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다스린 임금 27분 가운데 무려 262년간이나 ‘임금’ 대접을 받지못한 분이 계신다는 거 아십니까.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44곳 중 40곳) 중에 폐위된 연산군(10대·1494~1506)·광해군(15대·1608~1623)묘와 함께 그 임금 부부의 능(후릉)이 빠졌답니다. 그거야 그 부부의 능이 북한 땅(개성)에 묻혀있으니 불가피하다 칩시다. 태조의 정부인이자 태종의 친어머니인 신의왕후 한씨(1337~1391)도 황해도 개풍에 묻혀있어서 제외되었으니 말입니다.
■아들이 15명이나 되었는데…
아니 그런데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대왕 조차도 그 분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답니다. 대체 어떤 분이기에 세종대왕에게도 인정받지 못했을까요. 자초지종을 풀어봅시다. 그 문제의 임금이 바로 조선의 제2대 임금인 정종(1357~1419·재위 1398~1400)입니다. 정종은 태조 이성계의 둘째아들인 영안대군 이방과인데요. 나름 고려 말에 왜구 토벌에 나름의 공적을 세웠답니다. 그러나 조선 왕조 창업에는 참여하지 않아서 태조의 꾸지람을 들었답니다. 사실 차남이었기에 왕위와도 거리가 멀었죠. 그런데 고려의 충신을 자처한 장남(이방우·1354~1393)이 술병으로 죽은 뒤 어쩔 수 없이 맏아들 노릇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천성이 권력하고는 거리가 멀었나 봅니다. 1398년(태조 7년) 정안대군 이방원(태종)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 때는 황급히 성을 넘어 숨어버렸다는 일화도 있어요. 난이 수습되고, 세자 책봉 문제가 불거지자 이방과는 “조선 왕조가 개국하기 까지는 모두 정안군(5남 이방원)의 공이 크며 나는 세자가 될 수 없다”고 버텼는데요. 하지만 이방원이 굳이 사양하자 어쩔 수 없이 세자가 됐답니다.
결국 자식들 간 피바람에 염증을 느낀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의 양위로 임금이 됩니다. 그러나 허수아비 임금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1398년(태조 7년) 11월7일 <태조실록>에 묘한 기사가 등장합니다. 정종이 사가에 있을 때 첩이던 류씨를 후궁으로 들이고 아들을 자처하는 ‘불노’라는 인물을 갑자기 원자로 삼은 겁니다. 사실 정종의 정부인은 정안왕후 김씨(1355~1412)였는데요. 부부 금슬은 매우 좋았지만 자식은 두지 못했습니다. 정종은 대신 8명(혹은 10명)의 첩에게서 15남 8녀의 자식을 두었는데요.
■‘동생과 눈도 마주치지 못한 형’
그런데 정종은 어느날 갑자기 ‘불노’라는 아들을 ‘원자’로 삼았다는 겁니다. 원자가 무엇입니까. 아직 왕세자로 책봉은 되지 않았지만 임금의 맏아들이라는 얘기 아닙니까. 그러자 이방원의 측근들은 바싹 긴장했습니다. 자칫 ‘죽쒀서 개 줄 판’이었으니까요. 이방원의 최측근인 이숙번(1373~1440)은 “공신들이 목숨을 걸고 공(이방원)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는데, 지금 ‘원자’라는 사람이 궁중이 있으니 화근이 될 것”이리고 경고했답니다. 남재(1351~1419)는 대궐 뜰에 나타나 큰소리로 “속히 정안군을 세자로 정해야 한다”고 외쳤고, 이방원의 책사인 하륜(1347~1417)도 2차 왕자의 난(1400년 1월27~28일) 직후 “하늘과 백성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정종을 겁박했습니다.
심상치않게 돌아가는 낌새를 눈치챈 정종은 당신이 원자로 삼은 불노를 두고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정종는 한술 더 떠 슬하의 아들 15명에게 “전원 출가하라”는 명까지 내립니다. 정종도 사람이어서 잠깐 권력욕심을 부렸다가 ‘앗 뜨거’ 싶었나봅니다. 정치, 아무나 하는 거 아니죠.
오죽하면 정종의 정부인인 정안왕후가 동생(이방원) 이야기만 나오면 부들부들 떠는 남편(정종)에게 “전하께서는 왜 동생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느냐, 빨리 양위해서 편히 사시라”고 간곡하게 청했다고 합니다.(<연려실기술>) 아닌게 아니라 이복 동생들을 무참히 죽이고, 동복 형(방간·미상~1421)까지 쫓아낸 이가 동생(이방원)이 아닙니까. 정종이 불노를 세자로 고집했다면 아마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상왕’ 보직이 더 행복했던 임금
정종은 왕위를 동생에게 내주려 합니다. 원래는 동생을 후사로 책봉했으니 ‘왕세제’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정종은 “지금 이 순간 과인은 이 아우를 아들로 삼겠다”고 선언하고 동생을 ‘왕세자’로 책립했습니다. 정종은 동생을 세제가 아닌 세자로 삼아, 즉 양자로 삼아 대를 잇게 한 거죠.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이방원의 입김이 작용했겠겠죠. 이방원으로서는 ‘두차례의 골육상쟁에 이어 형의 왕위까지 찬탈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는 없었겠죠. 가장 좋은 방법은 태조로부터 직접 왕통을 승계한 것으로 종통을 꾸몄던 겁니다. 정종은 그 해 11월(1400년) 동생 정안군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상왕으로서 정종의 삶은 외려 행복했답니다. 격구와 사냥, 온천, 연회 등을 즐기면서 19년 간이나 살다가 1419년(세종 1년) 승하했습니다.
■조선의 2대 임금은 ‘공정왕’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조선의 2대 임금을 ‘정종’이라 했죠. 그러나 정작 왕실이 공식적으로 올려주는 ‘정종’ 묘호를 받기까지 무려 262년이나 걸렸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여기서 세종대왕(1418~1450)이 등장합니다. 세종은 정종 사후에 묘호를 내려야 할 때 매우 이상한 말을 남깁니다. 즉 “과인의 생각으로는 사시(賜諡·명나라가 내려주는 묘호)만이 허락될 뿐, 사시(私諡·조선 조정이 올리는 묘호)는 올릴 수 없을 것 같다”(<세종실록> 1419년 11월 29일)고 발언한 겁니다.
세종의 이 발언 때문에 정종은 명나라가 내려주는 ‘공정’의 묘호만 인정되고, 조선 조정이 공식적으로 내리는 묘호(정종이나 태종이나 세종과 같은)는 받지 못했답니다. 명나라가 내리는 묘호는 어쩔 수 없이 받아야겠지만 조선 왕실에서는 절대 정통으로 인정해주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조선의 2대 임금은 ‘공정왕’이라고만 했답니다.
■태조와 태종의 차이
세종은 왜 이런 각박한 결정을 내렸을까요. 한마디로 큰아버지인 공정왕을 조선의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종의 속내는 어머니(태종의 정비·원경왕후 민씨·1365~1420)의 승하 직후 능의 조성을 두고 논의를 벌이면서 드러납니다. 즉 세종은 “부왕(태종)의 승하하신 뒤에는 반드시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으실 것”(<세종실록> 1420년 7월17일)이라고 한겁니다. 이 무슨말일까요.
세종은 만약 부왕이 돌아가시면 그 묘호를 ‘태종’으로 정하겠다는 뜻을 확고하게 밝힌 거죠. 이 대목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예로부터 창업군주에게는 주로 ‘태조’의 묘호를 붙였고, ‘태조’를 계승한 이를 ‘태종’이라 했거든요. 그래서 중국 송나라-요나라-금나라-원나라가 줄줄이 2대 황제를 태종이라 했답니다. 한마디로 ‘태종’은 태조의 적통인 제1대 종자(宗子)에게 올리는 묘호였던 겁니다.
그런 예법이라면 태조 이성계의 뒤를 이은 2대 국왕, 즉 훗날 정종이 되는 공정왕의 묘호는 당연히 ‘태종’이어야 했죠. 하지만 정종은 ‘태종’은 커녕 묘호 조차 받지 못한채 ‘공정왕’의 이름을 얻는데 그쳤던 겁니다. 세종은 곧 “조선의 적통은 ‘태조-정종-태종’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태조-태종’으로 곧장 이어진다”는 것을 선언한 거죠.
■“원래 태종의 나라였다”
세종의 이러한 발언은 후대 임금들에게도 금과옥조가 됩니다. 공정왕의 묘호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양위를 받은 태종과, 예의범절이 지극한 세종이 공정왕에게 묘호를 내리지 않은 데는 ‘반드시 그 깊은 뜻이 있었을 것(必有深意)’”이라는 조정의 공론이 일었습니다. 그나마 1469년(예종 1년) 예종이 공정왕에게 ‘희종’이라는 묘호를 내리도록 결정했습니다.(<성종실록> 1475년 1월 15일)
그러나 예종이 갑자기 승하하는 바람에 무위에 그쳤답니다. 성종 때(1482년 7월 20일) 또다시 이 문제가 거론되자 일부 신료들이 ‘태종과 세종의 깊은 뜻(深意)’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적시했답니다.
“(왕자의 난 이후) 나라는 태종의 소유였는데, 다만 형제의 차례 때문에 공정왕에게 양보했습니다. 공정은 즉위 3년 만에 태종에게 도로 양위했는데….”
원래 태종의 나라였는데, 나이 때문에 잠시 형(공정)에게 맡겼고, 그것을 3년 만에 되찾았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공정왕의 나라는 원래부터 없었다는 겁니다. 태종은 처음부터 형을 ‘적통 임금’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뜻이죠.
이후에도 홀대는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정종의 신위는 제사 때도 철저히 무시됐는데요. 더욱이 정종의 신위는 성종 때 영녕전의 협실로 쫓겨났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제사 때도 무시 당했죠.
예컨대 1475년(성종 6년) 회간왕(1438~1457)의 부묘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공정왕이 종묘의 정실에서 협실로 쫓겨나는 일이 벌어집니다.(<성종실록> 1475년 9월16일) 즉 성종의 아버지이자 인수대비의 남편인 회간왕은 20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는데요. 회간왕이 덕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그 신위가 종묘로 옮겨 봉안하게 됐는데, 그 때 공정왕이 우선 순위에서 밀려 협실로 쫓겨난 거죠. 정식군주였는데도 추존왕에게 밀린 셈이니 얼마나 원통했겠습니까.
■“그 분들도 불편했을 것”
공정왕의 한은 승하한 지 262년이 지난 숙종 7년(1681년)이 돼서야 풀립니다. 그해 5월18일 선원계보(왕실족보) 교정청이 어첩(왕실의 계보를 뽑아서 적은 접책)을 수정하던 중 열성조의 묘호 가운데 공정왕의 묘호가 빠진 것을 발견하고 숙종에게 보고한 겁니다. 숙종은 이후 4개월간이나 대신들의 자문을 받는데요. 결론은 공정왕의 묘호가 빠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반드시 받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영중추부사 송시열(1607~1689)의 상언이 재미있었죠. 즉 “태종이 평소 조용히 살고자 하는 공정왕의 뜻을 받들어 묘호를 올리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편치 않았을 것”(<숙종실록> 1681년 9월14일)이라 했습니다. 꿈보다 해몽이 좋지만 뭐 어떻습니까. 숙종이 “당장 묘호를 올리라”는 명을 내리자 불과 4일 후인 9월18일 공정왕의 묘호를 ‘정종(定宗)’으로 정했답니다. ‘백성을 편안하게 했다(定)’는 뜻을 담았습니다.
무려 262년만의 복권이었던 셈이죠. 뭐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정종으로서는 임금 노릇 하고싶어서 한 것도 아니고요. 그나마 빨리 그 짐을 벗어던졌으니 발 쭉 뻗고 마음 편히 오래 산 것이 아닐른지요. 지금 정종과 정안왕후의 무덤(후릉)은 지금 북한에 뚝 떨어져 있어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지도 못했지만 뭐 어떻습니까. 통일이 되거나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추가 등재될 수도 있겠죠. 그게 대수겠습니까.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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