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 발부는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건데…훼손시키지 않는게 효도의 시초다. 그런데 요즘 양반이나 평민 남녀 할 것 없이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달아 중국 사람들의 조롱을 받는다…사헌부가 나서 엄벌하라.”(<선조실록> <임하필기>)
1572년(선조 5) 9월28일 선조가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다는 풍습을 엄단한다’는 비망기(특별담화문)를 발표합니다. 선조는 “이것은 부끄러운 오랑캐의 풍습”이라고 개탄합니다. 사실 선조의 언급은 팩트가 아닙니다.
<중종실록>은 연산군(1494~1506)의 서자로 9살 때 사약을 마시고 죽은 양평군 이인(1498~1506)의 인상착의를 말하면서 “귀에 귀고리를 꿴 구멍이 있었다”(1513년 1월7일)고 기록했거든요. 또한 이유원(1814~1888)의 <임하필기> ‘귀고리’ 조는 선조의 비망기 내용을 인용하면서 “중국에서도 아주 오래 전부터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다는 풍습이 있었다”고 고쳐 설명했습니다.
■삼국 명품 귀고리 총출동
저는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백제 귀엣-고리,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특별전(~2023년 2월26일)을 보았는데요.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만약 선조가 이 특별전을 보았다면 어땠을까, 세상에 망조가 들었다고 한탄하지 않았을까, 뭐 이렇게요. 이 특별전은 백제 영역에서 출토된 백제산 귀고리 142건 216점을 한자리에 모은 최초의 전시라 하는데요.
고구려는 물론 조선시대 귀고리까지 국보 8점, 보물 26점을 포함해서 모두 354건 1021점의 귀고리가 나왔답니다.
한마디로 우리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명품 귀고리가 총출동했다고 보면 됩니다.
백제·신라·고구려 등 삼국의 귀고리가 나름대로 특징이 있는데요. 백제 귀걸이는 단아함을 기본으로 하되 왕과 왕비의 귀걸이에는 세련되고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담았구요. 고구려 귀고리는 선이 굵고 강건하며, 신라 귀고리는 정교하고 화려함의 극치를 보인답니다. 가야 귀걸이는 백제의 영향을 받아 간결하지만 여러 줄의 장식을 연결하거나 독특한 끝장식을 매달았답니다.
특별전에서 제 눈에 보인 백제와 신라 귀고리의 도드라진 차이점이 하나 있더군요. 신라의 주로 여성 무덤에서 출토되는 굵은고리 귀고리가 백제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백제에서는 남녀를 막론한 가는고리 디자인을 선호했다는 뜻이죠.
그러나 공통점도 있습니다. 백제 귀고리는 고구려의 특징인 일체형 구조를 받아들였고요. 또 원통형 가운데 장식과 굽은 옥을 매다는 디자인은 신라 귀고리를 닮았습니다. 삼국이 치열한 패권 다툼을 벌이던 시기(6~7세기)인데도 미적 감각을 위한 기술교류가 이어졌던 겁니다. 패션의 유행은 극도의 적대감마저 초월하는 것 같아요.
■4년 간격으로 묻힌 무령왕 부부
특별전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무령왕과 왕비가 직접 매달았던 명품 귀고리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조 선조가 봤다면 “아니, 한나라를 다스린 임금이 무슨 귀고리를 저렇게 달았을까”고 의아해 했을 것 같아요.
아시다시피 무령왕과 왕비의 합장묘는 1971년 공주 송산로 고분군의 배수로 공사 도중 우연히 발견되었죠.
고분 안에서 발견된 지석은 놀라움을 안겼죠. “백제 사마왕(무령왕·재위 501~523)이 523년 5월 7일 서거(崩)했고 27개월 후인 525년 8월12일 안장됐다”는 명문이 나왔구요. 다른 1장의 지석에는 “무령왕비는 526년 12월 서거했고, 529년 2월12일 다시 대묘로 옮겼다”는 내용이 들어있었습니다. “우리가 무령왕 부부요!”라고 손들고 나선 고분이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렇게 4년 간격(525년, 529년)으로 묻힌 부부의 곁에는 그 분들의 금제 장신구가 착장한 그대로 모습을 드러냈는데요.
사실 발굴 때는 몰려드는 기자들을 통제하지 못해 하룻밤 사이에, 심지어는 삽으로 훑어내 쌀자루에 쓸어 담았답니다.
■24K 순금을 지향한 무령왕 부부
기막힌 일이죠. 그러나 훗날 그렇게 수습한 유물들을 하나하나 정리 분석했는데요.
그중 2007년 무령왕 부부의 곁에서 출토된 장신구 가운데 29건 64점을 대상으로 한 비파괴 분석에서 주목할만한 결과를 얻어냈죠. 바로 상당수 금제 장신구의 금 순도가 24K, 즉 99.99%에 거의 근접한다는 사실입니다.
한번 구체적으로 알아볼까요. 우선 무령왕의 머리맡에서 확인된 금제 관장식은 어떨까요.
관장식의 세부 재료로 사용된 금판과 달개, 금세선의 금 함유량을 재보니 98~99.07%(23.5~23.8K)로 측정되었습니다.
무령왕이 착용한 귀고리는 어떨까요.
몸체에 2줄의 드리개 장식을 한 귀고리인데요. 분석결과 98~99.84%(23.5~24K)의 금함유량을 보였습니다.
그럼 무령왕비의 금제 관장식은 어떨까요.
재료로 쓰인 금판의 금함유량이 99.01~99.22%(23.8K)로 남편(무령왕·98~99%)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관장식의 끝부분은 순금이 아니라 순동판에 수은을 이용해 도금한 금동제품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왕비의 귀고리를 한번 볼까요. 왕비의 관장식 오른쪽에서 출토된 이 귀고리 1쌍은 몸체에 가는 고리 1개를 연결하고 이 가는 고리에 다시 2줄의 드리개를 연결한 형태인데요.
이 귀고리의 각 부분 재료에 쓰인 부위별 금함유량은 98~99.8%(23.5~24K)에 이르렀습니다.
또 이 귀고리의 동쪽에서 나온 또하나의 금제 귀고리 1쌍 역시도 97~99.83%(23.3~24K)로 측정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왕비가 걸고 있던 아홉마디 목걸이의 경우 98.9~99.1%(23.7~23.8K)였습니다. 또 일곱마디로 제작한 목걸이는 98.2~98.8%(23.6~23.7K)였구요. 또 왕비의 머리 오른쪽과 가슴부위에서 출토된 ‘굽은 옥에 씌운 금 모자(금모곡옥)’ 등 각종 금제 모자의 금함유량은 99.87%, 즉 24K인 것이 상당수였습니다.
■착장품은 98~99.9%, 부장품은 91~95%
그런데 분석결과 재미있는 착안점이 있다고 합니다.
왕과 왕비가 직접 착장한 것으로 보이는 관장식과, 그 관장식을 꾸미려고 사용한 부품, 그리고 금귀고리, 금목걸이 등의 금함유량이 순금(24K)에 근접했거나 24K에 도달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왕이 머리 뒷부분에 꽂힌 금뒤꽂이나 머리카락을 흐트러지지 않게 잡아묶는데 사용한 각종 장식 등은 90.5~96.5%정도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종합해보면 금제 관장식과 금귀고리, 금목걸이 등 왕과 왕비가 직접 착용한 물품은 이른바 ‘포 나인’, 즉 99.99% 순금제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반면 무령왕 부부의 몸에 착장되지 않고 그 부품으로 사용되었거나 단순한 부장품으로 넣은 물품은 상대적으로 금순도가 낮은 재료(91~95% 내외)를 쓴 것으로 보입니다.
■합금을 선호한 신라 임금들
그렇다면 비슷한 시기의 신라 고분은 어떨까요. 경주 보문동 합장묘 중 굴식돌방무덤(6세기 전반)에서 출토된 국보 순금제 귀고리 1쌍은 금함유량은 92.32~97.76% 정도입니다. 무령왕릉의 순도보다는 약간 낮죠. 합장묘 중 돌무지덧널무덤에서 나온 귀고리는 금은 합금(71%, 은 28%)입니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되는 장신구는 대부분 금·은 합금으로 이뤄졌는데요.
신라의 대표 유물인 금관 역시 순금으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일정량의 은이 함유되어 있었는데요.
금관의 세움장식 순도를 기준으로 보면 금관 6점의 금 함유량은 80~89% 선이었습니다. 교동(89.2%)-황남대총 북분(86.2%)-금관총(85.4%)-천마총(83.5%)-금령총(82.8%)-서봉총(80.3%) 순이었어요. 순도로 따지면 21.1K(교동)~19.3K(서봉총)이었다. 은 함유량은 10.9(교동)~18.8%(서봉총) 사이였죠. 관테(둥근 밑동)의 금함유량 역시 차이가 있었는데요. 88.1(교동)~81.4%(서봉총)였다. 달개(영락)은 88.2(교동)~79.3%(서봉총), 금실은 85.8(황남대총)~77.9%(서봉총) 사이였습니다.
6점의 금관이 금관별, 부위별로 금항유량(순도)가 다르지만 대체로 90%를 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금관과 함께 출토된 관장식(새 및 새날개형)의 경우 82.9(천마총)~87.1%(금관총)였구요. 허리띠와 허리띠 장식의 경우 대략 75~85%의 금함유량을 보였으며, 목걸이 역시 71.4~98.3%까지 다양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백제 무령왕 부부는 24K를, 신라 왕들은 금은 합금을 선호했다는 겁니다.
■순금의 합금의 차이는?
여기서 의문점이 들죠. 신라는 왜 백제 무령왕 부부가 좋아한 순금을 지향하지 않은 걸까요
여러가지 분석이 있습니다. 단순히 금의 함유량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겁니다.
사실 금은 부드러운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순금만 사용했을 경우 연성이 강해서 굽어지거나 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라의 경우 시기가 빠른 교동 금관의 순도가 상대적으로 높은데요. 처음엔 순금에 가까운 금관 제작을 추구했다가 금관의 강도를 유지하려고 은을 섞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붉은 빛을 띠는 순금도 좋지만 은을 섞으면 반짝거리는 광택이 날 수도 있기 때문에 순금을 고집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더 강하고, 더 반짝거리는 금관을 위해 은을 섞었다는 얘기죠.
그러나 100% 확언할 수 없습니다. 신라금관은 은을 적게 섞었든, 많이 섞었든 무척 약하거든요. 관테도 2개의 금못으로만 고정하고 있으니, 조금만 움직여도 세움장식이 꺾여 내려앉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강도를 높이려고 은을 섞은 것으로 볼 수 없다는 해석도 있어요. 혹은 소비량이 급증한 금을 그만큼 구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은 아닐까요. 금관을 비롯한 신라의 황금유물은 5세기 초부터 6세기 초반까지 약 100여년 유행했는데요.
그 사이 “신라 눌지마립간(417~458)이 434년 백제 비유왕(427~455)에게 황금과 야광구슬을 예물로 보냈다”는 기록(<삼국사기>)이 보입니다. 신라에 황금문화가 유행하고 있었음을 암시하죠. 그러나 황금에 열광할수록 금소비량이 급증했을 것이고, 갈수록 금을 구하기는 만만치 않았을 것이구요. 점차 금 확보가 쉽지 않게 되자 금관의 금함유량을 줄여간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백제의 명품 디자이너는 ‘다리’
물론 백제 역시도 황금 생산이 용이하지는 않았겠죠. 그러나 갱위강국(更爲强國), 즉 한성함락과 공주 천도(475년) 이후 쪼그라든 국력을 추스리고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선언한 무령왕과 그 부인이 아니겠습니까.
생전에 당대 최고의 장인이 만든 명품으로 치장했을 거고, 두 분이 서거하자 그 유품을 생전에 장착한 그대로 묻어주었을 겁니다. 아니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제작해서 놓은 장례용품일 수도 있는게 아니냐구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런데 ‘생전 사용’을 방증하는 자료가 보입니다. 예컨대 무령왕의 귀고리 1쌍 중 한 점을 보면 끊어진 부위를 금실로 꿰맨 흔적이 있는데요.(이한상 대전대 교수) 이렇게 꿰매지 않으면 부품 자체를 완전히 교체해야 했거든요. 무령왕이 생전에 이 귀고리를 달고 다니다가 끊어지자 보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백제 온조왕(기원전 18~기원후 28)의 창업정신인 ‘검이불루 화이불치’, 즉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게, 화려하지만 사치하지 않게’ 정신에 부합되죠.
또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생전 착용의 증거가 있는데요. 무령왕비가 찼던 용무늬 은팔찌’(국보)의 안쪽에 새겨진 명문입니다.
“다리라는 장인이 경자년 2월(520년) 대부인(왕비)에게 230주이(主耳·단위)를 들여 만들었다”(庚子年二月多利作大夫人分二百삽主耳)는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요.
무엇을 말해줄까요. 520년이면 무령왕비가 서거하기 6년 전의 일이죠. 백제 최고의 장인이었을 ‘다리’가 왕비, 한 분을 위한 팔찌를 제작한 뒤 자신의 사인을 새겨넣은 게 아닐까요. 무령왕비를 위한 한정판 명품이었겠죠.
또하나 주목할만한 것이 있습니다. 각 1쌍씩 출토된 무령왕과 왕비의 금제 관장식, 왕비의 은제 팔찌 등을 보면 한 사람 작품이 아닌 것 같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한쪽의 제작기법이 좀더 숙련되었다는 인상을 준다는 데요.
이는 한 쌍의 유물을 한 사람이 순차적으로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두 사람의 장인이 동시에 하나씩 만들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겁니다. 무령왕릉 왕비의 목제 두침(베개)에서 ‘갑’과 ‘을’의 명문이 확인되었는데요. 이것은 두 마리의 봉황을 각각 만들었던 방증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령왕과 왕비의 장신구를 제작한 것은 ‘다리’와 같은 장인을 책임자로 둔 명품 제조 업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귀고리와 귀걸이의 차이
이번 국립공주박물관의 특별전을 보면서 한가지 이해가 부족했던 부분을 찾아냈는데요.
바로 ‘귀고리와 귀걸이’ 용어였습니다.
우선 특별전 제목이 ‘귀엣-고리’잖아요. 이 귀엣고리가 바로 귀고리의 옛말이랍니다. 제 기억으로는 얼마전까지 귀걸이가 아니라 귀고리를 표준어로 채택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요즘은 귀고리와 귀걸이 모두 표준어라 한답니다.
그런데 두 용어에 미묘한 차이가 있답니다. ‘귀고리’는 ‘귓불에 다는 장식품’의 의미로 더 오랜 시간 사용해왔답니다.
예전부터 귀고리(귀걸이)는 둥근 고리 모양으로 만들어 착용했는데요. 귓불에 구멍을 뚫고 안정적으로 고정하려면 고리 모양이 가장 알맞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조선조 선조 임금은 바로 남자들까지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다는 풍습을 개탄한 겁니다.
선조가 이렇게 귓불을 뚫는 것을 금하면서 고리 모양은 점차 사라지고 귓바퀴에 거는 걸이 모양으로 바뀐다는 겁니다. 귀고리가 귀걸이로 바뀌는 겁니다. 그럼에도 최근까지 ‘귀고리’를 표준어로 쓴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만큼 귓불을 뚫고 고리를 매다는 ‘귀고리’의 역사가 더 뿌리 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500년 전의 명품 귀고리를 보고 싶으면 지금 공주박물관을 향해 ‘오픈런’ 해보심에 어떨까요.(이 기사를 위해 한수 국립공주박물관장, 최성애 학예실장, 나선민 학예연구사와 이한상 대전대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터리텔러
<참고자료>
최기은·유혜선, ‘비파괴 분석법을 활용한 무령왕릉 출토 금제유물의 제작 특성 연구’, <백제 무령왕릉 출토 유물 분석보고서 II>, 국립공주박물관, 2007
신용비, ‘신라 금제품의 화학조성과 누금기술’, 공주대 박사논문, 2020
이한상, ‘무령왕릉 출토품으로 본 삼국의 문화교류’(무령왕릉 발굴 50주년 기념학술대회-무령왕릉 새로운 반세기를 준비하며), 공주시·국립공주박물관·충남역사문화연구원, 2020
주경미, ‘무령왕릉 출토 금속공예품의 현황과 특징’(무령왕릉 발굴 50주년 기념학술대회-무령왕릉 새로운 반세기를 준비하며), 공주시·국립공주박물관·충남역사문화연구원,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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