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500년 서울 개경의 생활사…휴머니스트|한국역사연구회
한국전쟁과 남북분단으로 갈 수 없는 도시 개성. 그러나 이제 남북화해와 통일의 시대를 맞아 개성은 반나절 코스로 훌쩍 다닐 수 있는 옆동네가 될 날도 머지 않았다. 개성, 즉 개경은 알다시피 한민족과 한민족 문화를 세계에 알린 고려왕국의 수도이자 국제도시였다.
이 책은 다소 밋밋한 제목이 불만스러울 만큼 당대 개성인의 생생한 삶, 그리고 애환을 담고 있다. 마치 지금 이 시대의 서울을 보는 것 같다. 요지경 그 자체다.
결혼을 말할 때 아주 상반된 표현으로 ‘시집간다’ 혹은 ‘장가간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장가간다는 표현이 맞았던 것 같다. “혼인 하면 필요한 것은 모두 처가에 의존하니 장모·장인의 은혜는 부모와 같다”(이규보)느니, “부모공양은 딸이 맡아서 주관한다”(이곡)는 말을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열녀? 고려에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열녀’란 거의 없다. 특히나 간통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예 하나. 공민왕 때 판밀직사였던 신귀의 처가 여러 대신들과 간통해서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재상 경복흥은 “절개를 잃은 것은 남편의 유배 때문에 한적함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변호했다. 왕은 도리어 독수공방을 하던 여인들을 불쌍히 여겨 다른 유배 남편들까지 대거 풀어주었다.
외국어 조기교육 열풍이 불기도 했는데, 이색이 대표적이었다. 이색은 10살부터 한인으로부터 중국어를 배웠다. 그런 뒤 4년간 원나라에서 유학했다. 하지만 ‘네이티브 스피커’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다. 1388년 명나라 태조를 만났는데, 태조의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한 것이다. 명태조는 “네 말은 꼭 나하추(원나라 장수로 명나라로 투항한 인물) 같다”고 했는데, 이는 이색의 발음이 신통치 않았음을 알려주는 말이다.
이 책은 고려시대 개경에 살았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그 도시의 일상풍경, 그리고 여가와 풍속, 불교 및 민간 신앙을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10년의 준비 끝에 나온 책이라 하지 않은가. 이름값을 내세워 날림으로 쑥쑥 책을 뽑아내는 경우와는 대비되는 대목이다. 대중서로서 손색이 없다. 2만2000원
〈이기환 선임기자〉
'책과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방전까지 신문 1면을 장식한 사건들-<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 (0) | 2009.01.10 |
---|---|
광개토태왕 경험·지혜 배워라- 윤명철 <생각의 지도를 넓혀라> (0) | 2007.07.06 |
인류기원의 열쇠 ‘DNA’- 마틴 존스 <고고학자 DNA 사냥을 떠나다> (0) | 2007.04.06 |
18세기 천재들 ‘벽과 치’- <안대회 조선의 프로페셔널> (2) | 2007.03.31 |
서라벌 인구가 100만…삼국유사는 사실일까- 이기봉 <고대도시 경주의 탄생> (0) | 2007.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