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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히힝~’, 천마 3마리가 보였다…신라왕 무덤인데 ‘금관은 뒷전’이었다

“7월 25일…(미리 예상했지만) 곡옥이 달린 나뭇가지 형태의 세움장식이 확실한 금관 일부를 확인했다.” 
1973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경주 155호분 발굴을 기록한 야장(발굴일지)의 7월25일자 내용입니다. 어째 좀 이상하죠. 
명색이 신라 금관을 발견했는데, 짜릿한 흥분감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금관총(1921년)-금령총(1924년)-서봉총(1926년)에 이어 4번째 금관 출토가 아닙니까. 게다가 155호 고분 출토 금관은 해방 후 첫번째로 수확한 금관이라는 의미가 있죠. 발굴된 금관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했구요.

그런데 발굴일지의 ‘예상했던 대로’라는 표현에 눈길이 갑니다. 
해방 후 첫 발굴한 왕릉급(높이 12.7m, 밑지름 47m)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었으니까요. 금관 출토는 시간문제로 여겼습니다. 그러던 차에 금관이 보이자 ‘찌릿함과 흥분’ 보다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 후 한 달 가까이 지난 8월22일 무덤 부장품을 한 곳에 담아놓은 상자 안에서 ‘말다래’ 3벌(6장)이 나왔는데요.
이 말다래에 그려진 말, 즉 천마가 155호분의 ‘시그니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고분에 ‘천마총’의 이름이 붙은 겁니다.

■시험발굴이 대박발굴로
내년(2023년)이면 천마총 발굴 50주년을 맞이하는데요. 며칠전 문화재청이 발굴 50주년을 앞둔 천마총의 의미와 되새긴다는 차원에서 ‘천마총의 우리말 의미와 상징, 표어를 공모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알아보고 싶네요. ‘천마도’와 금관 등 1만1526점의 유물이 쏟아진 천마총 발굴은 한국 고고학사에 어떤 자취를 남겼을까요. 당시 ‘155호분’의 호칭을 갇고 있던 천마총은 시험용 발굴 대상이었습니다. 사연이 있습니다.
1971년 6월 경주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경주관광개발계획을 마련하라”고 지시합니다.
이에 따라 마련된 개발계획 중에 눈에 띄는 항목이 있었습니다. 경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98호분(황남대총 남북분·높이 22~23m, 하부지름 80~120m)을 발굴조사한 뒤 그 내부를 관광자원으로 공개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고고학계로서는 그렇게 큰 신라 무덤을 발굴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155호분을 시험 발굴하여 경험을 축적한 뒤 98호분(황남대총)을 조사한다는 방침을 세운 겁니다. 
1973년 4월 6일부터 시작된 ‘시험용 발굴’이었지만 학계의 기대는 컸습니다. 엄청난 돌무지 때문에 도굴이 불가능한 고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7월25일부터 주인공이 착용한 금관과 금허리띠와 금귀고리, 금팔찌, 금반지 등이 보였습니다.

■말 3마리분의 장신구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8월14일부터 주인공의 머리맡에 놓여진 부장품 궤짝으로 발굴이 이어졌는데요.
그런데 상자 안에 뒤섞여있던 천조각과 나무 썩은 물질 등을 제거하자 뜻밖의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말 안장 위에 가지런히 놓은 두 장의 말다래가 보였습니다. 대나무로 짠 삿자리에 덧씌운 금동판 말다래였는데요.
당시 발굴단은 이 ‘금동판 말다래’에 ‘천마’가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문양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햇빛을 표현한 일광무늬인줄 알았습니다.

이 문양은 훗날 보존처리 과정에서 천마의 목덜미 갈기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때는 대나무 삿자리나 금동판이나 모두 심하게 부식되어 부서져 흩어져 있었기에 판별할 수 없었던 겁니다.
발굴단은 이렇게 부식된 ‘금동판 말다래’를 원상태로 수습해야 했습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그 조치란 유물에 약품을 뿌려 굳게 만드는 경화처리였습니다. 분무기와 이발소용 드라이기를 사용해서 경화처리용 악품을 ‘금동판 말다래’에 뿌리고 말리는 작업을 반복했습니다.

■강렬한 색깔의 천마가!
여기서 발굴단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돌발변수가 생겼습니다.
경화처리를 끝낸 ‘대나무제 금동판 말다래’를 살짝 들어올리는 순간, 그 밑에서 또하나의 심상치 않은 물체가 보인 겁니다. 
그것은 ‘자작나무 껍질(백화수피)’에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가득 찬 부식물 때문에 아래쪽 유물이 보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8월22일 ‘금동판 말다래’를 조심스레 들어올리자 ‘자작나무 말다래’의 전모가 드러났습니다. 두 장에 겹쳐져 있었습니다.

말의 양쪽을 가린 말다래 한벌이었습니다. 판 위의 부식물질을 제거해나가자 강렬한 채색 그림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아뿔싸!’하고 탄성이 터졌습니다. ‘자작나무 말다래’의 일부가 훼손되었던 겁니다. 
즉 ‘금동판 말다래’의 경화처리 때 뿌린 약물이 ‘자작나무 말다래’에까지 침투되어 버린 겁니다. 밑까지 스며들어간 약물이 자작나무판과, 그 위의 부식물에 엉겨붙어 까맣게 변한 거죠. 
그러나 훼손된 윗부분 말고는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 불행중 다행이었습니다. 
그렇게 노출한 자작나무 말다래 1벌(2장)은 길이 각 75cm, 너비 각 56cm, 두께 각 6mm 정도였는데요. 자작나무 껍질을 여러 겹 겹쳐서 바느질하고, 내부를 빗살무늬로 누볐습니다. 내부에는 하늘을 나는 백마를 화면 가득하게 그렸구요. 가장자리에는 꽃그림을 배치했고, 가죽을 둘러 꿰매었습니다. 

■만지면 꺼질세라 불면 날아갈세라
김정기 발굴단장(1930~2015)의 낯빛이 달라졌습니다. 금관 출토 때에도 비교적 ‘쿨’한 표정으로 작업을 지시했던 김단장은 천마도 말다래가 출토되자 직접 붓과 솔을 잡았습니다. 김단장은 말다래의 부식물을 털어내면서 입을 앙다물었다 풀었다 하고, 끙끙 신음소리를 내기도 하고, ‘하~하~’하는 감탄사를 숨기지 않았답니다.
신라의 회화 솜씨를 알 수 있는 그림이 처음 현현했으니 어찌 기쁘지 않았겠습니까. 
천마총 후속발굴에서 상서로운 새를 그린 ‘서조도’와 말탄 인물을 그린 ‘기마인물도’ 채색판이 나와서 흥분은 더해졌습니다.
그런데 김단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나와서는 안될 게(천마도) 나왔어!”하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합니다.
유물의 보존처리 기술이 일천했던 1970년대에 ‘천마도’ 같은 부식된 유기물이 출토되었으니까요.
발굴단장으로서 얼마나 긴장되었으면 “나오지 말아야 할 게 나왔다”고 토로했을까요.
딴은 그렇습니다. 천마도 말다래는 자작나무 껍질을 누벼 만든 거구요. 땅 속에서 무려 1500년 가까이 묻혀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출토 당시에는 나무껍질의 형태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실상은 모두 부식되어 있던 상태였거든요.
게다가 여기저기 틈이 갈라진 상태였구요. 이런 상태에서 오래 공기에 노출시키면 큰일납니다. 유물 틈에 녹아든 습기가 말라버리면 색깔도 금방 옅어질 뿐 아니라 판 자체가 갈라지고, 쪼그라들고 맙니다. 천마도 자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유물을 어떻게 빨리, 무사히 들어내고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이것이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발굴단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묘안을 짜냈습니다. 얇고 긴 대칼과 함석판, 켄트지(그림 그리기용 빳빳한 종이) 등을 이용하여 2장이 겹쳐진 자작나무 말다래를 살짝 들어올린 뒤 조심스레 옮겼습니다. 
한쪽에서는 6~7명이 빙 둘러서서 대칼에, 베니아판에, 함석판에, 켄트지까지 동원해서 살살 들어올려 구령에 맞춰 옮겼습니다. ‘불면 날아갈세라 만지면 꺼질세라’라는 말이 꼭 맞았습니다.
1500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천마도 두 장은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무사히’ 보존 상자로 이동되었습니다.
정리하고 보니 두 장의 천마도 가운데 아래판에 있던 천마 그림이 위판보다 훨씬 보존상태가 좋았습니다.
정리하자면 천마총에서 ‘대나무 삿자리 금동판제’ 1벌(두 장), ‘자작나무 껍질제’ 1벌(두 장) 외에도 ‘옻칠판제’ 1벌(두 장) 등의 말다래가 확인되었는데요. 모두 6장이니까 3마리분의 말다래가 세트로 나온 셈이죠. 
말다래는 말 안장 양쪽에서 배 아래로 늘어뜨린 부속구인데요.

말이 달릴 때 진흙(니·泥)이 기수의 가랑이에 튀는 것을 막아주는(장·障) 역할을 해준다는 뜻에서 ‘장니(障泥)’라고도 합니다. 기수의 발에 말이 다쳐 놀라지 않도록 하는 역할도 해줍니다.
천마총 발굴 당시에는 말다래 3벌(6장) 가운데 ‘자작나무 말다래’ 2장에서만 ‘천마도’가 보였습니다.

■전화국 교환수가 누설한 발굴기사
발굴 후일담도 기가 막힙니다. 1971년 백제 무령왕릉 발굴 때 몰려드는 기자들을 통제하지 못해 유물을 하룻밤 사이에 쓸어담는 불상사를 겪었죠. 그런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천마총 발굴현장은 비공개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자들이 누구입니까.
망원경까지 동원해서 발굴 현장을 스캔한 것은 애교로 봐줄만했습니다. 낮은 포복으로 현장에 잠입해서 사진을 찍어간 기자도 있었답니다. 기막힌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당시 발굴단은 중요 조사 상황을 유선전화로 서울의 문화재관리국으로 보고했는데요. 
보안을 우려해서 이불까지 뒤집어쓰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보고사항이 마치 현장중계하듯 특정신문에 잇달아 보도되고 있었습니다. 발굴단 내부에 ‘기자 끄나풀이 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았답니다. 그러나 곧 진상이 밝혀졌습니다.
당시엔 전화를 걸려면 전화국의 교환수를 통해야만 통화가 가능했던 시절인데요.
알고보니 그 전화국 교환실장이 특정 신문 기자의 부인이었던 겁니다. 그러니 상부 보고내용이 고스란히 이 교환수를 통해 기자에게 알려졌던 겁니다.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죠.

■‘천마총 보다 기린총’
훗날 ‘천마도’와 관련해서 인구에 회자된 논쟁이 있었습니다. 말다래에 그려진 그림이 ‘천마’가 아니라 ‘기린’이라는 견해가 나온겁니다.(이재중의 ‘기린 도상 연구’, 대구가톨릭대 박사논문, 2000) 
여기서 말하는 ‘기린’은 예부터 성인의 세상에서 출현한다는 상상의 동물인데요.

후한(25~220) 시대의 자전인 <설문해자>는 “기린은 어진 짐승이고, 말의 몸에 소의 꼬리를 갖고 있으며, 뿔이 하나 솟아있다(麒麟仁獸也 馬身牛尾一角)”고 했거든요. 
연구자는 “‘천마도’의 동물은 머리에 뿔이 있고 입에서 신기(神氣)를 내뿜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기린 그림에 나타나는 공통점이구요. 또 갈기 역시 기린이나 용 등의 신수(神獸)에서 나타나는 일관된 표현이라는 겁니다.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이 고화질로 찍은 ‘천마도’ 사진에는 ‘머리 위에 두꺼운 모양의 반달 문양이 보였는데요. 이것을 뿔로 확신하는 분위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기린총’ 견해는 순식간에 학계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구요. 
그래서 명칭을 ‘천마총’에서 ‘기린총’으로 바꿔야 하지 않느냐는 등의 이야기까지 나오기도 했습니다.


■다시 천마총으로!  
하지만 2014년 국립경주박물관이 ‘천마총 발굴 40주년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유의미한 분석결과를 밝표합니다. 
즉 1973년 발굴된 ‘대나무제 금동판 말다래’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다가 금동판을 오리고 붙여 만든 ‘천마’ 그림을 확인한 겁니다. 발굴 당시 ‘햇빛 무늬’라 했던 문양이 알고보니 ‘천마의 갈기’였다는 겁니다. 
또 1924년 금령총 출토품 가운데 막연하게 ‘말모양 금동 장식’으로 명명했던 유물이 사실은 천마총 출토 ‘대나무제 금동판’과 흡사한 ‘말다래에 표현된 천마’였다는 분석결과가 발표됐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지금까지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는 천마총(3점)와 금령총(1점) 등에서 모두 4점 확인된 셈이죠. 
천마총 말다래 가운데 남아있는 ‘대나무 금동판’ 1점과, ‘옻칠판 2점’ 등에서도 천마가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부식이 워낙 심해서 확인하지는 못했답니다.  

1990년대초 천마도의 동물이 천마가 아니라 기린이라는 견해가 등장했다. <설문해자>에 따르면 “기린은 말의 몸에 소의 꼬리를 갖고 있으며, 뿔이 하나 솟아있다”는 것이다. 기린도임을 주장하는 견해는 “천마도’의 동물을 자세히 보면 머리에 뿔이 표현되어 있고 입에서 신기(神氣)를 내뿜고 있다”면서 “천마도는 기린도”라고 주장했다.

국립경주박물관측은 이런 분석 결과를 토대로 천마도 말다래에서 확인되는 동물은 말이 분명하다고 단정했습니다. 즉 말 머리 위의 반달문양은 기린의 상징인 뿔이 아니라 말의 갈기 묶음(말상투)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습니다. 
이밖에 천마도 동물의 발굽도 ‘발굽이 하나’인 말에 가깝다고 했습니다. 꼬리 역시 기린의 상징이라는 ‘소꼬리’가 아니라 ‘말꼬리’가 분명하다는 겁니다. 또 같은 천마총 출토품 중에 역시 자작나무 껍질로 제작된 채색판에서 ‘말을 탄 인물상’이 보이는데요. 
이 말도 하늘을 나는 백마거든요. 무엇보다 천마총(5세기말~6세기초 추정) 보다 시기가 앞선 고구려 덕흥리 고분(408년 조성)의 북두칠성 아래에 ‘천마지상(天馬之象)’이라는 명문과 함께 천마가 그려져 있는데요. 이 역시 천마도의 ‘천마’와 다를 바 없다는 겁니다.

■천마총 주인공은 지증왕인가
그렇다면 왜 천마일까요. <삼국유사> ‘박혁거세’조를 보면 짐작이 갑니다.
“나정 곁에 신비로운 기운이 빛과 함께 땅에 비치더니 백마 한마리가 꿇어 앉아 절하고 있었다. 그곳에 알이 있었다. 말은 사람을 보고 길게 울다가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에서 단정한 동자(박혁거세)가 나왔다.”
하늘에서 내려운 백마가 박혁거세(기원전 57~기원후 4)를 내리고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거잖아요. 신라에서 말이 제왕의 등장을 알리는 신비로운 동물로 여겨졌다는 얘기죠. 따라서 왕이나 왕족의 무덤이 확실한 천마총 출토 말다래에 새겨진 동물은 천마라는 겁니다.

물론 기린이든, 천마든 무덤 주인공을 영원한 사후세계로 인도하는 신령한 안내자나 조력자의 역할을 했겠죠. 
그렇게 따지면 기린인지, 천마인지를 꼭 그렇게 구별할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천마총=기린총’ 설은 학계에 건전한 논쟁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문제제기였던 것 같아요. 
참 천마총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5세기말~6세기초에 조성한 고분이라는 학설이 맞다면 지증왕(재위 499~513)이 해당되는데요. 그러나 백제 무령왕릉처럼 “내가 주인공이요!”하고 손들고 나서지 않았으니 확정지을 수는 없습니다.(이 기사를 위해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과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 장용준 국립대구박물관장, 이한상 대전대 교수, 어창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원 학예연구관, 전용호 국립문화재연구원 학예연구관, 심명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원 학예연구사 등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천마총-발굴조사의 기록>(학술연구총서 133), 2019
국립경주박물관, <천마 다시 날다>(신라능묘 특별전 3 천마총 전시도록>, 2014
문화재관리국, <천마총 발굴조사보고서>, 1974
장용준, ‘백화수피 장니의 장식 문양’, <천마문 출토 천마문 장니>(국립경주박물관 학술조사보고 제29책), 국경주박물관, 2015
국립경주박물관, <천마문 출토 천마문 장니>(학술조사보고 제29책), 국경주박물관, 2015
이재중, ‘기린 도상 연구’, 대구 가톨릭대 박사논문,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