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감탄사를 연발하는 포인트가 있다. 도심에서 걸어서 오를 수 있는 산이 즐비하다는 것이다. 외국인들은 산을 등지고 강을 마주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자리에 터전을 잡고 살았던 전통 덕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100여 년 전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도 ‘도심 지척의 산’이 그렇게 신기했나보다.
“경성에서 서양인의 피크닉이라 하면 대개 북한산이 통념으로 되어 있었다…지게꾼들을 데려와서 말과 대나무 가마로 간다.”(<외국인이 본 조선외교비화>, 1934)
1894년 7월 관립법어(프랑스어)학교 교장으로 내한한 에밀 마르텔(1874~1949)의 회고이다.
대한제국 시절 궁내부 찬의관을 지낸 윌리엄 샌즈(1874~1946)는 한술 더 뜬다.
“한국땅을 벗어나 휴일을 즐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도시의 옛 궁궐로 소풍을 가거나 산마루에 있는 북한산성으로 탐험을 즐긴다. 아름다운 곳이 헤아릴 수 없고, 모든 계절이 다 즐길 만 했다.”(<비외교적 비망록>, 1930년)
의료선교사이자 외교관인 호러스 알렌(1858~1932)의 북한산 답사기도 흥미롭다.
“삐죽빼쭉하거나 반구형의 암석으로 된 바위투성이 봉우리들로 구성된 ‘국왕의 산성’(북한산성)…한폭의 비단 뭉치를 제멋대로 던져놓은 듯한 한강은 드문드문 솟아있는 산들 사이를 지나 바다까지 뻗어간다…”(‘더 코리안 리포지토리’ 1895년 6월호)
이를 보면 당대 서양인들의 ‘핫플’은 다름아닌 북한산(삼각산·해발 836.5m)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알렌의 표현 중에 북한산성을 ‘국왕의 산성’이라고 한 것이 의미심장하다. 알렌의 일기(1884년 12월 26일자) 중에 관련 내용이 들어있다. 알렌은 “주한 미국 공사관 소속 무관인 조지 클레이턴 포크 중위(1856~1893)가 고종의 청으로 국방시설인 북한산성을 탐방했다”면서 “이곳은 200명으로 1만 적군을 막아낼 수 있는 국왕의 산성”라고 소개했다.
■북한산성 금괴의 소문
1939년 10월 28일 동아일보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전설에는 북한산성의 행궁터에 70만원의 정제 금괴가 묻혀있다고는 하는데….”
이 무슨 소리인가. 산성 행궁터에 다량의 금괴를 묻혀있다는 소문을 전한 것이다. 그러나 신문은 “(금괴는 아니지만) 연전에 이 부근 땅 속에서 막대한 암염과 목탄 수만관을 발굴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전하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북한산성에 농성용 소금과 숯을 묻었다는 소문에 따라 헌병파견부대가 발굴한 결과 두 곳에서 소금 200석을 파냈다”(매일신보 1912년 8월30일자)는 기사가 보인다.
조선시대 정부재정과 군정내역을 모아 놓은 <만기요람> ‘총융청·군저’에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겨있다.
“북한산성 안에 은 1만2250냥(460㎏ 정도)과 소금 50석(구운 소금 100덩이), 숯 2120석을 묻어두었다.”
아마 이런 ‘은의 북한산성 보관’ 기사가 훗날 ‘정제 금괴 매장설’로 둔갑했던 것 같다.
일각에서는 고종이 1905년 을사늑약 직후 황실소유의 금괴 85만냥을 항아리 12개에 담아 비밀장소에 매장했다는 소문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고종이 이 비밀자금으로 중국에서 망명정부를 세우려다가 실패했고, 이것이 일제에 의한 독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금괴를 묻었다는 비밀장소는 어디일까. 조선에서 화폐대용으로 쓰인 은(銀)을 묻어둔 국고가 북한산성이었다면 어떤가. 고종 역시 북한산성을 최후의 보루로 여겨, 그곳에 대한제국의 운명이 달린 금괴를 숨겨놓지 않았을까. 바로 이런 막연한 믿음이 북한산성 금괴매장설을 낳게 했던 것 같다.
■10명이면 수만명의 적을 막아낼 수 있다
이렇듯 100여 년 전부터 서양인들의 피크닉 명소였고, 지금도 서울·경기 지역 주민들의 ‘최애 탐방 및 등산코스’인 북한산이 이른바 ‘보장처’(임금과 조정의 도피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는 “1387~88년 우왕(1374~1388)과 최영(1316~1388)이 요동정벌을 위해 중흥산성(북한산성)을 수리한 뒤 세자인 창(왕)와 여러 왕비들을 피난시켰다”고 기록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던 선조는 1596년 1월28일 ‘소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조치를 취하려 한다.
“전쟁이 10년 안에 그칠 가망이 없고, 또 100년 뒤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으니 삼각산 중흥동에 산성을 수축하라”는 명을 내린다. 병조판서 이덕형(1561~1613)은 북한산을 답사(3월3일)한 뒤 “삼각산의 산세가 높고 험절하여 단 10여명만 있어도 수만명의 적병이 어쩌지 못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하지만 전란 중에 도탄에 빠진 백성을 어떻게 대규모 동원할 수 있었겠는가.
북한산성 축조라는 ‘100년 대계’의 의지도 종전과 함께 퇴색되고 말았다.
그 사이 오욕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난지 불과 30년도 채 지나지 않은 1624년(인조 2), 이번에는 내란이 일어났다. 이괄(1587~1624)의 난이었다. 인조는 할아버지처럼 도성을 버리고 충남 공주로 줄행랑쳤다. 다 쓰러져가던 명나라를 섬긴 대가를 톡톡히 치른 정묘호란(1627년) 때는 강화도로 도주했다. 병자호란(1636~37년) 때는 강화도로 피신하기도 전에 청나라군이 들이닥쳐 우왕좌왕하다 가까스로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그 역시 천혜의 요새라던 남한산성에서 50일 가까이 버텼지만 끝내 항복하고 말았다. 강화도 역시 청나라군에 의해 함락됐다. 그때까지 ‘조선의 2대 보장처’였던 강화도와 남한산성이 속절없이 무너지자 조정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더는 도성을 버릴 수 없다
외우(外憂)와 함께 내환(內患)도 더욱 골칫거리였다.
16~18세기 전세계를 강타한 소빙하기가 예외없이 조선에도 불어닥쳐 냉해와 가뭄, 홍수, 전염병이 창궐했다. 이른바 ‘경신대기근’(1670~71년)과 ‘을병대기근’(1695~96년)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이 사이 요승 여환이 “미륵의 세상이 와서 용이 아들을 낳아 나라를 주관한다’는 등의 해괴한 소문을 퍼뜨렸다.(1688년) 장길산이 출몰했으며, 정씨 성이 국왕으로 등극해서 중국을 공격한 뒤 최씨 성을 왕으로 세운다는 요사스런 소문도 들렸다.(1697년) 떼강도(명화적)가 전국에 출몰했다.(1703년)
만약 이런 외우내환 때문에 난리가 일어나면 국왕은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 임진왜란 때처럼 임금이 멀리 줄행랑 칠 수는 없었다. 숙종은 “(임진왜란 때처럼) 오늘날 인심이 결코 도성을 떠나 멀리 갈 형세가 될 수 없다”(<숙종실록> 1710년 12월1일)고 밝혔다. 그럴만도 했다. 기상이변에 따른 자연재해 때문에 대거 발생한 유민들이 먹고 살기 위해 무작정 상경했다.
1648년(인조 26) 10만 명 남짓이던 서울의 인구는 69년 후인 1717년(숙종 43) 19만명으로 급증했다. 당시 서울은 대동법의 확대시행 등으로 서울로 들어오는 세곡의 물류량이 늘어서 상업도시로 변모했다. 이런 상황에서 외침과 내란이 일어난다고 도성을 비운다면 수십만 서울의 백성들은 어찌 되겠는가.
■수도방위의 방법론
경신·을병대기근의 위기를 일단 넘긴 1703년(숙종 29)부터 ‘유사시의 대책’이 본격 논의된다.
초점은 ‘수도 방위’의 방법론이었다. ‘북한산성 축조론’과 ‘도성방위론’ 등 두가지 안에 격렬한 논쟁을 불었다.
숙종은 ‘북한산성 축조론자’였다. 숙종은 “도성민이 나의 적자(赤子·백성)인데 난리를 맞았다고 어찌 버리고 가겠느냐”(1710년 10월 20일)고 반문했다. 숙종은 “도성은 지키기 어려우므로 백성들과 함께 북한산성에 들어가 지킬 것(與民入守)”이라 했다.
이것을 ‘백성과 함께 지킨다’는 뜻에서 ‘여민공수(與民共守)’라 한다. ‘여민공수’는 도성을 지키되 여의치 않으면 백성들이 모두 배후의 산성에 들어가 최후항전을 벌인다는 일종의 청야전술이었다. 고조선·고구려 때부터 채택해온 전통의 전략·전술이었다.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과연 위급한 시기에 20만명에 육박하는 모든 도성민이 산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할 경우 도성의 종묘사직과 백성들을 모두 적에게 내어주는 격이 아닌가. 차라리 한양도성을 수축하는 것에 힘을 쏟아야 하는게 아닌가.
더구나 경신·을병 대기근 등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있었다. 행사직 이인엽은 “환난에 대비하려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킴으로써) 도리어 난만 부를까 걱정된다”(1703년 4월5일)고 반대했다.
반대론자들은 특히 병자호란을 끝내며 청나라와 맺은 항복조건(7항) 중 ‘새로운 성을 쌓거나 기존의 성을 수축하는 것을 일절 불허한다’는 조항을 상기시키며 반대했다.
7~8년간의 지루한 논쟁을 종식시킨 것은 숙종이었다.(1711년 2월 9일) 숙종은 “여러분의 의견 수렴을 기다리다가 이미 적군이 강을 건너겠다”(<비변사등록>)고 짜증을 내면서 산성의 축조를 최종결정했다.
■12㎞ 성곽을 단 6개월만에 쌓은 비결
‘선조 때부터’ 끈질기게 이어온 북한산성 축조 논쟁이 종식된 것이다.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백운대~만경대~용암봉~문수봉~원효봉~영취봉 등 깎아지른 봉우리들을 굽이굽이 연결, 총 둘레 11.6㎞의 산성을 완성했다. 평지와 산지, 봉우리에 따라 온축, 반축, 반반축 등으로 쌓았다. 낮은 계곡부는 온축으로, 험준한 지점에서는 성벽 없이 여장만 조성한 곳도 있다. 산성의 전체 면적은 여의도의 2배인 5.2㎢ 규모에 달한다.
성곽공사가 1711년 4월부터 10월까지 단 6개월만에 끝났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군기가 바싹 든 삼군문(수도방위사령부) 병사들이 구간별로 사역했고, 승군들도 도왔다.
전국의 축성 장인이 총출동했고, 도성 주민이 노동자가 되어 거들었다.
취약지점인 산성의 서쪽을 보강하는 중성도 구축(1714년)했다. 성문은 16곳(대문 6곳) 마련했다. 임금의 거처인 행궁(124칸·1711년 8~1712년 5월)도 건설했다. 군량미 10만석을 쌓을 식량창고도 7곳 마련했다. 국왕 호위와 수도방위를 담당하는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 등의 지휘부 3곳이 들어섰다.
산성의 내부에 기존의 증흥사 외에 새로운 사찰 10곳과 암자 2곳을 세웠다. 산성을 지키는 이른바 ‘승영사찰’이었다. 정규군(삼군문)은 성곽의 주요진출입로와 창고를 방어하고, 승병들은 성곽의 암문 등 허점을 메우는 역할을 했다.
산성 밑 평지에 비상시에 대비하여 7만석 규모의 군량창고를 설치한다. 이곳이 ‘평창(平倉)’이다. 이 ‘평창’이 있는 곳이 지세가 낮아 수비에 취약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마지막 퍼즐은 탕춘대성
결국 한양도성~인왕산~북한산성을 잇는 또하나의 성이 축조되기 시작했다.(1715년) 이것이 탕춘대성이다.
탕춘대성의 축조공사는 숙종이 승하(1720년)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 하지만 1753년(영조 29)까지 공사가 꾸준히 진행되어 북한산 향로봉~인왕산 동북쪽을 잇는 성곽이 축조됐다. 영조가 부왕의 북한산성 축조 프로젝트에서 마지막 퍼즐이었던 탕춘대성을 맞춘 것이다. 이로써 비상사태시 경복궁을 빠져나와 자하문(창의문)~탕춘대성~북한산성으로 통하는 국왕과 백성들의 피란길이 완성되었다. 이것은 한양도성~탕춘대성~북한산성을 잇는 도성 방어체계의 완성이기도 했다.
1712년(숙종 38) 4월 10일, 숙종이 막 축조가 마무리된 북한산성 행차에 나섰다. 숙종은 어가를 타고, 혹은 내관들의 등에 업혀 동장대(산성 지휘소)에 오른 뒤 감탄사를 연발하며 시 한수를 뽑아냈다.
“…무수한 봉우리 깎아지른듯 구름에 접했네. 도적과 외적이 다가올 수 없고, 원숭이라도 기어오를 수 있을까… 도성 지척에 금성탕지(철옹성) 있으니 내 어찌 우리 백성 수호하는 도성 버리랴.(何棄吾民守漢州)”(숙종 어제시 ‘북한산성 열성어제’)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자격은?
최근들어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이 한양도성과 연계되어 새삼 주목받고 있다.
경기도와 서울시가 3개의 성을 ‘조선시대 도성의 방어체계(가칭)’로 묶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초에는 ‘한양도성’ 하나만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했지만 2017년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로부터 ‘등재 불가’ 판정을 받았다. 이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는 한양도성 한 곳이 아니라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을 연계해서 재도전하라고 권고했다.
경기도 또한 북한산성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등재를 추진하고 있었다. 북한산성의 경우 경기도(고양시)가 69%(374,631㎡·8,008m), 서울시가 31%(140,594㎡·3,592m) 정도를 나눠 관리하고 있다.
경기도 관할 구역의 경우 경기문화재단이 산성 4차례(2013~2017), 행궁 5차례(2013~2018)에 걸쳐 발굴조사를 펼친 바 있다. 산성 발굴에서는 고려 때 축조된 중흥산성의 존재를 밝혀내는 수확을 거뒀고, 성벽의 축조수법과 관련시설 등의 구조를 확인했다. 행궁 발굴에서는 임금이 거처하고 정사를 돌본 내·외전과 행랑, 왕실의 족보를 보관한 보각(추정)의 터를 찾아냈다. 행궁의 둘레는 392m, 현존길이는 250m 가량인 것으로 확인됐다.
필자는 얼마전 1시간 30분의 발걸음 끝에 행궁에 올랐는데, 출입금지를 알리는 금줄 때문에 먼발치에서만 바라보았다.
조사단(경기문화재단)에 문의하니 발굴조사는 완전히 마무리 됐고, 정비 복원계획이 수립중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신명종 재단 학예연구사는 “건물까지 복원할 지, 아니면 터만 남겨둘 지, 또 담장을 세울지 말지, 세운다면 어느 정도의 높이로 세울 지, 일반에 출입을 어디까지 허용할 지 등 정비·복원과 개방 계획을 두고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필자가 행궁터를 답사하고 돌아온 뒤 며칠이 지나자 이번에는 서울시가 탕춘대성의 조사계획을 발표했다. 서울시는 지난 3월 북한산성의 보국문과 대동문의 전면 해체공사를 시작한 바 있다.
■여민공수의 정신만큼은
그렇다면 한양도성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추진되는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은 ‘세계유산감’이 되는가.
우선 북한산성이나 탕춘대성 모두 1711년 축조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산성의 측량결과가 1711년 축성 당시의 연혁과 현황을 기록한 <북한지>의 내용과 일치한다.
또 북한산성이 해발고도 88.5m에서 최고높이 836.5m까지 험준한 산악 지형에 맞춰가며 다양한 축성법을 써서 완성한 17세기 최고의 단일 군사 유산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자연환경을 활용함으로써 불과 6개월만에 축성한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무엇보다 국왕과 20만 백성 모두 함께 들어가서 장기항전을 한다는 목표아래 조성된 군사도시의 성격도 갖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기준인 완전성과 진정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필자는 46년간 장기집권하면서 3번의 친위쿠데타(경신·기사·갑술환국)로 피의 숙청을 일삼고, 그 과정에서 애꿎은 부인(희빈 장씨·1659~1701)까지 죽인 숙종을 ‘극혐’한다. 그러나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더는 나의 적자(赤子·백성)들을 두고 도망갈 수 없다. 이제 임금과 백성이 함께 지킬 것이다”라고 다짐한 ‘여민공수(與民共守)’의 정신 만큼은 높이 사고 싶다.
참, 필자는 행궁터를 발굴한 경기문화재연구원 박현욱 선임연구원에게 재미삼아 한가지 물어본 내용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거액의 정제 금괴가 실려있다는 소문이 보도됐고, 또 <만기요람> 등에 실제로 은 1만2250냥(460㎏ 정도)을 보관했다는 내용이 있던데요.”(필자) “글쎄요. 실제 발굴에서는 금괴는 물론이고, 은(銀)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추가발굴이 필요할 것 같네요.(웃음)”(박현욱 선임연구원)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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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훈, ‘조선후기 지도 속의 북한산성’, <북한산성 사료총서> 제1권(고지도·고사진 모음집), 경기문화재연구원, 2017
고양시·경기문화재연구원, <사적 162호 북한산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등재신청을 위한 학술조사연구총서>(학술총서 2책),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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