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하면 떠오르는 답사코스가 있다. 부여왕릉원(능산리고분군), 부소산성, 관북리, 궁남지, 정림사터, 낙화암, 백마강….
사비백제(538~660) 123년 역사의 숨결이 담겨있는 곳이 아닌가. 결코 백제의 이미지를 벗어난 부여는 생각할 수 없으리라.
그런데 최근 ‘백제와 MZ 세대’를 아우르는 답사코스가 생겼다. ‘가림성 사랑나무’이다. 이름에서부터 역사성이 물씬 풍기는 ‘가림성’과, MZ 세대의 ‘인생사진 핫플’이 된 ‘사랑나무’가 어우러져 있으니 안성맞춤이 아닌가.
지난해(2021년) 10월 부여의 ‘루틴 코스’를 답사하다가 온라인상 ‘부여의 가볼만한 곳’에서 ‘가림성 사랑나무’를 발견했다.
새로움을 좇는 기분으로 성흥산(해발 260m)에 조성된 가림성(성흥산성) 정상부에 오르기 시작했다. 대체 어떤 사연을 품고 있는 나무가 서있기에 감히 ‘사랑’자를 붙였을까. 필시 역사적인 근거도 없는 스토리텔링일텐데….
■‘사랑나무 하트’
마음 한편에 살짝 들었던 회의감은 ‘사랑나무’가 우뚝 서있는 가림성에 오르자마자 말끔히 가셨다.
성의 남문터에 우뚝 서있는 나무 옆에서 보니 부여 시내는 물론이고 논산, 강경, 서천, 익산까지 훤히 조망할 수 있었다. 세상사에 찌든 가슴 속 응어리가 뻥하고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사랑’자가 붙은 나무는 어떤가. 키 22m, 가슴둘레 5m40㎝에 달하는 수령 400년 가량의 느티나무이다. 원뿔 모양의 아름다운 몸집에, 판 모양으로 돌출된 거대한 뿌리 등이 늠름한 자태를 풍긴다. 덕분에 2021년(8월)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그런데 이 나무의 ‘시그니처’는 따로 있다. 바로 하트 모양의 나뭇가지이다. 필자는 답사 당시에는 어떤 가지가 하트 모양인지 발견하지 못했다. 오른쪽 나뭇가지의 모양새가 하트 인가 했지만 어쩐지 반쪽 짜리 같아서 아쉬움만 삼키고 돌아섰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본래 반쪽짜리 하트였던 것을….
그래서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두 장 찍어서 한 장을 좌우로 반전·편집해서 완전한 하트를 만든다는 것을…. 그것이 MZ 세대의 하트놀이이고, 그래서 ‘사랑나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그걸 두고 ‘반쪽 짜리 하트’니 하면서 애궂은 나무 탓만 했으니 전형적인 ‘할저씨’가 아닌가.
‘할저씨’가 알든 모르든 ‘가림성 사랑나무’는 SBS 드라마 ‘서동요’(2005)에서 서동(조현재분)과 선화공주(이보영)가 국경을 초월한 사랑을 키운 나무로 유명해졌다. 이후 ‘대왕세종’, ‘계백’, ‘일지매’, ‘여인의향기’, ‘신의’, ‘대풍수’, ‘육룡이 나르샤’ 등 사극은 물론 현대극인 ‘호텔 델루나’에서도 등장하면서 ‘촬영의 핫플’로 발돋움했다.
■가림성주의 정변
필자는 ‘구시대의 인물’임이 분명하다. ‘사랑나무’가 서있는 ‘가림성’의 파란만장한 역사에 주목하고 있으니 말이다.
‘과거의 가림성’를 알면 ‘현재의 사랑나무’에 더욱 풍성한 이야깃거리가 담기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에서….
지금은 ‘사랑나무 하트놀이’로 유명세를 탄 가림성은 사실 뼈아픈 백제 멸망의 역사를 웅변해주는 유서깊은 성이다.
가림성은 성왕(523~554)이 사비로 천도하기 37년 전인 501년(동성왕 23) 축조된 산성이다.
알다시피 백제는 한성 함락(475년) 직후 황급히 천도한 웅진(공주)으로 천도했다. 그러나 웅진은 한 왕조의 도읍으로는 좁았다. 따라서 해외진출에 유리하고, 보다 넓은 평야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재천도를 염두에 둔다.
그 0순위 후보지가 부여였다.
동성왕이 사비에서 3번이나 사냥을 했던 이유가 바로 천도를 염두에 둔 사전작업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그런 동성왕이 501년 8월 사비(부여)에서도 사방을 조망할 수 있고, 금강 하구를 통제할 수 있는 성흥산에 성(가림성)을 쌓은 것이다. 동성왕은 축조된 가림성의 성주로 위사좌평(국왕 경호실장)인 백가를 임명했다.
그러나 웅진(공주)에 기반을 둔 귀족 출신으로 추정되는 백가는 이 인사발령을 ‘좌천’으로 여겼다. 본거지(웅진)에서 외지(사비)로 쫓겨났다고 여긴 것이다. <삼국사기>는 “백가는 병을 핑계로 왕명을 사양했지만 동성왕은 허락하지 않았다”면서 “백가는 이 때문에 왕을 무척 원망했다”고 기록했다. 3개월만인 11월 끝내 사달이 났다. 동성왕이 사비 벌판에서 사냥에 나섰을 때 마침 큰 눈이 내려 어느 마을에서 묵게 되었다. 이때 백가가 자객을 보내 동성왕을 시해했다.
이렇게 첫번째 역사기록부터 정변의 무대로 기록된 가림성은 백제멸망기에는 부흥군의 거점으로 재등장한다.
■의자왕은 항복했지만…
660년 7월18일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이 나·당 연합군에게 항복함으로써 백제 678년 역사는 공식적으로 종막을 고하게 된다. 8월2일 열린 나·당연합군의 승전의식에서 의자왕과 그 아들 부여융(615~682)은 치욕적인 항복의식을 벌인다.
“당상에 앉은 태종무열왕(654~661)과 소정방(592~667)은 의자왕과 아들 부여융을 당하에 앉혔다. 어떤 자들은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라’고 조롱했다. 이 모습을 본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이 흐느꼈다.”(<삼국사기> ‘백제본기·의자왕조’)
9월3일 당나라 소정방이 의자왕과 왕족·신료 93명, 그리고 백성 1만2000명을 당나라로 끌고 갔다.
왕조의 기둥을 뿌리째 뽑아간 형국이었다. 그러나 백제는 그리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었다. 당나라군이 철수하기도 전인 8월부터 남잠성·진현성(충남 대덕) 등지에 항거의 움직임이 일더니 전 좌평 정무가 두시원악(청양)을 근거로 나당연합군을 습격했다.
들불처럼 일어선 부흥운동의 중심인물은 무왕(재위 600~642)의 조카인 원로왕족 복신이었다.
복신(?~663)은 660년 9월초 승려 도침(?~661)과 함께 주류성을 근거지로 본격적인 부흥운동에 나선다.
당나라 장수 유인원(생몰년 미상)의 공적을 기리려고 충남 부여군에 세운 <당유인원기공비>(보물)도 “도침과 복신이 벌처럼 모이고 고슴도치처럼 일어나 산과 골짜기에 가득 찼다”고 했다.
이 비석은 당나라 장수 유인원이 부흥군을 진압한 뒤에 세웠다. 따라서 비문 내용은 사실에 부합될 것이다. 거병초기 독자적으로 활동했던 부흥군이 복신의 휘하로 결집되고 있었던 것이다.
“흑치상지(630?~689)가 별부장 사타상여(생몰년 미상)와 함께 험한 곳에 의거하여 복신에 호응했다”(<삼국사기> ‘백제본기·의자왕조’)는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부흥군이 특히 백제의 서방을 관할하던 임존성(충남 예산)을 확보하자 10일도 되지 않아 3만명이 모였다. 부흥군이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임존성을 지켜내자 주변의 200여개 성이 호응했다. 사비성에 주둔하던 나·당 연합군은 부흥군에 의해 고립되는 등 곤욕을 치렀다. 부흥군은 곳곳에서 진퇴를 거듭하며 나당연합군을 괴롭혔다.
특히 당나라가 고구려 침략전쟁에 전념하고, 신라에게 평양행 군량미 수송의 임무를 맡기자 백제부흥군의 운신이 자유로워졌다. 급기야 661년 6월~662년 2월 사이 당나라군이 고구려와의 혈투에서 패했다. 당나라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당나라 고종(649~683)은 백제고토에서 부흥군에게 포위당해 있던 웅진도독 유인궤(602~685)에게 “형편이 어려우니 신라땅으로 가든지, 아니면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오라”는 칙서를 내린다. <구당서>는 “이 때 백제땅에 주둔하던 당나라군의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돌아가기를 바랐다”고 기록했다.
그래도 유인궤는 “평양을 공격하던 군대가 철수했는데, 웅진의 군대마저 뽑아버리면 백제는 다시 일어설 것인데, 고구려는 언제 멸망시키겠느냐”면서 철군이나 신라 의탁을 거절했다.
이 무렵 부흥군 지도자인 도침은 유인궤가 보낸 사신에게 ‘신분이 낮아 만나 줄 수 없다’고 홀대했고, 복신은 당군 사령관 유인원에게 사람을 보내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라. 우리가 전송해주겠노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실제로 662년 7월 당시 당나라군이 장악한 백제의 고토라고 해봐야 웅진성 정도였다고 한다.
■내부분열이 부흥의 걸림돌
반면 최전성기를 맞고 있던 백제부흥군은 이미 661년 9월부터 새로운 왕국의 면모를 갖췄다. 복신 등은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풍장)을 백제의 새 임금으로 옹립했다.
백제는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한지 1년 여만에 새로운 임금(풍왕)을 내세워 부활한 셈이다. 풍왕의 등장과 함께 부흥백제왕조의 정통성이 확립됐다. 하지만 이것은 내부분열의 시작점이 됐다. 부흥운동을 이끈 동지였던 복신과 도침이 풍왕의 신하로서 경쟁하는 사이가 됐다.
결국 복신은 도침을 죽인 뒤, 풍왕마저 도모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반란 음모를 알아치린 풍왕이 선제 공격에 나서 복신을 급습하여 죽인다. 그러나 계속되는 내부 분열로 백제 부흥군의 사기는 급전직하했다. 반면 나당 점령군에게는 복음과도 같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당나라 군도 얼씨구나 하고 증원군 7000명을 보냈다.
<일본서기>는 “663년 8월 백제가 좋은 장수(복신)를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가 곧장 백제를 공격해서 주류성(부흥군의 최후 거점)을 취하고자 했다”(‘천지기’)고 기록했다. 신라는 김유신 등 28~30명의 장수가 지휘하는 5만 정예병을 파견했다.
■백제-왜, 신라-당나라 간 동북아 국제전
이때 가림성이 등장한다.
당나라군 사이에서 “먼저 수륙의 요충인 가림성(위치 미상)을 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당나라의 웅진도독인 유인궤는 “<손자병법>에서 ‘튼실한 곳을 피하고 빈 곳을 치라’고 했다. 가림성은 험하고 견고해서 공격하면 군사들을 다치게 할 것”이라면서 “백제부흥군의 소굴인 주류성을 치면 나머지 여러 성은 저절로 항복할 것”(<신당서> ‘열전 유인궤전’)이라 했다. 위기에 빠진 풍왕은 왜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마침내 왜국 장수 여원군신이 이끄는 지원군 1만여명이 수송선 1000여척에 나눠타고 백제로 향했다.
663년 8월 마침내 한반도 남부 서해안의 백강구(백촌강·백강)에서 백제-왜가 한편이 되고, 신라-당나라가 한편이 되어 치른 동북아시아 국제전의 막이 올랐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자치통감> 등 삼국의 역사서에서 서술한 백강구 전투는 처절했다.
<일본서기>는 “왜·백제부흥 연합군이 전선 170척을 이끌고 백촌강에 진을 친 당나라군과 잇달아 접전을 벌였지만 실패했다”면서 “당나라군의 포위공격에 물속에 떨어져 죽은 자가 많았으며, 뱃머리를 돌릴 틈도 없었다”고 기록했다.
당나라 측의 사서인 <자치통감>은 “…당나라 수군이 백강에서 왜병을 만나 4번이나 싸워 모두 이겼고, 왜선 400척을 모두 불태워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으며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다”고 했다.
<삼국사기>는 “당나라가 수전을 펼치는 사이, 신라군은 당나라군의 선봉이 되어 육지(주류성)에서 백제의 정예기병을 깨뜨렸다”고 기록했다. 이른바 백강구 전투의 백제-왜 연합군의 궤멸이었다. 부흥군을 이끌던 풍왕은 몇몇 측근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망명했다. 백강구 전투의 패배와 풍왕의 고구려 망명 소식에 백제부흥군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결국 의자왕의 다른 아들들인 부여충승·충지가 지키던 주류성은 9월초 항복하고 말았다. 주변 두량윤성 등 여러 성도 줄줄이 손을 들었다. 부흥군 장수 지수신 만은 임존성을 근거로 마지막 항전을 벌였다. 하지만 백제를 배신한 흑치상지와 사탁상여의 공격으로 663년 11월 임존성마저 함락됐다. 지수신 역시 고구려로 망명했다. 이로써 3년 3개월에 걸친 백제의 부흥운동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일본서기>를 보면 주류성이 함락되자 백제인들이 서로 부여잡고 피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주류성이 항복했구나. 돌이킬 수 없구나. 이제 백제의 이름이 끊기니 (조상의) 무덤을 어찌 가볼 수 있을 것인가.(州柔降矣 事無奈何 百濟之名 絶于今日 丘墓之所 豈能復往)”(<일본서기> ‘천지기’)
■백제 독립운동의 거점
하지만 백제 유민들의 독립운동은 끈질기게 이어진다.
664년 3월 남은 부흥군의 세력이 사비산성에 웅거하여 저항을 꾀한 일도 있었다. 특히 663년의 최후 공세 때도 나당 연합군이 공격을 기피하고 우회했던 ‘가림성’은 9년이 지난 672년까지 백제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남아 있었다.
즉 <삼국사기> ‘신라본기·문무왕조’는 “671년(문무왕 11) 6월 신라가 장군 죽지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가림성의 벼를 밟도록 했다”고 했다. 신라 군사들이 가림성의 벼를 밟았다는 것은 백제군의 군량미 확보를 사전에 막으려고 한 고육책이었다.
그럼에도 가림성은 신라의 수중에 들어오지 않았다. <삼국사기>는 이듬해인 672년(문무왕 12) 2월 “백제 가림성을 쳤지만 이기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신라가 의자왕이 항복한 지 12년이 지나도록, 백강구 전투에서 패한 풍왕이 고구려로 망명한 지 9년이 지나도록, 가림성만큼은 차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번 잃은 나라를 수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만 35년, 햇수로 36년간이나 끈질기게 이어온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사가 그것을 웅변하고 있다.
■모습을 드러낸 백제성벽의 흔적
최근 가림성에서 백제시대에 쌓은 성벽을 찾아냈다는 발굴 성과가 공개됐다. 백제고도문화재단이 가림성 북쪽 구간을 조사한 결과 20m 길이의 사비 백제 시대 성벽(최고 높이 5.2m, 폭 12m)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성벽 안쪽에서는 성과 나란히 만든 폭 0.9∼1m인 석축 배수로가 발견됐다. 노출된 성벽이 501년 백가의 반란 스토리를 담은 초축 성벽의 흔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요즘 MZ 세대 사이에서 부여 하면, ‘가림성 사랑나무’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뭐 어떤가. 경주의 경우도 ‘황리단길’이나 ‘벚꽃길’이 유명세를 타고 있지 않은가. 백제·신라의 고도(古都)라 해서 만날 1500~1000년 전 유적만 떠올릴 필요는 없다.
사랑나무, 황리단길, 벚꽃길 같은 새로운 스토리가 ‘구시대의 유물’ 이미지를 좀더 밝고 윤택하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필자는 옛날 사람인가보다. ‘사랑나무’를 찾아갈 때 ‘가림성’에 담긴 백제의 멸망사와 부흥운동사를 한번쯤 기억해주기를…. (이 기사를 위해 최병화 백제역사문화연구원 문화재조사부장과 성현화 팀장, 도의철 백제왕도핵심유적보존관리사업추진단 학예연구사,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부여군청 관계자 등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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