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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十’…경주서 발견된 광개토대왕 유물에 새겨진 비밀코드

1933년 4월 3일이었습니다. 경주 노서리에 살던 주민이 호박을 심다가 장신구 10여점을 발견했습니다.  
즉각 신고가 이뤄졌고, 총독부 박물관은 발굴전문가로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1907~2011)를 급파합니다. 발굴결과 순금제 목걸이 33점과 곡옥·관옥·환옥 달린 목걸이, 순금제 귀고리 등 수십 여 점의 유물을 수습했습니다. <조선시보>는 4월9일부터 20일과 21일까지 ‘고고학상 중대자료 희대의 귀고리 장식 발견’ 등의 제목으로 대서특필했습니다. 아리미쓰는 유물이 발굴한 곳을 노서리 140호분에 딸린 무덤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발굴은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호우총에서 출토된 청등그릇 세트에는 ‘광개토대왕’ 관련 명문과 함께 명문의 맨 윗부분에 ‘#(井)’ 자 혹은 문양이, 명문의 맨 마지막에는 ‘十’ 자 혹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十’자는 그냥 ‘10’을 기리킨다고 보아 ‘광개토대왕의 서거’를 기리는 청동그릇을 시쳇말로 ‘리미트 에디션’, 즉 한정판으로 제작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그렇다면 이 청동그릇은 한정판 중 10번째 그릇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 국립박물관의 <호우총·은령총 발굴조사보고서>, 을유문화사, 1948년


■한국-일본-미국 합작발굴 
1945년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은 현해탄을 건너 귀국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해방후 국립박물관장이 된 김재원 박사(1909~1990)의 눈에 띈 이가 바로 일본인 아리미쓰였습니다. 아리미쓰는 패망후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한국인에게 인계하느라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아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일본 교토대(京都大)를 나와 15년간 식민지 한국땅에서 발굴조사를 했던 고고학자였습니다.
급기야 1945년 12월 3일 인수인계가 마무리되어 아리미쓰는 귀국선을 타야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김재원 관장이 막아섰답니다. “이제 해방이 되었으니 우리 손으로 발굴조사 좀 해봐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1933년 4월9일자 <조선시보> 기사. 경주 노서리의 주민 김인동씨의 아버지가 호박을 심다가 금제 장신구를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고고학상 중대자료이며 희대의 귀고리 장식이며 삼국시대 왕족의 유품이라고 흥분했다.

“아니 그럼 우리끼리 하면 될 거 아니냐, 왜 일본인을 곁에 두느냐 하는 의문이 들겠죠. 불행히도 우리에게는 발굴경험이 전무했답니다. 일제강점기에 여러 발굴을 했지만 일본인들은 새끼줄을 쳐놓고 한국인의 출입을 철저히 막아놨으니 뭐 발굴을 배울 재간이 없었죠. 해방이 되었지만 당시는 미군정청 치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리미쓰를 귀국하지 못하도록 미 군정청의 양해를 얻었습니다. 당시 발굴은 미 군정청의 본부가 있는 동경 맥아더 사령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때 미군정청 문교부 교화국에서 한국 미술 및 역사보호 담당이던 유진 크네즈(1916~2010)가 동분서주 한 끝에 발굴허가를 이끌어냈습니다. 미군정청은 발굴비용까지 댔답니다. 발굴대상으로는 아리미쓰가 1933년 미처 마무리하지 못했던 ‘노서리 140호분’으로 낙착되었습니다. “하는 김에 경주의 단독고분 중 가장 큰 봉황대(지름 82m, 높이 22m) 고분을 파보면 어떠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발굴 경험이 없는데 괜히 팠다가 감당못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지배적이었답니다.

조선시보 1933년 4월 20일과 21일자가 연속으로 노서리 140호분의 발굴소식을 전하고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파견된 아리미쓰 교이치가 발굴했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일본인 아리미쓰의 조사는 해방후 우리 손의 첫발굴로 이어졌다.


■‘쎈세이순’한 발굴성과
마침내 1946년 5월 2일부터 노서리 140호분을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발굴 12일이 지난 뒤인 5월14일 엄청난 유물이 노출되기 시작합니다. 1948년 발간된 <호우총과 은령총 발굴조사보고서>(국립박물관)가 전하는 그 날짜 발굴 일지는 “(1946년) 5월14일…청동제 용기를 채취(採取)했는데, 용기의 밑부분에 명문이 나타나 큰 ‘쎈세이순’을 일으켰다. 16자 외에도 무슨 기호 같은 것이 있다”고 기록해놓았습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만주 호태왕비문에서와 같은…‘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이라는 명문이 있다. 약 1530년전 당시 신라와의 관계가 깊은 고구려에서 서거한 광개토대왕의 유업을 사모하여 제작한 그릇을 신라에 보낸 것….”(1946년 5월25일)

1948년 간행된 <호우총·은령총 발굴조사보고서>는 청동그릇에 보이는 ‘광개토대왕 명문’이 중국 지안(集安)의 광개토대왕비문 글씨와 동일인이 쓴 것처럼 비슷하다고 기록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광개토대왕비문과 동일인의 필적?
한마디로 경주의 호우총에서 고구려 정복왕인 광개토대왕의 유물이 발견된 것입니다. 깜짝 놀랄만한 발굴성과였죠. 발굴보고서도 “이 청동기는 이번 경주발굴에서 가장 중대한 발견품이며 고적발굴사상 특필(特筆)할 만하다”고 흥분했습니다.
특히 청동항아리 명문의 글씨체가 1883년 중국의 지안(集安)에서 발견된 광개토대왕의 비문과 동일인의 필적인 것처럼 흡사했구요. 글자구성과 내용도 거의 같았습니다. 발굴자들은 그 청동기가 고구려에서 제작되어 신라에 운반된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일단 그 고분의 명칭은 ‘노서리 140호’에서 ‘호우총’으로 바뀌었습니다. 주인공을 모르는 고분의 경우 도드라진 출토유물의 특징을 따서 이름을 붙입니다. 140호 고분의 경우 ‘호우(壺우)’(항아리와 그릇)에서 명문이 나왔다고 해서 ‘호우총’이란 명칭을 얻게 됩니다.

전국 삼국시대 유적에서 ‘#’문양이나 ‘우물 井’자가 새겨진 토기 등이 종종 출토된다. 제작지나 제작지, 혹은 주문처를 표시했거나 귀신을 쫓는 벽사의 의미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누가 가져온 청동그릇일까
궁금증이 난무했답니다. 먼저 ‘을묘년’은 어느 해일까요. 광개토대왕(재위 391~412년)이 서기 412년에 죽고 난 지 3년 후가 되는 서기 415년에 해당하고, 따라서 이 청동항아리는 그 해에 제작된 것이 분명했습니다. 누가 이 청동항아리를 신라에 가져왔고, 누구를 묻을 때 이 항아리를 넣어준 것일까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복호’라는 인물이 일단 손꼽힙니다.
즉 “412년(실성왕 11년) 고구려에 갔던 복호가 418년(눌지왕 2년) 제상 나마와 함께 돌아왔다.”(‘신라본기·눌지왕조’)는 기록이 눈에 밟힙니다. 신라 제17대 내물왕(356~402)의 왕자이자 눌지왕(417~458)의 동생인 복호(卜好)가 412년 인질의 신분으로 고구려에 갔다가 6년 만인 418년에 신라로 돌아왔다는 기록입니다.

<호우총·은령총 발굴조사보고서>(1946년·국립박물관)에 실린 호우총 출토 유물들. 유물의 연대로 보아 6세기 전반 무렵에 조성된 고분으로 추정된다.국립중앙박물관 아카이브·장상훈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완 제

그렇다면 그 복호와 이 호우총 유물이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학계에서는 고구려가 이 청동그릇을 415년 광개토대왕 서거 3주기 혹은 안장 1주년을 기념해서 광개토대왕을 추모하고,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때 마침 인질로 와 있는 복호에게 기념으로 준 것일까요. 그게 맞다면 복호가 신라로 돌아올 때 그 항아리를 가져왔고, 훗날 그가 죽자 함께 묻어 주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고분의 주인공은 복호가 됩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맹점이 하나 있습니다. 호우총의 연대는 출토된 유물의 연대로 미루어볼 때 6세기 전반 쯤으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이 청동 항아리가 제작된 시기(415년)와 100년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게 너무 무리한 주장이라면 할아버지(복호)의 유품을 대대로 간직하고 있던 직계자손이 묻힌 무덤이라는 견해도 나올 수 있겠네요. 다르게 본다면 이럴 수도 있죠. 이 청동항아리를 당시 광개토대왕을 기리기 위한 제사에 참석했던 신라 사절이 가져온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죠, 

호우총 발굴모습. 헤방 후 첫발굴이 대박박굴이 되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十’자의 정체…‘리미티드 에디션’일까 
또다른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호우십(壺우十)’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호우’란 ‘술과 같은 무엇을 담는 용기(사발)’로 보면 되겠지만 ‘十’의 의미는 알쏭달쏭합니다. 발굴보고서는 “해석이 곤란하다”면서 “그 경우 이 十자를 다만 여백을 채우는 의미로 보아야 할 줄 안다”고 얼버무려 놓았답니다. 그러나 혹자는 그냥 숫자 십(十)으로 보면 된다고 합니다. 415년 광개토대왕을 기리기 위해 기념으로 10개를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청동항아리는 엄청난 ‘리미티트 에디션(한정판)’이 되는 셈이 아닌가요. 그 10개 중 1개가 신라에 왔다면 얼마나 값어치가 대단했을까요.  

호우총에서 발견된 유물. 유리 눈알에 푸른 빛 홍채를 옻칠한 나무에 표현했기 때문에 발굴자들의 등골이 오싹했다고 한다. 이 유물은 훗날 백제와 가야지역에서 종종 출토되는 화살통 장식으로 밝혀졌다.국립박물관의 <호우총·은령총 발굴조사보고서>, 을유문화사, 1948년에서


■#(井)은 해시태그인가 우물인가
또하나 해결해야 할 궁금점이 또 있네요. 바로 명문 윗부분에 새겨진 ‘우물 井’자 혹은 ‘#문양’입니다.
당시의 발굴보고서는 “井(#)자형은 이 보이는데 이 역시 무슨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고 여백을 메우는 한 장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는데요.
소설가 최인호씨는 소설 <왕도의 비밀>에서 이 ‘#’자는 고구려의 정복군주 광개토대왕을 상징한다고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학자들의 반응은 “제대로 된 논문조차 거의 없다”면서 섣부른 추정을 삼가고 있답니다. 
‘#’가 새겨진 유물은 호우총 한곳에서만 출토되는 것은 아닙니다. 1997년 풍납토성에서도 발굴됐고, 구의동 아차산 4보루에서도 발견되는 등 끊이지 않고 확인되고 있어요. 
삼국시대 토기 중에는 井, 小, X, 工, 大, 卍자 모양이 새겨진 경우가 많답니다. 이를 두고 제작지와 제작자, 혹은 주문처를 표시한 것이거나 벽사(피邪·귀신을 쫓는 것)의 의미일 수 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뭐 웃자고 하는 얘기지만 최근 #문양이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뜨고 있죠. ‘해시태그(hashtag)’ 운동인데요. 아시다시피 ‘해시태그(hashtag)’는 게시물에 일종의 꼬리표를 다는 기능이죠. 특정 단어 또는 문구 앞에 해시(#)를 붙여 관련정보를 한곳에 묶을 때 사용합니다.
안그래도 고구려 호우총에서 발견된 청동그릇에 새겨진 #표시가 대체 뭔지 몰랐었는데…. 이제야 알 것 같다구요. 고구려인들이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라 새긴 것이 해시태그 운동의 표시일 수 있다구요. 그저 웃자고 하는 얘기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사진에 찍힌 ‘호우총 발굴조사’ 기념사진. 해방 후 최초의 고고학 학술발굴이었던 호우총 조사는 발굴주관은 한국, 발굴지도는 일본(아리미쓰), 발굴장비와 비용은 미국(군정청)이 나눠 맡은 국제발굴이기도 했다. 발굴현장에 김재원 국립박물관장 등 한국측 조사단원과 일본인 아리미쓰, 미국인 크네즈 대위 등이 모였다.장상훈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제공


■화살통을 귀신가면으로 오해
한가지 여담을 소개해드리자면요. 호우총에서는 발굴자들을 평생 가위 눌리게 한 유물이 출토됐는데요.
나무로 만든 위에 옻칠을 했는데 눈알은 유리이고 그 홍채에 해당하는 부분은 푸른빛이었으니 발굴자들이 소름끼칠 만했죠. 당시 연구자들은 그 유물을 ‘방상씨면’이라 규정하고 “방상씨는 웅피(熊皮)를 쓰고, 황금 눈 넷을 단 면을 쓰며 무기를 들고 역귀를 몰아내는 존재”라는 <주례(周禮)>를 인용했어요. 
그러나 이 유물은 훗날 백제·가야지역에서 종종 발견되는 화살통이었답니다. 화살통을 역귀를 몰아내는 무서운 존재로 여기고 호들갑을 떨었다니 쓴웃음이 나옵니다.
호우총 발굴은 광복 후 최초의 고고학적인 학술발굴이었고 발굴주관은 한국, 발굴지도는 일본, 발굴 장비와 발굴비용은 미국이 각각 담당한 최초의 국제발굴이라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또하나의 여담. 
발굴이 끝난 뒤 김재원 관장은 일본인 아리미쓰를 지프에 태워 부산 부두까지 태워주었답니다. 아리미쓰는 한국 국립박물관의 환대를 받는 몇 안되는 일본인이었는데요. 1967년 방한 때에는 때마침 회갑(11월10일)을 맞아 한국측이 회갑연까지 베풀어 주었답니다. 1907년생인 아리미쓰는 2011년 향년 104살의 천수를 누리고 타계했습니다. 일본인이지만 그나마 해방후까지 한국의 최초 고고학발굴에 도움을 주었으니 그렇게 장수한 것이 아닐른지요. 경향신문 선임기자
(이 기사를 쓰는데 장상훈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의 도움말과 자료 제공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