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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북쪽으로 22.58㎝ '기우뚱' 한 첨성대, 정말 괜찮은건가

요즘은 황리단길과 벚꽃길도 각광을 받지만 경주 시내의 ‘랜드마크’는 역시 첨성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경주시내 한복판, 대릉원과 월성 사이의 평지에 다소곳이 서있는 첨성대는 남녀노소와 밤낮을 막론하고 사계절, 사진발 잘 받는 핫플레이스이니까요. 
그런데 저는 첨성대를 볼 때마다 괜히 조바심이 납니다. 혼자 이리저리 나름대로 수평을 잡아보고, 기울어지지 않았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게다가 지난 9월 초강력 태풍 힌남노가 경주 지역을 휘몰아쳤잖습니까. 
왜 ‘기우(杞憂)’라는 말이 있죠. 1400년 넘게 잘 버티고 있는 첨성대를 두고 걱정을 사서 하니 쓸데없는 ‘기우’라고 하시겠죠.

■지진 때문에 북으로 2.13㎝, 동으로 1㎝ 기움
그러나 마냥 ‘기우’는 아닙니다. 실제로 첨성대가 기울어졌으니까요.
2009년 발표된 국립문화재연구원의 <첨성대 실측 훼손도 평가 보고서>는 첨성대는 북쪽으로 200㎜(20㎝) 정도 기울어져 있다는 측정결과(기단 중심과 정상부 기준)를 담았습니다. 첨성대의 높이(8770㎜)와 기운 거리(북쪽 200㎜)로 계산하면 1.19도 정도의 기울기로 계산된답니다. 2년 뒤인 2011년 국립문화재연구원의 ‘석조문화재 안전관리연구 보고서’는 피사의 사탑을 인용하면서 첨성대의 기울기를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5년 뒤인 2016년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죠. 9월12일 경주를 중심으로 관측 사상 가장 규모가 큰 진도 5.8의 강진이 발생한 겁니다. 이후 8일간 모두 600회가 넘는 여진이 이어졌습니다. 첨성대는 어찌되었을까요.

제가 지난해(2021년) 첨성대 모니터링 결과 보고서를 토대로 박찬민 국립문화재연구원 학예연구사와 함께 분석해봤는데요.
첨성대의 기울기를 처음 공식측정한 2014년을 0으로 놓은 정밀 측정 결과입니다. 
그랬더니 북측으로 2.13㎝, 동측으로 1㎝ 정도 탑 전체가 기울어진 현상이 일어났답니다. 4㎜의 배부름 현상도 포착됐구요. 
1년 2개월 만인 2017년 11월 15일 포항에서 진도 5.4의 지진이 발생했죠. 국립문화재연구원 실측자료는 2016년 지진 때(9월13일)에 비해 동쪽으로 2.1㎜, 북쪽으로 1.8㎜ 정도 더 기울었다고 했네요. 

그러나 전체적으로 2016년 경주 지진 이후 2019년까지 3년간 3㎜ 수치 범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다만 연구원은 2020년부터 2년 간의 추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답니다. 그럴 이유가 있답니다.
2020년 10월 6일 측정 때는 ‘북쪽으로 22.7㎜ 정도’(2014년 기준) 기울었는데요. 그런데 6개월 뒤인 2021년 3월 31일에는 그보다 1.8㎜ 더 기운 24.5㎜로 집계되었습니다. 이어 6개월여 뒤인 2021년 10월7일 측정 때는 ‘25.8㎜ 기움’이 되었습니다.
종합해보면 1년 전인 2020년 10월 6일보다 3.1㎜(25.8-22.7) 더 북쪽으로 기운 것으로 집계된 겁니다.
박찬민 학예연구사는 “측정상 오차 때문에 이 수치가 유의미한 것인지는 확언할 수 없다”면서 “그러나 국립문화연구원이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북쪽으로 기우는 첨성대
그렇다면 현재 첨성대의 전체적인 상태를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문화재 보존관리 등급에서  건축의 측면에서 첨성대의 관리등급은 ‘주의관찰’을 요하는 ‘C등급’입니다. 그렇다고 심각한 상태는 아니랍니다. 현대 건축물을 대상으로 분류하는 관리등급(A,B,C,D)을 첨성대처럼 세운지 1400년이 넘는 고건축물에까지 똑같이 적용할 수 없잖습니까. 그래도 늘 예의주시해야 합니다. 2009년 첫 측정 때 북쪽으로 20㎝ 이상 기울어졌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이후 2016년 일어난 경주 지진 때문에 2㎝ 더 기울었으며, 지난해와 올해 사이 3.1㎜ 정도 더 진행되었다고 했잖습니까. 
그렇다면 지금(2021년 현재)은 2009년 이전에 비해 22.58㎝ 더 기운 셈입니다. 

세월이 흘러 지반의 부동침하가 시작되면서 첨성대가 북쪽으로 기울었다. 그러자 내부를 메운 흙의 압력이 북쪽으로 높아지면서 첨성대의 기울기가 가속화하는 측면이 있다

무엇보다 첨성대에는 창문(개구부) 높이까지 흙으로 채워져 있는데요. 그런데 첨성대가 북쪽으로 기울다보니 그쪽으로 흙의 압력이 가중되겠죠. 그러다보니 북쪽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까지 배부름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북쪽면의 윗부분 석재 일부가 바깥으로 이탈되는 구조적인 변형이 보입니다. 
남쪽면은 무사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첨성대가 북쪽으로 기울면서 흙의 압력이 그쪽으로 쏠리겠죠. 반면 남쪽벽에서는 상대적으로 흙의 압력이 약해지게 되겠죠. 그러니 남쪽면의 석재들이 이완되어 틈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2021년 실측조사 보고서도 “첨성대에서 지반침하 등으로 인해 기울기가 변화될 경우, 밑 부분 흙 압력의 증가로 배부름이 증가되거나 상부 석재의 연쇄적인 미끄러짐(이탈) 현상이 발생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현재 국립문화재연구원이 첨성대 내부에 상시계측시스템을 설치하여 수시로 점검하고 있답니다. 안심은 되지만 그래도 경주 지진 같은 대형변수가 생기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북쪽으로 기울어지다보니 북쪽은 물론이고 동쪽과 서쪽까지 배부름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 때문에 북쪽과 서쪽면의 윗부분 석재 일부가 바깥으로 이탈되는 구조적인 변형이 보인다.

■‘첨성대는 의심할바 없는 천문대’
이쯤에서 첨성대의 기능과 관련된 학계의 견해가 어떻게 정리되었는지 점검해봤는데요.
갈수록 ‘백가쟁명(百家爭鳴)’이더라구요. <삼국유사> ‘선덕여왕 지기삼사’조는 “‘선덕왕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축조했다’는 기록(별기)이 있다”고 썼는데요. ‘별(星)을 바라보는(瞻·혹은 우러러보는) 구조물’이라고 했으니 이론의 여지가 없는 천문대로 인식되었죠.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등 후대의 사서도 ‘첨성대=천문대’로 설명했습니다. 
“첨성대는 선덕여왕이 쌓았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방형(方形)이고, 아래는 원형이다…가운데를 통하게 하여 사람이 올라가게 되어 있다.”

1476년(성종 7) 편찬한 편년체 사서인 <삼국사절요>는 첨성대의 축조연대를 ‘647년(선덕여왕 16) 1월’이라고 했구요.
조선 후기 이유원(1814~1888)이 엮은 <임하필기>는 더 구체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첨성대를 만들었다. 효소왕(692~702) 때는 당나라에서 귀국한 승려 도증이 천문도를 올렸고, 성덕왕(702~737) 때는 처음으로 누각(漏刻·물시계의 일종)을 만들었다.”(‘문헌지장·관측기구’편)
‘첨성대=천문대’설은 1909년 일본의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1859~1918)가 첨성대를 방문한 이후 재확인했는데요. 
미국의 천문학자 윌 칼 루퍼스(1876~1946)와 영국의 과학사가인 조지프 니덤(1900~1995)도 ‘첨성대=천문대’로 국제학계에 소개했습니다. 

■‘백가쟁명의 설설설’ 
그러나 1960년대부터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삼국유사>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견해들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하죠.
나름 근거가 있었습니다. 첨성대를 보면 오르기가 힘들고 꼭대기 공간이 너무 좁아서 천문을 관측하기에 불편하다는 겁니다.
1평도 안되는 공간에서 무슨 관측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뭐 이런 회의감이 든 겁니다.
다양한 다른 학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규표설(圭表說·1964)’이 처음 나왔습니다. ‘규표’는 지상에 수직으로 세운 막대를 뜻하는데요. 첨성대는 4계절과 24절기를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 세운 규표라는 겁니다. 

1970년대에는 ‘주비산경설’이 제기됐습니다. 첨성대에는 1대3의 원주율, 3대4대5의 구고법(句股法·피타고라스 정리)이 상징적으로 숨어있다는 건데요. 즉 첨성대 몸통의 윗지름이 문(창구) 한 변 길이의 약 3배(원주율 3.14와 비슷)에 해당되구요. 
또 몸통 밑지름과 정자석 한 변의 길이는 약 5대3이고 몸통부의 높이와 기단석의 대각선 길이는 약 5대4라는 겁니다. 이는 고대 천문수학서인 <주비산경>에 나오는 직각삼각형의 3²+4²+5²를 상징한다는 겁니다. 결국 첨성대에는 <주비산경>의 수학원리와 함께 천문현상의 상징숫자들이 내포되어 있다는 겁니다.
‘수미산설’도 흥미로운 주장인데요. 수미산은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인데요. 첨성대가 병 모양이라는 것에 착안한 견해인데요. 첨성대가 수미산 모양을 본떠 만든 제단이라는 설이 제기된 겁니다. 

첨성대와 관련해서 중국 고대 천문수학서인 ‘주비산경설’이 제기됐다. 첨성대에는 1대3의 원주율, 3대4대5의 구고법(句股法·피타고라스 정리)이 상징적으로 숨어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우물설도 제기되는데요. 원통형 몸체에 우물 정(井)자 모양의 돌을 2단 올린 모양이 우물을 연상시킨다는 겁니다.
우물은 신라의 개국신화와 연관성이 있습니다. 시조 박혁거세(기원전 57~기원전 4)가 나정(蘿井)에서 탄생했다는 신화가 있죠. ‘첨성대=우물설’과 관련해서 하나 더 흥미있는 견해가 나왔습니다. 첨성대가 선덕여왕의 표상이라는 겁니다. 즉 선덕여왕은 즉위할 때 ‘성스러운 조상을 둔 여황제’라는 뜻에서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존호를 받았는데요. 
선덕여왕의 ‘성스러운 조상’이 박혁거세와 석가모니였다는 겁니다. 여성의 산도를 닮은 우물은 나정에서 보듯 박혁거세의 탄생을 상징한 거구요. 한편으로 첨성대는 석가모니의 탄생을 뜻하기도 한다는데요. 첨성대의 가운데 문(창구)은 석가모니가 태어난 마야부인(석가모니의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라는 겁니다.(정연식 서울여대 교수의 ‘선덕여왕과 성조(聖祖)의 탄생, 첨성대’, <역사와 현실> 74호, 한국역사연구회, 2009) 

■대낮에 별을 관찰하는 천문대
이렇듯 더러는 일리있고,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할만큼 흥미로운 설들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때로는 심오한 철학을 부여하고 심지어는 고차원적인 수학원리까지 도입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어떤 견해도 <삼국유사>와 <세종실록>, <삼국사절요> 등이 소개하고 설명한 ‘첨성대’, 즉 ‘별을 관찰하는 구조물’이라는 기본틀을 뒤집을만한 결정적인 반증은 없습니다. 
그저 연구자들의 견해일뿐이죠. 또 여러 연구자의 견해 가운데는 ‘견강부회’와 ‘아전인수’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원래 있던 길을 두고, 자꾸 다른 길로 빠져가다 보면 미로에 빠져 헤매거나 엉뚱한 목적지로 닿을 우려도 있습니다. 
제가 이런저런 자료를 살펴보다가 또 한 편의 새로운 논문에 시선이 꽂혔는데요.
맹성렬 우석대 교수가 해외 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첨성대는 천문대인가’(2017년)라는 글이었습니다.    
즉 고대 그리스 천문학자인 클레오메데스(기원전 1세기)는 “우물 바닥에서 태양을 보면 평소보다 크게 보인다”고 했답니다. 또 고대 로마의 자연과학자 플리니(23~79)는 “대낮에도 우물에 반사된 별빛을 관측할 수 있다”고 했답니다.

우물은 신라의 개국신화와 연관성이 있다. 시조 박혁거세(기원전 57~기원전 4)가 나정(蘿井)에서 탄생했다는 신화가 있다.

낮에 별을 볼 수 없는 이유가 뭘까요. 수증기를 비롯한 대기 중의 많은 미세입자들이 햇빛에 난반사되어 별로부터 지구로 오는 빛을 가려버리기 때문입니다. 낮에 별을 보려면 난반사를 최대한 억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대낮의 별 관측은 암상자(camera obscura)를 이용하는데요. 깊은 우물이 암상자의 대체물로 고대에 주간 별 관측에 이용되었던 겁니다. 이런 전통이 후대 이슬람권에 이어져서 천문 관측용 우물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는데요. 
실례가 남아있습니다. 1428년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 건립된 울루그 베그 천문대가 그런 형태구요. 또 1579년에 이스탄불 천문대의 부속건물인 주간 천체관측용 우물탑을 그린 그림이 남아 있습니다.
또 프랑스 파리 천문대(1667년)와 오스트리아 크렘스문스터 천문대(1748년)에도 깊이 55m(파리)~59m(크렘스문스터)의 우물 형태 부속건물이 있답니다. 이들은 모두 대낮에 별자리를 관측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네요.

‘첨성대=선덕여왕의 표상’이라는 견해도 등장했다. 선덕여왕이 즉위할 때 ‘성스러운 조상을 둔 여황제’의 존호를 받았는데, 선덕여왕의 ‘성스러운 조상이 박혁거세와 석가모니였다는 것이다.

■첨성대는 우물형 천체관측대?
그럼 ‘첨성대=우물’ 형상이라면 어떨까요.

첨성대가 고대에 알려진 주간 별 관측용 우물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그동안 제기되었던 모든 의문점이 어느 정도 해소됩니다. 즉 첨성대 내부에서 꼭대기로 올라가라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서 천정을 지나는 대낮의 별자리를 관측하라는 것이다, 뭐 이렇게요. 물론 꼭대기에 관측 기구를 설치하려고 사람이 오르내릴 수는 있겠죠. 그러나 천문 관측자까지 그 위로 올라갈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

고대부터 천문관측용 우물이 존재했음을 알리는 해외 연구자의 논문

이와같은 서양의 천문관측 지식이 어떻게 7세기 신라까지 들어왔을까요. 논문을 쓴 맹교수는 인도를 통한 도입 가능성을 개진했는데요. 그러나 서역을 통한 도입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미 5~6세기 신라 고분에서 서역계 유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예컨대 페르시아 지방의 기법으로 제작된 ‘커트 글라스(Cut Glass·무늬를 새긴 유리)’는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진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됐습니다. 이 고분에서 확인된 5~6세기 은제잔은 어떻습니까. 여인 한 사람이 조각돼 있는데요. 이 여인은 이란의 아나히타(Anahita) 여신상과 흡사합니다. 
황남대총 남분 출토 봉수형 유리병은 어떻습니까. 현재 이란 국립박물관 소장 유리병과 쌍둥이라 할만큼 똑같습니다.
또 경주 구정동 방형 무덤의 네 모서리에 부조된 무인상을 보면요. 눈이 깊고 코가 큰 서역인이 페르시아 스포츠인 폴로(격구)용 스틱 같은 것을 잡고 있어요. 우물의 원리를 갖춘 천문지식 역시 이때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는 겁니다

1428년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울루그 베그의 우물형 천문관측대와 1579년 터키 이스탄불 천문대 부속건물로 건축된 주간 천체관측용 우물탑 그림. 우물형 천문대가 카메라 옵스큐라의 역할을 하여 주간에도 별을 관측할 수 있게 한다.

■동지의 새벽에 뜨고 지는 해와 별을 보았다?
그렇다면 우물 형태의 첨성대에서 무엇을 관측했을까요.

우물이 깊다면 몰라도 겨우 9m도 안되는 첨성대에서요. 
맹교수가 찾아낸 터키 이스탄불의 우물형 천문관측대 그림을 자세히 보면 달과 태양이 동시에 떠있습니다.
백주 대낮이 아니라 해가 뜨는 여명이거나, 지는 일몰 직후라면 어떨까요. 
마침 첨성대의 정자석(井字石) 모서리가 선덕여왕릉과 ‘동지일출선’에 정렬되어 있다는 연구가 있잖습니까. 동지에 해가 뜨는 ‘동지 일출’은 예부터 태양의 부활을 알리는 새해의 출발로 받아들였습니다. 
영국의 스톤헨지나 고대 이집트의 카르낙 신전 등이 동지 일출선에 정렬된 대표적인 케이스라 합니다. 
첨성대 역시 해 뜨기 직전이나, 지기 직후의 별과 해를 관측했던 시설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견해 역시 맞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역시 상상력의 폭을 넓힐 수 있는 흥미로운 주장이라는 점에서 소개해보았습니다. 저도 궁금합니다. 1400년전 신라인들이 이 첨성대에서 관측한 별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도 궁금합니다. 1400년전 신라인들이 이 첨성대에서 관측한 별은 무엇이었을까요.(이 기사를 위해 박찬민 국립문화재연구원 안전방재연구실 학예연구사와 맹성렬 우석대 교수가 자료와 도움말을 제공해주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국립문화재연구원, ‘2021년 경주 첨성대 모니터링 결과보고서, 2021
국립문화재연구소, <경주 첨성대 실측 훼손도 평가 조사보고서>, 2009
국립문화재연구소, <석조 문화재 안전관리방안 연구보고서>, 2011
맹성렬, ‘첨성대는 천문대인가’, <예술인문사회 융합 멀티미디어 논문지> 7권 10호, 인문사회과학기술융합학회, 2017
정연식, ‘첨성대의 기능과 형태에 관한 여러 학설 비판’, <역사학보> 204권, 역사학회, 2009
정연식, ‘선덕여왕과 성조(聖祖)의 탄생, 첨성대’, <역사와 현실> 74호, 한국역사연구회, 2009
장활식, ‘첨성대의 옛 기록 분석’, <신라문화> 39호, 동국대신라문화연구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