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에는 행궁터에 70만원의 정제금괴가 묻혀있다고는 하나 믿을만한 것은 못되지만, 연전에 이 부근 땅속에 막대한 암염과 목탄 수만관을 발굴했다는 것은 사실이니….”
1939년 10월28일 동아일보(‘북한산 일순(一巡)-하이킹 코스’)는 매우 흥미로운 기사를 냈다. “잡초 황량하고, 충성(蟲聲·벌레소리) 무성한 행궁터에서 묻혀있다는 ‘금괴매장’의 소문을 전한 것이다. 그런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만기요람>에는 “북한산성 내에 은 1만2250냥(460㎏)과 소금 50석, 숯 2120석을 창고에 보관했거나 땅 속에 묻어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금괴는 아니지만, 당시 무역의 주요 결제수단인 은을 다량 보관했던 것이다. 더구나 1년 전에 행궁터에 엄청난 양의 암염과 목탄이 발굴된 것은 사실이라지 않는가. 은매장이 금괴매장설로 둔갑해서 참새들의 입방앗거리로 회자됐을 것이 틀림없다.
혹 고종의 독살설과 어떤 관련이 있는 전설은 아닐까. 1919년 1월21일 고종이 승하하자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전국에 광범위하게 퍼졌다. 독살설은 3·1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독립운동가 선우훈 선생의 저작인 <사외비사-덕수궁의 비밀>을 보면 고종은 을사늑약 직후 황실소유의 금괴 85만냥을 항아리 12개에 담아 비밀장소에 매장했다고 한다. 그런 다음 매장장소를 그린 문서를 헤이그 밀사로 임명된 이지용에게 맡겼다는 것. 이 자금으로 중국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탈출하려다가 궁내음식도감이던 한상학과 그의 사돈 이완용에게 들켰다는 것. 결국 일제의 치밀한 암살계획에 따라 상궁이 올린 독약 식혜를 마시고 승하했다는 것이다. 건강하던 고종이 식혜를 마신 뒤 불과 30분만에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쓰러졌고, 시신의 팔다리가 크게 부어올랐으며, 이가 다 빠지고 혀가 닳아 없어졌다는 것 등이 그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북한산성 금괴매장설은 바로 이런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비명에 스러진 황제의 독립염원을 담은 군자금이 묻힌 비밀장소가 맞다는 확고한 믿음이 퍼졌던…. 아마도 고종 황제도 북한산성을 조선왕국 최후의 보루로 여겼을테니까….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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