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원권 지폐 앞면에 세종대왕의 초상화 뒤에 용비어천가의 ‘뿌리깊은 나무…’ 구절과 함께 심상치 않은 그림이 보인다. 바로 일월오봉도이다.
해와 달, 다섯봉우리, 소나무와 물 등을 그린 일월오봉도는 왕권의 상징이자 군왕의 분신이며 동일체로 여겨져 언제나 조선 임금의 어좌 뒤편에 걸려 있었다.
일월오봉도가 왜 왕관의 상지이자 국왕의 분신이라 했을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연구자들은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시가집인 <시경>의 ‘천보’라는 시에서 묘사된 9가지 자연현상을 인용한다. 즉 여기에 등장하는 다섯봉오리는 하늘이 내린 왕을 보호하는 물체를 일컬고, 나머지 4개, 즉 해와 달, 소나무, 물 등은 통치자가 자신의 미덕을 발휘하는 법을 보여준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이것들이 임금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해외 영구반출이 결정된 ‘책가도’. 책가도는 중흥군주인 정조의 문체반정 의지를 담은 그림이다. 정조 임금 이후 책가도 병풍 제작이 크게 유행됐다. 이번에 반출이 허용된 책가도는 19세기말~20세기 초 제작된 그림이다. 반출된 책가도는 호주 빅토리아 국립미술관에서 상설 전시될 예정이다. 문화재청 제공
따라서 이 일월오봉도는 항상 왕의 뒤에 놓이고 죽을 때도 같이 묻는다고 한다. 병풍만 걸려있다면 완성된 그림이 아니고 반드시 왕이 앉아있어야 완성된 그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1만원권 지폐에 세종대왕 초상화 뒤에 일월오봉도 병풍이 걸려있는 것이다.
그런데 1791년(정조 15년) 조선의 중흥군주라는 정조(재위 1776~1800)는 군왕의 상징그림이라는 ‘일월오봉도’를 내리고 이른바 책가도(冊架圖) 병풍을 내걸었다. 책가도가 무엇인가. 책장과 서책을 중심으로 하여 각종 문방구와 골동품, 화훼, 기물 등을 그린 그림이다.
정조가 일월오봉도 병풍을 내리고 책가도 병풍을 건 이유가 무엇일까. 이때 정조와 신하들과의 대화가 실마리를 풀어준다. 정조는 책가도 그림을 내건 뒤 신하들에게 “경들은 보이느냐”고 물었다.
“보입니다.”
그러자 정조는 신료들을 놀리는 듯 하며 “경들은 이것을 진짜 책이라 여길지도 모르지만 그림이다.”라며 일월오봉도를 내리고 책가도 그림을 건 이유를 밝힌다.
“정자(북송의 정이천·정명도 형제)가 이르기를 ‘비록 책을 읽을 수 없더라도 서재에 들어가 책을 어루만지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이 그림으로 인해 알게 되었다.”
조선 후기 화가 이응록이 그린 <책가도>. 책 뿐이 아니라 출세를 상징하는 산호와 공작, 그리고 다양한 고동서화가 그려져 있다. |KBS ‘천상의 컬렉션’ 캡쳐
정조는 여기서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글에 대한 취향이 나와 상반된다”고 장탄식한다.
“그들이 즐겨보는 것은 모두 후세의 병든 글이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바로잡을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이 그림을 만든 것은 그 사이에 이와 같은 뜻을 담아두기 위함이다.”
여기서 정조의 숨은 뜻이 드러난다. 정조가 책가도를 건 것은 바로 ‘후세의 병든 글’을 바로잡기 위해 단행한 문체반정의 예고편이었다. 정조는 문체의 성쇠흥폐는 정치와 통한다고 했다.
특히 서양학, 민간에서 떠도는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모은 패관 잡문 그리고 명말청초의 문집을 사(邪)로 규정하고, 이를 배격함으로써 순정한 고문의 문풍을 회복하고자 했다.
단적인 예로 연암 박지원(1737~1805)에게는 “경박한 문체로 <열하일기>를 썼다”면서 반성문 제출을 요구했고, 상재생(생원 혹은 진사시험에 합격한 성균관 소속 유생) 이옥(1760~1815)의 과거(대과) 응시를 막기도 했다.
정조는 1787년(정조 11년)에는 서학교수 이상황(1763~1841)과 이조참의 김조순(1765~1832)이 예문관에서 숙직하다가 재미삼아 소설책을 본 것을 적발했다. 두사람이 읽은 책은 당송시대의 각종 소설류와 <평산냉연>이었다. <평산냉연>은 재주가 뛰어난 남자와 용모가 아름다운 여자의 혼인과정을 소재로 한 청나라 통속소설이다.
정조가 소설을 “이치에 어긋나고 사람에게 해를 주는 음란하고 사특한 음악이나 색깔 같은 것”으로 치부했으니 화를 낼만 했다. 정조는 문제가 된 불온서적들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는 이상황·김조순 등 두 사람을 파직시켰다.
정조는 이어 임금에게 올리는 대책문에 ‘상스러운 패관문자’를 올린 초계문신 남공철(1760~1840)을 엄히 문책했다. 패관문자는 정통 산문문체인 고문(古文)과 상대적인 개념의 가벼운 한문문체이다. 주로 소설이나 야담 같은 서사물이나, 생활 주변의 소소한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낸 소품문을 가리킨다. 길이가 짧고 주제가 가벼우며 감성적인 산문 문장을 일컫는다. 요즘이라면 젊은이들이 주로 쓰는 인터넷용어나 은어 등이 포함된 것이리라. 남공철을 향한 정조의 추상같은 꾸지람을 보라.
“명색이 각신(규장각 관리)이고 명문가의 아들(남공철은 정조의 스승인 남유용의 아들이다)이라는 자가 가훈을 어기고 임금의 명령까지 저버린채 불경한 문체를 쓰다니…. 저 자가 반성할 때까지 경연에 얼씬도 못하도록 하고 그 집안의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도록 하라.”(<정조실록>)
남공철은 임금에게 올리는 대책문에 요즘으로 치면 젊은이들이 쓰는 신세대 용어와 문장을 쓴 죄로 곤욕을 치른 것이다. 그런 정조가 일월오봉도 병풍을 내리고 책가도를 내건 이유는 두가지였다. ‘내가 이런 한심한 세태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으니 조심해!’라는 경고 메시지인 동시에 ‘너희들은 모름지기 이런 책을 읽어야 해!’라는 가이드라인의 의미도 함께 담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책은 군주에게 무엇인가. 군주가 자신의 정치이념을 전파라는 도구이자 권력과 권위를 유지하는 수단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정조는 책가도를 그리면서 구체적인 책 끝의 표제까지 지정했다.
그것이 ‘경사자집’이다. ‘경사자집’은 중국 육조시대에 비롯된 서적 분류법이다. 경은 경서(經書), 사는 역사책, 자는 ‘맹자’와 노자 등의 자서(子書), 집은 시(詩) ·부(賦) 등의 집(集)을 말한다. 제자백가 중에서는 오로지 장자 만을 포함시켰다. 그렇게 정조는 책가도 병풍을 내걸면서 책과 학문으로써 세상을 다스리겠다고 천명한 뒤 1년 뒤인 1792년(정조 16년) 문체반정을 시작했다.
사실 필선 위주의 사물을 형상화하는 전통에 익숙했던 조선화원들에게 투시도법과 면으로 입체를 분석하여 명암을 넣은 서양화법의 책가도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투시도법은 르네상스식 원근법으로 물상이 뒤로 물러나면서 점점 작아져 결국 점으로 모아지게 하여 깊이있는 공간감을 표현하는 원근법이다. 정조는 이런 그림에 익숙치않은 신료들에게 보여주며 ‘이거 책인줄 알았지 그림이야’라고 놀린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가도 병풍을 잘 그린 화가는 바로 단원 김홍도(1745~?)였다. 이규상(1727~1799)의 ‘일몽고’는 “김홍도는 서양의 화법을 모방했는데, 이 법을 따라 그린 그림을 한 눈을 감고 보면 그림 속의 모든 물건이 잘 정돈되어 서 있는 것 같이 보인다”면서 “세속에서는 이를 책가화라 칭하며 반드시 채색을 가했다”고 전했다.
이 책가도는 정조 임금 이후 잘난 체 하는 사대부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규상은 “귀한 신분의 사람들은 너도나도 이 그림을 벽에 붙여놓고 유식한채 했다”고 전했다. 가뜩이나 책을 좋아했던 조선의 사대부는 서양이나 중국에서처럼 그저 골동품 같은 온갖 물품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책 위주의 책거리 그림을 그것도 2차원 병풍으로 항상 뒤에 두고 감상하면서 “나 이런 사람이오”하고 자랑했던 것이다.
책가도 그림은 민간에 퍼지면서 다양한 형태로 바뀌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고관대작의 상징인 공작과 산호 등은 물론, 다산과 풍요를 의미하는 부처손과 석류, 포도, 오이, 수박, 가지 등과, 장수와 성공, 부부금슬 등을 뜻하는 잉어, 금붕어, 나비, 호랑이 등까지 책 뿐 아니라 다양한 그림을 책가도에 그렸다. 이와함께 안경, 알람시계와 같은 서양기물과 중국의 엣 서책과 유물 등 고동서화가 그림을 장식하기도 했다.
책가도는 이렇게 정조의 문체반정 의지에서 비롯되어 19~20세기 민간에까지 대유행한 그림이다. 그런 책가도 1점과 함께 연꽃을 주제로 그린 연화도 1점이 국내 문화재 가운데는 처음으로 합법적인 경로를 통해 외국에 영구 반출된다. 문화재청은 근대에 제작한 전통 회화 병풍 ‘책가도’(冊架圖·19세기말~20세기초)와 ‘연화도’(蓮花圖·20세기초)를 호주 멜버른 빅토리아국립미술관으로 영구반출하기로 최근 확정했다.
문화재청은 “두 작품 모두 국내에서는 비교적 흔한 회화작품들”이라면서 “국내에 있기보다 국외에서 전시용으로 활용된다면 오히려 가치가 더 크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이 두 그림을 확보한 빅토리아 국립미술관은 1861년 설립된 호주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미술관이다. 미술관측은 미술관의 ‘한국실’이 중국실이나 일본실에 비해 전시품이 크게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해외전시가 가능한 한국 문화재를 조사한 끝에 이들 문화재 2점을 소장자로부터 정식구매한 뒤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았다. 두 그림은 7월중 반출된다.
문화재보호법상 국내 문화재의 국외반출은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그러나 외국 정부가 인증하는 박물관이나 문화재 관련 단체가 자국의 박물관 등에서 전시할 목적으로 국내에서 일반동산문화재를 구매 또는 기증받아 반출하는 경우, 문화재청장의 허가를 받아 반출할 수 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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