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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백세토록 받들어야 할' 한국의 서원 9곳

“백세토록 받들어야 할 47개 사액서원은 놔둬라.”(<고종실록> 1871년 3월20일자) 6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14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문화)으로 등재된 ‘한국의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47곳 중 대표적인 9곳이다. 소수서원(경북 영주·1543년·안향)을 비롯해 남계서원(경남 함양·1552년·정여창), 옥산서원(경북 경주·1573년·이언적), 도산서원(경북 안동·1574년·이황), 필암서원(전남 장성·1590년·김인후), 도동서원(대구 달성·1605년·김굉필), 병산서원(경북 안동·1613년·류성룡), 무성서원(전북 정읍·1615년·최치원, 신잠 등), 돈암서원(충남 논산·1634년·김장생) 등이다. 9곳의 서원은 성리학 교육기관의 전형이라는 공통요소를 갖고 있으면서도 각각의 독특한 특징도 지니고 있다. 

최초의 서원이자 서원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소수서원. 성리학을 도입한 고려말 학자 안향을 모신 서원이다. 4000여명의 인재를 배출했다. |문화재청 제공

■소수서원(4000여명의 인재 배출한 한국 서원의 성지)

가장 먼저 설립된 소수서원은 한국 서원의 강학과 제향과 관련된 규정을 최초로 제시한 기본 모델이다. 맨처음엔 성리학을 도입했고, 이곳에서 공부한 안향(1243~1306)을 제향했으며, 나중에 안향의 후손인 안축(1287~1348)·안보(1302~1357)에 이어 서원을 세운 주세붕이 추가로 배향됐다. 주세붕은 죽계사와 도동곡을 지어 배향된 선현을 제사지낼 때 부르게 했다. 안향과 중국의 유교선현인 공자·맹자 등을 찬양하는 이 서원의 교가인 셈이다. 제향의례에 제향인물의 가사가 포함된 것은 소수서원이 유일한 사례이다. 소수서원의 또다른 특징은 방문자들의 출신, 관직, 이름 등이 적힌 방명록(심원록)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당시 소수서원을 방문한 인물의 문집에는 소수서원을 주제로 한 수천개의 문학작품이 남아있다. 소수서원이 한국서원의 성지였고, 수많은 인물들이 성지순례에 나섰음을 일러준다. 소수서원에서는 이황의 문인인 김성일(1538~1593) 등 4000여명의 인재를 배출했다. 

경남 함양의 남계서원. 정여창을 모셨으며, 지역 사림들만에 의해 건립된 최초의 서원이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경남 의병운동을 주도한 서원이다.|문화재청 제공

■남계서원(자발적인 운영 돋보이는 두번째 서원)

남계서원은 지역 사림들 만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서원이다. 경남 함양 출신 사림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한 정여창(1450~1504)이 주배향 인물이다. 정여창은 관료주의적이고 훈구(勳舊·공신과 외척을 중심으로 한 지배세력) 중심적인 중앙정치무대에서 성리학에 기반한 입장을 견지하며 정치활동을 펴나갔다. 남계서원에는 특히 자발적인 서원 재정 운영의 사례로 19세기까지 사림들의 기부내역과 관련된 장부인 <부보록>이 남아있다. 서원이 민간인인 사림주도로 자발적으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경남의 의병활동을 주도한 서원이기도 하다. 그런 탓에 1595년(선조 28년) 왜군에 의해 전소됐지만 1603년(선조 36년) 곧바로 함양사람들이 재건했다. 남계서원은 19세기까지 훼철되지 않은 경남 유일의 서원이다. 남계서원의 건물들은 각각의 주요영역을 구분해서 하나의 축선에 배치한 특징이 있다. 이것은 이후 건립되는 서원 배치방식의 전범이 됐다. 

회재 이언적을 모신 옥산사원. 19세기말 조정의 일방적인 근대화정책에 반발하여 성리학 전통을 고수한 8849명의 상소문인 만인소가 소장돼있다.|문화재청 제공

■옥산서원(만인소와 한호·김정희의 편액이 있는 서원) 

옥산서원은 한국 성리학 발전단계에서 존재론·우주론 등의 성리학 이론을 탐구하고 토론을 주도했던 회재 이언적(1491~1553)을 모셨다. 기(氣)보다 이(理)를 중시하는 주리적 성리설은 퇴계 이황에게 계승돼 영남학파의 중요한 성리설이 되었다. 옥산서원에는 19세기말 조정의 일방적인 근대화 정책에 반발하여 성리학 전통을 고수한 8849명의 서명 상소인 만인소가 소장돼있다. 옥산서원에는 16세기 명필인 한호(1543~1605)와 19세기 명필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편액이 걸려있다. 이 서원의 특징은 출판과 장서의 중심기구로서 서원의 역할을 정립했다는 것이다. 건축적으로는 서원 영역 앞에 누마루를 도립하여 회합과 휴식의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이후 서원에 누마루를 설치하는 것이 일반화 했다. 옥산서원은 지금도 제향 희생물을 엄격하게 검사하는 의례를 진행하는데, 그 철저한 절차와 전통이 전승하고 있다. 서원의 제향에서는 원래 제물을 신성시 여긴다.  

퇴계 이황을 모신 도산서원. 조선성리학을 정착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황을 모신 서원 답게 한국 서원의 대표주자라 일컬을 수 있다. 정조는 이곳에서 특별과거를 치렀다.|문화재청 제공

■도산서원(퇴계 이황을 모신 서원 중의 서원)  

도산서원은 제향인물(이황·1501~1570)의 강학처를 기반으로 건립됐다. 한국 서원 중 학문 및 학파의 전형을 이룬 대표적인 사원인데, 성리학 관련 고서와 목판, 그리고 강회록 등 교육관련 기록들도 다수 보유했다. 이 서원은 이황의 문인 및 제자들의 학술공간이 됐고, 이곳에서 성리학과 관련된 다양한 철학적 논쟁을 펼쳐 이를 기반으로 학파의 통일된 의견을 종합했다. 도산서원의 목판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유교책판’에 포함돼 있다. 주 배향인물인 이황은 중국에서 전래된 성리학을 정착시키고 체계화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다. 도산서원의 대표성과 상징성은 조정도 인정했다. 

예컨대 정조는 1792년(정조 16년) 이황의 업적을 기념하고자 도산서원에서 7000여명이 참가한 특별과거를 치렀고, 여기서 거둔 3600장의 답안지를 직접 채점했다. 특히 도산서원의 경관을 주제로 당대의 인물들이 읊은 시문이 3000여 점에 이를 정도로 주변환경이 뛰어나다.

하서 김인후를 모신 필암서원. 인종의 스승이자 벗인 김인후는 인종이 의문사 한 이후 인종의 기일에 맞춰 뒷산에 올라가 통곡했다. 김인후는 이후 국정농단세력이 주는 관직을 받지 않았다. |문화재청 제공

■필암서원(임금의 스승이자 벗을 모신 서원)

필암서원은 하서 김인후(1510~1560)를 모신 곳이다. 김인후는 이 땅에 유교가 들어온 이후 문묘(공자 사당)에 종사된 동방 18현 중 유일한 호남 출신 인물이다. 5살 연하의 인종(1515~1545·재위 1544~1545)의 세자시절 스승이자 벗이었다. 인종이 김인후에게 <주자대전>과 묵죽도(대나무 그림) 등의 선물을 수시로 하사했다. 김인후는 인종이 재위 8개월만에 의문사하자 문정왕후(1501~1565)와 왕후의 오빠인 윤원형(?~1565) 일파의 소행으로 믿었다. 김인후는 해마다 인종의 기일인 7월1일이 되면 뒷산에 올라 통곡했고, 평생 국정농단 세력(윤원형 일파)이 주는 관직을 거부했다. 임진왜란 당시 저항운동의 중심지였던 필암서원은 전쟁 중인 1597년(선조 30년) 전소됐지만 곧 재건됐다. 필암서원은 동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시작된 서원운동이 서남부지역까지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필암서원에는 노비의 명단과 계보도인 노비보가 현존하고 있다. 국내에 존재하는 유일한 노비족보다.

성리학 이론 중 실천윤리를 강조한 김굉필을 모신 도동서원. 제행절차의 하나인 음복례를 가장 엄격하게 진행하는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문화재청 제공  

■도동서원(가장 엄격한 음복례를 진행하는 서원)

도동서원은 성리학 이론 중 실천윤리를 강조한 김굉필(1454~1504)을 모셨다. 성리학을 토대로 교육을 통한 후학양성에 집중한 사림이다. 도동서원에는 김굉필의 외증손자이자 17세기 남동부 지역 예학연구의 대표주자인 정구(1543~1620)가 추가로 배향됐다. 이 서원은 제행절차의 하나인 음복례를 가장 엄격하게 진행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홀기(笏記·진행 순서를 적어 낭독하게 하는 기록)에 따라 진행하기 때문에 의식이 엄숙하고, 또 제관 모두에게 돌아가며 잔을 돌리기 때문에 시간도 많이 소요된다. 도동서원은 산 기슭에서 북향해서 전면의 낙동강을 바라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서원의 사우(사당) 출입문은 낮게 조성됐다. 제향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몸을 자연스럽게 숙이게 해서 엄숙함과 공경함을 체화하기 위함이었다. 경사지를 활용한 서원의 건축배치를 탁월하게 구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인근에 김굉필의 묘소가 있다. 묘제와 서원 제향을 결합한 유일한 서원이다.

서애 류성룡을 모신 병산서원.  <징비록>을 인쇄출판한 서원이며, 조선최초로 유생 수천명이 연명한 상소를 올린 곳으로 알려져있다.|문화재청 제공

■병산서원(최초의 만인소 올린 사림의 공론장) 

병산서원은 영의정과 도체찰사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의 전쟁을 이끈 서애 류성룡(1542~1607)을 모신 곳이다. 사림이 중앙정계의 최고위직에 진출했다는 것 자체가 주요 정책 과정의 핵심위치로 발돋움한 관료형 사림의 유형을 보여준다. 유명한 <징비록>과 <군문등록> 등도 병산서원에서 출판·인쇄했다. 병산서원은 한국서원의 기능이 교육에서 공론장으로 확장된 사례에 속한다. 한국 최초로 유생 수천명이 연명한 유소(儒疏·연명 상소)를 올렸고, 지역의 공론을 종합하고 산출하는 공론장의 기능을 수행한 서원이었다. 이 서원에는 경북과 대구, 경남의 다양한 서원 및 사림들의 공론을 모으기 위해 작성된 통문들이 남아있다. 서원은 경사지를 기반으로 맞은편 병산과 낙동강을 바라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서원의 건축물은 전체적으로 장식을 배제하고 있다. 그러나 누마루가 뛰어난 만대루를 비롯한 건축물이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뤄 인위적인 장식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최치원 등을 모신 무성서원. 1906년 면암 최익현, 둔헌 임병찬 선생이 항일의병을 일으킨 곳으로 유명하다. |문화재청 제공

■무성서원(최익현·임병찬 의병장 배출한 항일운동의 요람)

무성서원은 원래 태산현(태인) 군수였던 고운 최치원(857~?)을 모신 곳이었다. 그러다 1544년(중종 39년) 태인 현감을 지낸 신잠(1491~1554)과 정극인(1401~1481), 송세림(1479~?), 정언충(1706~1772), 김약묵(1500~1558), 김권(1549~1622) 등을 차례로 배향했다. 다른 서원들이 지역사회의 강학활동과 성리학 연구를 중심으로 선정한 것과 달리 무성서원에 배향된 인물들은 향촌 교육과 연계되어 성리학의 가치를 보급하고 학문을 권장했다. 특히 자치규약인 향악과 관련이 깊어서 지역민 결집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것이 을사늑약(1905년) 직후인 1906년 일어난 병오창의에 영향을 끼쳤다. 면암 최익현 선생(1833~1906)과 둔헌 임병찬 선생(1851~1916)은 바로 이 무성서원에서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무성서원에서는 제향의례 전에 서원 입구에서 경내 건물 마당을 거쳐 제향공간까지 황토를 뿌리는 특이한 의식을 펼친다. 사사로운 기운이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벽사의 의미다.     

17세기 예학 연구를 선도한 김장생을 기리는 돈암서원. 김장생의 제자인 김집과 송준길, 송시열 등 쟁쟁한 인물들이 추가로 배향된 서원이다.|문화제청 제공 

■돈암서원(예학이론을 구체화한 서원) 

돈암서원은 17세기 조선의 예악 연구를 선도한 사림 김장생(1548~1631)을 기리는 서원이다. 예학은 전쟁으로 피폐된 국가질서를 다시 재건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중시된 성리학의 주제였다. 이를 기반으로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됐다. 이곳에서 예송논쟁과 같이 국가정책의 중요 이슈가 다뤄지기도 했다. 이 서원에는 김장생의 제자인 김집(1574~1656), 송준길(1606~1672), 송시열(1607~1689) 등 쟁쟁한 인물들이 추가로 배향됐다. 이들은 예학이론을 구체화하는 저서들을 썼다. 이후 서인 학맥의 형성과정에서도 이들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성리학의 특정 분야가 심화하는 영상을 보여준다. 서원 건축물 가운데 강당인 응도당은 정침이론을 한국의 건축언어로 재해석한 뛰어난 건물이라는 평을 듣는다. 1881년(고종 18년) 홍수 때문에 한차례 이건되었지만 이건상황을 세세한 기록한 자료를 남겼다. 유산의 진정성과 완전성을 유지하고자 한 노력이 돋보인다.

이들 9개 서원들은 성리학이 동아시아 전역에 확산되어 지역적인 특생을 지니며 꽃피운 중요한 사례라는 가치를 담고 있다. 건축학적으로도 한국 서원의 정형을 뚜렷하게 완성하면서도 각각의 독자성도 겸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완전성과 진정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유산적 가치가 차고 넘친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