 수 없었다. 1950년의 5·30 총선에서 무소속이 62.9%의 득표를 할 정도로 반이승만과 반민국당 세력이 대거 국회에 진출해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양측은 한 명의 국회의원이라도 확보하려고 혈안이 돼있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금품을 살포하고 백골단과 땃벌레와 같은 깡패와 청년단을 동원해서 국회의원들을 협박·포섭했다. 이 대통령은 급기야 친위세력을 요직에 포진시킨 뒤 부산·경남·전라 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5월25일)
다음 날에는 국회의원 50여 명이 탄 통근버스를 헌병대로 끌고가 국회의원들을 구속시키는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부산정치파동’이다.
이 대목에서 김용식 재판장과 김시현이 나눴던 첫번째 공판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6·25 2주년 행사장에서 거사를 하겠다고 최후결정한 때는?”(재판장)
“한참 민의(民意)니 뭐니 하고 데모로 떠들썩하고 그 민의들은 돈에 팔려오고 할 때였다. 하루에 10만원씩 받고 어떤 이는 3만원도 받고 했단다.”(김시현)
그러면서 김시현은 “나는 개헌안에 대해서는 이승만 편도, 민국당 편도 아니다. 그래서 민국당을 탈당한 것이다.”라 진술했다. 그러나 김시현과, 그의 사주를 받은 유시태의 거사는 총탄 불발로 미수에 그치고 만다.
4 19혁명 뒤 석방된 김시현
■의열단 동지들
여기서 한 가지 착안점이 있다.
김시현(1883년생)이나, 그의 사주를 받은 유시태(1890년생)이나 당시로서는 호호백발 노인들이었다.
이들은 왜 노구를 이끌고 저격이라는 가장 과격한 방법으로 대통령을 처단하려 했을까.
이를 위해서는 두 사람이 활약한 의열단이 어떤 조직이며, 두사람은 어떤 임무를 맡았는지 알아봐야 한다.
김시현과 유시태가 활약한 의열단(義烈團)은 1919년 민주에서 결성된 항일 무장독립운동단체였다.
국내외 일제관공서의 파괴와 요인암살 및 테러 등이 주요투쟁활동이었다. 조국독립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았다.
비폭력 투쟁으로 펼친 3·1운동이 좌절되자 ‘광복을 위해서는 폭력 대응이 필수적’이라고 여겨 암살과 파괴, 태러라는 과격하지만 직접적인 독립운동을 지향했다. 그에 따라 ‘공약 10조’와 ‘파괴대상(5파괴)’ ‘암살대상(7가살)’이라는 행동지침을 채택한다.
‘공약 10조’의 골자는 정의로운 일을 실행하고,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해 목숨을 희생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다수를 위해, 다수는 한 사람을 위해 헌신하며, 의열단의 뜻에 배반한 자는 척살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5파괴’는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경찰서, 기타 주요 기관이다. ‘7가살(可殺)’은 총독부 고문과 군 수뇌, 타이완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물, 밀정,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神)이다.
이처럼 희생정신과 폭력투쟁을 강조한 의열단은 폭탄제조법까지 배웠다. 박재혁의 부산경찰서장 폭사(1920년)와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이상 1920년), 조선총독부 청사 폭탄 투척(1921년),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1923년),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조선식산은행 습격 사건(1926년) 등은 의열단이 행한 대표적인 의거들이다.
이대통령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던 의열단원 유시태. 그는 만약 불발탄인줄 알았다면 저격사건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라 했다.
■의열단원 김시현·유시태
유시태(1891~1965)은 1920년대 초 국내에서 활약했다.
의열단은 제2차 국내암살·파괴활동을 계획하면서 필요한 자금을 국내에서 마련하고자 했다.(1922년)
당시 의열단원 유시태는 권정필·남영득·유병하 등과 함께 서울 내자동의 부호 이인희 집을 찾아가 권총으로 위협하며 군자금 8000원을 요구했다. 유시태는 결국 이인희의 밀고로 경찰에 붙잡혀 7년형을 선고받았다.
김시현의 의열단 경력은 더할 수 없이 화려하다.
일본 메이지대 법학부를 나온 김시현은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6차례 체포와 15년 옥고’를 기록한 전형적인 의열단원이었다.
특히 1923년 다량의 폭탄을 국내로 밀반입시키다가 붙잡혀 10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1929년 대구형무소에서 출감한 김시현은 곧바로 지린(길림)으로 떠났다. “좀 쉬라”는 가족들의 간청에 김시현은 딱 잘라 말했단다.
“나의 섭생(攝生·건강관리)은 독립운동 뿐이다.”
이후에도 김시현은 의열단이 추진하던 군사간부학교 설립에 참여한다. 국내외 청년들을 모집하는 학생 초모관으로 활약했다. 김시현은 특히 베이징에서 일본경찰의 보호를 받고 있던 밀정 한삭평(박준빈이라고도 함)을 처단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는다. 1939년 출소한 김시현은 중국과 국내를 오가며 군자금 조달과 동지 규합에 나서다 체포와 석방을 거듭했다.
해방 후 김시현은 좌우합작으로 통일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인식아래 좌우합작운동을 벌였다. 남북총선거를 통해 통일국가 수립의 노선을 지지하는 민족자주연맹의 간부로 활약했다.
남한 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민국당(민주국민당)에 참여했고, 1950년 5월 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불과 한 달 뒤 6·25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이승만은 죽어야 해”
이처럼 김시현과 유시태는 불의를 보면 권총을 빼어들어 쏴버리는 철저한 의열단원이었다.
특히 김시현은 ‘나쁜 놈 총쏘아 죽이는데 일가견이 있었던 의열단원’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의열단을 만든 김원봉보다 더 피가 끓었던 의열단이었다고 한다. 6·25 전쟁 중에 평화운동을 벌인 박진목의 회고를 들어보자.
“김시현 선생은 안동약방에서 동지들과 모여 나라 일을 걱정하면서 늘 술을 마셨다. 선생은 늘 전쟁처리를 잘못 해 젊은 청년들을 다 죽게 한다고 분개하시면서 ‘대통령을 죽이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한번은 박진목이 “선생님, 술자리에서 이대통령을 죽이겠다는 말씀 안하시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시현은 분함을 참지못하고 대꾸했다.
“하도 괘씸하고 너무 독선적이고 전쟁에 지고 부산으로 쫓겨온 대통령이…무슨 군왕처럼 날뛰고, 법을 무시해가면서 대통령을 더 해보겠다는 그 태도가 옳지 않아. 그래서 그만 없애버리는 것일세. 그 자는 해외있을 때부터 파벌을 조성하고 사욕에 치우친 일이 많았어.”
김시현은 이승만을 선거로 몰아내자는 주장에 대해 “그것은 이승만을 전연 모르는 사람”이라고 일축했다.
일각에서는 “김시현이 젊었을 때부터 폭탄과 총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했던 행동파였기에 진짜 거사를 해치울 지 알 수 없다”고 보기도 했다.
김시현과, 그의 사주를 받은 유시태 두 사람 모두 ‘불의 타도’를 위해서라면 암살·테러를 주저하지 않았던 ‘의열단 기질’을 발휘한 것이다.
그러나 총탄이 불발됨으로써 계획이 엉클어진 것이다.
유시태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권총을 겨누기 직전 사진을 부분확대한 것.
■여전히 남는 미스터리
어쨌든 김시현과 유시태는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다른 피고인들은 모두 무죄 및 공소기각으로 풀려났다. 옥고를 치르던 김시현과 유시태는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뒤 석방된다.
1960년 4월 28일 부산형무소에서 출옥한 유시태는 “저격사건 당시 경찰관(정용환)으로부터 구입한 권총을 미리 검사해보지 못한 것이 큰 실수였다”고 저격불발의 아쉬움을 표했다.
김시현은 훗날 회고록에서 이승만 저격 성공 이후의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즉 이승만을 제거하고 내각책임제 개헌추진 의원들과 힘을 합쳐 내각 책임제를 관철시킨다는 것. 그와 함께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을 대통령으로 옹립하여 명실상부한 민주애족정권을 수립한다는 것…. 이것이 암살 이후의 계획이었다고 술회했다.
물론 이 사건을 둘러싸고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남아있다.
총탄은 왜 불발됐을까. 김시현은 8월 22일 첫번째 공판에서 “총탄 4발이 불발된 것은 이대통령에게 경각심만 불어넣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죽이려던 마음을 돌이켰다는 것이다.
그러자 유시태가 분통을 터뜨렸다.
“그날 행사장에 가기 직전까지 ‘탈환은 완전하냐고 김시현에게 물었다. 그는 ‘염려말라’ 했다. 만약 불발탄이었다면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관련해서 김시현이 자신의 형량을 줄이려고 진술을 번복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단지 이승만에게 경각심을 불어넣기 위해 30년 지기 동지(유시태)에게 불발권총을 건네줬을까.
김시현은 이후 진술에서 일관되게 이승만을 죽이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또하나, 이 사건에 민국당(민주국민당)은 어디까지 관련돼있을까.
김시현은 처음에 민국당과의 관련성을 부인했다. 이 사건을 조사했던 김창룡 특무대장은 미국 대사관 측과의 면담에서 이대통령 저격사건의 주범은 김시현·유시태 두사람이라고 밝혔다.
그를 뒷받침하듯 두사람을 제외한 모든 관련자들은 공소기각이나 무죄로 풀려났다. 미국의 현지조사단도 민국당과의 관련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훗날 김시현은 신익희, 서상일, 조병옥 등 민국당 고위인사들과 상의해서 꾸민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진술들은 나중에 번복된 것이어서 신빙성을 100% 담보하기는 쉽지 않다.
어쨌든 최근 공개된 한 장이 사진엔 이렇게 파란만장한 현대사의 곡절이 담겨있다.
이런 생각도 해본다. 만약 유시태의 저 총탄이 실제로 발사됐다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허종, <김시현의 통일국가 수립운동과 이승만 대통령 저격사건>, ‘한국인물사연구’ 제10호, 한국인물사연구소, 2008
박진목, <내 조국 내 산하:지금은 먼 옛 이야기>, 계몽사, 1994
양형석, <김시현(1883~1966)의 항일투쟁>, 안동대학원 석사논문,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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