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주제는 ‘신라공주와 페르시아 왕자의 사랑’이야기 입니다.
아니 머나먼 나라의 왕자 공주가, 그것도 1500년 전에 사랑을 나눴고, 혼인까지 했다는 거냐. 그걸 믿으라는 거냐 하고 말씀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란판 단군신화라 할 수 있는 ‘쿠쉬나메’라는 서사시에 나오는 내용이라니 어쩝니까. 그 서사시에 따르면 멸망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자가 중국을 거쳐 신라로 망명합니다.
이란 왕자는 엄청 환대를 받습니다. 양국 선수들끼리 선수를 섞어 이란의 전통 스포츠인 폴로경기까지 벌였답니다.
그리고 이란왕자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신라 공주와 혼인을 하게 됩니다. 양국은 신라-페르시아 연합군을 결성해서 때마침 침략해온 중국군대를 대파하고, 그 여세를 몰아 중국대륙까지 진출합니다.
왕자와 공주 부부는 아이를 임신합니다. 그 와중에 망국의 페르시아 왕자의 꿈에 ‘빨리 조국에 가서 아랍 정복자들을 무찌르고 나라를 바로 세우라’는 계시가 나타납니다. 부부는 아이를 임신한 채로 이란으로 달려갑니다.
왕자는 독립투쟁의 와중에 죽습니다. 그러나 부부사이에는 영웅이 태어납니다. 이란-신라 혼혈의 아이가 자라 결국 아랍폭정자를 무찌릅니다. 이것이 ‘쿠쉬나메’의 내용입니다.
저는 이 쿠쉬나메 서사시를 보면서 무릎을 쳤습니다. 지난 2008년 이란 답사여행 중 품었던 궁금증의 하나가 풀린 느낌이랄까. 당시 이란에서 방영됐던 사극 ‘대장금’은 85%가 넘는 엄청난 시청률를 기록했습니다. 저는 그 때 의문이 생겼습니다. 이역만리 이란에서 ‘대장금’이 이렇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유가 뭘까. 뭐 그런 의문이었습니다.
그러다 ‘쿠쉬나메’를 보고서야 양국 백성들 사이에 흐르는 뭔가 친연의 DNA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쿠쉬나메의 내용을 한번 살펴보고, 과연 우리와 이란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친연의 DNA가 무엇인지를 검토해보겠습니다. 이번 주와 다음 주를 기대해 주십시오.
“양금이, 양금이(Janggumi).”
2008년 초, 테헤란 등 이란 답사일정을 소화하고 있던 필자는 아주 흥미로운 광경을 목격했다. 일단의 이란 젊은이들이 필자와 함께 답사단의 일원이었던 한국 여성을 보고 반색하면서 몰려든 것이다.
이란 남성들이 한국 여성만 보면 ‘양금이 양금이’하고 외쳤던 것이다. ‘양금이’는 한국 드라마 <대장금>의 주인공인 ‘장금이’의 이란식 발음이다. 2006~2007년 사이 이란 국영 채널 2에서 방영된 <대장금>(이란에서는 ‘Jewel in the palace’)은 평균 시청률 85~90%에 달할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대장금>의 주인공역을 맡은 이영애는 ‘살아있는 인형’ 대접을 받았다. 지금도 한국 드라마, 특히 사극의 인기는 대단하단다. <대장금>의 후속작인 <주몽>과 <동이>도 60%의 시청률을 상회했다니까.
■양금이 장금이
왜 이란에서 한국 사극은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을까. 전문가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우선 <대장금>을 비롯한 한국 사극의 흐름이 이란 역사와 비슷하다는 것을 꼽았다.
이란은 인류 이동 및 동서문명의 교차로로 끊임없이 외부세력과 충돌을 빚었다. 지금도 15개국과 국경 및 바다를 접하고 있다. 또한 이슬람에서도 다수파인 수니파의 협공 속에 외로이 시아파의 전통을 이어가느라 고난의 역사를 걸었다.
그런 만큼 역경을 딛고 일어서 마침내 꿈을 이루는 대장금과 주몽, 동이가 파란만장한 이란인들의 역사와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또 한국 사극에서 보이는 여인들의 의상이 헤자브를 쓰고 몸 전체를 가리는 이란 여성과 닮았다는 점도 친근감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럴 듯 하지만 딱부러진 해석이라고 하기엔 어쩐지 부족했다.
사실 사극 뿐이 아니다. 한국인에게 이란은 ‘열사의 나라’로 상징되는 아랍세계의 일원이며, 축출해야 할 ‘악의 축’ 국가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란은 결코 아랍의 일원도, 열사의 나라도 아니다. 더군다나 ‘악의 축’도 아니다. 한국과 이란간 교역 규모는 174억 달러(2011년)에 이른다. 서방의 경제제제가 무색하게 교역은 되레 급증한 것이다.
한국은 아랍에미리트·중국에 이어 이란의 3대 수입국으로 도약했다. 또 이란은 한국 원유의 4대 수입원이다. 이란의 태권도 인구는 종주국인 한국에 이어 세계 두번째로 많은 120만 명이다.
최근 일부 초등학교에서는 태권도를 정식교육 과목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대체 한국과 이란 사이엔 무슨 사연이 있기에 그 끈끈한 ‘친연의 DNA’를 서로 이어왔을까. 서방과 서방언론이 끊임없이 뿌리는 이간계의 술책에도….
■Shilla의 현현
2010년 5월 어느 날이었다. 중동 전문가인 이희수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과)에게 흥미로운 연락이 왔다.
“이 교수가 확인해야 할 것 같네요. 신라와 관련된 내용인 것 같은데….”
이란 국립박물관의 동아시아 담당 큐레이터이자 아자드대 교수인 다르유시 아크바르자데 교수였다. 고대 페르시아어 전공자인 다르유시 교수의 연락내용은 흥미진진했다.
즉 1998년 이란 학자 잘랄 마티니 교수가 오랫동안 구전으로 내려온 서사시를 모아 책으로 펴냈다는 것. ‘쿠쉬나메(Kush-name)’라고 하는 이 서사시의 원 편찬자는 300~400년 간 구전된 서사시를 모은 11세기 대학자인 이란샤 이븐 압달 하이르였다. 그런데 다르유시 교수는 이 책 내용에 ‘shilla(실라)’, 즉 신라와 관련된 내용이 엄청난 분량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이희수 교수에게 알려준 것이다.
“2005년부터 한양대 문화재연구소는 이른바 ‘악의 축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가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30 여 년 간 경제제재에 나선 것에 일종의 오기를 부렸다고 할까요. 어쨌든 다르유시 교수가 사장되다시피 한 ‘쿠쉬나메’를 보고, 그 속에 신라를 다룬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의미는 큽니다. 한양대 연구소와 이란 측의 공동연구 결실이라 할까요.”
무슨 말이냐. 1998년 잘랄 마티니 교수가 ‘쿠쉬나메’를 정리해서 책을 펴냈다지만, 그 속에 포함된 의미는 사장되다시피 했다. 이란 학자들이 대부분 ‘쿠쉬나메’ 속에 있는 ‘신라’를 ‘일본’으로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신라’라는 고대국가를 아는 학자들은 드물었다. 하기야 최근까지도 한국인이라 하면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보는 게 다반사였지 않은가.
그런데 한국-이란의 공동연구 과정에서 새삼스럽게 ‘신라’의 존재를 인식하고 주목했다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의미있는 작업이었다는 것이다.
■쿠쉬나메, 파천황의 자료
곧바로 이란으로 건너가 자료를 확인한 이희수 교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페르시아와 신라가 혈맹관계’ 였음을 알리는 방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멸망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족이 신라의 공주와 혼인해서 왕자를 생산하고, 그 왕자가 이라크로 귀국해서 폭정자를 물리친다는 것이었다. 총 800여 쪽 가운데 신라 관련 부분만 400쪽이 넘어설 정도였다. 이후 이희수 교수를 비롯한 한국·이란 관련학자들이 번역작업에 매달렸다.
쿠쉬나메는 총 1만129 쿠플레(대구·對句)가 넘는 방대한 양을 자랑한다. 이란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구전 서사시이다. 그 가운데 신라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구절은 1만219절 중에서 2011~5925절 사이를 구성한다. 역사기록으로 살펴볼 때 사산조 페르시아는 637년 카디시야 전투에서 아랍군에게 패배한 뒤 모술·니하반도·하마드한·라이·이스파한 등 주요도시들을 잇달아 잃으면서 멸망한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황제 아즈데기르드의 왕자 피루즈는 끝까지 저항했으며, 중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이란인 잔존세력과 공동체를 이뤘다.
대서사시인 ‘쿠쉬나메’의 역사적인 배경은 바로 이 무렵(7세기 중반), 마지막 왕자 피루즈가 중국으로 망명한 뒤 사망한 시점인 것으로 보인다. ‘쿠쉬나메’에서 ‘쿠쉬’는 실존인물이라기 보다는 구전상의 영웅이다. ‘나메’는 ‘서(書)’이다. 말하자면 ‘쿠쉬나메’는 ‘쿠쉬서(書)’인 것이다.
■신라로 망명한 페르시아 왕족
다시 쿠쉬나메의 세계로 돌아가자.
중국으로 망명한 마지막 왕자 피루즈는 ‘쿠쉬나메’에서 아비틴(Abtin)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중국에서 이란 공동체를 이끌던 아비틴은 중국내 정치 격변기를 맞아 제3국으로 재망명을 결심한다.
이 때 주변국인 마친(Machin)의 국왕이 추천한 나라가 바로 신라였다. 마친왕은 “지상 낙원인 신라는 침략이 불가능한 안전한 나라”라고 치켜세웠다.
과연 신라왕(테후르)은 망명객인 아비틴 일행을 환대한다. 서사시는 ‘바실라(Bashilla·신라)’를 “달처럼 아름다운 인형 같은 선녀들이 가득찬 향기로운 낙원”이라고 표현했다.
“낙원처럼 꾸며진 궁 내부는 진정으로 군주의 처소 같았다. 궁 전체가 하늘색 배경에 금으로 장식돼 있었고, 모든 의자에 사파이어와 루비가 세공돼 있었다. 궁녀들은 인형처럼 아름다웠다.”
신라왕은 아비틴을 황금옥좌에 앉히고, 진귀한 선물을 건낸다. 연일 연회를 연다.
“맛있는 음식냄새가 가득한 가운데 요리사들이 음식을 나르고 술을 가져왔다 아비틴은 그런 음식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100가지 이상의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었다.”
■신라 vs 이란의 폴로경기
신라왕의 환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아비틴은 신라왕의 다짐을 받아야 했다. 정치적 흥정에 따라 망명한 이란인들을 중국에 넘길 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저희 망명객들은 신라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제발 저희들을 정중하게 대해주십시요.”
신라왕 테후르는 “걱정하지 마라”며 안심시킨다.
“아무도 여러분들을 괴롭히지 못할 것입니다. 적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오. 우리의 역사는 천년 이상입니다. 명심하세요. 어느 누구도 신라를 공격한 자가 없소이다.”
신라왕은 30명의 궁녀들을 아비틴 앞에 대령했다. 아비틴 일행은 궁녀들이 춤추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궁녀들의 얼굴은 자볼(이란 서남쪽 도시)의 꽃처럼 아름다웠고 얼굴은 선홍색 꽃 같았다. 여인들은 달처럼 아름다워 그들이 눈을 뜨면 남자들은 넋을 잃었다. 세상에는 이만큼 좋은 곳이 없으며 이들의 정원만큼 매혹적인 곳도 없다고 한다.”
신라왕과 아비틴은 페르시아 스포츠인 폴로(격구)를 즐긴다. 원래는 ‘신라 vs 이란’의 국가대항전을 생각했다. 그러나 아비틴은 경기가 자칫 과열양상으로 치닫을 것을 우려했다. 결국 6명씩 멤버를 섞어 친선경기의 형태로 치른다. 그럼에도 아비틴 팀이 2연승을 거둔다. 아비틴은 신라에서 엄청난 인기를 끈다. 아비틴을 흠모한 나머지 이혼을 결심한 여인들도 있었을 정도였다.
“아비틴 팀이 테후르 팀을 두번이나 이겼다. 아비틴은 엄청난 속도로 공을 쳤다. 공이 달까지 날아가는 것 같았다. 모든 기수들이 입을 모았다. ‘그 누구도 아티빈과 대적할 수 없도다.’ 태후르 왕은 아비틴의 얼굴에 입을 맞추며 그의 폴로 실력에 감탄했다.”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의 사랑과 결혼
한편 중국 황제는 이란인들이 신라로 망명했다는 소식에 분노한다. 중국은 신라를 총공격한다.
그러나 신라-페르시아 연합군이 대승을 거둔다. 중국이 아비틴의 신라 망명을 주선한 마친왕을 핍박하자 신라-이란 연합군은 중국 원정길에 오른다. 연합군을 지휘한 아비틴은 중국의 심장부를 점령한 뒤 획득한 전리품의 반과 점령한 도시들을 신라에 내준다.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끈 아비틴은 다시 신라왕 테후르의 환대를 받는다.
아비틴은 테후르의 딸인 신라공주 프라랑(Frarang)과 혼인할 마음을 갖는다. 파르(Far)라는 통역이 “신라 소녀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덕까지 갖췄다”며 “그 가운데 신라왕의 딸이 최고”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아비틴은 타이후르를 만나 조심스럽게 “따님과 혼인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신라왕은 주저한다.
“신라법에 이방인에게 딸을 내주지 않아요. 내가 딸을 내준다면 귀족들이 우습게 볼 겁니다.”
아바틴은 자신이 이란의 전설적인 왕인 잠쉬드(Jamshid)의 후예임을 강조하면서 “절대 우스운 혼인은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고민하던 테후르는 마침내 혼인을 승락한다.
“그래요. 아비틴에게 전하시오. 이 혼인 허락하겠소.”
하지만 조건을 단다. 아비틴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공주 프라랑을 10명의 처녀들 틈에 섞어 놓고는 “찾아보라”고 시험한 것이다. 아비틴은 좌절한다. 하지만 프라랑을 미리 본 동료들은 프라랑의 인상착의를 몰래 일러준다. 아비틴은 그 정보를 바탕으로 공주를 찍는다. 우여곡절 끝에 혼인이 성사됐다. 마침내 성대한 혼인식을 치른 아비틴-프라랑 커플은 아이를 임신한다.
■이란판 단군신화
그런데 아비틴의 꿈에 “장차 태어날 왕자가 바그다드의 자하크(아랍의 폭정자)를 물리치고 이란인의 복수를 해줄 것”이라는 계시가 나타난다.
신라왕은 낙담했지만 부부를 이란으로 떠나 보낼 수밖에 없었다. 프라랑은 왕자를 생산했는데, 왕자의 이름은 페리둔이었다.
이란에 도착한 아비틴은 자하크의 맹공세에 그만 전사하고 만다. 너무 어렸던 페리둔은 아버지의 죽음을 모른채 신하들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자란다. ‘페르시아-신라’ 혼혈왕자인 페리둔은 훗날 페르시아의 적인 자하크를 물리치고 이란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이란의 신라공주(프라랑)는 신라에 있는 아버지(테후르)에게 편지를 보낸다.
“아버지, 제 아들 페리둔이 자하크의 군대를 모두 죽였습니다.”
손자의 승전 소식에 신라왕은 성대한 연회를 연다. 피를 나눈 사이가 된 신라-페르시아 양국은 이후 교류와 협력관계를 이어간다. 이것이 한·이란 학자들이 달려들어 해석한 이란의 서사시 ‘쿠쉬나메’의 내용이다.
물론 서사시인만큼 역사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기는 쉽지않다. 하지만 ‘쿠쉬나메’는 그리스 로마신화나 단군신화가 그렇듯 페르시아 문화와 역사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쿠쉬나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음역이 당시 신라사회의 지명이나 인명과 일치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 신라 왕실이나 사회를 정확하게 묘사한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이희수 교수)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신화나 서사시, 전설은 그 민족의 문화원형이자 역사원형이다. 그리스 로마신화가 서구문화의 원형이 됐고, 단군신화가 한민족 역사의 원형이 됐듯, 쿠쉬나메는 페르시아 문화와 역사의 원형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희수 교수는 “기존 학계의 고고학, 민속학, 역사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용한 해석의 길잡이임에는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쿠쉬나메는 새빨간 거짓의 기록인가, 아니면 뭔가 흥미롭게 해석할 여지가 있는가. 이제 <쿠쉬나메>에 숨겨진 비밀의 단서를 하나하나 살펴보자.(계속)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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