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창(창원) 다호리에서 국내 최고(最古)의 철제 농구 등 발굴. 삼한은 고도의 문화국가.”(<경향신문>)
“삼한시대 청동·철기유물 대량출토, 철제사용 문명국가 입증.”(<동아일보>)
1988년 4월8일과 9일, 도하 각 신문이 획기적인 고고학 발굴조사성과를 앞다퉈 전했다. 경남 의창군 다호리에서 기원전 1세기 무렵, 즉 삼한시대의 발전상을 증언해줄 엄청난 유물이 쏟아졌다는 소식이었다.
과연 그랬다. 통나무를 세로로 잘라 가운데를 파내 만든 목관 안팎에는 <삼국지> ‘위서·동이전·변진조’와 <후한서> ‘동이전·진한조’ 기록을 입증할 유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선 중국의 전한시대(기원전 1세기)에 사용됐던 오수전이 출토됨으로써 확실한 연대가 확정됐다. 무엇보다 청동기와 함께 다양한 철기가 출토됐다.
■철, 붓, 칠기…. 엄청난 물질문화
철광석(무게 6㎏)과 철망치는 철기를 직접 제작했음을 알려주는 유물들이다. 이와함께 정교한 형태의 고사리 무늬 철기와 각종 철제 농기구 등…. 다호리에서 철생산이 중요한 산업이었음을 입증시켰다. 이 가운데 날이 갈리지 않은 철부(도끼)는 당대의 화폐인 덩이쇠(철정·鐵鋌)였을 가능성이 크다.
“나라에서 철이 나는데 (마)한·예ㆍ왜가 모두 이를 가져다 썼다.(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시장에서는 철을 중국의 돈처럼 사용한다.(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후한지> ‘진한조’, <삼국지> ‘변진조’)
변진 사람들은 육로와 해로를 통해 철기를 수출했으며, 시장에서 철을 돈으로 썼다는 것이다. 유물의 양상은 바로 이 역사기록을 강하게 뒷받침해준 것이다.
이곳에서는 오수전 말고도 ‘전한시대 거울(前漢鏡)’과 ‘허리띠고리(帶鉤)’, ‘청동방울(銅鐸)’ 등 한나라 유물이 보였다, 활발한 국제교역이 이뤄졌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또 있다. 다양한 칠기가 확인됐다. 옻칠한 항아리와 낚싯바늘, 투겁창, 칼집은 물론 원통 모양의 칠기 등…. 사실 칠기를 만든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원료인 옻나무 재배지가 한정돼있는 데다 그 제작과정 또한 워낙 까다롭다. 불순물의 정제와 칠 안료의 배합, 도장 등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겨우 질좋은 칠기를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칠기생산은 장인(匠人)집단의 전유물이었을 것이다.
더 주목을 끈 발굴성과는 ‘붓(筆)’이었다. 붓은 표면에 옻칠을 했으며 양쪽에 붓털을 끼웠다. 발견 당시 붓털이 약간 남아 있었다. 지우개로 활용된 손칼도 칼집과 함께 나왔다. 종이 대신 사용한 목간의 글씨를 긁어서 지우거나 고칠 때 쓴 것이다. 하기야 국제교역에 필수적인 것은 문서가 아닌가. 당연히 문자를 사용했을 것이다.
“기원전 109년, (조선의) 우거왕(?~기원전 108)은~ 황제에 입조하지도 않았다. 진번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황제를 뵙고자 했지만(眞番旁중國 欲上書見天子) 우거왕이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했다.(又擁閼不通)”(<사기> ‘조선열전’)
붓의 출토는 바로 이 <사기>의 기록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하관 때 있었던 3번의 제사
다호리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당대 물질문명의 수준을 알려주는 획기적인 자료였다.
그런데 물질문화의 화려함에 묻혀, 어쩌면 더 의미심장한 정신문화의 흔적들을 간과한 것은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이 든다.
바로 장례와 제사의 흔적이다. 조상신과 하늘신을 존숭한 당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먼저 2100년 전의 장례장면을 재구성해보자. 당시 발굴책임자였던 이건무 학예관(전 문화재청장)이 발굴 당시의 유구와 유물 상태를 토대로 설명한 내용을 약간 각색한 것이다.
기원전 1세기~기원 전 후 사이 다호리 일대를 다스린 소국의 수장이 별세했다. 유족들은 슬픔을 감춘채 장례절차에 들어간다.
먼저 통나무관을 세로로 잘라 내부를 각각 구유형으로 파내 몸체와 뚜껑으로 사용한다. 그런 다음 시신과, 각종 부장품(칠초동검, 철검, 목합, 유리구슬, 목걸이, 철정 등)을 넣는다. 목관을 밀봉한 다음 목관 다리 부분의 ㄴ자형 구멍에 굵은 동아줄을 건다. 이 목관의 줄을 여러 사람이 끌어 장지까지 옮긴다. 망자의 가는 길을 애도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운구를 쫓아왔을 것이다. 마치 상여행렬처럼….
유족들은 목관을 미리 파놓은 묘광의 바닥에 다시 구덩이를 다시 판다. 이 구덩이에 다양한 보물들을 가득 담은 ‘대나무 바구니(竹협)’를 부장한다. 이 바구니에는 칠을 칠한 각종 무기류와, 쇠도끼 등 철기류, 중국거울, 허리띠고리 등 장신구류가 가득했다. 또한 오수전·말방울·칠기 붓 등도 넣었다. 이 모두 소국의 지도자였던 망자가 생전에 애지중지했던 물품들이었을 것이다.
이어 각종 제기에 감 등 과일과 같은 다양한 제물을 담아 묘광 바닥에 넣는다. 그런 다음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하는 1차 제사를 올렸을 것이다. 이 때 마지막으로 밤(栗)을 뿌렸다. 다음 절차는 하관이었다. 굵은 밧줄을 이용해 목관을 안장한 다음 목관과 토광 사이에 흙을 뿌려 덮은 뒤 다시 칠기와 철기 등을 올려놓았다. 다시 2차 제사를 지낸다.
“아마도 두번째 제사 때는 망자와 가까운 사람들, 즉 친족이나 주변 읍락의 수장이 자신들이 가장 아끼는 물건들을 넣어주었을 겁니다. 생전에 망자와 친분을 나눴던 사람들이 망자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했을 겁니다.”
2차 제사를 끝낸 뒤 목관 위에 다시 제수용품을 담은 칠기 제기들을 배열한 다음 마지막(3차) 제사를 지낸다. 이건무 선생은 “유물의 양상을 토대로 추정하면 하관식 때 최소한 3차례의 제사행위가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제사의 민족, 군자의 나라
3차례의 제사라. 그야말로 끔찍한 장례의식이다. 하기야 조상과 하늘을 기리는 제사행위는 동이족의 유별한 덕목이었다. 동이는 중국에서도 전통적으로 예(禮)의 나라, 군자의 나라로 통했던 것이다.
한나라 때 자전인 <설문해자>는 ‘동이’를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이(夷)는 동방에 사는 사람이다. 동이는 대의를 따르는 대인이다. 동이의 풍습은 어질다. 어진 이는 장수하는 법이며, 군자들이 죽지않는 나라이다.(夷 東方之仁也 惟 東夷從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공자도 “중국에서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인 구이에 가고 싶다.(吾欲之君子不死之國九夷)”(<산해경>)고 했다. 하기야 성인군자의 대표격인 공자님도 동이족의 후예니까 말해 무엇하랴.
“장사를 지낼 때 하나라 사람들은 동쪽 계단에,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에 모셨지만, 은나라 사람들은 두 기둥 사이에 모셨다. 어젯밤 난 두 기둥 사이에 놓여져 사람들의 제사를 받는 꿈을 두었다. 나는 원래 (동이족의 나라인) 은나라 사람이었다.(予始殷人也)”(<사기> ‘공자세가’)
죽음을 앞둔 공자가 동이족인 은나라 출신임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논어> ‘자한(子罕)’은 “동이는 천성이 뛰어나다. 공자는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아프게 여겨 구이의 나라에 가고싶어 했다”고 썼다.
이 뿐이랴. <후한서> ‘동이전’과 <삼국지> ‘동이전’ 등을 보자.
“이(夷)는 만물이 땅에서 나오는 근본이다. 동이는 즐겁게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그릇은 조두(俎豆·제기)를 쓴다. 중국에서 예를 잃어버리면 사이에서 구한다는 것은 믿을 만한 일이다. 천자가 본보기를 잃으니 사이(四夷)에서 이것을 구했다.”
그러면서 부여와 고구려, 한(마한·진한·변한)의 풍속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음식을 먹을 때 제기인 조두(俎豆)를 쓴다. ~은력 정월에 제사를 지내는데, 온 나라가 모여 연일 먹고 노래하고 춤춘다. 장례는 5개월이나 지내는데, 오래 끌수록 번성한 집안이다.”(부여)
“장사를 후하게 지낸다. 금은비단을 죽은 자에게 보낸다. 시월에 나라의 동쪽에서 거국적으로 하늘제사를 지낸다.”(고구려)
“오월에 씨를 뿌릴 때 귀신(조상)에게 제사 지내고 무리지어 노래하고 춤춘다. 날마다 밤낮없이 쉴 줄 모르고 술을 마신다.”(마한)
지역마다 다소간 차이는 있으되 조상신과 하늘신을 제사지내는 예(禮)에 공통으로 심혈을 쏟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관 주변에 밤(栗)을 뿌린 까닭
그러니 소국의 수장 하관식에서 무려 3차례나 제사를 지낸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발굴된 제사용품도 흥미진진하다.
우선 옻칠을 한 다양한 형태의 제기가 눈에 띈다. 사각형 제기, 원형 제기, 원통형 제기 등이 확인됐다. 중국인들은 제기를 통틀어 조두(俎豆)라 한다. 중국인들은 부여 사람들이 평소 식사할 때도 제기인 조두를 썼다는 것을 무척 신기하게 여겼다. “음식을 먹을 때 조두를 썼다”(<삼국지>)고 특별히 기록했을 정도였으니까…. 공자는 어릴 적 늘상 이 조두를 펼쳐놓고 제사를 지내는 소꿉장난을 펼쳤다고 한다. 제사용품인 조두가 변진 수장의 무덤에서 다수 확인된 것이다.
그런데 조두 위에 감 3개가 담긴채 발견되었다는 것이 특기할만한 일이다. 하관식 때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자료인 것이다.
또 의미심장한 유물은 목관 밑에 뿌려진 밤 28개였다. 통나무 관을 하관할 때 사용된 동아줄 주위에 뿌린 것이다. 이 또한 허투루 넘길 주제가 아니다. 하관 때 제의행위의 일종으로 뿌린 것이므로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감과 밤은 대추와 함께 제삿상에 올리는 ‘삼색과일’이다. 이미 2100년 전 다호리에서 제삿상의 기본차림을 확립했다는 뜻이다.
조상들은 왜 밤과 감을 제사에 없어서는 안될 과일로 꼽았던가. 우선 ‘밤’의 경우를 보자.
“마한의 금수초목은 중국과 비슷하지만, 배 크기만한 굵은 밤이 난다.(出大栗 大如梨)”(<삼국지> ‘위서·동이전’)
1611년 허균이 쓴 <도문대작(屠門大嚼)>에는 “밀양 밤이 크고 맛이 달고 좋다”는 내용이 있다. <삼국유사>를 보면 원효대사의 고향인 압량군(경산시)에는 한 톨이 밥 그릇 하나에 가득 찰 정도의 어마어마한 밤이 나왔다고 한다. 사실 밤꽃의 향기는 약간 시큼한, 남성의 정액 냄새와 비슷하다는 ‘망측한’ 소리를 들어왔다.
하지만 밤은 우리네 제사상에 뻬놓지 않고 올렸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두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밤송이 하나에 보통 3개의 알이 들어있는 것과 관계가 깊다. 즉 제사 때 삼정승(영의정·우의정·좌의정)을 배출시켜 달라는 염원에서 밤을 올렸다는 것이다. 더 유력한 설이 있다. 밤은 부모의 은덕을 잊지 않은 한결같은 효심의 열매라는 것이다. 즉 밤은 싹이 틀 때 껍질은 땅 속에 남겨 두고 싹만 올라온다. 그런데 땅 속에 남아있던 껍질은 썩지 않고 그대로 붙어있다. 굉장히 신기한 현상이다. 그러니 예로부터 밤나무는 자신을 나아준 부모의 은덕을 절대 잊지 않는 기특한 나무로 여겼다.
그래서인가. 밤나무 목재는 신주(神主)와 위패, 제사상 등 제사용품의 재료로 쓰였다. 2100년 전 다호리 사람들도 돌아가신 부모님의 은덕을 절대 잊지 않겠다면서 밤을 목관 주변에 뿌렸을 것이다.
■제기에 감(枾)을 담은 사연
제기 위에 담긴 감도 대표적인 제사용 과일이다.
감나무를 비롯한 과일나무는 무거운 열매를 지탱하느라 진이 빠져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한다. 나무 문화재연구 분야의 권위자인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의 말이다.
감나무도 마찬가지였다. 설상가상으로 감나무가 골프채 헤드에 안성맞춤이라 해서 수도 없이 잘려 나갔다. 그러니 100년을 넘긴 감나무가 드물었다.
그런데 감나무에게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 감나무를 그냥 심기만 해서는 절대 탐스러운 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어미보다 훨씬 못한 땡감이 달릴 뿐이다. 그래서 감나무와 비슷한 고욤나무를 대리모로 고용해야 한다. 고욤나무를 밑나무로 하고 감나무 가지를 잘라다 접을 붙여서 대를 잇는다.
사실 감과 흡사한 고욤은 너무 떫고 온통 씨투성이여서 먹기가 어렵다. 서리를 맞히고 흑자색으로 완전히 익혀서 반죽처럼 으깨어 놓아야 겨우 먹을만 하다. 그래도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의 식사대용으로 사랑받았다. 어떻든 감나무는 정성껏 남의 자식을 키우는 고욤나무 덕에 탐스런 열매를 맺는다. 그러니까 감과 고욤의 이야기는 사람은 다른 이의 도움과 가르침을 받고 나서야 제대로 된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가르침을 전한다. 조상의 가르침을 받아야 비로소 진정한 인격체로 거듭난다는 교훈을 제사상의 감은 전하고 있다는 뜻이다.
<세종실록> ‘오례(五禮)’을 보면 천신종묘의(薦新宗廟儀·종묘에 새로 나온 곡식이나 과실을 먼저 올리는 의식)를 올릴 때 10월의 과일 속에 감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이미 2100년 전부터 제사상에 감을 올렸음을 다호리 제기 속의 감은 증거해주고 있는 것이다.
제사의 필수인 ‘삼색과일’ 가운데 대추는 확인하지 못했다. 조사단의 눈에 씨앗만 남았을 대추가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당대에 제작된 전한시대 중국거울이나 김해 양동리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진 청동거울의 명문에서 대추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아닌게 아니라 대추의 역사는 깊다.
“띠스한 남풍이 대추나무 새싹에 불어/파릇파릇하니/어머니의 노고가 생각나네.”
<시경> ‘국풍’ 편에 나오는 ‘개풍(凱風)’이라는 시의 내용이다. 기록으로만 봐도 족히 3000년은 넘는 재배의 역사이다.
고려와 조선시대 때 제사를 지낼 때 맨 먼저 놓는 과일은 대추였다. 오죽했으면 과일 놓는 순서가 ‘조율이시(棗栗梨枾)’, 즉 대추·밤·배·감이었을까.
예전부터 시골에서는 밭둑엔 대추나무, 야산자락엔 밤나무. 마당가엔 감나무, 숲속엔 돌배나무를 심었다. 식량으로도 먹을 수 있고, 무엇보다 제사용 과일을 조달하기 위해 심은 것이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마한에는 배만한 밤이 나왔다(出大栗 大如梨)”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배(梨)의 재배’도 확인된다. 추측건대 다호리 유적에서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대추와 배도 제사상의 기본차림이었을 것이다.
■제사상에 복숭아가 배제된 이유
여담 하나. 복숭아 나무는 못된 귀신을 쫓아내고 요사스런 기운을 없애주는 주술적인 징표를 상징하는 나무다.
그런데 조상들은 제사상에는 이 복숭아를 절대 올리지 않았다. 왜일까. 아주 동이족의 명궁인 ‘예’를 둘러싼, 슬픈 사연이 숨겨져 있다.
때는 바야흐로 태평성대의 시대인 요임금 시절이었다. 그 시절 태양은 모두 10개나 됐다. 동방의 천제 제준과 태양의 여신 희화 사이에 난 자식들이었다. 이들은 10개의 태양은 세 발 달린 신성한 까마귀, 즉 삼족오였다. 이들은 어머니 희화의 규칙에 따라 하루에 하나씩 교대로 떠올랐다. 그 짓을 수만년 계속하니 따분해졌다. 하품을 거듭하던 태양들은 재미삼아 일제히 떠올라 공중을 날아다녔다.
10개의 태양이 떠오르자 세상은 불의 지옥으로 변했다. 보다 못한 천제가 명궁 예를 지상에 파견했다. 예는 특유의 활솜씨로 태양들을 하나하나 쏘아 떨어뜨렸다. 9마리를 쏘고 나서야 예의 활쏘기가 멈췄다. 세상이 돌아가려면 태양 하나 쯤은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는 하늘로 복귀하지 못했다. 천제가 자신의 아들(태양)들을 9명이나 죽인 예를 용납하지 못한 것이다. 떠오르지만 못하도록 적당히 손을 보면 될 것을…. 예가 자신의 활솜씨를 발휘하려고 너무 많은 천제의 자식들을 죽인 것이다. 한마디로 ‘오버’한 것이다. 지상에 남게된 예는 제자들에게 활쏘기를 가르치며 살았다. 하지만 봉몽이라는 제자는 스승의 천재성을 질투했다. 도저히 스승의 활솜씨를 능가할 수 없다고 여긴 봉몽은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사냥길에서 돌아오는 예를 복숭아 몽둥이로 때려 죽인 것이다. 사람들은 지구를 위해, 인류를 위해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비명횡사한 예를 위해 제사지냈다.
‘귀신의 우두머리’가 된 예는 나쁜 귀신을 쫓는 종포신(宗布神)이 됐다. 또한 제사상을 차릴 때는 절대 복숭아를 올리지 않았다. 귀신의 우두머리(예)를 때려죽인 복숭아 나무가 아닌가. 그러니 조상 귀신을 위한 제사상에도 차마 복숭아를 올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예의 신화는 누가봐도 동이계의 신화임이 틀림없다. 고구려 시조 주몽처럼 최고의 명궁이고…. 게다가 삼족오까지 등장하니 말이다.
명절을 비롯해 때때마다 지내는 제사상에 이렇듯 뿌리 깊고 속깊은 이야기들이 담겨있는 것이다. 2100년 전 막 돌아가신 조상을 기리며 슬픔을 참고 제사상을 차리던 분들이 어렴풋 떠오른다. 문득 2100년 전 다호리 사람들의 마음씨가 전해온다. 고인의 은덕과 조상의 가르침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제사를 지낸…. 추석을 휴일로 치부하며 허투루 지낼 일이 아닌 것 같다.
<참고자료>
국립중앙박물관, <갈대밭의 나라 다호리-그 발굴과 기록>, 2008
이건무, <다호리 유적발굴조사의 의의>, ‘고고학지’, 국립중앙박물관, 2009
송의정, <다호리 유적 발굴조사의 성과>, ‘고고학지’ 국립중앙박물관, 2009
박상진, <우리 나무의 세계>, 김영사, 2011
홍일식, <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 정신세계사, 1996
이형구·이기환,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책문, 2009
정재서, <중국신화의 세계>, 돌베개, 2011
|경향신문 문화체육 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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