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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루트를 찾아서

솔롱고스 부족과 동명성왕의 사연

태무진과 훌란 공주의 몸에도 솔롱 고스의 혈맥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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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1일 오후 4시께 에벵키 민족박물관에서 환호성과 함께 카메라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졌다. 나로서는 17년 여를 애타게 찾던 ‘솔론’이라는 족제비과 짐승의 박제된 실물을 처음 보는 것이라 단연 특종감이었다. 역시 오랫동안 이를 찾아 헤매온 현지인 성빈(成斌·70) 선생의 수고 덕분이었다. 그간 서울대 이항 동물유전자은행장과 흑룡강성 동물자원연구소 박인주 교수(62)의 탐문으로도 찾을 수 없었다.

한갓 박제된 동물 하나에 이렇게 매달린 것은 ‘조선’이 아침의 나라라는 전거도 전혀 없는 허황된 해석과 맞먹는, ‘솔롱고스’가 무지개의 나라라는 한국인의 그릇된 지식을 바로잡을 아주 긴요한 실물 자료기 때문이다. 몽골학의 거장 펠리오가 맨 먼저이를 문제로 제기했다. ‘솔롱고스’는 ‘솔롱고’의 복수로, 솔론을 잡아 모피(Fur) 시장에 팔아서 먹고사는 부족을 일컫는다는 것이다. ‘몽골비사’에도 이런 식으로 부족의 이름을 붙이는 사례가 종종 등장한다.

칭기즈칸 ‘출생의 비밀’ 담긴 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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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론은 누렁 족제비다. Baraga(바라가)가 Bar(호랑이)라는 명사에 ‘aga’가 붙어 ‘호랑이를 가진’이 되듯이, Solongo (솔롱고) 또한 Solon(솔롱)이라는 명사에 ‘go’가 붙어 ‘누런 족제비를 가진’이 된다. Solongo에 ‘s’가 붙어 복수가 되면 부족 이름도 된다. 훌룬부이르 몽골 초원 원주민들은 애호(艾虎)나 황서랑(黃鼠狼)이라고도 부른다.
보통 정도로 가늘고 긴 족제비과 동물로 서식권역이 매우 넓어서 각종 생태 환경에 모두 적응 능력이 있다. 삼림, 초원(스텝), 하곡(河谷), 소택(沼澤)이나 농작물 생산지와 백성들이 사는 지대에서도 혈거(穴居)한다. 새벽이나 황혼녘에 먹이를 찾아 활동한다. 주된 먹이는 설치류 동물, 개구리류나 새의 알과 병아리 등이다. 내몽골 중동부 및 동북의 대부분 지역, 한국, 몽골과 시베리아 일대에 분포돼 있다.

몽골에서 한국인을 솔롱고스라고 부르는 연원은 칭기즈칸의 ‘출생의 비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이 바이칼 호로 흘러드는 셀렝게 강 일대에 자리 잡은 메르키드족 가운데 우두이드 메르키드 톡토아베키의 아우인 예케 칠레두가 아내를 빼앗기는 사건이 일어난다. 약탈자는 칭기즈칸의 호적상의 아버지 예수게이이고, 약탈당한 여인은 칭기즈칸-테무진의 어머니 후엘룬이다. 그는 물이 대흥안령 북서부 부이르 호수로 흘러드는 황하 강 지역의 처가에서 데릴사위로 있다가 그들의 관행에 따라 임신한 아내 후엘룬의 출산을 위해 고향으로 함께 귀가하던 길에 오논 강변에서 아내를 빼앗긴 것이다. 이 때문에 테무진의 생부는 예수게이가 아니라 예케 칠레두라는 것이 비공식적으로는 거의 공인된다. 칭기즈칸이 몽골 혈통이 아니고 메르키드 핏줄이라는 얘기다. 다구르족 몽골학자 아르다잡 교수는 메르키드는 발해의 말갈(靺鞨)이라고 고증한다.

그렇다면 칭기즈칸의 혈통적 소속은 발해 유민국, 곧 당시의 솔롱고스가 된다. 그런데 당시의 몽골 고원에서는 아내를 빼앗기면 반드시 보복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래서 20여 년 후에 예수게이의 호적상 아들 테무진도 20대에 예케 칠레두의 아우 칠게르 부쿠에게 아내 보르테를 뺏긴다. 당시에 약체였던 칭기즈칸은 맹렬하고도 노회한 외교로 부족들의 연합전선을 구축해 자신의 친아버지가 되는 예케 칠레두의 혈족 메르키드를 섬멸시키고 뺏긴 아내를 되찾는다. 그렇게 되돌아와서 낳은 아들이 장자 주치다.

몽골 역사상 전설적 미인 훌란 공주
 

'>‘주치’란 손님이란 뜻으로 아내 자궁의 주인이 아니라는 점을 암시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주치는 칭기즈칸의 장자로 관행상 칸 위의 승계자임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이 ‘메르키드의 사생아’라는 치명적인 저주를 퍼붓는 가운데 소외되고 셋째 아들 오고타이가 계승자로 선택된다. 칭기즈칸 생전의 일이다. 칭기즈칸과 그는 호적상으로는 부자 간이지만 혈통상으로는 종형제 사이다. ‘몽골비사’의 관계 내용들을 간추려본 것이다.
칭기즈칸은 자신의 반렵반목의 메르키드 혈통과 단절하기 위해 그 피가 흐르는 주치와 훌란 카툰의 아들마저도 철저히 소외시켰다. 애초부터 아예 멸족을 감행하며 제 혈통의 완벽한 부정을 통해 스텝의 온전한 순수 몽골 혈통으로 다시 나기 위해 일생을 오로지 끝없는 정복으로만 일관해야 했다. 이런 시각에서 예리하게 칭기즈칸의 일생을 천착해낸 몽골 영웅 일대기가 일본의 역사소설가 이노우에 야스이(井上靖)의 불후의 창작품 ‘푸른 이리’다.

메르키드를 섬멸한 후 칭기즈칸도 메르키드족의 아내와 딸들을 차지했다. 더러는 딸은 자기가 갖고 어미는 아들에게 주기도 했다. 우와스 메르키드 다이르 우순 칸의 딸인 훌란 공주도 헌납됐다. 훌란 공주는 몽골사상 전설적인 미인으로 알려지고 있어 원말의 기황후와 함께 한국 여인은 아름답다는 인상을 몽골인들에게 깊이 각인시킨 솔롱고스, 즉 고려 여인이다. 당시의 솔롱고스는 발해 유민국이었고 발해는 외교문서 상에 고려로도 자칭했다.

알려진 대로 훌란 공주는 17세기 문헌인 ‘몽골원류’와 ‘알탄톱치’에 솔롱고스의 공주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당시의 솔롱고스가 발해이고 메르키드가 솔롱고스로 기록됐다면, 메르키드는 말갈일 수 있고 메르키드의 공주 훌란은 솔롱고스 공주가 된다. ‘알탄톱치’는 놀랍게도 훌란 공주의 아버지 다이르 우순 칸을 보카 차간 한이라고 적고 있다. 보카이(Booqai)의 보카란 ‘늑대’의 존칭어로 몽골에서 발해를 일컫는다. 차간은 ‘하얀’의 뜻으로 젖색을 상징하는 귀족 색깔이다. 즉 발해(渤海) 백왕(白王)이 되는 것이다.

결국 훌란 공주는 발해(유민국) 공주이고, 그래서 솔롱고스(한국) 공주라고 썼음이 자명하다. 몽골인에게 메르키드-말갈은 타이가에서 활을 쏘아 사냥하고 전투하며 사는 숲속의 사람들이다. 메르겐(麻立干: Mergen)이라는 명궁수의 복수형에서 유래된 부족명으로 이족(夷族)이랄 수도 있다. 따라서 메르키드는 흥안령 북부나 스텝과 타이가가 혼재하는 셀렝게 강 일대에서 연해주에 이르는 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발해와 역사적으로 밀착 관계를 맺어왔을 수 있다.

실제로 그들은 발해의 고급 문명을 체득하고 철의 주산지인 셀렝게 강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강력한 무력을 과시했다. 더군다나 이 지대는 솔롱고스 부족의 원주지로 알려진 곳이 아닌가. 솔론족은 바이칼 호 동쪽에서 헨티 산맥에 걸치는 지역을 원주지로 하면서 초원의 주변으로 동진하기도 하고 초기에는 주로 셀렝게 강을 타고 서진한 것으로 보인다. 훌란은 셀렝게 강과 오르홍 강의 합류지점에 살던 우와스 메르키드 다이르 우순 칸의 공주다.

근하지역은 북부여를 세운 고리국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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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탄톱치’에서는 칭기즈칸의 본거지인 헨티 산맥 일대에서 이들을 공격하면서 ‘해뜨는 쪽’의 메르키드를 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쪽인데 동쪽을 쳤다고 해서 이를 오기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해 뜨는 쪽’이라는 관용구는, 코리족 시조 탄생 전설이 얽힌 바이칼호 알혼 섬이 이 지역 몽골로이드들의 주신을 모시는 중심지여서 그냥 따라붙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솔롱고스의 메르키드 부족이 헨티 산맥의 서쪽 셀렝게 강 일대에 있든 동쪽인 훌룬부이르 초원 근하(根河) 일대에 있든 그대로 ‘해뜨는’, 즉 ‘동명(東明)’이라는 형용구가 따라붙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솔론-솔롱고스의 본거지는 애초에 물이 북극해로 흘러드는 바이칼 호-셀렝게 강 일대에 주로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1921년 사회주의 혁명으로 교과서에 솔롱고스라고 찍어내기 전에는, 물이 태평양으로 흘러드는 훌룬부이르 호 대만주권에서는 한국을 ‘고올리’라고만 불렀지 솔롱고스라는 호칭은 전혀 몰랐다.

7월 23일에 탐사단원들은 근하에 들어섰다. 영하 40~50℃까지도 내려가 호랑이가 못 사는, 대흥안령에서 가장 추운 지역이다. 근하는 ‘껀허‘로 발음되는데, ‘껀’은 물이 ‘깊다’는 군(gu:n)이 아니라 빛이 ‘밝아오다’나 물이 ‘맑아지다’라는 뜻의 게겐(gegen)이라고, 구몽문(舊蒙文)인 내려 쓴 꼬부랑 글씨로 적힌 위구르친 비칙 현지 팻말을 보고 에르덴 바타르 교수가 지적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르 가라크’-‘해 뜨는’이라고 하여, 솔롱고스라는 국명이나 종족명 앞에 으레 따라붙는 수식구와 동일한 내용의 이름이어서다.

나는 이미 이 지역을 동명왕이 말치기 노릇을 하다가 도망 나와 동남하해서 북부여를 세운 고리(槁離: Qori=순록)국 터로 추정해본 터여서 더욱 그랬다. 껀허의 ‘껀(根)’이 ‘동명(東明)’의 뜻을 가지리라고 이전에는 미처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역시 바이칼 동남쪽이 원주지였던 솔롱고스 부족에 붙어내린 관용구에서 비롯된 이름일 터다. 수미야 바아타르 교수가 1990년 5월에 몽골 문화사절단 통역으로 따라와 내게 건네준 첫마디가 부이르호 남쪽 호반에 선 고올리 칸 석인상이 바로 ‘솔롱고스’ 임금인 ‘동명’ 성왕이라는 것이다. 이는 필자를 경악케 했다. 몽골 스텝엔 발도 들여놓아본 적이 없는 농경권 붙박이인 당시의 내게는 기마 양 유목민의 거리 개념이 있을 턱이 없어서다.

실로 이때까지 필자는 바이칼 동남부 셀렝게 강변의 메르키드 공주 훌란이 훌룬부이르 몽골 스텝의 하일라르 강변에서 칭기즈칸에게 헌상되고 헤름투라는 곳에서 초야를 보냈다고는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너무나도 먼 거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농경적 거리 관념에만 매몰되었기 때문임을 유목 현지 답사 경력을 쌓아가며 점차로 깨달았다.

훌란 공주가 나이도 다른 아내들보다 어려 앳되고 아름다웠겠지만, 필시 고국 또는 고향의 동족이어서 칭기즈칸이 그토록 그녀를 사랑해 전장에까지 늘 함께 간 것 같다.
1990년 초에 몽골에 살면서 나는 몽골 소녀들을 많이 만났다. 그녀들은 저마다 자기가 한국 여자를 닮았느냐고 묻는다. 그래서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너는 많이 닮고 너는 조금 닮고 넌 아주 안 닮았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몇 번인가 그런 경험을 반복하면서 그녀들의 표정이 저마다 서로 달라지는 것을 알았다. 한국 여인을 닮았다는 게 아름답다는 말이 되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훌란 공주의 전설적인 미모를 떠올렸음이리라. 많아 닮았다는 말을 들은 소녀는 나를 대하는 눈빛이 금방 달라지며 반색했다. 지금 우리가 만나온 이곳의 바르쿠족 몽골 처녀들도 그랬다.

<주채혁 : 세종대 역사학과 교수·몽골사>
<후원 : 대순진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