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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법정 은퇴연령 70세인데…' 숙종·영조는 왜 50대에 노인대접 받았을까

‘기로(耆老)’라는 말이 있습니다. ‘늙을 기(耆)’에 ‘늙을 노(老)’ 이므로 노인을 가리키는 말인데요. 
<예기> ‘곡례 상’은 “60세는 기(耆)이며, 남에게 일을 시켜도 되는 나이(六十耆指使)이고, 70세는 노(老)이며, 자기 일을 넘겨주고 은퇴하는 나이(七十曰老而傳)”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즉 ‘기로’는 예순살(60)이 넘어가면 노인 대접을 받고, 일흔살(70)이 되면 정년퇴직 한다는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70세가 되더라도 물러나지 않는 법은 있었습니다. 임금에게서 궤장(궤丈·의자와 지팡이)을 하사받는 것인데요.(<예기> ‘곡례·상’) 예컨대 신라 문무왕은 664년 70세가 된 김유신(595~673)에게 궤장을 하사했습니다.(<삼국사기> ‘열전·김유신’조) 
존경의 의미와 함께 은퇴하지 말고 임금이 내려준 지팡이를 짚고 출근해서 의자에 앉아 근무하라는 뜻도 담았습니다.

■이른바 ‘삼달존’의 조건
그건 예외였습니다. <증보문헌비고> ‘직관·치사’조는 “70세가 되면 은퇴하고, 비록 70세가 되지 않더라도 사직을 청하면 대부분 허락한다”고 설명했습니다.
70세 이상의 은퇴 관리 중 정2품 이상의 문관 중 ‘기로소’로 입소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원로원이라 할까요.
물론 자격요건을 채우더라도 다 기로소 회원이 될 수 없었습니다. 우선 과거급제를 통하지 않고 관리가 되면 아무리 학문이 높고 명망이 두터워도 원칙적으로 입소할 수 없었습니다. 무관 출신도 역시 자격을 얻지 못했답니다.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조건이 한가지 더 있었습니다. ‘덕(德)’이었습니다. <맹자> ‘공손추·하’는 “세상에서 존귀하게 여기는 세가지가 벼슬(작·爵)과 나이(치·齒)와 덕(德)”이라 했습니다. 이것을 ‘삼달존’(三達尊·존귀한 조건 세가지)이라 하는데요. ‘정2품 문관(爵)’으로서 ‘70세 이상(齒)’이 된 이라도 ‘덕(德)’을 겸비하지 못한 이는 기로회원이 될 수 없었습니다. 

■노인대접 받겠다고 아우성 친 임금
이렇게 ‘삼달존’의 원로대신 만이 입소할 수 있는 기로소에 들어가겠다고 아우성 친 임금이 두 분 있었습니다.
숙종(1661~1720, 재위 1674~1720)과 그 아들인 영조(1694~1776, 재위 1724~1776)입니다.
더욱이 이 두 분은 70세는커녕 60세도 안된 59세(숙종), 심지어 51세(영조)에 기로소 입소를 강행했습니다.
두 분은 임금 신분으로서 들어갈 필요가 없는 기로소 입소가 뭐가 그리 급했을까요. 
1719년(숙종 45) 4월18일이었습니다. 59세에 기로소에 입소한 숙종은 기로신 10명을 초청하여 기념 잔치를 벌였습니다. 
당시 숙종은 눈병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았는데요. 그래도 “병든 몸이 궁전에 오르니…여러 관리 모여있고…이 연회는 본시 높이려는 뜻에서 나왔으니 가득한 술잔에 자주 손이 간들 어떠리”라는 어제시를 지었습니다. 
숙종은 기로신들과 하루종일 어울리며 5차례에 걸쳐 5잔씩 술을 마시도록 했습니다. 그날의 연회내용을 글과 그림으로 제작한 것이 ‘기사계첩’(보물)입니다. 

■59세에 “노인대접 받고 싶다” 
숙종의 기로소 입소를 처음 거론한 이는 여성군 이집(1668~1731·인조의 고손자)이었습니다. 
이집은 1719년(숙종 45) 1월10일 “어차피 올 연말이면 (춘추 60을 앞둔) 성상의 기로소 입소를 준비할 것인데,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겠느냐”는 의견을 냅니다.

이때 대리청정 중이었던 세자(경종·1688~1724, 재위 1720~1724)가 반색했습니다.
“태조대왕께서도 60세에 기로소에 들어가셨단다. 성상(숙종)도 59세가 되셨으니 자식된 마음에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
그러나 법과 절차에 따라 추진해야 했습니다. 곧 난제가 생겼습니다.

“‘태조가 60세에 기로소에 입소했다’는 내용을 <실록> 등 공식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는 보고가 올라온 겁니다. 
백방으로 근거자료를 뒤진 끝에 후대의 인물인 심희수(1548~1622)와 김육(1580~1658)이 기록한 ‘태조와 기로소’ 이야기를 겨우 찾아냈는데요. 일각에서 “비록 실록 등의 공식기록에는 보이지 않지만 아쉬운대로 심희수와 김육 등의 기록이 있으니 ‘근거’는 마련된 셈”이라고 했습니다. 

무관 출신 역시 문재, 즉 문관출신 정경(정 2품)아니라는 이유로 배제됐다.

하지만 임금의 일을 사적인 기록에 의존하기는 왠지 찜찜했죠. 공식기록에 나와있는 출처와 근거가 필요했습니다. 
조정은 지춘추 민진후(1659~1720) 등 춘추관 관리 2명을 실록이 보관된 강화 정족산 사고(史庫)에 급파했습니다. 그러나 민진후는 “<태조실록> 첫권부터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출처를 확인할 수 없었다”(<숙종실록> 1719년 1월22일)고 보고했습니다. 세자(경종)가 “정말 없더냐”고 되물었는데요. 
민진후는 “두사람이 밤새도록 철저하게 찾았으니 놓칠리 없다”고 쐐기를 박았습니다. 민진후는 중전(인현왕후·1667~1701)의 오빠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민진후는 “근거와 출처가 없으니 차라리 날씨가 따뜻해지기를 기다려 양전(숙종과 중전)을 위한 잔칫상을 베푸는게 좋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관례도, 출처도 없는 군왕의 기로소 입소 행사 강행에 신중론을 개진한 겁니다.

숙종의 기로소 입소는 숙종이 갓 59세가 된 1720년 1월부터 추진됐다. 당시 종신인 여성군 이집이 “육순이 되는 내년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느냐. 빨리 기로연을 베풀자”고 촉구한다.

■“나 안할래!” 삐친 숙종
이 말에 충격을 먹은 것일까요. 삐친 것일까요. 
숙종은 “그래? 기록이 없다니 할 수 없지. 논의를 중지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이 무렵 <실록>을 읽으면 잘 짜여진 각본 같습니다. 임금이 “야. 증거 없다잖아. 안할래”라고 떼 쓰자, 종친들이 상소문 릴레이를 펼치고…. 세자가 맞장구치고…. 급기야 연잉군 이금(영조) 등이 종신(宗臣·벼슬하는 종친)을 거느리고 나섭니다. 
“실록에 없다고 갑자기 논의를 중단하다니오. 아니 될 말씀입니다. 국초에는 사관들이 더러 빠뜨리고 기록했을 겁니다.”
연잉군 등은 갑자기 “선조 말년에 태조대왕의 고사를 뒤쫓아 기로소에 입소하려고 했다가 미처 시행하지 못했다”는 가짜뉴스까지 동원했습니다. 선조(1552~1608, 재위 1567~1608)는 57세에 승하했거든요. 또 <선조실록>에도 “선조가 기로소 입소를 도모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숙종은 “세자와 왕자, 여러 종친이 한 목소리로 청하고…선조의 고사까지 전해진다니 명백한 일이 아니냐”면서 기로소 입소의 명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눈치없는 신하들이기로서니 더는 반대할 수 없었습니다. 

숙종의 기로소 입소계획은 난관에 부딪쳤다. 태조대왕(이성계)가 60세에 기로소에 입소했다는 내용이 실록에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59세나 51세나 60 바라보는 것은 매한가지
이 숙종의 기로소 입소 소동은 새발의 피였습니다. 숙종의 아들인 영조는 51살에 기로소에 입소했으니까요.  
영조는 “기로소에 입소한 뒤 국사를 원량(사도세자·1735~1762)에게 맡기고 한가롭게 지내는 것이 평생의 소원”(<영조실록> 1743년 1월11일)이라 했습니다. 종신들이 가만 있지 않았습니다.
1744년(영조 20) 7월29일 여은군 이매가 “전하의 춘추가 ‘50을 넘어 60을 바라보게 되었으니’ 기로소 입소 자격을 갖췄다”는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51세=망육(望六·60을 바라보는 나이)’이라 하니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숙종은 59세였고 전하는 51세입니다. 조금 차이는 나지만 ‘육순을 바라보는 것은 매한가지(望六旬則一)’입니다.”

그런 억지춘향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영조는 “기로소 입소가 내 소원이기 때문에 겸손 떨지 않겠다”면서 “선조(숙종)의 고사를 따려면 59세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몸이 아픈 내가) 어찌 될 줄 알겠느냐”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영조실록>은 이 대목에서 “영조의 하교가 누누이 수백마디에 달했다”고 표현했습니다. 보다못한 우의정 조현명(1690~1752)이 “성교(聖敎·임금의 지시)가 너무 장황하고 번거롭다”고 일침을 놓았답니다. 영의정 김재로(1682~1759)가 가세했습니다.
“태종·세종·세조·중종·선조 같은 분들은 50세를 넘겼지만 모두 기로소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기다렸다가 의논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8월11일)

■남들은 젊어보이려고 콧수염 뽑는데…
정승들까지 앞장서서 반대하자 영조가 어린아이같이 생떼를 피웁니다.
“자네들이 나를 아비라고 여긴다면 8년을 기다리라고 했겠느냐. 역시 아들이 아버지 생각하는 마음과, 너희 같은 신하들이 임금 생각하는 것과 역시 다르구나.”(8월19일)
이에 조현명이 일침을 놓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늙는 것을 싫어해서 족집게로 흰 머리털을 뽑기까지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젊어보이려고 애쓰는데 임금이라는 분은 왜 이렇게 노인대접을 받으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나 어느 누가 임금의 고집을 꺾을 수 있겠습니까. 조현명 등은 “정 그러하시다면 특별 교서로 명한다면 불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항복했습니다. 마침내 극심한 반대여론을 잠재웠다고 의기양양한 영조 앞에 새까만 관리가 나섰습니다.  

여은군 이매는 영조가 51세 때인 1744년 7월 “숙종이 기소로에 든 나이(59세)보다는 젊지만 60을 바라보는 것은 같으니 성상(영조)기로소 입소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사헌부 지평(정 5품) 박성원(1697~1767)이었는데요.(8월29일) 박성원은 “성상께서는 100세까지 사실 수 있을 것 같은데…뭐 그리 급하시냐”고 꼬집은거죠. 영조가 펄펄 뛰었습니다. “네가 감히 임금이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을 반박하는가.”
영조는 ‘너 때문에 더러워서 임금 노릇 못해먹겠다’는 듯 “모든 정사는 앞으로 승정원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명까지 내렸습니다. 말하자면 양위소동을 벌인거죠. 
승정원 관리들이 “저희의 팔뚝이 끊어지더라도 망극한 하교를 받잡을 수 없다”고 아우성쳤습니다. 결국 상소문을 올린 박성원은 영조의 역린을 건드린 죄로 절도(남해)에 유배됐습니다. 이 지경이니 누가 반대목소리를 내겠습니까. 
영조는 1744년(영조 20) 9월9일 ‘60을 바라보는 나이’(망육·望六)라면서 기로소에 입소했습니다. 이때 입소를 기념하여 제작한 계첩도 있으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사경회첩’입니다.

신료들은 “보통 사람들은 족집게로 흰 머리털을 뽑는데 전하는 왜 그러시냐”고 했고, 영조는 “너희가 날 아버지로 여긴다면 8년을 기다리라고 하겠느냐”고 맞섰다.

■초조했던 51세, 59세 임금
숙종·영조 부자는 왜 말도 안되는 생떼를 쓰면서까지 기로소 입소를 ‘소원’했을까요.
갖가지 해석이 나오지만 역시 건강문제를 들 수 있겠네요. 조선 임금들의 평균수명은 48세(한국나이) 정도였는데요. 
27명 중 환갑을 넘긴 이는 태조(74)·정종(63)·광해군(67)·숙종(60)·영조(83)·고종(67) 등 6명입니다. 
숙종의 경우 병치레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기로소에 입소하기 2년 전인 57살 때는 다리가 저리며 양쪽 눈이 어지럽고 잘 보이지 않는 증세에 시달렸습니다. 세자(경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정승들의 반대에도 51세 기로소 입소 방침을 마무리지은 영조는 사헌부 지평(5품)인 박성원까지 나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자 ‘양위소동까지 벌인다. 영조는 박성원을 절도에 유배를 보냈다.

과연 숙종이 기로소에 입소한 직후 급격하게 쇠약해졌습니다. 1720년(숙종 46) 1월 육순을 맞이했는데요. 
그러나 그 해가 마지막이 됐죠. 6월8일 승하할 때까지 6개월 이상 병석에 누워 있었습니다. 숙종은 60을 맞이하기도 어려운 몸 상태를 알고 기로소 입소를 강행한 것 같습니다. 
영조는 어떨까요. 83세까지 산 영조는 조선 임금 가운데 가장 장수한 왕이죠.

그러나 ‘골골 팔십’이라는 말이 꼭 맞았습니다. 
특히 기로소에 입소할 무렵인 50세 때는 담증과 근육통, 어지럼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영조가 “선조(숙종)의 고사를 따르려면 59세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어찌 될 줄 알겠느냐”고 조바심을 낸 겁니다. 
또 영조는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1670~1718)의 소생이었습니다. 출생 콤플렉스가 만만치 않았죠. 
게다가 이복형(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이 평생 따라다녔습니다. 영조는 기로소에 입소한 부왕 숙종의 모습과 자신을 대비시키면서 왕권의 정통성을 입증하려 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두 임금이 59세, 51세에 기로소에 입소한다면서 생떼를 썼죠. 그러나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천근만근 국정의 무게를 짊어졌던 군주였으니 그 정도는 애교로 봐줄까요. 

■노인대접 받는 법?
요즘 ‘노인 연령’ 문제가 반드시 풀어야 할 화두로 등장했는데요. 1981년 제정된 노인복지법 등에 따라 제도적으로 통용되는 ‘노인 연령 기준’은 만 65세죠. 그러나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고령화가 가속화하면서 그 기준을 늘려야 한다는 논의가 일고 있죠. 
2025년이 되면 5명 중 1명이 노인으로 분류된다면서요. 그럼 그런 노인들을 부양해야 할 젊은이들의 부담이 너무 커질 것 같네요. 물론 ‘정년 연장’ 문제도 함께 논의되어야 할 것 같구요. 평균수명이 턱없이 낮았던 왕조시대에도 은퇴나이가 70세였잖습니까. 아무튼 저도 환갑을 넘은지 몇 년 되어서 이제 만 65세를 향해 가고 있는데요. 곧 ‘노인 대접’을 받게 되지만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낀 세대’라는 푸념도 해보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대로라면 저희 자식들 부담이 너무 커지잖습니까.
무엇보다 ‘기로’(60~70세)에 접어든 분들은 옛 사람들이 강조한 ‘삼달존’(세상에서 존귀하게 여기는 세가지)을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나이’란 시간이 지나면 쌓이는 것이구요. 그렇다면 ‘벼슬(작·爵)’을 얻은 분들이나, 필자 같은 장삼이사라면 ‘덕(德)’이 필요하겠네요. ‘노인대접’을 제대로 받으려면….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김문식, ‘1719년 숙종의 기로연 행사’, <사학지> 40권, 단국대사학회, 2008
박상환, <조선시대 기로정책 연구>, 혜안, 2000
윤정, ‘숙종 45년, 국왕의 기로소 입소 경위와 그 정치적 함의-세자(경종) 대리청정의 명분적 보강’, <역사문화연구> 제43집, 한국외대 역사문화연구소, 2012 
오민주, ‘조선시대 기로회도 연구’, 고려대 석사논문, 2009
김정선, ‘조선시대 왕들의 질병치료를 통해 본 의학의 변천’, 서울대박사논문, 2005 
심재우·한형주·임민혁·신명호·박용만·이순구, <조선의 왕으로 살아가기>, 한국학중앙연구원, 2011
임지연, ‘숙종 45년(1719) <기사계첩>과 영조 20년(1744) <기사경회첩> 연구’, 명지대 석사논문, 2017
심예원, ‘1744년(영조 20) 영조의 기로소 입사 의례와 정치적 의미’, <조선시대사학보> 96권, 96호,, 조선시대사학회,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