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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역사상 최강의 활쏘기 달인은?

 “그대는 어디서 왔는고?”(송양)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모처에서 도읍했느니라.”(주몽)
 “무슨 소리! 우린 여러 대에 걸쳐 왕노릇을 했노라. 땅이 좁아 두 사람의 왕이 필요없다. 어떠냐. 내 부하가 되는 것이….”(송양)  
 “웃기는군! 신의 자손도 아닌 당신이야 말로 천제를 계승한 내 밑에 엎드려야 하는 것이 맞다.”     

 

  ■주몽과 송양의 활쏘기 결투
 기원전 37년,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왕(주몽)은 비류수로 사냥을 떠났다가 강물 가운데로 채소잎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상류에 사람이 살고 있음이 분명했다. 사냥을 겸하며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주몽은 그만 비류국 국경을 넘어 비류국왕인 송양과 마주쳤다. 말이 사냥이지, 영토확장을 위한 침범이 분명했다. 송양은 주몽이 자꾸 ‘천제의 아들’ 운운하자 빈정이 상한 나머지 ‘잔소리 하지 말고 내 밑으로 들어오라’고 비아냥댔다. 한치의 양보도 없던 두 사람은 극심한 말다툼을 벌였다. 송양은 22살 밖에 안된 새파란 젊은이가 말끝마다 ‘천제’ 운운하자 그만 ‘해서는 안될’ 결투를 신청한다. 

 전형적인 집단사냥의 모습을 보여주는 약수리 고분의 벽화. <삼국사기> ‘온달전에 나오는 낙랑언덕에서의 사냥대회 모습인 듯 싶다.

“네가 천제의 아들이라고? 그럼 한 번 활쏘기로 너의 재주를 시험해보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몽의 활솜씨를 꿈에도 몰랐던 송양의 ‘아차 실수’였다. 주몽이 누구던가.
 “주몽이 어릴 적에 어머니에게 ‘파리 때문에 잘 수가 없으니 활과 화살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어머니가 갈대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주었다. 주몽이 물레 위에 앉아 시위를 당기자 쏘는 족족 파리를 맞혔다. 부여에서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했다.”(이규보의 <동명왕편>)   
 하필이면 이런 타고난 ‘신궁(神宮)’에게 활쏘기 결투를 신청하다니…. 처음부터 승부가 되지 않았다. 송양은 사슴을 그려놓고 100보 밖에서 시위를 당겼는데, 화살이 사슴의 배꼽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데도 송양의 얼굴은 힘에 부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몽이 씩 웃으며 100보 밖에 옥지환(玉指環·옥반지)를 두고 시위를 당겼다. 화살을 정통으로 맞은 옥지환은 ‘마치 기와장 깨지듯’ 산산조각났다.
 만약 ‘보(步)’가 사람의 보폭을 뜻한다면 100보는 70m(보폭이 70㎝일 경우) 정도 된다. 그 경우 요즘 양궁 경기의 거리(70m)와 비슷하다. 그런데 만약 보(步)가 ‘거리의 단위’라면? 조선조 <경국대전>이나 <문헌비고> 등에 나오는 1보는 요즘 거리로 대략 120㎝ 된다, 100보라면 무려 120m. 그 거리에서 지름 3㎝도 안될 옥반지는 눈에 잘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거리에서 옥반지를 산산조각 냈다면, 주몽의 활솜씨는 가히 신묘의 경지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기가 죽은 송양은 그로부터 몇 달 뒤 주몽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유명한 무용총 수렵도. 달리는 말 위에서 몸을 돌려 도망가는 짐승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고단도의 활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국왕배 사냥대회’ 우승자 온달
 창업주가 이랬으니 고구려의 활쏘기 풍습은 어땠을까.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3월3일 낙랑의 언덕에서 국왕과 신료들이 참가한 가운데 대대적인 사냥대회를 벌이고, 그 날 잡은 짐승들로 제사를 지냈다”(<삼국사기> ‘열전·온달전’)고 한다. 평원왕(재위 559~590년)의 딸 평강공주와 혼인한 온달 장군도 “말을 타고 사냥대회에 나서 남보다 앞서서 포획하는 짐승이 많아 따를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아 짐승을 잡는 기술? 이것이 바로 고구려 고분에 흔히 등장하는 사냥장면일 것이다.
 무용총 벽화에서는 기마무사가 내닫는 말 위에서 몸을 반대방향으로 돌려 활을 쏘는 고난도의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흰 말에 화려한 복장을 갖춘 것을 보면 왕·귀족이 분명하다. 말을 타고 달려 달아나는 호랑이를 쫓으며 활을 쏘는 장면도 있다. 호랑이는 오랫동안 쫓겼는지 입을 크게 벌린, 지친 모습이다.
 약수리 무덤의 집단사냥 벽화에서는 몰이꾼들이 짐승을 몰고, 여러 명의 사수들이 짐승을 잡는 모습이 보인다. 어떤 이는 한 대의 화살로 노루 세마리의 목을 꿰뚫었다. 다른 사람은 등에 화살을 맞은채 산으로 기어오르는 호랑이를 향해 명적(鳴鏑·소리화살)을 겨눈채 쫓아간다. 장천 1호분과 덕흥리 무덤에도 범·멧돼지·곰 등을 활로 쏘는 장면이 나온다. 무사들의 화살이 도망가는 동물을 쓰러뜨리고, 궁수들은 쓰러지는 사냥감을 쳐다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해마다 봄철 3월3일 낙랑언덕에서 사냥대회의 장면이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국왕배 사냥대회’ 같은….

 

 ■활쏘기로 관리 선발한 신라
 같은 부여계 후손인 백제라고 다를까. <후주서> ‘백제전’에는 “백제는 기사(騎射), 즉 말 타고 활 쏘는 일을 좋아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아닌 게 아니라 다루왕(재위 28~77)은 31년 한 쌍의 사슴을 잇달아 맞혀 주위의 찬사를 받았다. 고이왕(234~286)은 236년 강화도에서 손수 사슴 40마리를 쏘아 맞혔다.
 동성왕(479~501)은 백발백중의 명사수였다고 한다. 동성왕은 삼국의 임금 가운데 가장 많은 7차례나 사냥에 나섰다. 하지만 마지막 사냥터였던 사비성 서쪽에서 폭설을 만나 마포촌에서 묵었다가 백가라는 신하가 보낸 자객의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
 신라인들도 활쏘기를 즐겼다. <수서>와 <구당서>, <신당서> 등을 보면 “해마다 한가위 잔치 때 임금의 주재로 관인(官人)들이 활쏘기를 겨뤄 말과 베를 상으로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추석 때마다 <국왕배 공무원 궁도 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삼국사기> ‘원성왕조’는 “원성왕 4년(788) 독서삼품과를 제정하기 전까지는 오로지 활쏘는 것으로 인물을 선발했다.”고 기록했다. 아니 활쏘기 성적만으로 관리를 뽑았다니…. 그러고 보면 해마다 추석에 열리는 공무원 궁도대회는 그야말로 최정예 스타급 선수들이 나서는 왕중왕 대회였을 것이다.

 

남자양궁의 한승훈 선수가 36발 모두를 10저 만점에 꽂아놓은 만점 표적지와 당시의 경향신문 기사.(1994년 6월13일자)   

■이성계의 신출귀몰
 역사상 주몽에 견줄만한 ‘신궁의 후예’가 있었으니 바로 조선조 창업주인 태조 이성계다.
 <태조실록> ‘총서’를 보면 이성계의 활솜씨는 가히 신출귀몰이다. 그의 활과 화살은 남들과 확연히 달랐고, 신묘한 사법(射法)으로도 유명했다. 싸리나무로 화살대를 만들고 학의 깃으로 깃을 달았다. 또 순록의 뿔로 촉을 만드니 촉의 크기가 배(梨)만 했다. 그러니 화살의 힘이 엄청났다. 예컨대 화살 한 발에 까치 다섯마리를 떨어뜨렸다는 일화는 ‘이야기 축’에도 못낀다. 노루 두마리를 꿰뚫은 화살이 풀명자나무에 박혔다. 뒤따르던 이가 ‘화살이 나무에 깊숙히 박혀 뽑을 수가 없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고려 공민왕 때의 일이다. 공민왕은 은 거울 10개를 80보 밖에 두고는 신하들에게 맞히면 이 은거울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조선시대의 척도로 계산해볼 때 1보가 120㎝ 정도 되므로 80보라면 96m에 이른다. 그런데 태조는 이 은거울 10개를 모두 맞혔다. 또, ‘절친’들을 술자리에 초대한 이성계는 100보(120m) 밖의 배나무에 달린 배 수십개를 보고 즉각 활을 쏘아 명중시켰다.
 또 하나의 일화. 원나라에서 벼슬길에 오른 황상(黃裳)이라는 자는 원나라 순제가 감탄할 정도로 명궁이었다. 공민왕과 신료들은 과녁을 150보(180m) 밖에 두고 “두 사람이 한번 겨뤄보라”고 권했다. 까마득한 거리였다. 물론 황상도 명궁이었다. 하지만 연달아 50발을 맞힌 이후에는 힘이 빠져 화살이 번번이 과녁을 빗나갔다. 하지만 이성계의 화살은 백발백중이었다. 공민왕은 그런 이성계를 두고 “정말 비상한 사람”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조선판 퍼펙트골드
 고려 우왕 때의 일이다. 임금이 행궁에 무신들을 모아놓고 활쏘기 대회를 열었다.
 50보(60)m 거리에 과녁을 두었는데, 한 가운데에 주발 크기의 황색 정곡을 만들고, 또 그 정곡 안에 직경 2치 정도의 작은 은(銀)과녁을 만들어 붙였다. 그러니까 10점 골드 과녁(주발크기의 황색정곡) 안에 ‘퍼펙트 골드’(X점·은 과녁)를 더 만든 것이다. 그 X과녁의 직경, 즉 2치는 지금으로 따지면 6㎝ 정도?
 물론 이성계는 정확히 그 X과녁에 화살을 명중시켰다. 이성계의 활쏘기는 촛불을 밝힐 때까지 계속됐으며, 우왕은 이성계에게 말 3필을 하사했다.
 이성계의 의동생인 이두란(퉁두란)이 이성계에게 귓속말 했다.
 “형님, 세상이 드문 재주를 사람들에게 많이 보여서는 안됩니다.”
 1384년(우왕11년) 임금과 함께 사냥을 나선 이성계는 “오늘 짐승을 쏠 때 등골을 맞힐 것”이라고 ‘예고’ 했다. 과연 그랬다. 이성계가 사슴 40마리를 쏘았는데, 모두 등골을 명중시켰다. 주변 사람들은 신묘한 사법에 탄복했다.
 실전에서도 이성계의 활솜씨는 유감없이 발휘됐다. 1380년 왜적이 쳐들어왔을 때 적군의 기병과 예병이 급습하자 화살 50대를 잇달아 쏘아 적군의 얼굴에 명중시켰다.
 왜적의 장수 가운데 아기발도라는 소년장수가 있었는데, 매우 용맹했다. 15~16살에 불과한 소년장수는 갑옷과 투구를 목과 얼굴에 감쌌기 때문에 틈이 없었다. 이성계가 “투구의 정자(頂子·꼭지)를 쏘겠다”고 예고한 뒤 두 발을 정확하게 맞히자 투구가 떨어졌다. 그 틈에 이성계의 충성스런 부하 이지란이 화살을 날려 아기발도를 명중시켰다. 적군의 기세는 무너지고 말았다.
 1385년 왜구의 침략으로 패색이 짙어가자 군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출정을 자처한 이성계의 급선무는 떨어진 군의 사기를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진중에 70보 거리에 떨어져 서있는 소나무를 보고 군사들을 불러모았다..       
 “자. 내가 소나무의 몇번째 가지에 몇번째 솔방울을 쏠 것이니 잘 보아두어라.”
 그의 화살 7발이 모두 명중됐다. 군사들은 모두 발을 구르고 춤을 추며 환호했다. 사기에 부을 지핀 이성계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2번이나 퍼텍트골드를 맞춘 김경욱 선수. 역사속 신궁인 주몽과 이성계와 견줄 수 있는 신의 기록이었다.

■태양 9개를 쏘아 떨어뜨린 동이의 전설적 명궁
 ‘신궁 계보’의 비조(鼻祖) 격인 전설의 동이계 명궁은 실은 따로 있다. 그가 바로 동이계의 신 혹은 군장으로 알려진 ‘예’이다.
 <산해경>과 <회남자> 등을 보면 태평성대인 요임금 시절, 열 개의 태양이 멋대로 떠올랐다. 이 태양들은 ‘동방의 천제’인 제준과 태양의 여신 희화 사이에 난 자식들이었다.
 태양 10개가 한꺼번에 떠오르자 산천초목이 타기 시작했다. 요임금이 제준에게 도움을 청하자 제준은 ‘동방의 명궁’ 예를 파견한다. 예는 특유의 활솜씨로 태양을 하나하나 명중시킨다. 9개의 태양을 떨어뜨린 후에야 활쏘기를 멈춘다. 하나 남은 태양은 비로소 정상운행으로 지상세계를 비춘다. 예의 활솜씨는 그치지 않았다. 아기 울음으로 상대를 현혹시킨 뒤 잡아먹는 괴물 알유를 화살로 처치한다. 끌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2m나 되는 착치를 역시 사살하고, 9개의 머리로 불을 뿜어내는 구영을 9발의 화살로 죽인다. 이어 사나운 괴조(怪鳥) 대풍과 코끼리까지 삼킨다는 구렁이 파사, 거대한 멧돼지 봉희 등을 모조리 활로 쓰러뜨린다. 예에게 화살은 인간 세상을 구원하는 ‘최종병기’였던 셈이다. 

 

 ■주몽·이성계를 방불케 하는 김경욱과 한승훈의 신(神)기록
 예의 전설이나 주몽·이성계 등의 역사기록을 보면 과장의 혐의가 매우 짙다.
 그러고보면 창업주이거나 혹은 쿠데타(정난) 등을 주도한 격변의 지도자일수록 갖가지 무용담의 주인공이 된다.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범인(凡人)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전설의 무용담을 가미할 수밖에 없으리라. 더욱이 예전엔 사냥이 곧 군사훈련이기도 했고, 사냥터에서 잡은 짐승은 제사에 쓸 제물이 되기도 했으니까, 활쏘기 실력은 지도자의 덕목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가 영웅신화를 만들기 위한 ‘과장’과 ‘포장’이었을까. 그렇지만은 아닐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신출귀몰 활솜씨는 어찌 설명할 것인가.
 또 요즘 사람들이 눈으로 목격한 명백한 증거들도 있다. 바로 동이족 신궁의 계보를 잇는 명궁들의 ‘신화’이다.
 예컨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 출전했던 김경욱 선수를 보자. 그는 70m 거리에서 직경 12.2㎝의 10점 과녁, 그것도 정가운데 퍼펙트 골드를 두 번이나 명중시켰다. 퍼펙트골드를 맞힐 확률은 1만2500분의 1이리 한다, 그것도 두 번이나 맞혔다니…. 그 때의 기록은 마치 <산해경>, <회남자>, <삼국사기>, <동명왕편>, <태조실록>에서처럼 분명하게 남아있다.
 “TV화면이 뻥 뚫렸다. 가운데 과녁에 박힌 화살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10발 가운데 2발이 과녁의 정가운데 숨겨놓은 POV(Point of view) 카메라를 정통으로 맞힌 것이다.”(<경향신문> 1996년 8월2일자)
 또 있다. 그보다 2년 전인 1994년 6월12일, 남자양궁 선수 한승훈은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청주에서 열린 제1회 국제양궁대회 30m 예선에서 360점 만점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것이다.
 36발 모두를 10점 과녁에 명중시킨 것이다. 10점 과녁의 직경은 장거리(70·90m) 12.2㎝, 단거리(30·50m) 8㎝이다. 한승훈이 쏜 36발 가운데 단 2발만이 10점 라인에 걸쳐 있었을 뿐이었다.
 나머지 34발은 안정적으로 직경 8㎝인 10점 과녁 안을 뚫었다. 특히 ‘골드 중의 골드’를 뜻하는 ‘X(직경 4㎝)’ 안에 무려 22발이 꽂혔다. 표적지를 보면 한 점처럼 보이는 곳이 5군데나 있었다. 이는 화살 위에 화살이 꽂혔다는 얘기다. 또 일렬로 7발이 일직선을 그은듯 이어진 곳도 있었다. 상단부엔 4발이 가로·세로 1㎝의 사각형을 그린 듯한 모습으로 찍혀 있었다. 세계 양궁 사상 100년 만에 처음 보는 진귀한 광경에 세계양궁 관계자들이 기립박수를 쳤다.
 그런데 만약 수백 년 뒤 후손들이 이 기사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까. 혹시 지금의 필자처럼 예와 주몽, 이성계의 일화가 ‘다분히 초가 들어간 과장법’이라고 의심하지는 않을까.
 하지만 김경욱과 한승훈의 ‘신(神)기록’은 우리가 분명히 지켜보았던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태양을 9개나 쏘아 떨어뜨렸다는 전설의 명궁인 예와는 비교할 수는 없을지언정 주몽이나 이성계의 활솜씨와는 그런대로 견줄 수 있는 대단한 기록이 아닌가. 여하튼 대단한 동이족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