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30일 저는 매우 유서깊은 곳을 다녀왔는데요. 아주 좋은 곳은 아니구요. 바로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현장의 유물 중 하나인 삼전도비를 다녀왔습니다.
다녀오고 나니까 1월 30일이더라구요. 그 날이 1637년 1월30일이 바로 삼전도의 굴욕사건이 있던 날이잖아요. 물론 당시엔 음력이었으니까 양력으로 따지면 1637년 2월24일로 환산되더군요.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음력 1월30일로 기억되니까 뭐 겸사겸사해서 답사한거라구 저는 생각했습니다.
■수난당한 삼전도비
비문을 보면 맨 윗부분에 ‘대청황제공덕비’라는 글자가 보이는데요. 비석 앞뒷면에 만주어와 몽골어, 한자어 등으로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한 과정과 청 태종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새겼다는 데요. 세부 글자는 잘 보이지 않더군요. 비석 옆에는 다소 작은 크기의 받침돌 한개가 놓여있는데요. 원래 이런 크기로 비석을 새우려 했다가 “더 큰 비석을 세우라”는 청나라의 요구 때문에 할 수 없이 옆에 큰 비석을 만들다고 합니다.
삼전도비는 1895년(고종 32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뒤 땅속에 묻혔다가 일제강점기인 1917년 조선총독부가 다시 세웠고요. 1956년 당시 문교부가 주도해서 다시 땅속에 묻혔답니다.
이후 홍수로 버려진 비석의 모습이 드러났고, 다시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니다가 원래 위치(석촌호수 서호 내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세워야 한다는 의견으로 이곳에 정착하게 됐다는군요. 그리 자랑스러운 역사도 아니고, 치욕의 유물이다보니 이리저리 천대받았던 모양입니다.
■하필 예문관 대제학은 공석이었다
그러나 누누이 강조하지만 수치의 역사도 배워야 하잖습니까. 반면교사의 입장에서요.
다들 아시다시피 인조(재위 1623~1649)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항복의식을 펼쳤죠. <인조실록>을 보면 항복의식을 끝내고 강을 건너는 인조에게 청나라 군에 인질로 붙잡힌 1만여 백성이 울부짖었답니다.
“임금이시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吾君吾君 捨我以去乎).”(<인조실록> 1637년 1월30일)
그런데 굴복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죠. 5개월이 지난 1637년 6월, 청나라는 “삼전도에 청 태종의 승첩비를 세우라”면서 “조선이 알아서 비문을 지어 바치라”고 독촉했답니다. 알아서 기라는 얘기였죠.
인조가 문장에 능한 예문관 제학 이경석(1595~1671)과 신풍부원군 장유(1587~1638), 전 부사 조희일(1575~1638)과 이경전(1567~1644) 등을 부릅니다.(<인조실록> 1637년 11월 25일)
인조는 “여러분들이 비문 좀 써야겠다. 매우 급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제가 하겠다”고 손들고 나서겠습니까. 다들 손사래를 쳤습니다. 인조는 “당신들이 아니면 누가 하겠느냐”고 애원했는데요. 부탁받은 신료들은 이때부터 이핑계 저핑계댑니다. 이경전은 “아프다”고 칭병(稱病)했구요. 조희일은 글을 엉망으로 써서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결국 장유와 이경석이 쓴 2개의 비문을 청나라에 보냈어요. 그런데 청나라는 장유의 글에서 예법에 맞지 않는 내용이 있다고 트집 잡았습니다.
결국 청나라는 “(이경석의 글이) 매우 소략하고 전혀 포장하지 않았지만 잘 고쳐 채택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이경석이라고 쓰고 싶어서 썼겠습니까. 이경석의 당시 벼슬은 ‘예문관 제학’이었답니다. 예문관은 국왕의 말이나 명령을 담은 문서의 작성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예문관의 수장인 대제학이 맡아야 했는데요. 아 글쎄 공교롭게도 대제학 자리가 공석이었어요. 재수없게도 이경석이 마침 예문관의 2인자라 할 수 있는 제학(종 2품)이었거든요.(<숙종실록> 1703년 5월21일)
게다가 이경석은 전주 이씨였는데요. 조선의 2대 임금인 정종(재위 1398~1400)의 10번째 아들인 덕천군 이후생(1398~1465)의 6대손이었어요. 그랬으니 뭐 인조 임금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겠죠. 이경석으로서는 빼도박도 못한 딱한 신세가 된겁니다. 인조는 이경석을 불러 “오늘은 저들의 말대로 하세. 나라의 존망이 달려있네. 지금은 후일을 도모할 때네”라고 설득했고요. 이경석은 청나라의 협박에 안절부절 못하는 인조를 보고서 “군주의 욕됨이 이렇게까지 되다니요. 이 한 몸 돌볼 수 없습니다. 꾹 참고 명을 받들겠나이다.”라고 승락했습니다.
■임금(효종) 대신 처벌받은 이경석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완성돼 건립된(1638년) 삼전도의 비문 내용은 이랬습니다.
“상국(청나라)에 죄를 얻은 지 이미 오래됐다.…그런데 우리나라가 미혹하여 깨달을 줄 몰랐다.… 온 국토가 다 망했다가, 종사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우리 동토 수천 리가 모두 다시 살려주는 은택을 받게 됐다. 아 성대하다! 만년토록 황제의 덕이 빛날 것이다.”
이런 내용을 쓴 이경석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이경석은 비문을 고친 뒤 “아! 글을 배운 것을 후회한다”고 한탄했다고 합니다.(박세당의 <서계집>)
어쨌든 ‘굴욕의 이벤트’는 이경석의 희생으로 그대로 종지부를 찍는 듯했습니다. 이경석은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척화파 인물들의 구명운동을 벌이면서 나름대로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1650년(효종 1년)에는 주목할 만한 사건이 터졌는데요. 청나라가 막 즉위한 효종(1649~1659)의 북벌 계획을 눈치챈 겁니다. 청나라는 ‘진상 파악을 하겠다’고 앙앙불락하면서 사신 6명을 잇달아 파견했습니다. 조선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자칫하면 임금(효종)의 머리가 깎이는 치욕을 당할 수도 있다”는 등 온갖 흉흉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런데 이때 이경석이 청나라 사신들을 맞았는데요. 사신들의 추궁은 집요했답니다. 이경석은 “모두 나의 과실이고 우리 임금님과 다른 신하들은 알지 못한다”고 끝까지 주장했답니다. 청나라 사신들은 이경석을 보고 “동국(조선)에는 오직 이 정승 한 사람이 있을 뿐”이라며 감탄했답니다.(<연려실기술>)
이때 이경석은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백마산성(평북 의주)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됐습니다. 임금 대신 처벌을 받은 셈이죠. 그는 3년 뒤인 1653년(효종 4년)이 돼서야 사면을 받아 영중추부사로 임명됩니다.
■‘수이강’ 덕담 속엔 무시무시한 가시가
그런데 말입니다.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1668년(현종 9년) 74세가 된 이경석에게 불똥 하나가 튑니다.
당시 이경석은 최고 영예인 궤장을 하사받는데요. 아시다시피 궤장은 나라에 공이 많은 70세 이상의 늙은 대신에게 내리던 궤(몸 받침대)와 지팡이를 가리키는데요.
이경석은 모든 대소신료들을 초청해서 이른바 자축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당시 유림의 영수였던 송시열(1607~1689)은 축하글을 지어 이경석의 행적을 칭송했습니다. 뭐라 했냐면요.
“(병자호란 때) 영리한 자들은 팔짱을 끼고 물러섰지만~ 공(이경석)만 홀로 생사를 돌보지 않고~ 나라가 무사하게 되었다.~ 공은 하늘의 보우를 받아 ‘오래 살고 편안했다.(壽而康)’”
어떻습니까. 누과 봐도 덕담이죠? 그런데 송시열의 이 ‘오래 살고 평안했다’는 뜻의 ‘수이강(壽而康)’에 무시무시한 독침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수이강’이 뭐냐. 송나라 한림학사 손적(1081~1169)을 일컫는 표현인데요. 손적은 송나라가 금나라에 멸망한 뒤 송나라 황제를 대신해서 항복문서를 지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손적이 쓴 항복문서 내용이 오랑캐에 지나치게 아첨했다고 해서 지탄의 대상이 됐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손적은 오랑캐 진영에서 아첨했으니 오래 살고 편안했구나(壽而康)”라고 비웃었다는 거거든요, 말하자면 송시열은 ‘수이강’의 단어를 인용하면서 슬쩍 이경석을 비난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경석이 별다른 반격을 가하지 않음으로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나갑니다. 이경석은 3년 뒤인 1671년(현종 15년) 세상을 떠나는데요.
■“이경석은 봉황, 송시열은 올빼미”
그런데 이후 소론인 박세당(1629~1703)이 죽은 이경석을 위한 ‘신도비문’을 찬술하면서 역시 고인이 된(1689년) 송시열을 맹비난한 겁니다. 박세당은 이경석을 ‘착한 군자’를 뜻하는 ‘봉황’으로, 송시열을 그런 군자를 꾸짖고 괴롭히는 ‘올빼미’로 묘사한겁니다.
<시경>에 따르면 올빼미는 어미 잡아먹는 아주 나쁜 새로 인식돼왔습니다. 야밤에 아이울음 같은 소리를 내서 그런지 흉조 중 흉조로 인식됐어요. 그러니 어떻게 됐겠습니까. 송시열의 추총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났겠죠. 이들은 “이경석은 청나라 오랑캐를 뜻을 다해 찬양했지만, 송시열은 <춘추>의 대의에 따라 효종(의 북벌론)에게 몸을 바쳤다”(<숙종실록> 1703년 4월 17일)고 이경석을 맹비난했습니다.
당시의 집권당은 노론이었는데요. 당시 임금이던 숙종(1674~1720)이 집권당인 노론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노론의 완승으로 끝났습니다. 숙종은 “박세당이 작성한 이경석 신도문은 물론 박세당의 저작물(<사변록(思辨錄)>)까지 불구덩이에 처넣으라”는 특명을 내렸어요.
■누구든 죄가 없다면 돌을 던져라
1703년(숙종 29년) 이경석의 손자 이하성이 할아버지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립니다. 그러자 실록을 쓴 사관의 논평이 흥미롭습니다.
“이경석이 비문을 지은 것은 마지못해 한 일이다. 그러나 뜻을 다해 포장해서 오랑캐의 공덕을 칭송하고…. 이경석에게 일생의 오점이 되었다.”(<숙종실록> 1703년 5월 21일)
이 무슨 뜻일까요. 이경석이 청나라에 과공비례(過恭非禮)했다는 겁니다. 쓰다듬을 때 쓰다듬더라도 좀 적당히 하지 그랬냐, 뭐 이런 뜻이겠죠.
그러면 어떻게 했으면 칭찬받았을까요. 임금이 “나라의 존망이 그대에게 달려 있다’고 신신당부하는데. 누구처럼 칭병을 해서라도, 또 누구처럼 일부러 엉망으로 글을 지어서라도 피했어야 했을까요.
그렇다면 송시열은 어떻습니까. 좋은 평가를 얻었을까요. 그 역시 좋지못한 평가를 받았답니다. <현종실록>의 사관은 송시열을 ‘병자’ 취급하고 있어요. “송시열이 너무 각박하게 (이경석을) 배척하니 논자들이 병(病)처럼 여겼다”(<현종실록> 1669년 4월14일)고 했답니다.
이 ‘삼전도비문’ 사건은 우리 역사의 부끄러운 얼굴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는데요. 전문가들은 이렇게들 포장합니다. 이경석과 삼전도 비문을 둘러싼 논쟁은 절대 개인간의 감정싸움이 아니라는 겁니다. 병자호란 이후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사회질서를 반영하는 이념투쟁이자 정론대립이었다는 겁니다.
굴욕적인 강화를 맺어야 했던 인조 시대를 지나, 존명반청 정책에 북벌론까지 대두되는 효종 시대를 지나면서 사회분위기가 매우 바뀌었다는 것이고, 그 와중에 이경석이 도마 위에 올랐다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저는 그렇게 믿고 싶기는 합니다. 아울러 저는 삼전도비 맞은 편 롯데월드 놀이기구에서 터져나오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누구든 죄가 없는 자가 (이경석에게) 돌을 던져라.”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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