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여름, 공주 정지산 유적을 발굴 중이던 이한상(당시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사)은 몇가지 의문이 들었다.

해발 67구릉인 이 산의 정상부가 왜 이리 평탄할까. 800여 평이었는데 마치 학교운동장 같았다.

이런 가운데 유독 돌출돼있는 중심건물의 존재 또한 이상했다. 기와를 얹은 이 건물엔 적심도, 초석도 없었으며 무려 45개의 기둥들이 3열로 박혀있었다. 내부 공간이 거의 없을 정도였으니 이걸 건물이라고 세웠나, 무슨 조화인가.

정지산 유적의 건물터. 어름창고와 빈전의 흔적이 보인다. 무령왕비의 시신도 이곳에서 27개월동안 안치된 뒤 장례식을 치렀을 것이다.

이렇게 고민하던 이한상의 뇌리를 스친 게 있었으니 바로 무령왕릉 출토 지석과 매지권, 그리고 왕비의 묘지(墓誌)이었다.

이에 따르면 무령왕은 죽은 지 27개월만에 買申地爲墓’, 즉 신지(남서방향의 땅)의 땅을 사서 묘를 만들었다.

또 매지권의 뒷면에 새겨진 왕비의 묘지(墓誌)왕비가 526년 세상을 뜨자 居喪在酉地, 즉 유지(서쪽의 땅)에서 상을 치르고 529년 대묘에 합장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결국 왕궁에서 볼 때 서남쪽인 신지에 왕릉이, 서쪽인 유지에 빈전(殯殿)이 있었다는 것이다.

방위에 있어 신지(申地)와 유지(酉地)는 약 30도의 편차가 존재한다.

발굴단은 공산성에서 무령왕릉으로 선을 그어놓고는 북쪽으로 30도 옮겨보았다. 그랬더니 바로 정지산 유적에 머물렀다. 혹시 몰라 공산성-정지산 선상(線上)에 다른 후보지가 있을까 검토했다.

그러나 그곳들은 산과 강이 만나는 저습지로 빈전을 세울만한 곳들이 없었다.

결국 정지산은 52611월에 32살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왕비의 빈전(殯殿)이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기와건물 한가운데 왕비의 시신을 모셔두고는 27개월 동안 조문객들의 문상을 받은 것이다.

이 건물의 구조를 추정하면 흙으로 된 벽체는 없었으며 밀착된 기둥사이로 공기가 통하도록 배려했을 것이다.

내부에 세워진 4개의 기둥을 보면 건물구조가 2층일 가능성도 있으며 내부의 얕은 기둥은 평상 등의 시설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와 관련, 김길식(용인대 교수)은 이 유적에 27개월간 왕비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조성한 빙고(氷庫)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유적에서 확인된 괴상한 형태의 구덩이를 주목했다.

정지산 유적에서 확인된 빙고 유구. 시신의 부패를 막는 역할을 했다.

너비 502~568, 깊이 1571호 구덩이 안에 니질점토(진흙덩어리)가 두껍게 깔려 있었다. 상층부에는 목탄이 쌓여있었다.

문제는 이 구덩이 모서리에 길이 480, 30~80, 깊이 70~150규모의 U자형 관(배수로)이 아래쪽으로 경사지게 연결돼있다는 점.

그리고 배수로 끝에는 깊이 30~40의 구덩이가 또 있었다. 만약 단순한 물탱크였다면 왜 물이 빠져나가는 배수로를 설치했을까.

김길식의 추론은 이렇다. 겹겹이 쌓인 니질점토는 고체인 얼음이 서서히 녹으면서 생긴 끈끈한 점액질이라는 것. 이것은 겨울철에 인근 금강의 얼음을 잘라 저장한 것. 얼음이 쉽게 녹지 않도록 짚, 솔가지 등의 엄청난 보냉재와 빙탄으로 사용할 목탄을 쌓아두고는 구덩이 상부를 덮었을 것이다.

만약 얼음이 녹으면 배수관을 통해 경사진 밑에 설치된 소형구덩이로 흘렀을 것이다. 백제인들은 바로 이 집수시설에 고인 찬물을 이용, 냉수·냉주와 함께 신선한 음식을 먹었다는 것. 이 신선한 음식은 조문객들에게 접대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앞서 말했던 기와 건물지 한가운데는 왕비의 관이 놓여 있었다. 바로 그 관의 밑바닥에 빙반(氷盤)을 조성, 빙고에서 보관된 얼음덩어리를 부패방지용으로 깔아놓았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미 중국에서는 능음빙실야(凌陰氷室也)’라고 한 시경(詩經)의 기록이 있듯이 춘추전국시대인 BC 7~5세기에 이미 얼음저장시설인 빙실(氷室)이 존재했다.

왕궁(공산성)에서 볼 때 유지(정지산)과 신지(무령왕릉)의 입지가 맞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묘지와 매지권을 보면 무령왕이 죽자 신지(서남쪽)의 땅을 사서 임금을 묻었다는 내용이 있다. 또 무령왕비가 죽자 27개월동안 유지(서쪽)에 빈소를 차린 뒤 왕릉에 합장했다는 내용이 있다. 정서쪽인 유지와 서남쪽인 신지는 약 30도 각도이다. 공산성에서 보면 딱 맞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도 사람이 여름에 죽으면 모두 얼음을 채워둔다는 부여의 상장례(喪葬禮)가 있다.

후한서 의례지(儀禮誌)와 의례(儀禮)등에도 시신의 아래에 얼음을 담은 빙반을 두어 시신의 부패를 방지했다는 기록들이 있다.

우리 측 기록에도 처음으로 소사에 명하여 얼음을 저장하게 하였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6년조·505)”, “내성에 소속되어 빙고를 관리하는 관청인 빙고전(氷庫典)’이 설치돼 대사(大舍) 1명과 소사(小舍) 1명을 두어 관리·운영하도록 했다(삼국사기 직관)”는 등의 내용이 있다.

백제에는 특히 선왕의 해골을 노지(露地)에 모아 두었다가 후에 곽을 만들어 장사지낸다(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조)”는 기록이 있다.

결국 정지산 유적에 왕비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조성된 빙고(氷庫)가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무령왕비 역시 그곳에서 27개월동안 부패당하지 않은채 안치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지산 유적의 얼음창고에서 확인되는 두꺼운 니질점토는 무엇인가. 김길식은 "그것은 고체인 얼음이 서서히 녹아 생긴 끈끈한 점액질"이라 주장한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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