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어렸을 적 달달 외웠듯 조선의 임금은 총 27명이다. 그러나 살아 생전에는 임금이 아니었지만 사후에 임금으로 모신 이른바 ‘추존왕’이 9명 있다. 

이 추존왕 9인을 정식 임금으로 쳐주지 않지만 그래도 그중 1명은 ‘국왕대우’로 대접받아야 할 것 같다. 왜냐면 그 이는 정식으로 등극하지 않았을 뿐이지 실제로 조선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바로 순조(재위 1800~1834)의 맏아들인 ‘추존왕’ 익종(고종 때 문조로 다시 추존)이자 효명세자(1809~1830)이다. 2016년 방영된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박보검 탤런트가 연기한 주인공(효명세자), 바로 그 이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하라”는 순조의 명에 따라 1827년 2월 18일부터 22살의 나이로 요절한 1830년 5월 6일까지 ‘국왕 대리’로서 조선을 직접 다스렸다. 무엇보다 효명세자의 저술이 <열성어제>에 실렸다. <열성어제>는 조선조 역대 임금들의 시문을 모은 책(태조~철종)이다. 추존왕 중에 <열성어제>에 저술이 포함된 예는 효명세자가 유일하다. 따라서 효명세자를 익종(재위 1827~1830)이라 해서 ‘정순(익)헌철고순’이라 외어도 딴죽을 거는 이는 많지않을 듯 싶다.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를 그린 어진. 화면 우측 상단에 “익종돈문현무인의효명대왕십팔세어진(翼宗敦文顯武仁懿孝明大王十八歲御眞)” 이라 묵서되어 있다. 대리청정에 임하기  1년전인 1826년(순조 26년)에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국왕의 어진은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가 있었는데, 1954년 12월에 난 대형화재로 거의 대부분이 소실됐다. 익종어진도 화면의 절반 이상이 소실되어 정확히 확인되지 않다. |국립 고궁박물관 소장

■‘꽃미남 세자’

효명세자는 태어날 때부터 할아버지인 정조 임금을 빼닮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세자는 이마가 솟은 귀한 상이었고, 용(龍)의 눈동자로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 궁내의 모든 이들이 ‘장효왕(정조)과 흡사하다’고 입을 모았다.”(<순조실록>)

<순조실록>은 세자의 비범함을 증거하는 일례를 든다. 즉 세자로 책봉된 4살 때(1812년) 홍경래(1771~1812)의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젖을 먹고 있던 세자가 웃으면서 ‘쾌(快)하고 좋구려!’라 말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유모가 ‘무엇 때문이냐’고 묻자 세자는 ‘도둑이 벌써 잡혔으니 어찌 쾌하고 좋지 않겠느냐’고 대꾸했다는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밥을 먹다가 밥알을 떨어뜨리면 반드시 주워서 삼키면서 “하늘이 내려 준 것을 소홀하게 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세손(헌종)이 비단 때때옷을 입자 “나도 입지않는 비단옷을 입히느냐. 빨리 고치도록 하라”고 꾸짖었다는 일화가 인구에 회자됐다.


■시간문제였던 대리청정

그렇게 15년간 차기 대권 수업을 받은 효명세자는 19살 때인 1827년(순조 27년) 대리청정에 나선다. 아마도 순조와 신료들 사이에 사전조율을 끝냈을 것이다. 순조는 이미 4년전인 1823년(순조 23년) 5월부터는 궁중의 공식행사와 신하와의 접견 자리에 세자를 배석시켰다.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 순조의 나이는 38살에 불과했다. 

순조는 왜 그런 창창한 나이에 왕권을 아들에게 물려줄 생각을 했을까. 권력은 부자지간이라도 나눌 수 없는 것이라는데…. 우선 건강을 들 수 있다. 순조는 시쳇말로 ‘국민 약골’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수두-홍역-천연두 등 전염병이란 전염병은 모두 앓고 지나갔다. 게다가 11살 어린 나이에 등극하자 마자 서슬퍼런 증조할머니(정순왕후·영조의 계비^1745~1805)의 3년 수렴청정으로 주눅이 들었고, 이후에는 처가인 김조순(1765~1832)의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기를 펴지 못했다. 순조는 불면증, 식욕부진, 사지무력, 피로, 현기증 등 신경쇠약 및 소화불량 증상을 호소했다. 

게다가 당시 조선 사회는 어수선했다. 잇단 흉년과 가뭄으로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 홍경래의 난(1811~12년)이 진압됐지만 여전히 ‘홍경래 불사론’까지 떠돌만큼 민심이 흉흉했다. 

순조로서는 이런 난국에 세자의 처가인 풍양 조씨 세력을 등장시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견제하고 추락한 왕권을 강화하려고 대리청정이라는 극약처방을 썼을 가능성이 짙다. 

순조는 1827년(순조 27년) 2월18일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의 명을 내리면서 “병형(군권과 형벌권)의 긴요한 일이 아니면 세자가 모두 처리하라”고 일러둔다. ‘대리청정’을 명해도 임금은 인사권, 군권, 형벌권 만큼은 놓치 않는데 원칙인데, 순조는 인사권까지 효명세자에게 준 것이다. 

<효명세자 입학도첩>. 효명세자가 8살 때 성균관에 나아가 스승에게 수업을 받는 의식을 그린 도첩. 흑단령으로 갈아입은 스승이  높은 지위를 뜻하는 동쪽에 앉아있고, 효명세자는 왼쪽 노란 그림 안에 엎드려서 가르침을 받고 있다. 세자의 그림은 역시 그리지 않았다. 세자에게는 책상도 없었다. 학생의 자세로 배우라는 의미였다. 세자 뒤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들은 시강관들이다. 성균관 유생들이 명륜당 앞에 서있고 역시 세자의 시종들은 명륜당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국립고궁박물관 소 

■피 안묻히고 안동 김씨 세력을 쫓아내다

효명세자는 과연 아버지의 뜻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대리청정을 시작한 지 불과 3일 뒤인 2월21일 세자의 하례식 의례에 착오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안동 김씨계의 전 이조판서 이의갑과 김재창은 물론 현 이조판서 김이교를 감봉 징계했다. 

한 달 여 뒤인 3월30일에는 안동 김씨 계열인 우의정 심상규를 삭탈관직한다. 순조가 대리청정을 명했을 때 영의정·좌의정 없는 조정을 이끌던 우의정 심상규가 마땅히 ‘대리청정은 아니되옵니다’라고 마땅히 되돌려야 했는데도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조순의 아들이자 순원왕후 김씨(순조비)의 오빠인 김유근(1785~1840)과, 김유근의 종질(사촌형제의 아들)인 김교근도 중앙무대에서 쫓겨났다. 

이 과정에서 효명세자는 자신이 직접 피를 묻히기 보다는 소외된 소론·남인·북인 세력을 사헌부나 사간원의 언관으로 배치하고 이들로 하여금 안동 김씨의 사치와 권위를 공격하게 함으로써 공론에 따라 축출하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효명세자의 관례(성년식)을 기록한 수교도(受敎圖).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효명세자는 그 빈자리를 친위 관료 세력으로 채웠다. 외척정치에 반대하고 청의(淸議)를 기치로 내건 김로(1783~?)·이인부·홍기섭(1776~1831)·김노경(1766~1837) 등이었다. 이들은 훗날 ‘효명세자의 4간신’으로 지목된다. 김노경의 아들인 추사 김정희(1786~1856)와 권돈인(1783~1859) 등도 정치적 입장을 함께 했다. 김로와 서준보(1770~1856)·서희순(1793~1857)·김정집(1808~1859)은 ‘익종(효명세자)의 4각신’으로 일컬어진다. 김로와 서준보는 문무의 인사권을 담당했다. 여기에 세자의 처가였던 풍양 조씨 가문의 조만영(1776~1846)·조종영(1771~1829)·조인영(1782~1850) 등이 안동 김씨를 견제하고 세자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하는 세력이 됐다. 

1827년 2월18일부터 1830년 5월6일까지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할 때의 기록을 일기형식으로 엮은 <대청시일록>|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전국의 260만명을 구휼하다  

효명세자가 국정을 총괄한 기간은 불과 3년3개월이었다. 지금의 국회의원 임기보다 짧은 기간이다. 

그러나 나름 국정개혁을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우선 서울의 소수 가문의 자제를 주로 뽑는 과거의 폐단을 개혁하고 전국에서 신진세력을 널리 등용했다. 중앙 및 지방 관료의 시험인 응제(임시 과거)와 강(사서오경 시험), 제술(백성 다스리는 방책을 시험) 등의 횟수를 급격하게 늘렸다.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1827년(순조 27년) 8월8일 홍문관 부수찬(종 6품) 강태중이 “대체 저하께서 대리 청정하신 뒤에 품계가 올라간 자가 몇 사람이며 발탁된 자가 몇 사람이냐”고 ‘시험 남발’을 비판했다. 그러나 세자는 강태중에게 “대리청정한지 몇달이 지났는데 당신 같이 직언하는 이는 없었다”면서 오히려 대사간(정 3품)에 임명했다. 직언한 신하를 벌주기는커녕 종6품 홍문관 부수찬을 언관의 꽃이라는 사간원의, 그것도 당상관인 정3품 수장으로 발탁한 파격인사였다. 자신감 넘치는 지도자의 면모가 아닐 수 없다.

효명세자가 각 지방의 실정을 파악하는 방법은 암행어사 파견이었다. 1829년(순조 29년) 10월29일자 <순조실록>은 전라도 감사를 비롯한 수령들의 불법탐학을 고발한 암행어사 유성환(1788~?)의 보고서를 싣고 있다.  

“전 전라도 감사 서경보(1771~1839)는 10개월 재임동안 제대로 처리한 일이 없었고…자색이 있는 기녀들을 불러들여…뭇 백성들은 뼈가 으스러지도록 하소연했지만 모두 내쫓기고 구타당하니…”

효명세자는 그해 5월 29일 함경도와 영남·호서·호남 등에서 모두 260만명에 달하는 굶주린 백성들에게 곡식 및 각종 구호 물자를 내려보냈다.(<순조실록>) 세자는 또 경기 일원의 역대 임금 능원을 여러차례 참배했는데, 그것을 민심파악의 기회로 삼았다. 특히 사민의 상언·격쟁을 장려했다. 상언(上言)과 격쟁(擊錚)은 사회 전반적인 문제를 다룬 상소(上疏)와는 성격이 다르다. 백성들이 민원을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합법적인 소원수리제도다. 상언은 양반과 중인이 문서로 올렸지만 글 모르는 일반 백성들은 임금이 거둥하는 길가에서 징이나 꽹가리를 쳐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효명세자는 올라온 상언과 격쟁 중에 시행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철저하게 가려 보고토록 하고 그 양이 아무리 많아도 자신이 먼저 열람한 뒤 해당 관사에 회부하여 처리토록 했다. 

효명세자는 또한 창덕궁과 창경궁을 함께 그린 대형궁궐 그림인 동궐도를 제작하기도 했다. 

1829년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의 즉위 30년과 40회 탄신을 맞이 베푼 궁중연회를 기록한 <진찬의궤>. 효명세자는 효를 내세워 통해 위로는 부왕을 섬기고 아래로는 신하들에게 충성을 이끌어 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실추될대로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되살리는 기회로 삼았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누이동생을 향한 끔찍한 사랑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효명세자의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문화 군주의 면모’이다.

효명세자는 역대 국왕 중 가장 문학적 성취가 높은 ‘국왕 대우’였다. 세자는 무려 400여제의 시를 남겼다.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는 정조의 시가 200제를 넘지 않았으니 22살에 요절한 효명세자의 문학적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는 지를 알 수 있다. 효명세자의 시 중에는 누이를 그리워하는 것이 매우 많은게 특징이다. 아닌게 아니라 세자는 여동생 명온공주(1810~1832)와 복온공주(1818~1832), 덕온공주(1822∼1844)를 ‘지나칠 정도로’ 예뻐했다. 

특히 1살 어린 명온공주에게는 사흘 간격으로 시를 보냈다. 동생을 그리워하는 운자를 사(思)로 하여 그리움의 뜻을 듬뿍 담아낸 ‘사매시(思妹氏)’도 그런 예다. 규장각에 소장된 <익종간첩>은 누이에게 보낸 친필시가 수록됐는데 남매간 우의를 집약적으로 표현했다. 동생에게 보내는 친필시는 한시를 원문으로 적고 다시 한글음을 병기했으며 그 번역문까지 첨부했다. 제목 역시 번역했는데, 어려운 어구는 한글로 주석까지 달아놓았다. 한글로 문자생활을 했던 누이를 위한 세심한 배려가 아닐 수 없다. 

“수레를 보낸지 이미 삼일이 되니 암암리에 내 마음이 생각하는도다. 슬퍼함에 저녁산을 대하니 나무에 가득한 매미가 울 때로다.(送송車거已이三삼日일 暗암暗암我아心심思사 초초창창對대山산夕석 滿만樹수蟬선鳴명時시)”(기寄매妹씨氏)

누이를 사가로 보낸지 사흘이 지나자 그리운 마음에 먼산만 바라보는 세자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효명세자의 편지글. 효명세자는  무려 400여제의 시를 남겼다.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는 정조의 시가 200제를 넘지 않았으니 22살에 요절한 효명세자의 문학적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는 지를 알 수 있다. |서울대 중앙도서관 등

“내가 지은 시 좀 고쳐달라”는 여동생(명온공주)의 편지와 그 편지에 자상하게 응답한 오빠의 답장을 보라.

“…이 글은 소인이 지었사오니 감상하시고 어떠한지 보아주십시요. ‘늦가을 서리에 밤은 깊은데(九秋霜夜長) 홀로 등잔꽃 밝은 것을 대하였도다(獨對玉燭明) 머리숙여 멀리 형(오라버니) 생각하니(低頭遙想兄) 창을 사이에 두고 기러기 소리 들었어라.(隔유聞鴻鳴)”(명온공주가 오빠에게) 

오빠 효명세자는 이에 공주의 시구절 일부를 고쳐준 뒤 다음과 같은 애틋한 내용을 적어보냈다.

“(너의)글씨를 보고 든든하며 잘 지었는데, 두 어 곳 고쳐 보내니 보아라. 그리고 ‘머리 숙여 멀리 형을 생각한다(저두요상형)’는 시구는 나를 생각한 것인가. 그윽히 감사하노라…이 글이 또 너를 생각함이로다.”

마치 애인 사이에 주고받는 연애편지 같다. 

왜 이렇게 오빠 동생사이에 ‘오글거리는 편지’를 나눴을까. 하기야 여염집 남매 사이가 아니지 않은가. 구중궁궐에 마음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누이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남매간 정분이 유달랐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효명세자를 비롯해 순조의 자녀들은 모두 요절했다. 효명세자가 22살의 젊은 나이에 서거했고(1830년), 둘째동생 복온공주와 첫째동생 명온공주는 각각 15살과 23살에 한달 사이를 두고 차례로 세상을 떠났으며(1832년), 막내동생인 덕온공주는 18살의 나이(1844년)에 죽었다. 누이들을 그토록 사랑했던 오빠의 요절이 여동생들의 가슴에 치유할 수 없는 생채기를 남겼는지도 모르겠다.

효명세자와 여동생인 명온공주가 주고받은 편지. 명온공주가 자신의 시를 오빠에게 보내 “틀린 곳 좀 잡아달라”고 하면 오빠는 몇가지 지적사항을 언급하고는 ‘보고싶은 마음’을 전했다.|국립한글박물관  

■궁중공연의 업적

그러나 효명세자의 혁혁한 업적 중에서도 으뜸이 있다. 바로 세자가 궁중예술의 꽃인 ‘정재(呈才)의 황금기’를 이뤘다는 것이다. ‘정재’는 궁중의 연회에서 여령(女伶)과 무동 등 당대 연예인들이 공연했던 춤과 노래이다.

대리청정에 임한 효명세자는 3년3개월의 재임기간 중 세차례에 걸쳐 대규모 궁중연회를 개최했다.      

1827년 9월9일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를 올린 뒤 베푼 ‘자경전진작정례의’와, 1828년 어머니 순원왕후의 40세 생일을 기념한 ‘무자진작의’, 그리고 1829년 순조의 등극 30년과 탄신 40년을 기린 ‘기축진찬의’가 그것이다. 솔직히 말해 당시 시대상황은 좋지 않았다. 천주교 탄압과 외척의 정권개입, 뇌물 수수로 정치기강이 무너지고, 신분질서의 와해로 사회혼란이 가중되었던 시기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크고작은 천재지변이 일어났고, 전염병이 번져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있었다.

효명세자가 존호를 받으라고 하자 순조가 그나마 양심의 가책은 었었던지 “재위 30년 동안 백성은 곤궁해지고, 법도는 실추됐고 병을 요양하느라 세자에게 청정을 시키고 있는 처지”라고 거듭 사양했다. 효명세자는 그런 순조에게 “존호를 받으시라”고 5번이나 독촉한 끝에 결국 관철시켰다. 그러면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그 어려운 상황에서 궁중잔치를 벌였던 효명세자를 곱게 볼 수 있을까.

1829년 궁중잔치를 그린 병풍인 ‘기축진찬도병’.  1829년 순조의 사순(40세)과 즉위 30주년을 기념한 잔치의 모습을 그린 병풍이다|삼성미술관 리움

■안동 김씨를 무릎 꿇린 궁중잔치 및 공연

그러나 왕조시대에서 잔치는 단순한 ‘놀자판’이 아니다. 성리학에서 예악을 다스리는 군주야말로 성군으로 칭송받았다. 공자는 “악(樂)은 천지의 조화이고 예(禮)는 천지의 질서이니…정치가 안정되면 예를 만들고 공이 이뤄지면 악을 지었다”고 했다. <예기> ‘악기’는 “군왕이 음악을 만든 것은 천지의 이치에 따라 백성을 다스리려고 했기 때문”이라고까지 했다. 효명세자가 그 어려운 시기에 세번이나 궁중잔치를 벌인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아무리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세도가라도 궁중잔치에 참석하면 군왕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충성을 서약하며, 만세무강을 비는 치사를 낭독해야 했다. 효명세자의 궁중잔치는 효를 내세워 위로는 부왕을 섬기고 아래로는 신하들에게 충성을 이끌어 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실추될대로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되살리는 좋은 기회였다. 

효명세자의 시문을 모아둔 <학석집>. 세자의 글은 역대 임금들의 시문을 모아둔 <열성어제>에도 포함돼있다. 효명세자를 ‘국왕대우’로 일컫는 이유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당신이 한번 해볼래?”

젊은 ‘군왕 대우’가 내로라한 신료들을 ‘예약’으로 다스린 단적인 예가 있다. 

1829년(순조 29년) 1월10일 세자가 궁중잔치를 위한 리허설을 직접 관장하고 화려한 복장을 한 기녀들이 궁궐을 드나드는 꼴이 보기싫었던 대사헌 박기수(1774~1845)가 “신성한 궁궐 안에서 이게 무슨 꼴이냐”고 반대하고 나섰다. 그런데 효명세자의 조치가 이상했다. “함부로 한게 아니라 관례에 따른 것”이라고 대꾸한 뒤 박기수를 아예 예조참판으로 임명하고 잔치를 총괄하는 진찬소 당상으로 삼았다. 무슨 뜻이었을까.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소리야. 네가 한번 맡아서 해보라’, 뭐 이런 소리였다. 졸지에 예조참판으로 잔치를 관장하게 된 박기수가 예법을 검토한 결과 효명세자가 맞다는 것을 깨닫고는 “죽을 죄를 졌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예조의 업무일지인 <등록> 등을 보니 연회의 예행연습은 모두 궁궐 내에서 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신이 그것도 모르고 함부로 망령된 말을 하였습니다. 죽고싶습니다.”

효명세자는 그런 박기수에게 유배형을 내렸다. 이제 20살 안팎에 불과했던 효명세자였지만 다름아닌 군주를 위한 궁중예법을 무기로 내로라하는 대소신료들을 쥐락펴락했던 것이다. 

정재를 출 때 여령(여자연예인)이 입었던 몽두리. 앞뒤가 트인 4자락의 옷이고, 밀화단추로 여몄다. 허리에는 허리띠인 대대를 둘렀다. 한삼은 소매 끝에 끼웠으며 춤을 출 때 손동작을 더욱 강조하였다.|독일 라이프치히 그라시 민속박물관

■궁중 연회및 공연의 총감독 

효명세자는 단순히 궁중잔치 및 공연을 치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때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진다.

해마다 열린 세차례의 궁중잔치 및 공연의 세부내용을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관장했다. 효명세자는 이를테면 궁중잔치 및 공연의 총연출자(총감독)을 맡았던 것이다. 이 뿐이 아니었다. 당대의 정재, 즉 궁중연회 때의 공연은 창사(노래)와 춤, 반주 등 가·무·악의 3요소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효명세자 대리청정기에 공연된 정재는 모두 40종목인데 그중 17종목은 예부터 전승된 것이며, 새로 등장한 것은 모두 23종목이었다. 

이중 효명세자가 가사를 직접 지은 것은 모두 20종이다. 이중 17종은 순수한 창작품이고, 3종목은 종래부터 전승되어온 정재의 가사와 곡조, 춤의 구성 등을 그 시대에 맞게 바꾼 것이다. 단순한 ‘노가바’(노래 가사바꿔 부르기)나 편곡의 차원을 넘어선 재창작이라 할 수 있다. 

효명세자가 4살 때인 1812년(순조 12년)세자로 책봉하면서 만든 어보다.|국립고궁박물관

세자는 또 ‘가사’라 제목한 국문 악장(공중행사에서 불린 노래가사)도 제작했는데, ‘목멱산’과 ‘한강’, ‘춘당대’ 등이 있었다. 또 효명세자가 남긴 시조가 9수나 되는데 이것들은 아마도 1927~29년 열린 궁중공연에서 가창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또 공연작품 중에는 당나라 시인 이백이 고구려 춤을 보고 읊은 시를 노래가사로 차용해서 새로운 춤으로 재창작한 ‘고구려무’와 신라시대 화량들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은 ‘사선무’ 등도 역사 속에서 소재를 택했다는 점에서 주목거리이다.

효명세자의 작품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조선의 정재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1인 무용이다. 그 이름은 ‘춘앵전’과 ‘무산향’이다. 이중 ‘춘앵전’은 1828년 6월1일 어머니 순원왕후의 40세 축하 연회인 ‘연경당 진작’에서 처음 연주됐다. 창사 가사는 세자가 직접 썼다. 1인 무용으로 구성된 독무 정재의 첫 등장이다. 기존의 정재는 대부분 대형중심이었다. 그러나 ‘춘앵전’은 한마리 꾀꼬리인듯한 댄서 1인이 돗자리라는 아주 작은 무대공간에서 나아갔다가 물러나고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었다. 

“아름다운 미인 달빛 아래 걸어나오니(빙정月下步) 비단 옷소매 춤은 바람에 하늘거리네.(羅袖舞風輕) 꽃 앞의 자태 가장 아끼나니(最愛花前態) 이 청춘 스스로 님의 정에 맡기네.(靑春自任情)”

또 다른 독무곡인 ‘무산향’은 설치해놓은 대모반(침상처럼 행긴 이동무대)에 댄서 1인이 올라가 추는 춤곡이다. 

이 작품 역시 효명세자가 직접 창작한 곡이다. 1인 독무인 ‘춘앵전’과 ‘무산향’의 등장은 효명세자 대리청정기인 이때가 궁중 무용의 전성기였음을 알려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초연을 공연한 연예인은 김형식이었다. 3차례의 대규모 궁중공연에서는 장악원 소속의 악공인 가차비 외에도 민간 소속의 가수인 양천호·정수경·임성창·김수익 등이 초청되어 공연했다. 이중 정수경은 청구영언에 2수의 시조 작품을 남긴 유명가수이다. 

효명세자가 쓴 시의 초고본(<경헌시초>).  효명세자의 시 작품을 모아 엮은 책이고 39장 1책의 필사본이다. 본문에는여러 곳에 관주(貫珠·시문가운데 잘 되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쳤던 동그라미 표시)가 표시되어 있다. 일부 수정하고 고쳐 적은 부분도 발견된다.|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조선시대판 방시혁?

물론 이 모든 창작·안무·연출 등을 효명세자 1인이 북치고 장구치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함화진(1884~1948)의 <악인열전>을 보면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바로 그해(1827년) 전악(조선시대 장악원에서 음악업무를 맡은 정6품 잡직)의 자리에 오른 김창하라는 인물이 눈에 띈다. 

“김창하는 익종(효명세자)의 총애를 받아 음악인 중 실력이 좋은 이들을 선발해서 악단을 조직하고 궁중에 주야로 머물게 해서 시시 때때로 연주하게 했다. 이 악단을 구관(九官)이라 했고 선생은 구감관이라 일컬었다.”

함화진은 이때 “김창하는 세자를 보좌해서 다수의 정재를 창작했다”고 소개했다.  

<순조실록>에는 “1827년(순조 27년) 3월11일 효명세자가 장악원 소속의 대년악생(待年樂生) 72명에게 봉급을 주어 춤을 연습하도록 명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요즘으로 치면 기획사에서 연습생을 키웠다는 의미가 아닐까.

효명세자는 시쳇말로 표현하자면 궁중에 ‘구관’이라는 기획사를 차려놓고 김창하와 함께 연습생들을 기르고, 훈련시킨 뒤 궁중음악을 창작·편곡·연출한 대표 프로듀서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BTS를 키운 방시혁 프로듀서라 표현하면 과장일까. 결국 효명세자는 아버지(순조)와 어머니(순원왕후)를 위한 궁중잔치(예·禮)와 그 궁중잔치를 위한 공연(악·樂) 등 전체 의례를 진두지휘, 총연출, 총감독한 것이다. 

 효명세자가 창작한 1인독무 <춘앵전>. 돗자리 위에서 추는 춤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각혈로 쓰러진 22살 군왕의 꿈

그러나 노래와 춤을 무기로 실추된 왕권을 되살리겠다는 효명세자의 꿈은 불과 3년3개월만에 산산조각난다.  

1830년(순조 30년) 윤 4월22일 <순조실록>은 “효명세자가 각혈 때문에 약을 먹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증세인 것 같았지만 갈수록 회복되지 못했다. 효명세자는 5월6일 급서하고 만다.

갑작스러운 부고에 백성들은 “하늘이 우리 국가를 망하게 하려고 하느냐”고 울부짖었다. 효명세자가 죽자 그의 흔적은 부인되고, 지워지기 시작했다. 세자의 대리청정 기간 중 대사헌·병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던 김로는 “언행에 분수가 없고 국왕의 존엄을 돌보지 않았으며, 조정의 신하들을 위협하고 문무관의 인사권을 장악하여 자기 세력을 모았다”는 등의 공격을 받았다. 이인부와 홍기섭, 김노경 등도 탄핵됐다. 이후 조선은 4년간의 순조 친정기를 더 보냈고, 8살에 즉위한 헌종(재위 1834~1849)과 강화도령 철종시대(1849~1863)를 맞아 급격히 몰락했다. 

그렇다면 궁금증이 하나 든다. 효명세자는 누가봐도 훌륭한 국왕의 자질과 능력을 지녔다는 평을 듣는다. 만약 효명세자가 정식으로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을 오롯이 다스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효명세자가 아무리 출중한 능력을 지녔던들 기울어져가는 조선을 과연 일으켜 세울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그 알량한 예악정치로 당대의 어지러운 사회를 어떻게 다스릴 수 있었겠느냐는 회의감도 든다. 효명세자가 왕위를 물려받었어도 조선은 어느 드라마의 언급처럼 좀 늦게 망하는 길로 접어들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무리 역사에 가정법이 없다지만 그건 너무 비관적인 평이 아닐까. 군주의 수업을 받은, 현명한 효명세자였기에 그래도 휘청거리던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울 비책을 마련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아무렴 헌종-철종-고종-순종 같은 길을 걷지는 않았겠지.

28일부터 9월22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문예군주를 꿈꾼 왕세자, 효명’을 주제로 특별전이 열린다. 세자의 성장과정과 교육, 문예적 재능을 조명하고, 세자가 국정의 최고지도자로서 조선을 다스리는 동안 궁중 잔치와 공연, 궁궐도 제작 등에서 이룩한 업적을 되돌아볼 기회가 될 것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이 기사를 위해 이종묵 서울대 교수와 김문식 단국대 교수, 조경아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심승구 한체대 교수 등이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참고자료>

이종묵, ‘효명세자의 저술과 문학’, <한국한시연구> 10, 한국한시학회, 2002

김문식,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문헌과 해석> 56권, 태학사, 2011 

조경아, ‘순조대 효명세자 대리청정시 정재의 계승과 변화’, <민족무용> 제5호, 세계민족무용연구소, 2004

심승구, ‘효명세자의 삶과 예술’, <한국무용연구> 제36권 4호, 한국무용연구학회, 2018

신경숙, ‘19세기 가객과 가곡의 추이’, <한국시가연구> 2, 한국시가학회, 1997

한지영, ‘효명세자 대청시 창작정재연구’, 한양대석사논문, 2008

김거부, ‘효명세자 에제 정재명과 악곡명에 대한 연구’, <아시아민족조형학보> 19, 아시아민족조형학회, 2018

이상각, <효명세자>, 서해문집, 2013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