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깊이가 생각보다 엄청 깊습니다. 2.3(1호)~2.4m(2호)나 되는데요. 사람이 들어가 있으면 보이지 않고요. 사다리를 타야 겨우 오르내릴 수 있습니다. 또 하나 각 냉장고의 벽면을 정연하면서 조밀하게 쌓아놓은 것도 인상적입니다.
■더운 바람을 내보내는 통기구
두 유구가 ‘백제판 냉장고’ 였음을 알리는 장치가 또 백미죠. 각 유구의 동쪽 긴 벽 위쪽에 설치된 각 3개씩의 통기구인데요.
외부 공기가 드나드는 통기구는 50㎝ 간격을 두고 경사지게 돌출구조로 조성했습니다.
이 통기구 덕분에 이 두 기의 저장고를 ‘백제판 냉장고’로 특정할 수 있었습니다. 옛날 석빙고의 구조에서도 보듯 이 통기구가 더운 공기를 밖으로 배출시키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찬 공기가 바닥에 깔리고 더운 공기가 상승하는 대류의 원리를 이용한 거죠. 바닥은 습기를 차단하도록 잡석과 모래성분이 섞인 점토를 섞어 다졌습니다.톻
그렇다면 냉장고가 아니라 석빙고(냉동고)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석빙고에서는 얼음 녹는 물을 빼내는 배수구가 예외없이 보이는데요. 그러나 이번에 확인된 두 유구의 바닥에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두 유구의 바닥에서 참외와 들깨, 밀, 조, 팥 같은 재배작물과, 딸기와 다래, 포도속, 산뽕나무 같은 채집 식물류의 흔적이 보였는데요. 그래서 백제판 저장고, 즉 냉장고로 추정할 수 있었던 겁니다.
물론 아직 풀지못한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윗부분에 두 냉장고를 연결하면서 ㄱ자로 연장되는 좁은 통로가 있습니다. 바닥 부분이 아니라 윗부분에 조성된 이 통로가 무엇인지 알쏭달쏭합니다. 배수구는 아닌 것 같아요. 또 하나는 두 냉장고의 위를 덮은 장치가 있었을텐데요.
보통의 석빙고는 아치형 지붕으로 덮었는데요. 이 두 백제판 냉장고의 지붕 구조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이밖에 1·2호 냉장고에서 각각 확인된 토기 뚜껑과 굽달린 접시를 맞춰보니 한 벌이었고요. 또 각각의 냉장고에서 수습된 토기편을 붙여보니 꼭 맞았습니다. 왜 같은 토기의 조각 조각을 두 냉장고에 따로 두었는지 그것도 수수께끼입니다. 그러나 어떻든간에 두 냉장고를 동시대에 사용했음이 명백해졌습니다.
이 두 냉장고와 인접한 곳에서 지상건물터와 구상유구(도랑처럼 두른 유구)가 확인되었는데요. 약 25평(길이 9.47m×너비 8.57m) 규모의 건물터에서는 기와편이 확인됐고, 취사시설인 부뚜막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거주시설은 아니었던 겁니다.
이 냉장고는 누가 사용했을까요. 이번처럼 통기구 달린 냉장고는 아니지만 공주 공산성과 부여 관북리 등 궁궐 유적에서도 이와같은 저장고가 확인되는데요.
따라서 이번에 확인된 1400년전 냉장고는 백제 왕실과 관련된 시설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서동 생가터에 웬 냉장고?
‘익산의 백제 왕실’이라면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서동 왕자, 즉 무왕과 선화공주를 떠올리게 되죠.
이번에 백제 냉장고가 확인된 곳이 다름아닌 서동 왕자의 생가터라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이번 발굴도 익산시가 서동 생가터를 정비하고 이 일대를 역사공원으로 조성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것인데요.
그렇다면 왜 이곳을 서동의 생가터로 추정했던 걸까요. 우선 <삼국유사> ‘기이 무왕’조를 볼까요.
“무왕(서동)의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못의 용과 관계를 맺어 아들을 낳았다. 아이 때의 이름이 서동(맛동)이다. 늘 마를 캐어 팔아 생업을 삼았으므로 맛동, 즉 서동(薯童)이라 했다.”
부여에서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무왕 시대의 서울이라면 익산이겠죠. 그렇다면 서울 남쪽의 못가가 어디일까요.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조선의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익산’조를 살펴볼까요.
“마룡지(현 연동제 연못)는 오금사 남쪽 100보 자리에 있다. 서동대왕의 어머니가 축실(築室·집을 지은)했던 곳이라 한다.”
마를 태어 팔다가 용(龍·임금)이 된 맛동(서동)이 태어난 연못이라 해서 마룡지라는 이름이 붙었답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곳 주변에는 서동의 설화가 담긴 지명이 많습니다.
생가터 뒤쪽에는 야트막한 오금산(해발 125m)이 있는데요. 산 정상부에는 백제시대에 축성한 토성이 있구요.
남쪽 기슭에는 서동이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는 오금사가 있었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익산에는 오금사(五金寺)가 있는데, 서동이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고, 마를 판 땅에서 다섯개의 금덩어리를 얻었다”고 했는데요.
<삼국유사>에 따르면 서동은 선화공주의 환심을 사려고 “나는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흙처럼 많이 쌓아 두었다”고 자랑했습니다. 생가터 위 쪽에는 오금산에서 흐르는 물이 고여 마룡지에 모이는 용샘이 있는데요. 용샘이 있는 마을을 용골이라 일컫고 있습니다.
■설화와 역사 사이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설화나 야사의 모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등 정사에 기록되지 않았거든요.
사실 따지고보면 서동왕자, 즉 백제 무왕(재위 600~641)의 익산 천도 기록 자체도 역시 <삼국사기>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왕의 익산천도와,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애틋한 사랑과 혼인 이야기 및 미륵사 창건 설화 등도 모두 역사적인 사실로 믿을 수 없겠네요.
그럼 서동 생가터에서 확인된 백제 냉장고는 ‘서동과는 전혀 관계없는 생뚱맞은 유구’가 아닐까요.
그러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동안 백제를 한성백제(기원전 18~기원후 475)와 웅진백제(475~538), 사비백제(538~660) 등으로 구분했는데요. 이제는 ‘익산 백제’도 당당히 포함되었거든요.
다른 예를 들 것도 없습니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 목록에 공주(2곳), 부여(4곳)와 함께 익산(2곳·왕궁리 유적과 미륵사터)가 들어가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무왕 때 익산 백제가 신(新)수도 구상에 따른 천도였거나 혹은 별도로 조성했다는 주장이 제기됐구요.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고고학 자료가 나왔기 때문이죠.
이중 왕궁리 유적을 볼까요. 역사기록은 보이지 않고, 그러나 지명은 심상치 않은 왕궁리(王宮里)고…. 그러다보니 갖은 억측이 나왔죠. 게중에는 고조선의 준왕이 해로를 따라 이곳에 와서 나라를 세웠다는 설, 후백제 견훤 도읍설, 신라의 삼국통일 후 고구려 유민들을 위해 세운 보덕국의 수도라는 설 등 다양한 견해가 나왔습니다.
물론 백제 무왕의 별도(別都)이나 천도설을 능가할만한 주장은 없었는데요. 하지만 어떤 문헌에서도 무왕의 익산 천도 및 행정수도설은 나오지 않았던 게 약점이었죠.
■관세음응험기의 비밀
그런데 1970년 마키타 다이료(牧田諦亮·1912~2011) 일본 교토대(京都大)교수가 10세기쯤 편찬된 <관세음응험기>를 찾아냈는데요. 여기에 무왕의 익산천도 기사가 보였습니다.
즉 “백제 무광왕(무왕)이 지모밀지(금마·익산)로 천도하여 사찰을 경영했다. 하늘에서 비와 함께 뇌성벽력이 내리쳐서 새로 지은 제석정사가 재해를 입었다(정관 13년·639년)”는 내용이었습니다. <관세음음험기>는 제석정사가 당한 피해사례를 언급하면서 “탑 아래 초석 속에 넣어두었던 귀중품 가운데 불사리병과 금강반야경만이 기적적으로 무사했다”고 특별히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1965년 왕궁리 석탑 해체수리 때 사리장엄구는 물론 금판 금강반야바라밀경 19매가 발견됐습니다.
백제인들이 제석사 화재 때 수습한 사리 및 금강경을 왕궁리 석탑으로 옮겨 봉안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그렇다면 <관세음응험기> 기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었죠.
이후 왕궁리에서는 공주 공산성이나 부여 부소산성 등 백제 도성에서나 볼 수 있는 상급의 유물들이 계속 나왔구요.
한반도에서는 한번도 확인되지 않은 최고급 중국제 청자 조각 등도 출토됐습니다.
왕궁리 유적 비중이 얼마나 높은지를 알 수 있죠. 또 ‘5부명’ 인장와와 ‘수부(首府·군주의 거처 및 중앙정부가 있는 수도) 명문 인장와’는 이곳이 도성이었음을 암시하는 결정적인 증거죠. 백제의 행정제도는 <삼국사기>나 중국의 사서인 <주서> 등에서 보이는데요. <삼국사기> ‘잡지’는 “옛날에 오부(五部)를 두어 37군, 76만호로 나누어 통치했다”고 했구요.
또 <주서> ‘이역전·백제조’는 “수도에 1만가가 있어 이를 상부·전부·중부·하부·후부 등 5부로 나누었다”고 했는데요. 왕궁리에서는 <주서>에 등장하는 5부 중 후부(後部)를 제외한 4부의 명칭이 모두 발견됐습니다.
■서동왕자는 가짜뉴스 퍼뜨린 스토커
그렇다면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사랑과 미륵사 창건 설화는 어떨까요.
두 분의 사랑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죠. 그러나 서동왕자는 가짜뉴스를 퍼뜨리면서 좋아하는 여인(선화공주)을 스토킹해서 결국 차지해버린 인물이죠. 남의 나라(신라)에 가서 아이들에게 ‘선화공주가 밤에 서동을 몰래 안고 간다’는 내용의 서동요를 퍼뜨렸구요. 그 뿐이 아니라 가짜뉴스의 피해자가 된 공주를 쫓아가 감언이설로 꾀어 관계를 맺고 부인으로 맞이했잖습니까. 요즘 같으면 성범죄자의 낙인이 찍힐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우여곡절 끝에 백제로 돌아와 왕위에 오른 무왕(서동)과, 왕후(선화공주)가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 못가에서 이르렀을 때 미륵삼존이 나타났다죠. 이 때 부인(선화공주)이 “이곳에 큰 절을 세워달라”고 간청했고요. 무왕의 명을 받은 지명법사가 하룻밤 사이에 3탑3금당을 갖춘 절을 세웠다고 하죠. 그것이 미륵사이구요.
그것을 뒷받침하듯 미륵사는 ‘중앙탑+강당’, ‘서탑+강당’, “동탑+강당” 등 3탑3강당으로 조성된 것이 확인됐구요. 연못과 같은 습지에 조성되어 있다는 것도 확인됐습니다.
절터의 주춧돌이 다른 절과 달리 높게 세워진 모습인데요. 이것은 늪지라는 특수성 때문에 주춧돌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는 거죠. “산을 헐고 연못을 메워 절을 조성했다”는 <삼국유사> 기록과 일치하죠.
■쌍릉의 주인공
지난 2009년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이 설화가 거짓일 수도 있다는 식의 발굴결과가 나와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죠.
미륵사 서탑에서 ‘탑을 세운 이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왕후인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명문금판이 나왔거든요. 한바탕 난리를 피웠는데요. 그러나 만약 무왕의 부인이 1명이 아니라면 어떨까요. 미륵사가 ‘3탑3금당’으로 조성되었다고 했죠.
‘서탑=사택적덕의 딸’이라면, ‘중앙탑=선화공주’, 그리고 ‘동탑=또다른 무왕의 부인’일 수도 있잖습니까.
굳이 ‘서동왕자과 선화공주’ 설화를 버릴 필요가 없죠. 또하나 익산 쌍릉의 주인공을 두고도 논란이 벌어졌죠.
그런데 최근의 재발굴 결과 대왕릉의 주인공은 사실상 ‘무왕’으로 확정했습니다.
대왕묘에서 확인된 102개의 인골분석 결과가 그것을 말해주는데요. 인골의 키가 161~170㎝, 나이는 50대 이상의 남성 노년층, 연대는 620~659년으로 추정됐거든요.
게다가 주인공을 안장한 나무관이 무령왕릉처럼 일본산 금송으로 밝혀졌거든요. 또 그 시대에 이만한 크기의 무덤을 조성한 인물이라면 무왕이 틀림없다는 견해가 정설이 된 겁니다.
물론 소왕릉의 주인공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있는데요. 그러나 그 주인공이 선화공주일 가능성은 아직 남아있습니다.
■무왕 부부의 음식 보관한 냉장고?
다시 백제판 냉장고가 확인된 서동 생가터로 돌아가 볼까요.
냉장고 확인 지점에서 오른편으로 약 20m 떨어진 곳에서 1980년대부터 기와 및 토기편이 계속 출토되었구요.
건물이 세워진 흔적인 초석까지 확인되었는데요.
2011년에는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와 같은 종류의 토기편(뚜껑)이 연못(마룡지)둑에서 수습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동의 어머니가 ‘집을 세웠다’는 이른바 ‘축실(築室)’의 방증자료로 삼았는데요.
그런데 그 인접지역에서 새롭게 냉장고 시설이 확인된 겁니다. 그렇다면 서동생가와 냉장고 사이에 어떤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사실 이번에 확인된 유기물을 대상으로 연대측정을 해보니 6~7세기 정도로 추정되었는데요.
어느 정도 무왕의 생존 연대(재위 600~641)와 일치합니다. 앞으로 서동의 어머니가 집을 지었다는 바로 그곳(냉장고 확인지점에서 20m 떨어진 지점)을 조사한다는데요. 어떤 유구와 유물이 나올지 궁금합니다.
서동이 어릴적부터 마를 캐어 지극 정성으로 어머니를 공양했다고 했죠. 그 모습에 하늘도 감복했는지 마를 캐던 뒷산에서 금덩이를 발견했구요. 서동은 어머니를 위한 절인 오금사를 짓고, 후에 임금이 된 거구요.
그렇다면 이번에 확인된 냉장고 역시 서동, 즉 무왕과 그 부인(선화공주)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두 분이 드신 곡물과 과일, 채소, 음료를 보관한 왕실의 냉장고일 수 있잖아요. 1400년 동안 서동, 즉 무왕과 관련된 갖가지 설화가 전해졌는데요. 이번에 또하나의 이야깃거리가 추가되었네요. 고고학적 상상력까지 가미된 스토리텔링이겠군요.(이 기사를 위해 김낙중 전북대 교수, 이정호 동신대 교수, 배석희 익산시청 문화유산과장, 곽스도 전북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실장, 조상미 익산시청 학예연구사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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