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통풍구 위에서 치마를 펄럭이던 금발미녀, 풍만한 몸매와 뇌쇄적인 입술, 게슴츠레 반쯤 감은 눈….
메릴린(마릴린) 먼로하면 떠오르는 말이 ‘백치미 섹스심벌’이다.
그러나 ‘섹스심벌’은 맞지만 단언컨대 ‘백치미’는 아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은 독서광이었으니까 말이다. 굳이 붙인다면 ‘독서광 섹스심볼’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1962년 약물과다 복용 등으로 죽은 먼로의 서재를 둘러본 이들은 심지어 사회주의 금서까지 꽂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먼로의 연기코치였던 나타샤 라이테스는 “먼로는 다른 이의 지적 토대 위에 좋은 것을 취해 자기 것으로 흡수하는 정신적인 비치코머(해변에서 물건을 줍는 사람)였다”고 회고했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와 마르셀 프루스트, 토머스 울프 등의 작품은 물론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까지 읽었다.
먼로의 독서 가운데 백미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였다. 가장 위대한 작품이지만 도저히 읽어줄 수가 없는,
그래서 20세기 가장 어려운 문학의 대명사로 꼽힌 <율리시스>를 다름아닌 먼로가 섭렵했다는 것이다. 특히 단 8개의 문장으로 되어 있는 <율리시스>의 마지막 50쪽을 큰 소리로 달달 외웠다.
행바꾸기도, 쉼표도, 마침표도 없이 통제되지 않고 흐르는 작품속 주인공의 부인(몰리 블룸)의 독백을 외워나갔다. 먼로는 “책의 사운드가 너무 좋다. 의미를 알려면 큰 소리로 읽어야 한다”고 했다.
사실 먼로의 율리시스 읽기 방식은 아주 적절했다는 평이 있다.
동양의 고전이 그렇듯 유럽도 10세기 무렵 글쓰기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행바꾸기나 마침표, 쉼표, 단락 등 가독성을 높이는 요소가 전혀 없었다.
때문에 수도원이나 관청 등은 큰소리로 문장을 읽는 소리가 가득찼다. 소리를 내서 읽어야 길고 어려운 문장의 바다에서 내용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단 8개로 구성된 <율리시스>의 마지막 50쪽이야말로 입으로 읽고, 눈으로 보고, 다시 귀로 듣는 세 단계를, 그것도 몇 번 씩 거쳐야 겨우 이해할 수 있는 단계가 되었을 것이다.
먼로의 읽기가 옳은 방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먼로는 왜 그 어렵다는 <율리시스>를 읽어나갔을까.
먼로는 천생 배우였다. ‘배우’로서 철저한 심리분석을 위해 <율리시스>를 연기의 교과서로 삼은 것이다. ‘멍청한 섹시스타’로만 여길 수 없는 반전매력이다.
최근 강원도 인제군 소양강가에 메릴린 먼로의 동상이 선 것을 두고 말들이 많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2월 인제의 미군부대를 찾아와 위문공연을 한 것을 기념했단다. 먼로는 야구스타 조 디마지오와 결혼한 뒤 일본 신혼여행 중에 한국행 위문공연을 제의받고 흔쾌히 응했다.
신랑 디마지오의 마지못한 허락 속에 4일간 10여차례나 공연하고 돌아갔다. 강추위 속에서 펼쳐진 공연모습은 전세계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런 먼로의 방문을 기릴 기념물을 세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인적이 드문 강가에, 그것도 고작 식상하기 이를데 없는 치마 가리는 섹시심볼의 동상이라니….
1954년 공연 준비를 위해 분장실에 있던 메릴린 먼로에게 흥분한 미군장교가 뛰어와서 외쳤다.
“좀 더 일찍 나오셔야겠어요. 더 이상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군인들이 무대 위로 돌을 던지고 있어요.”
이제는 지하의 메릴린 먼로가 저 생뚱맞은 자신의 동상을 보고 돌을 던지지 않을 지 모르겠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이 기사는 ‘슈테판 볼만의 <여자와 책-책에 미친 여자들의 세계사>, 유영미 옮김, RHK, 2015’를 주로 참고했습니다. ‘칼 롤리슨의 <세상을 유혹한 여자 마릴린 먼로>, 이지선 옮김, 예담, 2003’도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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