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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탈출 미수극'에 '영감!'소리 들은 광해군 일가…폭군 대접 과연 옳은가

“‘영감’(爺爺)은 임금으로서 무엇이 부족해서 뇌물을 받고 벼슬을 팔았소…‘영감’이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말투가 요상하죠. 임금을 ‘영감!’이라 지칭하면서 뇌물로 받아챙긴 파렴치한으로 깔아뭉개고 있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요. 이 발언의 주인공은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1608~1623)를 모신 궁비(궁궐 여종)입니다. 
광해군은 이때 워낙 싸가지없이 구는 궁비를 꾸짖었는데요. 그러자 이 궁비가 “‘대체 누구 더러 제대로 모시라’고 호통을 치는 거냐. 영감이야 정치를 잘못해서 위리안치됐지만 우리에게 무슨 잘못이 있느냐”(<공사견문>)고 쏘아붙인 겁니다. 
그렇다면 광해군 면전에서 내뱉은 궁비의 질타는 ‘사이다 발언’이었겠네요. 그러나 100%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봅니다. 
“이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궁비의 패악하고 교만한 말에 분개했다. 사람들은 ‘반드시 저 궁비가 천벌을 받을 것’이라 했다. 과연 이 궁비는 다른 일로 죽고 말았다.”
폐주(광해군)를 향한 동정론도 만만치 않았음을 암시하는 기록이죠.

인조반정 후 강화 교동도로 유배된 폐세자 이지와 부인 박씨는 서울에서 보내온 인두와 가위로 땅굴을 판 뒤 탈출을 도모한다. 폐세자는 26일간 70여척이나 판 땅굴을 통해 빠져나왔으니 방향착오로 붙잡히고 만다. 남편이 붙잡히자 낙담한 부인은 3일만에 자진한다.

■폐세자 부부의 심야 탈주 미수극 
올 2013년이 인조반정이 일어난지 꼭 400년 되는 해네요. 정확히 1623년 음3월13일(양력 4월12일)입니다. 
인조반정은 조선의 운명을 바꾼 분수령이 되었고, 또한 한국외교사에서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인조반정 발발 후 광해군·폐비 류씨(1576~1623) 부부는 강화도로, 폐세자 이지(1598~1623)·폐세자빈 박씨(1598~1623) 부부는 교동도(강화)로 위리안치(유배지 가시담장 안에서 가택연금) 됩니다.(3월21일)  
광해군 일가는 하루 아침에 쿠데타로 쫓겨난 충격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특히 혈기왕성한 폐세자 이지 부부는 견딜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인조실록>은 “폐세자 부부는 보름 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했고, 함께 목을 매었다가 여종에 의해 겨우 구출됐다”(1623년 5월22일)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서 누군가 가위와 인두를 보낸 후부터 조용해졌습니다. 이때부터 심야탈주극을 준비한겁니다. 

“부부는 땅굴을 뚫어 탈출하려 했다. 폐세자는 땅을 팠고, 폐세자빈은 자루에 흙을 담아 방 안에 옮겨두었다.”(<인조실록>)
26일 만에 마침내 외부로 통하는 굴이 뚫렸습니다. 부부가 판 땅굴의 길이는 70자(21m)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폐세자의 탈출기도는 미수에 그칩니다.
“5월 21일 밤 폐세자가 도망쳐 나와 마니산으로 가려다가 가야산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그러다 포졸들에게 붙잡혀….”
이때부터 비극이 시작됩니다. 폐세자빈 박씨는 나무에 올라가 땅굴을 빠져나간 남편이 체포되는 장면을 지켜보고는 낙심해서 땅에 떨어졌습니다. 폐세자빈은 이후 3일간 음식을 전폐하다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인조는 반정세력의 강요에 못이겨 폐세자에게 “자진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폐세자는 부인과 같은 나이(26살)로 목숨을 끊는 신세가 됐는데요. 폐세자가 유배길과 유배지에서 지은 시가 가슴 찡합니다.
“…26년은 참으로 한바탕 꿈이어라. 흰구름 사이로 돌아가리.”
“본시 한뿌린데 어찌 이다지 박대하는고…어떻게 이 새장 벗어나 녹수 청산 마음대로 왕래하랴.”
어머니(폐비 유씨)도 자식 부부가 죽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시름시름 앓다가 4개월 뒤(10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운명을 알았을까요. 불교를 믿었던 폐비는 늘 “다음 생에는 제발 왕가의 며느리가 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렸답니다.

결국 폐세자도 “자진하라”는 인조의 명을 받아 26살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 <인조실록>의 기자는 “무조건 죽여야 한다”고 아우성친 조정공론을 비판했다.

■광해군 시해미수사건 
홀로 남은 광해군은 어찌 되었을까요.

이괄의 난(1624)과 정묘호란(1627) 등 변란이 이어지자 강화~태안~교동~강화로 계속 옮겨다녔습니다. 병자호란(1636~37)이 일어나자 가장 먼 제주도로 내쳐지는 신세가 됩니다. 죽을 고비도 넘겼습니다. 일부 반정세력이 경기수사인 신경진(생몰년 미상)에게 “잘 처리하라”는 글을 보냈는데요. “광해군을 몰래 없애라”는 글이었죠. 
그러나 신경진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광해군을 제주도로 옮기라는 명이 떨어지자 호송업무를 자청한 무사가 있었습니다. 이 자가 바로 자객이었습니다. 그러나 신경진 덕분에 광해군 시해시도는 무위에 그쳤답니다.(<병자록>)
제주도로 이첩된 광해군은 폐위된 지 19년 만인 1641년(인조 19) 7월 1일 67세의 춘추로 서거했는데요.
<인조실록>이 전하는 광해군의 최후는 쓸쓸했습니다.
“위리안치된 광해군이 죽었다. 제주목사(이시방·1594~1660)가 자물쇠를 부수고 문을 따고 들어가 예를 갖춰 장례를 치렀다.”
광해군의 사후 대우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는데요. 인조는 애도의 표시로 ‘3일간 관청 업무의 정지’를 선언했습니다. 
예조에서는 “주상께서 한번쯤 대신들과 함께 상복을 입고 곡(哭)을 하는 것도 좋을 듯 싶다”고 건의했습니다. 
이에 인조는 ‘7일간 소선(素膳·음식의 가짓수를 줄이는 것)’ 명령까지 내리려 했는데요. 그러나 반정세력의 아우성에 ‘깨깽’하고 말죠. 결국 광해군은 역시 반정으로 쫓겨간 연산군처럼 ‘왕자(王子)의 예’로 장례를 치러야 했습니다. 

치욕의 삼전도비. 인조반정 후 디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섬긴 대가는 컸다. 1636년 청나라의 침입으로 존망의 위기에 빠진 조선은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빠져나와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의식을 펼치고 군신관계를 맺음으로써 겨우 사직을 보전했다.

■금수의 행위
광해군이 연산군과 같은 대우를 받은 것이 과연 옳은 대접일까요.
우선 반정이 무엇일까요. <사기>의 표현대로 ‘발난세반제정(撥亂世反諸正)’, 즉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바른 세상으로 돌이키는 혁명을 뜻합니다. 인조반정의 명분은 세가지였습니다. 첫번째가 ‘폐모살제’였죠. 
9살짜리 이복동생(영창대군·1606~1614)을 죽이고, 서모(인목대비·1584~1632)까지 유폐시킨(1618) 행위는 유교사회에서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반정세력은 광해군의 ‘폐모살제’를 ‘금수(禽獸)의 행위’라 매도했습니다.
반정세력이 내건 또하나의 명분은 지나친 토목공사에 따른 민심의 이반과 부정부패의 만연이었는데요.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궁궐들을 중건하면서 왕권강화를 노렸죠. 세금을 대폭 늘렸음에도 재원이 부족하자 은과 목재, 석재를 바치는 이들에게 벼슬을 팔기도 했습니다. 

삼전도비에는 전서로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라는 제목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대동법 실시와 동의보감 편찬
업적도 만만치 않습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위기 속에서 세자로 책봉됐죠. 
광해군은 의주로 도망한 임금을 대신해서 전국을 돌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왜군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를 모집했습니다.
광해군의 가장 큰 내정의 업적은 1608년 경기도에서 시행한 대동법일 겁니다. 대동법은 백성이 나라에 바치는 공물을 현물 대신 쌀로 낼 수 있게 만든 제도입니다. 원래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도록 한 것이 조선의 공물제도였는데요. 
그러나 폐단이 컸습니다. 예컨대 흉년이 들어 수확이 어려워도 반드시 현물(예컨대 인삼 혹은 굴비 등)로 바쳐야 했거든요. 
그 경우 나지도 않는 현물을 청부업자에게 비싼 값으로 구입해서 관청에 납부해야 했습니다. 대동법의 실시는 백성들의 입장에서 ‘복음’과도 같은 소식이었죠. 백성을 착취해서 떼돈을 벌던 청부업자들 가운데는 사대부와 왕실의 인척과 관련이 깊은 모리배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광해군은 기득권 세력의 아우성을 일축하고 대동법을 밀어붙인 겁니다.
또 선왕(선조)의 죽음에 책임을 지고 유배를 떠났던 허준(1539~1615)을 방면했는데요. 허준은 광해군의 보살핌 속에 <동의보감>을 완성했습니다. <동의보감>은 이 땅에서 나오는 637개 향약 이름을 한글로 표기하여 백성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두창과 성홍열, 티푸스 같은 전염병에 걸려 속절없이 죽어가는 백성들을 구제했죠

<인조실록> 1623년 3월14일자가 전한 광해군의 죄상. 그중 “명나라의 은혜를 저버리고 파병군 사령관(강홍립)에게 ‘형세를 살펴 행동하라’고 지시함으로써 전군이 항복하는 불상사를 빚었다”고 비난했다.

■필살기, 관형향배 외교
인조반정군, 즉 쿠데타군이 내건 세번째 명분은 좀 어이없습니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다시 일으켜준 중국의 은혜는 영원토록 잊을 수 없었다…광해는 천자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배반하는 마음으로 오랑캐와 화친…예의의 나라인 우리 삼한(三韓)은 금수의 나라가 되었으니….”
그러나 당시 조선은 절체절명의 고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안으로는 국난의 상처를 치유하고 바깥으로는 명청교체기에서 종묘사직을 보호해야 했죠. 광해군이 내건 ‘등거리 외교’는 중차대한 시기의 필살기였습니다. 
명나라의 몰락은 시간문제였죠. 1618년 후금의 누루하치(태조·1616~1626)는 요동반도의 무순성(撫順省)을 함락시켰습니다. 명나라는 패닉에 빠져 조선의 파병을 ‘명령’했는데요. 
조정 신료들은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일으켜 세워준 명나라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아우성쳤습니다.

1798년(정조 22)에 편찬된 김응하 장군의 분투를 기록한 <충렬록>. 이 책에는 1619년 3월1~4일 만주 선허(사르후)에서 벌어진 조명연합군과 후금 간 전투의 기록화가 그려져있다. 이 전투에서 명나라군은 궤멸당했다.

그러나 후금의 위세를 파악한 광해군은 흔들리지 않고, 묘수를 찾았습니다. 
파병을 결정하면서 지원군 사령관 강홍립(1560~1627)에게 밀명을 내리죠. “형세를 보아 행동을 결정하라(觀形向背)”고요.
광해군은 파병을 차일피일 늦추면서 “조선의 국난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조선의 군사력이 미약해서 도움이 안 된다”는 등 갖가지 핑계를 댑니다. 급기야 1619년 3월1~4일 선허(深河·사르후) 전투가 벌어지는데요. 조선군의 행보가 여기서 나뉩니다.
조방장 김응하 장군(1580~1619) 등은 명나라군과 함께 후금군과 싸웁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명나라군 10만명이 궤멸 당했구요. 김응하 장군은 후금군의 철창이 가슴을 관통하는 순간까지 싸우다가 전사했는데요. 이때 사령관인 강홍립은 광해군의 밀명대로 ‘형세를 보아 행동’했다가 후금군에 투항했습니다.
두 장군 덕분에 조선은 두마리 토끼를 잡았습니다. 강홍립의 투항으로 후금의 위협에서 벗어났구요. 김응하의 분전 덕분에 명나라와도 척을 지지 않았습니다. 명나라는 김응하 장군에게 요동백이라는 작위까지 내려주었거든요. 
광해군의 실리외교가 빛나는 순간이었죠. “고담준론으로만 적을 제압할 수는 없으며, 대의로만 오랑캐를 막을 수 없다”는 광해군의 안목이 돋보였습니다.

광해군은 “지금과 같은 난국에는 고려처럼 안으로 내실을 다지고 밖으로 견제하는 등거리 외교를 펼쳐야 하는데 큰소리만 치고 있다”고 갑갑해 했다. 광해군은 명나라에 파병군을 보내면서도 파병군 사령관인 강홍립에게 “명나라 장수의 말만 듣지말고 지지 않는 방향으로 형세를 보아 행동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아! 나 때문에…”
반면 그런 광해군을 ‘금수’로 규정하고 반정을 일으킨 인조는 어떠했을까요.
다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사모하는 이른바 ‘향명배금(向明排金)’정책을 썼다가, 다시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지죠.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년)이 이어지고, 급기야 ‘삼전도의 굴욕’을 겪게 되구요. 인조는 스스로 ‘반정’의 정신을 무너뜨리고 오랑캐라 무시했던 청나라(후금)와 군신관계를 맺게 되죠. 인조의 자책이 하늘을 찌릅니다.
“나 때문에 조용했던 강토가 갑자기 병자·정묘년의 큰 변란을 당했다…아, 이번 일을 당한 백성들이 아무리 나를 꾸짖고 원망한다 해도 이는 나의 죄이니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인조실록> 1641년1월2일) 
삼전도의 굴욕을 두고는 “끝까지 싸울 수 있었지만 허겁지겁 항복한 것은 백성들을 살리기 위함이었다”고 변명했습니다. 그렇다면 광해군이 백성들을 전란의 화에서 구하려고 실리외교를 편 것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정묘 및 병자호란 때 척화파 사이에서도 후금(청)과의 화친이 이뤄지기를 바랐지만 강경파들의 주장이 무서워 감히 입밖으로 내지 못했다.

■“다들 화친을 바랐지만….”
광해군은 어땠나요. 조정공론이 다 쓰러져 가는 명나라 편에 섰을 때 광해군은 ‘답답하다’고 가슴을 쳤습니다.
“요즘 조선인들은 큰소리만 치고 있다. 반드시 그 큰소리 때문에 나랏일을 망칠 것이다.”
장유(1587~1637)의 <계곡만필>은 기막힌 이야기를 전합니다.
“정묘호란 당시 조정신료들은 화친이 이뤄지지를 바랐다. 척화파들도 큰소리치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조정 여론이 무서워 자기 입으로는 화친을 말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 대목에서 광해군이 제주도로 이첩된 뒤 남긴 시가 떠오릅니다.
“…푸른 산 슬픈 빛은 싸늘한 가을 기운…나그네 꿈 자주도 제자주(제주도)에서 깨네.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연기 깔린 강 물결 외딴 배에 누웠구나.”(<인조실록> 1641년 7월10일)
<인조실록>의 기자는 “이 시를 들은 사람들은 비감에 젖었다”고 했습니다. 인조반정 400주년을 맞이한 지금, 되새겨봐야 할 역사라는 거울이 아닐까요. 이기환 히스토리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