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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태종이 직접 밝힌 양녕대군 폐세자 이유-"대체 너 때문에 몇 사람이 죽었냐"

“나이 10세 때 세자 책봉을 받았지만…16~17세 때 성스러운 덕을 타고난 세종에게 하늘도, 인심도 쏠린 것을 알고는 일부러 미친 척하면서 하루같이 술과 기생 속에 보내….”

정조가 1789년(정조 13년) 양녕대군 이제(李제·1394~1462)의 사당을 위해 지은 ‘지덕사기’(至德祠記)의 내용이다. 왜 양녕대군의 사당을 ‘지극한 덕’을 뜻하는 ‘지덕사’라 했을까. 정조는 “무슨 덕이 제일 좋을까”라고 자문하고는 “그야 사양하는 덕, 그것도 명예를 사양하는 일”이라고 자답했다.

1962년 개봉된 영화 ‘양녕대군 주유천하’.  양녕대군이 부왕(태종)의 뜻이 셋째 왕자인 충녕대군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 위해 일부러 거짓 광태를 부리며 주색에 빠진다. 그러나 이 영화는 “훗날 양녕대군이 평민 차림으로 나라 곳곳을 누비며 탐관오리를 색출하고 효자, 효부를 표창하는 일에 힘쓴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사양의 미덕 발휘한 양녕대군

그렇다면 ‘지덕’이란 ‘사양하는 덕’이라는 뜻이 된다. 유래가 있다. 중국 주나라 태왕은 맏아들 태백과 둘째아들 중옹을 건너뛰어 막내인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그러자 맏아들 태백은 부왕의 심중을 헤아려 동생인 중옹을 깨우쳐 “우리가 양보해야 한다”면서 삭발하고, 오랑캐 땅(형만)으로 피했다. 

훗날 공자는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 왕위를 양보한 태백을 두고 “태백은 지극한 덕이라고 말할 만하다.(泰伯 其可謂至德也已矣)”(<논어> ‘태백’)고 했다. 바로 이 ‘공자왈’에서 ‘지덕은 곧 태백’을 일컫는 말이 됐고, 같은 의미로 조선조에서 왕위를 셋째동생 충녕대군(세종)에게 양보한 양녕대군의 사당을 ‘지덕사’라 한 것이다.


■일부러 미친척한 양녕대군?

양녕대군이 왕위를 동생에게 양보했다는 기록은 야사에 수두룩하게 등장한다. 

문신 김시양(1581∼1643)의 수필집인 <자해필담>을 보면….

“태종의 뜻이 세종에게 있는 줄 알고 일부러 미친 척하고 사양하니, 태종이 결국 폐하고 세종을 세웠다. 양녕은 자기의 재주를 감추어 드러내지 않고 이럭저럭 지냈다. 그런 탓에 내외(內外)·상하(上下)에 모두 환심을 얻었다.”(<자해필담>)

이에따라 “세종도 양녕대군을 높이고 사랑해서 매번 대궐로 맞아들여 잔칫상을 베풀어 술을 대접했다”는 것이다. 또 “양녕을 향한 세종의 정이 지극했으며, 세조 시대에 왕자와 대신이 수두룩 죽음을 당했지만 양녕은 지혜로써 스스로를 보전했고, 세조도 거리낌없이 높이 대우했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자해필담>은 “양녕대군은 원래 문장이 뛰어났지만 성덕이 뛰어난 세종을 위해 짐짓 글을 모르는 체하고 미친 체하여 방자히 놀았기 때문에 부왕(태종)도 글하는 줄을 알지 못했다”면서 훗날 쓴 시가 깜짝 놀랄 수준이라고 소개했다,

“산 안개로 아침밥 짓고(山霞朝作飯) 담쟁이 덩굴 사이로 보이는 달로 등불삼네.(蘿月夜爲燈) 외로운 바위 아래 홀로 누워 밤새우니(獨宿孤巖下) 오직 탑 한층이 있으매라.(惟存塔一層)”


■“살아서는 임금의 형, 죽어서는 부처의 형”

이 중에서도 가장 인구에 회자된 이야기는 효령대군과의 일화일 것이다.

즉 양녕대군이 미친 척하고 방랑하니 효령대군이 “장차 형님이 폐위되고 내 차례가 되겠구나”라고 여기고 열심히 글공부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양녕이 지나다가 들어와 효령대군을 발로 차면서 “어리석다. 넌 충녕에게 성덕이 있는 것을 모르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깨달음을 얻은 효령이 절간으로 뛰어나 두 손으로 북 하나를 하루종일 두드려 북가죽이 부풀어 늘어났으며, 지금까지도 부드럽고 늘어진 것을 ‘효령대군 북가죽’이라 한다는 것이다.(<연려실기술> ‘양녕대군의 폐위’)

정사인 <태종실록>(1446년 4월23일)에 등장하는 일화도 있다. 

불심이 깊은 효령대군의 양주 회암사 불사(佛事)에 참여한 양녕대군이 사냥으로 잡아온 고기를 씹고 술을 마셨다는 것, 그리고 부처님에게 절을 올리던 효령대군이 ‘형님께서는 오늘만이라도 술과 고기를 그만 두라’고 정색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양녕대군의 한마디는 기가 막혔다는 것이다. 

“나는 복이 많다. 살아서는 왕(세종)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효령대군)의 형이 될 것이니….”

양녕대군의 친필로 알려진 ‘숭례문’ 현판. 100% 확증은 없지만 아직까지는 양녕대군 친필글씨라는 설이 다수설로 여겨진다. 이 현판의 목판이 2008년 도난당했다가 최근 회수됐다.

■“충녕은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정사인 왕조실록에는 양녕대군이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일부러 미친척 했다는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몇가지 단서는 보인다. 1414년(태종 14년) 10월 26일 세자(양녕대군)가 종친들과의 술자리에서 누이인 정순공주(1385~1460)에게 뜬금없이 내뱉은 한마디는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忠寧非常人也)”라는 것이었다. 

대체 무엇이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인가. 충녕대군에게 자신이 갖지못한 왕재가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충녕이 세자인 자신의 위상을 넘보는 행동을 했다는 것인가. <태종실록>은 더이상의 첨언없이 넘어갔지만 세자 양녕대군의 한마디가 과연 어떤 뜻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또다른 단서가 실록에 등장한다. 즉 1418년(태종 18년) 6월6일 태종이 외척의 일원인 문귀(?~1439)를 통해 폐세자된 양녕대군에게 전한 말 중에 의미심장한 내용이 들어있다.

“네(양녕대군)가 나(태종)에게 ‘나는 세자 자리를 사양하고 싶습니다’고 고했는데 내가 ‘불가하다’고 한 일이 있었다. 너의 자리를 사양하는 것은 평소 네가 바라던 바가 아니냐.”

무슨 말인가. 양녕대군이 세자 시절 부왕에게 “세자 자리를 사양하고 싶다”는 말을 실제로 했다는 것이다. 다음의 실록 내용도 흥미롭다. 태종이 “(임금의 말을 전해들은) 제(양녕대군의 이름)가 비탄에 잠겨더냐”고 묻자 문귀는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전하의 말씀을 전하면서) 신(문귀)은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지만 양녕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금도 비탄(悲嘆)하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태종이 재차 “정말 그러하더냐”고 묻자 문귀는 ‘전혀!’라고 했다. 너무도 담담했다는 것이다. 태종은 그럴줄 알았다면서 “바로 그렇기 때문에 폐위된 것이다. 어찌 뉘우치겠느냐”고 고개를 가로지었다. 

폐위의 전교를 받고도 전혀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본인이 폐위될 줄 이미 각오했던 일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아니면 스스로 폐위를 자초한 일이라는 것 아닌가. 


■“전하의 여인들은 되고, 세자의 여인들은 안된단 말입니까” 

과연 그런 것 같았다. 태종이 세자(양녕대군)이 그토록 아꼈던 여인 어리(於里)를 내쫓자 세자는 부왕에게 큰 글씨로 두 장 분량의 친필 서한을 올린다.(1418년 5월 30일) 그것이 결정타였다. 내용을 들춰보면 아버지를 향한, 모골이 송연한 ‘작심 비판’이었다.  

“전하(태종)의 시녀는 모두 받아들이면서 왜 신(세자)의 첩들은 내보내는 거냐”는 직격탄이었다.

“전하의 시녀는 다 궁중에 들이는데, 어찌 다 중하게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입니까…신(세자)의 여러 첩은 다 내보내어 울부짖음이 사방에 이르고 원망이 나라 안에 가득찹니다.”

세자는 한발 더나아가 “전하께서는 어찌 스스로에게서 반성을 구하지 않으시냐”고까지 치받았다. 아무리 세자라고 하지만 천하의 지존이자 만백성의 어버이인 군주에게 해댈 수 없는 막말이었다. 폐위를 각오하지 않으면 올릴 수 없는 편지였다.

전남 담양의 몽한각. 양녕대군의 증손인 이서를 추모하기 위한 재실이다. 이곳에 소장되어있는 양녕대군의 유물이 지난 2008년 도난당했다가 최근 11년만에 회수됐다.  

■적장자의 운명

이로 미루어 양녕대군은 세자라는 자리가 자신에게는 맞지 않은 옷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양녕대군은 순전히 태종의 적장자라는 이유에서 세자가 된 케이스다. 태종으로서는 뼈아픈 교훈이 있었다. 아버지인 태조가 적자도 장자도 아니고, 조선 건국에 아무런 공도 세우지 않은 어린 이방석(?~1398)을 세자로 세움으로써 피를 부르지 않았던가. 즉 태조는 고향에 본부인(신의왕후 한씨·1347~1391)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데도 개경에 둔 둘째부인(신덕왕후 강씨·1356~1396)를 총애함으로써 사달이 일어났다. 

태조가 바로 신덕왕후 강씨와 낳은 어린 아들이자, 태종으로서는 이복동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이다. 이 때문에 본부인(신의왕후 한씨)의 자식들이 앙앙불락했고, 결국 다섯째 아들인 태종 이방원이 1~2차 왕자의 난(1398년과 1400년)이라는 정변을 일으켜 천신만고 끝에 정권을 잡았다.  

그런 이력이 있으니 태종은 1403년(태종 4년) 10살이 된 맏아들(양녕대군)을 세자로 세웠다. 세자 책봉은 곧 “국본(國本), 즉 나라의 근본을 높이고 백성의 뜻을 정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세자를 책봉한 태종은 “내가 세자에게 마치 새끼를 키우는 호랑이 같이 엄히 키우고자 했다”(<태종실록> 1418년 5월 10일)고 했다.


■밥상머리에서도 꾸지람 받은 세자

밥상머리에서도 태종은 세자에게 호된 꾸지람을 안겼다. 즉 1405년(태종 5년) 10월21일 <태종실록>에는 세자가 부왕을 모시고 식사를 하는데 예의에 맞지 않은 일이 많아 야단맞았다는 기록이 있다.    

“밥상에서 주상(태종)이 세자를 꾸짖었다. ‘나도 젊었을 때 놀기만 해서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마음 속이 부끄럽다. 너는 비록 원자이지만 언행에 어째서 절도가 없느냐. 스승(서연관)이 가르치지 않더냐.’ 그 말을 들은 세자가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했다.”

태종은 세자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세자의 스승들에게 “만약 세자가 말을 듣지 않으면 즉시 나에게 보고하라”는 엄명을 내렸으며, “요즘 세자가 공부하기 싫어한다는데 너희들(스승들)을 죄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세자의 스승인 계성군 이래(1362~1416)는 기생에 푹 빠진 세자를 향해 “저하의 뱃속에 가득찬 것은 모두 사욕 뿐”이라면서 심상치않은 경고 한마디를 날린다.

“종종 과실로 인해 주상께 문책 당하면 세자의 지위마저 지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전하의 아들이 저하뿐인줄 아십니까.”

스승인 이래가 얼마나 사사건건 세자를 닦달했는지 세자는 이래만 보면 원수처럼 여겼다고 한다. 

세자는 주위 사람들에게 “저 계성군(이래)의 얼굴만 보면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산란하다. 비록 꿈에라도 보이면 그날은 반드시 감기가 든다”고 치를 떨었단다.(<용재총화>) 

최근 도난된지 11년만에 되찾은 숭례문 현판의 목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남대문 현판인 숭례문 석자는 양녕대군의 글씨이며 웅장하고 뛰어남은 양녕의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양녕대군의 친필이 아니라는 문헌들도 더러 있다.   

■양녕대군의 교육은 새발의 피였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이 정도 공부하지 않는 세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조선의 왕세자는 태어나기 전인 모후의 뱃속에서부터 태교가 시작되어 이상적인 군주라는 요임금의 덕을 찾을 때까지, 즉 죽을 때까지 줄기차게 공부해야 했다. 단적인 예로 무려 15년간(1762~1776) 왕세손으로 교육받았던 정조의 생활은 어떠했는가.

“임금이 15년간 동궁으로 있으면서 새벽 어른의 침실에 문안을 올리는 것부터 밤늦도록 경서 공부에 마음을 쏟는 것까지 부지런히 했다. 왕위에 올라서는 제대로 밤잠도 이루지 못하고 끼니도 제때 떼우지 못하면서 틈만 나면 좌우에 책을 두고 밤낮으로 사색에 잠겼다.”(<정조실록> ‘행장’)

그러니 양녕대군의 교육은 특별한 것도, 더 혹독한 것도 없었다. 


■“내가 왜 저하 때문에 볼기를 맞아야 한단 말입니까”

물론 실록의 일부나 야사 등의 언급대로 “더 훌륭한 왕재(충녕대군·세종)을 위해 평생을 미친척 살았다”는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양녕대군의 씻을 수 없는 한가지 허물을 허투루 넘길 수는 없다. 

즉 양녕대군의 바로 그 언행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죄를 얻었다는 것이다.

1405년(태종 5년) 10월21일 세자(양녕대군)을 모시던 내관 노분이 세자를 향해 볼멘 소리로 항의했다. “대체 소인이 누구 때문에 맞아야 한단 말입니까.” 노분은 왜 하늘처럼 모셔야 할 상전, 그것도 다른 이도 아닌 세자에게 벌컥 화를 냈을까. 이유가 있었다. 

태종이 공부를 게을리한 세자를 차마 때리지 못하고 대전내관 노희봉을 시켜 세자궁의 내관인 노분의 볼기를 치도록 한 것이다. 그랬으니 노분이 “세자께서 맞아야할 볼기를 내가 왜 맞아야 하느냐”고 울컥한 것이다. <태종실록>은 “노분이 화를 내자 세자는 기뻐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노분의 ‘버럭’은 그야말로 애교에 지나지 않았다. 실록을 읽어보면 ‘세자(양녕대군)’ 때문에 횡액을 당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았다. 


■“너 때문에 사형 당한 자가 한 둘이야.”

“세자가 불의하기 때문에 죄를 받은 자가 한둘이 아니다. 내가 참으로 부끄럽다.”

1418년(태종 18년) 3월6일 태종이 지신사(도승지) 조말생에게 비밀리에 전했다는 이 한마디 넋두리가 세자(양녕대군)의 난행을 한마디로 정리해준다. 세자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거나 죄를 받았다는 것이다. 태종은 이때 세자의 비행을 낱낱이 열거한 뒤 세자를 폐위시킬 수도 있음을 알렸다.

“역대 임금이 태자를 바꾸거나 폐한 경우는 있었다. 난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그러나 세자의 행동이 이 지경이니 어찌하겠는가.(奈何) 어찌하겠는가.(奈何)” 

태종은 ‘어찌하느냐’(奈何)는 한탄을 두번이나 내뱉고 있다. 결국 자신에게 직격탄을 날린 손편지를 받아본 태종은 결국 세자를 폐위하는 교서를 내리면서도(6월1일) 똑같은 말을 한다.

“너 때문에 사형당한 자가 몇 명이고, 죄를 입은 자가 몇명이냐, 너에게 죄를 묻지 않았을 뿐이다.”

최근 회수된 양병대군의 친필을 새긴 것으로 알려진 ‘후적벽부’ 목판. 이 목판에 ‘숭례문’ 현판 글씨가 양녕대군의 친필이라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사적인 관계 맺고 싶다”는 말에 옷까지 선물한 세자  

양녕대군의 세자 시절은 과연 어땠나. 한마디로 비행 소년의 하루하루였다.

세자는 선공감 부정(종 3품) 구종수(?~1417)·구종지·구종유 등 삼형제와 서방색(궁궐에 지필을 공급하는 관아) 관리인 진포, 악공 이오방·이법화 등과 사적으로 교유하며 질펀하게 놀았다. 이들은 밤마다 종묘문으로 들어가 대나무 다리를 만들어 궁궐의 담장을 넘어 세자궁으로 들어갔다. 세자와 구종수는 박희(놀음)를 했고, 이오방은 거문고를 연주하며 밤새도록 놀았다. 세자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구종수 형제, 이오방·진포 등과 함께 야음을 틈타 미복 차림으로 궁궐 밖 구종수의 집 등에서 역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구종수 등은 세자에게 “오늘 일은 꿈만 같다. 세자께서는 (즉위 후에도) 저희 형제를 대우해달라”고 청했고, 취기가 오르자 한발 더 나아갔다.

“저하께서 저희를 사반(私伴·고관이 사사롭게 부리는 반당)으로 삼아주소서.”

감히 장차 임금이 될 세자의 충직한 비선 노릇을 자청했다. 그런데 철없는 세자는 “그거 좋다”면서 자신의 옷을 벗어 구종수에게 입혀주었다. 철없는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행태였다.


■봉지련과 소앵은 약과였다욖

세자는 특히 여자 문제에 관한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세자는 17살 때인 1410년(태종 10년) 11월 3일 중국 사신을 위해 베푼 연회에 불러나온 기생 봉지련에게 흠뻑 빠졌다. 

세자는 어린 내관 2명에게 봉지련의 뒤를 밟게 한 뒤 그 집을 찾아가 기어코 사통하고는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이것이 발각되자 태종은 세자의 명을 받아 봉지련의 뒤를 밟은 어린 내관(소친시) 2명에게 곤장을 치고 봉지련을 가둬버렸다. 세자는 이에 단식투쟁으로 버텼고, 태종은 세자가 정신병에 걸릴까봐 봉지련에게 비단을 하사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봉지련 사건은 애교에 불과했다.    

1413년(태종 13년) 3월27일 세자의 비선 측근들이 평양 기생 소앵을 세자에게 바쳤다. 동궁(세자궁)의 북쪽 담밑에 난 지름길로 불러들인 것이다. 태종은 관련자들을 내쫓고 곤장을 쳤고, 심지어는 세자의 스승들인 변계량(1369~1430)과 조용(?~1424) 등에게 “대체 무엇을 가르쳤느냐”고 문책했다. 

하지만 세자는 이번에도 단식투쟁으로 맞섰다. 어머니인 원경왕후 민씨(1365~1420)가 내관을 시켜 “너는 어리지도 않으면서 어째서 부왕(태종)에게 이토록 노여움을 사느냐. 지금부터 조심하고 밥 부터 먹어라”는 당부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소동파의 ‘후적벽부’를 새긴 목판. 자유분방한 양녕대군의 친필로 알려져 왔다. 몽한각의 목판에는 ‘숭례문 목판’과  ‘후적벽부’ 목판을 다시 새긴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문화재청 제공

■큰아버지의 여인과 매형의 여인을 탐하다

세자의 여성편력은 끝이 없었다. 1414년(태종 14년) 10월26일 세자가 매형인 이백강(1381~1451)의 집에서 벌어진 종친연회에서 밤이 깊도록 기생 초궁장을 끼고 술을 마셔 부왕의 꾸지람을 샀다. 아버지 태종은 이때 “세자라는 작자가 다른 동생(대군)들하고 같냐. 그냥 예만 갖추고 돌아와야지 그렇게 방종하게 즐겼단 말이냐”고 호되게 꾸짖었다. 

그런데 7개월 뒤인 1415년(태종 15년) <태종실록>을 보면 ‘세자와 여러달 사통한’ 초궁장은 다름아닌 상왕이자 큰아버지인 정종(재위 1398~1400)을 모신 기생이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실록은 “세자가 그같은 사실을 몰랐다”고 했지만 심각한 큰아버지의 여인을 범한 패륜을 저질렀음을 알 수 있다. 

1416년(태종 16년) 3월20일에는 세자가 매형인 이백강이 축첩한 기생 칠점생을 궁궐로 데리고 오려 했다. 그러자 보다못한 동생 충녕대군은 “친척의 첩을 이렇게 데려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정색했다. 이 일은 세자(양녕대군)과 동생(충녕대군·세종)의 사이를 갈라놓은 결정적인 사건이 됐다.

“충녕대군이 ‘안된다’는 말을 반복하자 세자는 마음 속으로 노했다. 하지만 (지당한 말인지라) 동생의 말을 따랐는데 그 후에는 충녕대군과 가는 길(道)이 달라 마음으로 매우 꺼려했다.”(<태종실록>)  


■세자 때문에 죽임 당한 어린 내시

급기야 세자의 여성 편력이 죄없는 어린 청춘을 죽어나가는 데까지 이르렀다.

1417년(태종 17년) 4월23~24일 <태종실록>은 세자의 외도를 도운 소친시(임금의 곁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나이 어린 사내아이) 이귀수와 진포를 참형에 처하는 등 관련자들을 처벌했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즉 세자의 곁에서 알랑거리던 진포라는 인물이 “세자 바칠 예쁜 여자가 있느냐”고 묻자 이귀수가 군기시 관리를 지낸 방유신의 손녀를 선택했다. 세자는 그 집을 두번이나 찾아가 “싫다”는 방유신의 거절에도 기어코 사통하고 새벽에 궁궐로 돌아왔다. 이 사건이 발각되자 태종은 이귀수와 진포를 참형에 처했다. <태종실록>은 “이귀수의 참형에 불만을 품은 세자가 수업거부 투쟁을 벌였다”(4월24일)고 했다. 진포는 물론 이귀수의 죄도 없다 할 수는 없지만 어떤가. 세자 대신 당한 형벌 치고는 너무도 혹독하지 않은가.

양녕대군의 묘소. 양녕대군은 69세에 세상을 떠났다. 세종과 조카 문종, 그리고 비명에 간 조카의 아들 단종보다 오래 살았다. |문화재청 제공

■세자의 아이를 낳은 어리와의 위험한 관계

그러나 세자 여성편력의 결정판은 어리(於里)와의 위험한 애정행각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결국 폐위 당했고, 비운의 여인 어리 역시 자결로 생을 마감했으니 말이다.

사건은 1417년(태종 17년) 2월15일 세자의 총애를 받던 악공 이오방이 몰래 동궁에 들어가 “전 중추 곽선(무신)의 첩인 어리의 자색과 재 주가 뛰어나다”고 소근거림으로써 시작됐다.

“그래? 그럼 불러와야지. 뭐하고 있냐.”

그러나 어리가 “엄연히 남편(곽선)이 있는 몸”이라 거절하자 궁을 뛰쳐나온 세자는 어리의 집으로 달려가 “빨리 나오라”고 협박한 뒤 궁중으로 납치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어리를 동궁에 불러들이고, 세자를 타락에 빠뜨린 이오방과 구종수·구종지·구종유 3형제 등을 참하고 가산을 적몰하는 것으로 끝냈다. 어리는 쫓겨났다.(1417년 3월5일)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세자가 쫓겨난 어리를 장인인 김한로(1358~?)의 집(처가)에 몰래 숨겨두었다가 다시 세자전에 들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어리가 덜컥 세자의 아이를 낳은 것이다. <태종실록> 1418년 3월6일자를 보면 기가 찬다. 

“‘세자전에서 아이를 기를 유모를 구한다’는 소식이 중궁전(원경왕후전)을 통해 태종의 귀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태종은 “도대체 김한로라는 자는 나(태종)의 신하인가, 아니면 세자의 신하인가”라고 한탄했다. 태종이 김한로를 추궁하자 그 해명이 기막혔다.

“어리가 쫓겨나자 세자 저하께서 ‘어리가 불쌍하다’며 침식을 잊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래 (세자의 장인인) 신이 그런 세자를 가엽게 여겨 어리를 보살펴주었고, 세자가 ‘어리를 다시 궁으로 들여야겠다’면서 데려갔습니다.” 

아니 자기 딸이 명색이 세자의 부인인데, 바람난 사위를 위해 사위의 내연녀(어리)를 돌봐주는 어이없는 장인이 어디 있는가. 장인 김한로는 훗날 왕위에 오를 세자의 옥체가 상할 것을 염려했다는 것이지만 참…. 

태종은 “세자라는 작자는 막내동생 성녕대군(1405~1418)이 죽었을 때 궁중에서 활쏘기를 했던 황음무도한 짓을 저지른 자”라고 비난했다. 태종은 이때 “세자를 바꿔야겠다”고 마음을 굳힌 것 같다.

다시 내쫓긴 어리는 폐위된 세자(양녕대군) 때문에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새로운 세자(충녕대군)가 옥좌에 오른 후인 1419년(세종 1년) 1월30일 경기도 광주에 연금되다시피 한 양녕대군이 밤에 담을 넘어 도망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조정 여론이 모두 “어리 때문에 모든 사달이 일어났다”고 수근거렸다. 그러자 어리는 너무나 분한 마음에 목을 매어 죽고 말았다. 그렇다면 어리는 과연 무슨 죄를 지었기에 죽음을 당했단 말인가.

양녕대군의 묘소. 양녕대군은 69세에 세상을 떠났다. 세종과 조카 문종, 그리고 비명에 간 조카의 아들 단종보다 오래 살았다. |문화재청 제공

■“내가 네 이름을 기억하겠다”

세자 자리를 양보하려 미친 척했다는 양녕대군의 언행 중 이해할 수 없는 기록이 또 있다,

1413년(태종 13년) 8월 13일 세자의 시중을 들던 어린 내관 강민과 한용봉이 세자의 비위를 맞추려고 매사냥을 도왔다가 태종에게 적발되어 궁궐밖 본가로 내쫓겼다. 

그런데 이 어린 내시들은 근신하지 않고 양아버지인 내관 박유·유문의를 찾아가 “다시 세자궁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탁했다. 강민과 한용봉은 그렇게 다시 궁궐로 들어갔다. 하지만 곧 태종에게 재적발됐다. 태종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대전 내관을 시켜 “그 자들을 잡아오라”는 명을 내렸다. 내전내관은 앞을 막아서는 세자에게 “주상 전하의 엄명”이라고 전했다. 그러자 세자는 내전내관에게 “네 이름이 무어냐”고 묻고는 절대 해서는 안될 말을 내뱉었다. “내가 네 이름을 기억하겠다.”

이 말을 전해들은 태종은 펄펄 뛰었다. 

“대체 뭘 기억하겠다는 거냐. 세자 자리가 안전할 것 같으냐. 종실에 적당한 사람이 없겠느냐.”(8월15일)

“네 이름을 기억하겠다”는 세자의 으름장은 ‘내가 훗날 옥좌에 오르면 널 가만 두지 않겠다’는 협박이었다. 이 또한 세자자리를 충녕대군에게 양보하기 위해 일부러 내뱉은 말이라는 것인가.


■외가에 멸문의 화를 입힌 세자 

세자의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은 계속된다. 1410년(태종 10년) 태종이 차기 임금인 세자의 외숙들이 정권을 농단할까 두렵다는 이유로 외삼촌 4형제 중 장·차남인 민무구와 민무질을 처단했다. 태종은 예서 만족하지 않았다. 남은 두 형제도 위험인물로 간주했다. 

1415년(태종 15년) 사소한 송사문제가 발단이 되어 두 형제까지 올가미에 걸려들었다. 그러나 민씨 형제를 죄다 죽여야 했던 태종 앞에 민무회의 장인이자 개국공신인 우의정 이직(1362~1431)이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태종의 계획은 제동이 걸린 듯 했다. 

이때 돌발상황이 벌어졌다. 정말 뜬금없게도 세자가 앞장서서 나서 “외삼촌들을 죽이라”고 고변한 것이다.(1416년 1월10일)  

“태종이 제례를 마치고, 광연루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세자(앙녕대군)가 한껏 술에 취해 부왕에게 나서 ‘종사는 오로지 전하의 종사만이 아닙니다. 민무휼·무회 형제를 법대로 처치함이 옳습니다’라 했다.”

세자의 고변은 살아남은 외삼촌들까지 모두 죽이라는 것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변이었다. 

세자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원경왕후 민씨)의 친정집에서 자랐다. 외삼촌인 민무구·민무질·민무회·민무휼 등 4형제가 업무를 마치고 귀가할 때의 제일성은 “우리 아기씨(세자)는 강녕하시냐”는 것이었다. 그만큼 세자를 귀여워한 외삼촌들이었다. 

그런데 이미 두 외삼촌이 죽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두 외삼촌까지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여있는데, 보호하지는 못할망정 “두 외삼촌 모두 죽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결국 민무휼·민무회 형제는 “임금와 세자를 원망하면서 역심을 품었다”는 죄목으로 귀양지에서 자진(自盡)해야 했다.(1416년) 


■아들의 여자까지 빼앗은 아버지

세자 자리가 싫어서 재능있는 동생(충녕·세종)에게 물려주려고 일부러 미친 짓을 했다? 그렇다 치자.

그러면 양녕대군으로 물러난 뒤에도 그 버릇 버리지 못했다면 이 노릇을 어찌 한단 말인가. 양녕대군의 패륜적 행태는 폐세자 된 후 예순이 다된 <세종실록>에 적나라하게 기록됐다.

즉 양녕대군의 아들인 이혜는 요즘으로 치면 조현병에 걸린 듯 천하의 망나니 짓을 저질렀다. 1447년(세종 27년) 10월 3일 술주정을 하다가 살인을 저질러 서산군의 작위를 서산윤으로 깎았고, 유배를 보냈다. 그럼에도 제버릇 개 못주었다. 무단으로 가출해서 금강산에 다녀오더니 갑자기 승려가 되겠다고 상투를 제 스스로 자른채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 무렵 노비 1명을 또 죽이는 등 정신병자 같은 해괴한 행동을 일삼았다. 1450년(문종 원년) 5월 2일 통제불능인 이혜와 그 가족들이 강화도로 유배됐지만 그곳에서도 사고를 쳤다. 1451년(문종 1년) 2월 13일 밤 이혜가 쇠못으로 여종을 찌르고 그것도 모자라 그 집에 불을 지른 뒤 도망친 일이 벌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온 이혜는 이번에는 자기 아들을 역시 쇠못으로 찔러 죽이려 했다. 이혜는 두 달 뒤인 4월1일 목을 매달아 자살을 기도했고, 이틀 뒤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런데 1450년(세종 32년) 2월11일 <세종실록>을 보면 심상치않은 기록이 부연되어 있다.

“이혜는 아비(양녕대군)에게 애첩을 빼앗긴 뒤 심화병을 얻어 주정을 부리다 사람을 죽인 까닭에….”

이 무슨 말인가. 아들 이혜가 조현병에 걸리고, 망나니짓을 일삼으며 살인을 일삼은 이유가 바로 아버지(양녕대군)에게 애첩을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닌가.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아버지 앙녕대군의 행위는 그야말로 금수와도 같은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양녕대군의 사당과 묘소가 같이 있음응 알리는 '지덕사부묘소기'

■폐위된 후의 난행

이 뿐이 아니다. 1422년(세종 4년) 11월14일과 1423년(세종 5년) 2월16일 <세종실록>은 “양녕이 폐위되어 광주(경기)로 쫓겨난 후에도 담을 넘어 고을 기생 두 사람을 훔쳐 두 전하(태종과 세종)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그럼에도 양녕대군은 “태종이 두 기생을 잡아오라 하자 양녕대군은 개과천선은커녕 분함을 이기지 못해 야음을 틈타 달아남으로써 두 전하를 더욱 놀라게 했다”는 것이다.  

또한 아버지인 태종이 승하한지 겨우 20일 만에 양녕대군은 사람을 불러 밭에 김을 매게 한 뒤 한가롭게 농부가를 부르게 하고는, 자신을 따르는 자에게 “즐겁다”고 까지 했단다. 이뿐이 아니다. 태종의 장례를 마치자마자 무리와 함께 마구 사냥 행각을 벌였으며, 고을백성을 무단으로 불러 자기 집을 호화롭게 꾸몄고, 백성들에게 소주를 먹여 그중 한 사람을 사망케했다. 심지어는 양녕대군의 허물을 조사하던 이천군수 박고에게 원한을 품고 “저 박고라는 자를 처벌하라”는 글을 올리면서 “만약 청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소신(양녕대군)과 전하(세종)의 사이가 멀어질 것”이라 협박까지 했다.  

1438년(세종 20년) 5월19일 “양녕대군 가족을 비롯한 종친들이 단옷날 대로변에서 펼친 석전(石戰·돌멩이 던지기)을 진두지휘했고, 그 석전으로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이유로 탄핵됐다. 당시 석전은 법적으로 금지된 놀이였다. 당시 탄핵문은 “폐위되어 외방으로 추방된 양녕대군은 성상(세종)의 은덕으로 겨우 도성 출입을 허락받았는데 근신하기는커녕 작대기로 사람을 구타하는 등 상해까지 입혔다”고 비판했다. 또 남의 노복을 빼앗고 간사한 소인들과 공모하여 말을 만들며, 잘못된 것을 꾸며서 문권(文券)을 위조했다는 탄핵까지 받았다.(1440년 5월11일)

또 “종묘의 내맥(종산에서 내려오는 산줄기)에 호화정자를 지었고(1441년 6월14일), 말 26필이 동원된 무리 30명을 이끌고 멋대로 사냥하고, 과천이나 수원 등 두 고을을 무시로 출입·유숙하고 피폐한 마을에서 아침 저녁으로 기생들을 동원한 잔치를 벌이게 했으며, 이에따라 고을 수령들이 접대하느라 골몰한다(1442년 10월26일)”는 탄핵이 이어진다. 


■“양녕이 그런게 어디 하루이틀의 일이냐” 

세종은 그럴 때마다 “양녕대군을 접대했다고 고을 수령들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지 않느냐”면서 “양녕이 그런게 어디 하루이틀 된 일이냐”(1444년 4월13일)고 눈감아 주었다. 

도리어 세종은 1446년(세종 28년) 4월8일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양녕대군의 집에 이어(移御·임금이 거처를 옮김)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세종은 “양녕은 내가 항상 함께 있고자 했고, 또 그 집이 새로 지어서 매우 시원시원하니 얼마나 좋으냐”고까지 했다. 

문종 역시 양녕대군을 극진하게 모셨다. 문종은 1450년(문종 즉위년) 6월6일 부왕(세종)의 하산릉전(임금의 관을 하관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올리는 제사)에 큰아버지인 양녕대군을 제일 앞자리에서 따르도록 했다. 신료들이 “죄인(양녕대군)을 하관식의 맨 앞자리에 서게 할 수 없다”고 반대했지만 문종은 “높으신 어른(양녕대군)이 마음으로 따르고자 하기에 허락했는데 무슨 소리냐”고 일축했다. 

세조도 양녕대군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고, 어떤 농담이라도 받아들였다. 예컨대 1459년(세조 5년) 세조가 “나도 마음만 먹으면 글씨를 잘 쓸 수 있다”고 하자 양녕대군은 “군주의 재주가 뛰어나다고 해도 스스로 자랑하면 안된다”고 졸지에 ‘갑분싸’를 연출했다. 그러나 <세조실록>은 “임금이 관대하게 넘어갔다”고 기록했다.


■조카들을 죽이라고 촉구한 삼촌

그런데 양녕대군의 이해할 수 없는 행태가 몇차례 더 있다. 수양대군(세조)가 계유정난(1453년)을 일으키자 “안평대군 이용의 악역이 지극히 중하니 마땅히 법률에 따라 처벌하고 처벌받은 자들은 효수해야 한다”는 주청을 올렸다. 양녕대군(세종의 형)과 안평대군(세종의 아들)이 누구인가. 삼촌과 조카 사이이다. 

삼촌이라는 사람이 “조카를 살려달라”는 주청을 올리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대역죄인이니 사사로운 은혜를 끊고 법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했다니 이게 정상인가.(1453년 10월 17일) 수양대군조차 양녕대군의 주청이 올라오자 “골육지친인 용(안평대군)은 이미 절도에 유배되었는데 어찌 번복할 수 있느냐. 죽일 수 없다”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457년(세조 3년) 10월 21일 양녕대군은 단종 복위운동을 펼친 또다른 조카 금성대군(세종의 6남·1426~1457) 등을 “이 변란에 이유(금성대군)가 노산군을 끼고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면서 엄중한 처벌을 촉구했다. 이 결과 금성대군은 사사됐고, <세조실록>은 “노산군은 금성대군의 사사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기록했다. 양녕대군은 17살에 불과한 동생(세종)의 손자(단종)을 자결하는데 일조한 것이 아닐까. 


■페세자의 생존법인가

하기야 이런 언행이 평생 위태로운 삶을 살아야 했던 폐세자 양녕대군의 생존법일 수도 있다.

어찌됐던 태종의 후계자였다가 이유가 어떻든 폐세자된 양녕대군의 삶은 평생 칼끝을 걷는 위태로움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단적인 예로 세조 연간(1459년)에 양녕대군은 경상도 동래 온천 등 남부지방을 여행하던중 김해 부사 변포라는 인물이 모은 무사들하고 활쏘기 행사에 나섰다가 ‘역모혐의’를 뒤집어 쓸 뻔했다. 

하지만 “그릴리 없다”는 세조의 적극적인 변호 덕택에 무사히 넘어갔다. 여행 도중 지방수령들에게 받은 뇌물이 100여바리가 되었다는 탄핵도 받았지만 그 또한 그냥 넘어갔다. 

양녕대군은 향년 69살까지 살다가 1462년(세조 8년) 세상을 떠났다. 동생인 세종(54세·1397~1450)에, 조카인 문종(39세·1414~1452), 조카의 아들인 단종(17세·1441~1457)보다 더 오래 살았으니 천수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임금 자리가 싫어 평생 미친 척 한 것이 맞는지, 아니면 혹은 정말로 엉망인 삶을 살아 폐세자 됐고, 그 이후에도 평생 그렇게 살다가 세상을 떴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그렇게 사는 동안 태종의 말마따나 “양녕대군 때문에 목숨을 잃고, 죄를 받은 이들이 너무도 많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결코 잘 산 삶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죽임 당한 영혼들은 세종시대 개막의 희생양?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만약 양녕대군이 옷에 맞지않은 임금자리에 올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우리 역사는 세종이라는 성군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한글창제도 없었을 것이다. 

지난 2008년 도난당한 ‘전(傳) 양녕대군 친필’ 숭례문 목판 및 후적벽부 목판 등이 11년만에 회수됐다는 소식이 들린다. 숭례문 목판에 전(傳)자가 붙은 것은 숭례문 현판글씨가 양녕대군의 친필이라는 확증이 100% 없기 때문이다. 다만 ‘양녕대군 친필설’이 다수설인 모양이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남대문 현판인 숭례문 석자는 양녕대군이 쓴 글씨이며 웅장하고 뛰어남은 그의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고 했으니 한번 믿어보련다. 

이 참에 양녕대군의 인생역정을 알아봤다. 양녕대군의 단하나의 공적은 ‘자의든 타의든, 임금이 되지 않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세자(양녕대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기생 어리와 어린 내관 이귀수, 그리고 멸문의 화를 당한 민무회·민무휼 형제, 또한 죄는 지었지만 세자의 몫까지 가중처벌된 구종수·종지·중유 형제와 법화 등도 세종시대의 개막을 위한 희생양 쯤으로 여겨야 할 것 같다. 결코 억울한 죽음은 아니라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 것 같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이준호, <조선왕실 적장자 수난기-비운의 조선 프린스>, 역사의아침, 2013

김영수, ‘조선왕조의 권력 이양과 승계-양녕대군의 폐세자와 충녕대군의 전위를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 58,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2014

이기대, ‘관련기록의 형성과 변이양상’, <우리문학연구> 36, 우리문학회, 2012

유지복, ‘전 양녕대순 초서에 대한 고증’, <서지학연구> 53, 한국서지학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