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병이 있습니다. 재앙이 오겠습니까.(有疾心 唯有害)”
은(상)나라 반경~무정 시대(기원전 1300~1192년)의 갑골문에 나오는 흥미로운 내용이다.
갑골문은 은(상)의 임금이 정사를 펼칠 때 미리 점을 친 뒤 그 내용을 거북껍질이나 소 어깨뼈에 새겨넣은 것이다. 이 갑골문에 표현된 ‘심질(心疾)’은 ‘지나치게 마음을 쓰거나 괴로움을 당해 생긴 질환(思慮煩多 心勞生疾)’(<좌전> ‘소공’ 조)를 일컫는다. 그러니까 이 갑골문은 이미 3000년 전 표현된 ‘마음의 병’ 혹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호소한 기록인 것이다.
다른 갑골문에는 “대왕의 마음이 화평할까요?(王心若)”라고 묻는 내용도 있다. 대체 군주의 자리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점까지 쳐서 ‘마음의 병’ 혹은 ‘스트레스’를 다스리려고 했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럴 만도 하다. 예로부터 천자(군주)의 정사를 ‘일일만기(一日萬機)’ 혹은 ‘일리만기(日理萬機)’라 했다.(<상서> ‘고요모’)
군주(혹은 천자)가 하루동안 처리해야 할 일이 1만 가지나 된다고 일컬어진 이름이다. ‘만기친람’이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임금 노릇 하려다 수염이 하얗게 셌구나!
“과인은 세자 시절부터 화증(火症)이 있었는데, (즉위 후) 만기(萬機·정사)를 주관하게 되면서 노심초사하는 바람에 수염이 다 세였다. 거기에 성미가 느긋하지 못해 처리해야 할 정사가 있으면 그냥 버려두지 못하느니라. 또 식사도 거르는 바람에 너무 지나치게 노췌(몸이 고달파서 파리함)해졌다. 요즘 현기증이 발작하면….”(<숙종실록> 1699년 10월 4일)
조선조 숙종의 이야기다. 숙종은 “이런 심화증(心火症)은 30년 동안이나 쌓인 지병”이라고 하소연하고 있다. 정사를 돌보느라 얼마나 가슴이 답답하고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수염이 하얗게 셀 정도가 되었을까.
숙종만 그랬을까. 군주는 피곤한 자리였음이 분명하다.
만백성과 사직을 간수해야 하는 막중한 자리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예컨대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과 중흥군주라는 정조를 보라. 그들은 공부벌레인 동시에 일벌레였다.
“세종은 반드시 100번씩 글을 읽었고, <좌전(左傳)>과 <초사>는 200번 읽었다. 병이 깊어졌는 데도 글읽기를 멈추지 않자 아버지(태종)는 내시를 시켜 (세종의) 책을 모두 거둬들였다. <구소수간(歐蘇手簡·구양수와 소동파의 편지모음집)> 한 권만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다. 그것을 임금(세종)은 1100번 읽었다.”(<연려실기술> ‘세종조고사본말’)
세종이 훙(薨·임금의 죽음)한 뒤의 <세종실록> 1450년 2월 17일조를 보라.
“임금은 매일 사경(四更·새벽 1~3시)에 일어나 날이 하얗게 밝으면 조회를 받고, 다음에 정사를 돌봤다. 그 후에는 신하들을 차례로 접견하는 윤대(輪對)를 행했고, 다음엔 경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해동의 요순’이라 일컬었다.”
정조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가 신하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라.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니 괴롭고 괴로운 일이라.”(1797년 12월26일)
“백성과 조정이 염려되어 밤마다 침상을 맴돈다. 날마다 늙고 지쳐간다.(1799년 1월20일)
“바빠서 틈내기 어렵다. 닭우는 소리 들으며 잠들었다가~비로소 밥 먹으니, 피로해진 정력이 갈수록 소모될 뿐….(1798년 10월7일)
“바쁜 틈에 윤음을 짓느라 며칠 째 밤을 새고, 닭울음을 듣는구나. 괴롭다!”(1798년 11월30일)
“책을 읽고, 온갖 문서를 보느라 심혈이 모두 메말랐구나.”(1799년 7월7일)
정조는 이처럼 정사를 처리하고, 편지를 직접 쓰면서, 틈나는 대로 독서에 매진하느라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당뇨병 환자 세종의 걱정은
그랬으니 몸과 마음이 정상일 리 없었다. 공부벌레·일벌레의 대명사였던 세종을 보라.
세종은 게다가 고기가 아니면 수라를 들지 않을 정도로 육식을 좋아했다. 오죽했으면 1418년(세종 즉위년) 10월 9일, 상왕(태종)이 “주상은 사냥을 좋아하지도 않고, 몸도 뚱뚱하시니 건강을 좀 챙겨야 한다”고 걱정했을까.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고, 운동을 하지 않은 데다 과도한 업무에 따른 스트레스가 세종의 몸을 갉아먹었던 것 같다.
1425년(세종 7년) 세종은 두통과 이질 등 중병에 걸렸음에도 이를 참고 명나라 사신단을 맞이하기도 했다. 이 때 임금의 얼굴빛이 눈에 띄게 파리하고 검게 된 것을 백관이 보고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세종실록>을 보면 “얼마나 임금의 병세가 위중했는지 임금의 관곽을 이미 짜놓는 등 흉사에 대비했다”고 한다.(<세종실록> 1449년 11월15일)
이 때 사신단을 수행한 명나라 의원 하양은 세종을 진맥하고는 “전하의 병환이 상부는 성하고, 하부는 허(虛)한데, 이것은 정신적인 과로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렸다.(<세종실록> 1425년 윤 7월 25일조) 업무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각했기에 이렇듯 ‘관을 미리 짜놓을 정도’로 위독한 지경에 빠졌을까. 그럼에도 세종은 위중한 병세를 참고 명 황제의 부고를 받들고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을 만나 곡례(哭禮)까지 무사히 마쳤다. 외교적인 결례를 범하지 않으려 투혼을 발휘한 것이다.
세종은 평생 다양한 병을 달고 살았다.
1431년(세종 13년) 8월 18일 풍질(風疾) 때문에 “두 어깨 사이가 찌르는 듯 아픈 증세가 고질병이 되었다.”고 괴로워했다. 또 ‘하루에 물 한동이 이상을 마셔야 하는’ 당뇨(소갈증)와, 당뇨 합병증의 하나인 망막변성(안질)에 시달렸다.
“소갈병 때문에 하루에 마시는 물이 어찌 한동이 뿐이겠는가.”(1439년 7월 4일) “왼쪽 눈이 아파 안막(眼膜)을 가렸고, 오른쪽 눈도 어두워 한 걸음 사이의 사람도 분간할 수가 없다.”(1439년 6월 21일, 1441년 2월 20일)
그밖에도 다리부종과 임질(淋疾), 수전증 등을 앓았다. 참으로 화려한 병력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세종은 병치레 때문에 정사를 잘 돌보지 못하는 스스로를 책망했다.
“온갖 병 때문에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했다. 모든 일에 본보기를 보여야 하는데…. 게으른 버릇이 나로부터 시작될까 두렵다. 정사가 해이해진 것이 아닐까.”
그야말로 백성과 사직을 생각하는 성군의 투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조의 못말리는 일중독
정조는 또 어떤가. 정무처리에, 독서에, 편지쓰기까지 밤을 꼴딱꼴딱 세운 정조였으므로 그 역시 건강할 리 없었다.
1784년(정조 8년) 도제조 서명선이 “제발 건강 좀 챙기시라”고 걱정했다. 그러자 정조의 대답이 걸작이다.
“정신 좀 차리고 보니 국사가 많이 지체되었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보는 것이네.(不得不親覽矣) 나는 원래 보고서 읽는 것을 좋아하네. 아픈 것도 잊을 수 있지.”
보고서 읽는 것이 취미라는 데야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가 신하들에게 쓴 편지를 보면 병세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요즘 열기가 치솟고 등은 뜸 뜨는 듯 하고 눈은 횃불 같아 헐떡일 뿐이다. 현기증이 심해서 독서에 전념할 수도 없다. 괴롭기만 하다.”(1799년 7월7일)
“뱃속의 화기가 내려가지 않는구나. 얼음물을 마시거나 차가운 온돌 장판에 등을 붙인채 뒤척이는 일이 모두 답답하다.”(1800년 6월15일)
정조는 등창이 난 지 20여 일 만인 1800년 6월, 승하했다. 재위 24년(1776~1800)만에, 그것도 나이 48살의 많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지독한 일중독증에 따른 스트레스가 간접 사인이었을 것이다.
■‘심열이 끓어 오른다’
명종 역시 ‘심열’증세를 호소했다.
“가슴이 답답하다. 잠자리가 늘 편안하지 않다. 심열(心熱)이 위로 치솟으면 입이 말라 물을 끌어다가 마시기 일쑤이다.”
명종은 “만기(萬機), 즉 정사만 생각하다 보니 심열이 생기는 것 같다”면서 “나이 30이 넘었는 데도 아직 국가에 경사가 없다”고 노심초사했다. 지존의 자리가 편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경사가 없음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1567년(명종 22년) 6월 24일,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명종은 조선을 방문하는 명나라 사신을 어떻게 접대할 것인지 노심초사하고 있다.
“사신 접대 때 몸이 좋지 않아 오래 서있지 못할까 두렵다. 술은 나눌 때 예의를 잃어버리지나 않을지…. 병중에 쓴 외교문서가 잘못되지나 않을른지…. 요즘 열이 올라 간혹 귀가 어두울 적도 있는데 혹 예를 잃을 수도 있는데…. 이 또한 사신에게 전하라.”
명종의 노심초사에서 지도자의 자리가 얼마나 힘든 지 잘 나타나 있다.
■효종의 죽음엔 뭔가 있다.
효종은 의료사고 때문에 급서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임금의 얼굴에 종기의 독이 퍼졌다. 의원 신가귀의 처방에 따라 임금이 침을 맞았는데 피가 그치지 않고 솟아나왔다. 침이 혈락을 범했기 때문이다. 임금이 그만 승하하고 말았다.”
1659년(효종 10년) 5월 4일, 효종의 급서(急逝)를 알리는 <실록>의 내용이다. 의원 신가귀의 침이 그만 임금의 혈맥을 찌르는 바람에 사망했다는 것이다.
의료사고가 분명했다. 신가귀는 이 의료사고 때문에 교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실록>을 가만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임금은 머리 위에 작은 종기를 앓고 있었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마침 중병에 걸려있던 세자를 돌보느라 자신의 종기에는 무관심했다. 또 때마침 전국에 비가 오지 않아 자신의 건강을 돌볼 틈이 없었다. 그는 대궐의 뜰에 나가 직접 기우제를 주관하고 있었다. 그러다 종기의 독이 얼굴까지 퍼지는 등 위독해졌다.”(<효종실록> 1659년 4월 27~28일)
의료사고만이 사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효종은 사직(후대를 이을 왕세자의 병)과 백성(기우제)을 걱정하느라 몸을 돌보지 못했고, 그 때문에 병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는 것이다.
■정신착란에 시달린 선조
선조는 극심한 정신병 증세에 시달렸다.
그는 백성을 전란(임진왜란)의 소용돌이에 빠뜨렸다는 비난을 받았던 임금이다. 그도 인간이고, 한 나라를 책임진 지도자인지라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책임을 절감했을 것이다.
게다가 일부 신하들은 물론 명나라까지도 세자(광해군)에게 양위하는 것이 어떠냐고 군불을 땠으니 그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것이다.
<연려실기술> ‘선조조고사본말’을 보라.
“1592년 10월, 김적이라는 사람이 ‘전하는 인심을 많이 잃어 오늘날의 사태를 불렀습니다. 어찌 세자(광해군)에게 전위하지 않으십니까.’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1593년(선조 26년) 윤 11월14일, 명나라 사신은 선조 임금에게 아주 희한한 말을 건넨다.
“어제 영윤(세자) 광해군을 보니 용안이 특이하였고, 또 신민이 다 추대한다 합니다. 당나라 현종(재위 712~756)이 안록산의 난을 맞아 아들인 숙종(756~762)에게 군권을 맡겼더니 숙종이 장안과 낙양을 수복했습니다. 영윤(광해군)의 현명함이 당 숙종보다 더하니 국왕은 반드시 전위하시어….”(<선조실록>)
이 무슨 주제넘고 해괴한 소린가.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못난 임금이니 당 현종의 예에 따라 속히 현명한 세자(광해군)에게 물려주라는 소리가 아닌가.
대신들은 물론, 상국인 명나라로부터도 버림을 받고 쫓겨나는 임금이라면…. 당시 선조가 느끼는 위기감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임금 노릇 안할게. 나 좀 살려주라”
선조는 원래 원기가 허약한 체질이었다. 비위도 약했다.
본래 심열(心熱·화기가 뻗치는 병)증세가 있었다. 임진왜란 발발 4년 전인 1588~89년(선조 21·22년) 사이 반복적으로 심질의 증세를 말하며 물러날 뜻을 밝힌다.
“나는 반평생 신병을 지니고 있었는데, 심질이 더욱 심하기 때문에…. 반드시 광질이 발작할 것이다. 여러분들이 임금을 사랑한다면…. 물러나 쉬게 하라. 더는 번거롭게 하지 마라.”(1588년 윤 6월 1일) “심질 때문에 정신이 혼미하고 기분도 좋지 않다. 대신들은 날 가엾게 여겨달라.”(1589년 12월 21일)
선조의 심질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책임론이 비등해지면서 더욱 악화됐다. 여러차례 ‘선위’ 혹은 ‘섭정’의 뜻을 전하면서 “제발 내 말 좀 들어달라”고 애원한다.
“심질이 고질이 됐다. 불을 대하고도 춥고, 눈(雪)을 씹어도 되레 열이 생긴다. 때로는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 달린다. 동서를 구별하지 못한다. 유독 경들만 모르고 있다.… 내가 하루를 더 왕위에 있으면 백성들이 하루를 더 걱정하게 된다.”(1592년 11월 21일)
선조는 이후에도 ‘병 때문에 죽을 지경’임을 호소하면서 섭정 혹은 선위를 줄기차게 요구한다.
“양쪽 귀가 완전히 먹었다. 심병(心病) 때문에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쓰러지기를 반복한다. 가슴 속 답답한 기운은 없어지지 않는다. 하루가 1년 같고, 밤낮으로 눈물만 흘린다. 병이 갈수록 더해가는데 몸은 매여 있고….”(<선조실록> 1596년 8월 27일)
“가슴 통증 때문에 아파서 울부짖느라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그런데도 처리해야 할 업무가 밀려드는구나. 참 난감하구나. 경들도 내가 먼저 죽으면 후회하지 않겠는가. 어찌 내 고민과 병을 풀어 줄 생각은 안하는가.”(<선조실록> 1597년 1월 6일)
1598년(선조 31년) 2월 25일 선조가 “전광증(顚狂症·정신착란)으로 크게 울부짖으며 인사불성이 된다”고 호소했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선조 자신) 좀 살려주라. 그러면 나랏일에도 다행이 아닌가.”
■“철없는 소리 작작 하세요.”
그러나 대신들은 선조의 선위 발언을 ‘정치쇼’라면서 번번이 일축했다. 영의정 류성룡과 우의정 이원익 등 정승들의 말본새를 보라.
“아니 지금이 어떤 때이고, 이 일(선위의 일)이 어떤 일이기에 번번이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말 민망하고 답답한 심정 금치 못하겠습니다.”
지존인 임금이 ‘정신병 때문에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통사정하는데, 대신들은 ‘철없는 소리 좀 작작하라’고 일축하는 상황이 되풀이 된 것이다.
하기야 임금의 자리가 어디 그만 두고 싶으면 그만 둘 수 있는 자리인가. 대신들의 입장에서도 ‘그리 하시라’고 쉽게 찬성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찍이 태종이 선위 파동을 일으켰을 때(1406년) ‘단지 기쁜 얼굴빛을 내비쳤다’는 어처구니 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주륙당한 임금의 처남들(민씨 형제)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임금의 선위 발언에 쉽게 동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록>을 살펴보면 선조의 정신병은 심각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선조는 결국 백약이 무효인 실어증까지 걸렸고(1605년), 새벽에 기급하여 쓰러지기도 하는(1607년) 일을 반복하다가 향년 57세(1608년) 승하했다
선조는 죽기 직전까지 “내가 많은 병에 걸렸지만 여러 병 가운데 심병(心病)이 가장 극심하다”고 괴로워했다.(<선조실록> 1607년 10월 11일)
선조는 백성과 사직을 도탄에 빠뜨린 임금이라 손가락질 받는다. 하지만 평생 정신병에 괴로워하면서도 임금의 자리에서 내려올 수 없었던 신세를 생각한다면 딱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명나라와 의리가 밥먹여주냐”
광해군의 스트레스는 부왕인 선조와는 좀 차원이 달랐다.
세자 시절부터 부왕(선조)이 걸핏하면 ‘선위 운운’하지 않았던가. 세자로서는 추호라도 잘못된 언행을 했다가는 역린을 건드릴 수 있었다. 조심 또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선위 운운할 때마다 가슴이 덜컥덜컥 내려앉았으리라. 세자로서 임진왜란을 치렀고, 재위 시절 떠오르는 강국인 후금(청나라)과 썩어도 준치인 명나라 사이에서 외줄타기 외교를 펼쳐야 했다.
그 어려운 정세를 맞아 신하들은 아주 세세한 사항까지 임금에게 보고했다. 전형적인 책임회피였다.
“난 고질병인 화병 때문에 요즘 겨우 버티고 있다. 이럴 땐 급하지 않은 업무는 좀 보류해도 좋으련만…. 너무도 일의 경중을 모르고 있구나.”(<광해군일기> 1620년 10월 18일)
다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맹목으로 섬기려는 대신들의 ‘몽니’는 광해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예컨대 1619년(광해군 11년), 당시 욱일승천의 기세로 요동을 차지한 후금이 편지를 보냈다.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우리(후금)와 맹약을 맺자”는 편지였다. 광해군은 ‘지는’ 명나라와 ‘뜨는’ 후금 사이에서 적절한 등거리 외교를 펼치고자 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달랐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웠다. 이들은 3개월이나 ‘몽니’를 부리며 차일피일 미뤘다.
“호서(胡書·후금의 편지)를 처리하라고 했거늘…. 명색이 국방을 담당하는 비변사가 미적미적 대고 있으니…. 1~2일 안에 처리하도록 하라.”(<광해군일기> 1619년 7월 16일)
그러나 대신들은 “명나라의 문책이 두렵다”며 선뜻 나서지 않았다. 광해군은 ‘명나라와의 의리가 밥 먹여주냐’며 호통친다.
“이번 호서의 처리에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다. 그런데도 경들이 명분론만 내세우고 있다. 종묘와 사직이 위험에 빠진다면 어찌할 것인가. 약한 것이 강한 것을 대적할 수 없는 것이다.”(<광해군일기> 1619년 7월 22일)
■“다른 사람에게 시키든가요.”
광해군은 실리외교를 주장한 것이다. 그럼에도 대신들이 미적거리자 우의정 조정(1551~1629)에게 “당신이 한번 처리해보라”고 명했다.
그러나 조정은 ‘제가 왜 책임지냐’면서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고 회피했다.
“신이 어떤 사람이기에 이 일을 혼자 담당한다는 말입니까. 성상께서는 다른 대신들과 함께 상의하여 처리하소서.”(<광해군일기> 1619년 7월 27일)
그러자 광해군이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당신도 ‘맡지 않겠다’며 이토록 번거롭게 하는데…. 어느 대신이 맡겠는가. 나 혼자 고민하다가 병이 되었다. 생각해보니 나랏일이 한심하구나.”
아닌게 아니라 당시 광해군은 깊은 병에 걸려 있었다. 후금의 편지에 답하는 기한(8월5일)이 훌쩍 지났지만 어느 누구도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그러자 광해군은 병든 몸을 이끌고 나와 대신들에게 애원조로 호소한다.
“내가 병이 심하고 졍신이 혼미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 데도 종묘사직이 위태로운 꼴을 차마 볼 수 없어 나왔다. 이미 답서의 기한(8월 5일)이 지났지만 8월 안으로 보낸다면 혹시 목전에 닥친 전란은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경들은 대체 어쩌자는 것인가.”(<광해군일기> 1619년 8월 14일)
광해군은 “만약 전쟁이 다시 일어난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섬짓하다.(思之膽寒)”고 걱정했다. 그러니 병이 쉽게 나을 리가 있었겠는가.
■‘난 임금이 싫어!“
조선의 2대왕인 정종은 어떤가. 애초부터 임금이 될 생각이 없었던 정종 역시 마음의 병 때문에 내내 불면증에 시달렸다.
“밤마다 마음 속으로 번민하여 자지 못하고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근일에 다시 병이 생겨 마음과 기운이 어둡고 나른해서 피부가 날로 여위어진다.”(<정종실록> 1399년 3월 13일)
하기야 정종은 임금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동생인 정안군(태종 이방원)을 그렇게 무서워했다지 않은가. 오죽했으면 부인(정안왕후)이 동생 앞에서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남편에게 “빨리 양위하라”고 애원했을까.(<연려실기술> ’정종조고사본말’) 하루라도 임금 자리에서 내려오고 싶었던 정종은 ‘격구’로 시간을 때우고 건강을 되찾으려 했다고 한다.
정종에게는 임금의 자리 그 자체가 스트레스 였던 것이다.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가슴과 배의 통증을 호소했다. 세조는 특히 “어렸을 때는 방장한 혈기로 병을 이겼는데 몇해 전부터 질병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왕위에 오른 지 9년 뒤인 1463년 9월 27일의 기록(<세조실록>)이다. 조카를 죽이면서까지 차지한 지존의 자리였건만 주단이 깔린 행복한 자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가슴통증에 사딜리던 세조는 1466년(세조 12년) 꿈에 나타난 처방대로 현호색(玄胡索·양꽃 주머니과의 다년생 풀)을 넣은 칠기탕을 복용하고 차도를 보였다. 칠기탕(七氣湯)은 정신적인 스트레스 질환에 사용되는 처방이다. 세조 역시 임금으로서의 스트레스로 고생했던 것이다.
■만기(萬機) 처리에 만병(萬病) 생긴다.
반정으로 임금 위에 오른 중종 역시 마음병으로 고생했다.
<중종실록> 1544년 11월 14일조를 보면 “임금이 번민이 심한데도 약을 들기 싫어하므로 야인건수(똥물)에 청심환을 타 올렸다”고 했다. 야인건수(野人乾水)는 인분을 물에 탄 것을 일컫는다. 극심한 열기를 다스리는 데 쓰인다. 가슴앓이를 다스리기 위해 인분 탄 물을 약으로 마셨다는 것이다.
1544년(중종 39년) 11월 14일 중병에 걸린 중종은 선위의 뜻을 밝히는데, <실록>을 쓴 사관이 사족을 붙여놓는다..
“임금이 즉위한 이래 권간(權奸)이 출몰, 조정을 제멋대로 어지럽혀서 골육에까지 화가 미쳤다. 임금의 심려가 병이 된 것은 당연하다. 간흉(奸兇)에게 권력을 맡겼고, 임금의 대권을 행사하지도 못하고 억지로 따르다가 이것이 쌓여서 뼈속까지 병이 들어 끝내 구제할 수 없는 슬픔에 이르게 되었으니, 아! 슬프다.”
기묘사화(1519년) 이후 김안로와 윤원로 형제 등의 득세로 임금의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해 마음의 병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도자라는 자리…. 결국 ‘만기(萬機’)를 처리하느라 ‘만병(萬病)’에 걸릴 수 있는 자리였던 것이다.
하기야 한나라 시대 유학자인 동중서는 왕(王)의 자리를 이렇게 해석했다.
“문자를 만드는 사람이 3번 획을 긋고 그 가운데를 이어 왕(王)이라 했다. 3개의 획은 하늘, 땅, 사람을 의미하며 이 세 가지를 관통하는 것이 왕(王)이라 했다.”(<설문해자>)
때마침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조선왕실의 생로병사-질병에 맞서다'를 주제로 한 특별전이 열린다. 9월14일까지 열리니만큼 틈이 난다면 한번 가볼 것을 권한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흔적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모…베이징 원인 실종사건 (0) | 2014.08.26 |
---|---|
중국어에 능통했던 이순신 가문 (0) | 2014.08.14 |
옛 기록에 나타난 명량해전의 진실 (8) | 2014.08.04 |
시진핑이 언급한 '인물탐구' (0) | 2014.07.29 |
끔찍했던 1592년 4월 15일 (2) | 2014.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