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흥미로운 발굴기사가 떴습니다. 김유신 장군의 집터(종택)인 재매정지(財買井址·사적 246호)에서 갑옷이 출토됐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김유신 장군이 입었던 갑옷은 아니었으므로 호사가의 입장에서는 다소 실망스러웠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 발굴을 보면서 새삼 김유신 가문의 종가인 ‘재매정택’을 떠올리게 됩니다. 재매정택은 최전성기 신라를 대표하는 가문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으로 친다면 권력형 축재로 성공한 제벌가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김유신의 '재매정택'은 한마디로 신라 최고의 재벌가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유신의 재매정택은 돈만 좇는 탐욕의 재벌은 아니었습니다.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을 했던 가문이고자 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명문가였습니다. 김유신의 '재매정택'을 포함해서 전성기 신라에는 무려 39곳의 호화저택이 있었다고 합니다. <삼국유사>는 이 39채의 호화저택을 황금이 쏟아져들어가는 금입택(金入宅)이라 했답니다. 한마디로 금테두른 저택이라는 뜻이겠죠. 이들이 축적한 재산은 상상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재벌기업에 가부를 강요했듯이 당대 신라 임금도 '금입택' 가문에 '돈 좀 내라'는 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아마 그때도 '강요된 기부'였겠지요. 어떻든 김유신의 종가 '재매정택' 발굴을 계기로 신라 전성기의 재벌가들을 한번 알아보려 합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는 '금테 두른 김유신 저택에 숨겨진 명문가의 향기'입니다.
■경주의 인구는 70만명?
“신라 전성기에는 서울(경주)에는 17만8936호가 있었고…. 금입택(金入宅)이 35개(실제로는 39곳)에 이르렀다.”
<삼국유사> ‘기이 진한’조에 등장하는 기록이다. 4인 가구로 따지면 전성기 경주 인구가 70만명을 훌쩍 넘었으며 금이 쏟아져 들어갈 정도의 호화저택이 35곳(39곳)에 달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김유신 장군의 종택인 재매정(財買井)을 비롯해 39곳의 이른바 ‘금입택’을 일일이 열거해놓았다. 이 대목을 두고 온갖 여러 설이 난무해왔다. 우선 인구는 어떤가.
학자들 가운데는 70만명 설에 고개를 내젓는 이들도 적지않다. 신라의 왕경인 경주는 8~9세기에 사방 5.5㎞ 정도의 작은 도시였는데, 그렇게 좁은 공간에 70만명이 넘는 인구가 살았을리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유사>가 기록한 호(戶)의 개념은 가구수가 아니라 사람 1인을 뜻한다는 것이다. 당대 경주의 인구는 17만9000명 정도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전성기 경주의 위용을 폄훼할 필요가 있을까. <구당서>나 <삼국사기> 등의 정사를 보면 백제와 고구려의 인구를 76만호, 69만7000호 등으로 기록해놓았다.
그렇다면 신라의 전체 인구도 아닌 경주의 인구가 17만9000호라는 것 또한 애써 부정할 필요도 없다는 주장도 무시할 수 없다.
■개와 원숭이도 황금으로 치장한 신라
‘금이 쏟아져 들어간다’는 뜻의 ‘금입택’은 또 어떤가.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은 이 대목에서 “‘금입택’이란 부윤대택(富潤大宅·부잣집의 호화저택)을 뜻한다”는 주석을 달아놓았다. ‘아무렴 황금이 마구 쏟아져 들어간다는 뜻이겠느냐, 그 정도로 온갖 재화가 모이는 부자집이라는 소리겠지’라는 속뜻을 담고 있다.
연구자 가운데는 ‘금입택’을 금당과 탑을 가진 주택으로 보는 이도 있다. 금입택은 금당입택(金堂入宅)의 약칭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경주 시내의 고고학적 성과를 토대로 진골 귀족들의 저택 안에 조성한 ‘개인 원찰’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어떤 것이 정설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황금이 무시로 드나들었다’는 표현은 절대 터무니없는 과장이 아니다. 천마총이나 황남대총 등 5~6세기 신라시대 고분에서 쏟아져 나오는 엄청난 황금유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라인의 황금 사랑은 당시 국제적으로도 유명했다. 중세 아랍의 지리학자이자 여행가인 알 이드리시(1099~1166)는 “신라에서는 황금이 너무 흔해서 심지어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까지도 황금으로 만든다”(<천애갈망자의 산책>)고 혀를 내둘렀다.
아랍의 사학자인 알 마크디시는 “신라인들은 집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한다. 밥을 먹을 때도 황금그릇을 사용한다”(<창세와 역사서>)고 했다. 9~12세기 아랍 지리학자는 이처럼 한결같이 신라를 ‘황금의 나라’로 표현하고 있다.
■해외명품만 찾은 신라인
사실 전성기 신라를 두고 ‘사치향락’이라는 수식어로 표현할 수 있다. 오죽했으면 834년 흥덕왕이 “백성들이 해외명품만 찾는다”고 개탄하며 사치금지령을 내렸을까.
“백성들이 앞다퉈 사치와 호화를 즐긴다. 해외명품만 숭상하고 국산은 수준이 낮다고 혐오한다.(民競奢華 只尙異物之珍寄 却嫌土産之鄙野) 예의가 무시됐고, 풍속이 쇠퇴하여 없어졌다.”(<삼국사기> ‘잡지’)
흥덕왕은 “옛 법에 따라 다시 교시를 내리는데 만약 죄를 저지르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당대 신라인의 사치는 극에 달했다. 금은실과 인도산 공작꼬리, 캄보디아산 비취모(물총새의 털)로 만든 허리띠와 페르시아산 에메랄드를 알알이 상감한 머리빗과 보르네오와 필리핀 등에서 잡은 거북등껍질로 만든 관….
심지어 요즘의 자가용에 해당되는 마차의 치장에도 열을 올렸다. 인도 및 스리랑카산 목재인 자단과 베트남산 침향으로 마차를 ‘튜닝’하는 이들이 많았다. 흥덕왕은 평민들까지 말안장을 금은옥으로 장식하는 풍습을 개탄하고는 ‘일절 금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금테두른 집이 실제로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의 주택인 ‘옥사(屋舍)와 생활용품인 ’기용(器用)‘도 금과 은으로 꾸몄다.
“진골의 집은 길이·너비가 24자를 넘지 못한다. 당와(唐瓦)를 덮지 않고 금·은 등으로 장식하지 않는다. 6두품까지 침대를 대모·침향으로 장식하지 않는다.”
거꾸로 말하면 주택의 외양과 인테리어까지 금은으로 장식했고, 심지어는 침대까지 외제 ‘대모와 침향’으로 꾸몄음을 알 수 있다.
침향은 지금으로 치면 동남아산 티크재 원목 정도로 볼 수 있다. 생활용품(기용)도 외제품으로 가득했다.
흥덕왕은 “6두품에서 일반백성들까지 금·은 도금한 그릇과, 호랑이 가죽과 구수와 탑등을 쓰지마라”는 명을 내렸다. 진골 귀족 뿐 아니라 일반백성까지 금은 그릇과 호랑이 가죽은 물론 구수와 탑등까지 사용했다는 것이다.
구수와 탑등은 양모를 주성분으로 잡모를 섞어짠 페르시아(波斯)산 직물이다.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긴 의자(평상·榻)에 깐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진골 귀족은 물론 일반백성들까지 주택과 마차, 심지어는 생활용품과 의류, 장식품까지 금과 은, 그리고 해외명품으로 치장했다는 것이다.
■황금이 홍수처럼 들어갔다
무슨 뜻인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금입택’ 단어는 그저 부잣집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황금이 쏟아져 들어가는 집, 혹은 황금으로 잔뜩 치장한 호화저택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신라백성들은 진골귀족들의 호화저택을 두고 ‘금테 두른 집’이라는 뜻의 ‘금입택’이라 일컬으며 수근대지 않았을까.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명문대가 귀족의 저택에 황금이 수없이 들어갔다는 뜻, 즉 황금 뇌물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풍자한 단어일 수 있다.
흥덕왕의 시대보다 250년 앞선 시기의 기록에 심상치 않은 대목이 등장한다. 제17대 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인 염장공(586~648) 기록이다.
“사람들이 공의 집을 수망택이라 했다. 금이 마치 홍수처럼 들어갔다.(謂基金入望如洪水也)”(<화랑세기> ‘염장공조’)
‘수망택’은 바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39개 금입택 가운데 하나이다. 풍월주의 저택에 황금이 쏟아져 들어간다? 정상적인 재산축적일 수도 있고, 뇌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다.
■상상초월의 신라판 ‘재벌’
그런데 ‘금입택’ 즉 신라 귀족의 재산은 어느 정도였을까. <신당서> ‘동이열전·신라조’를 보면 상상 이상임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재상가는 녹이 끊이지 않는다. 노동(奴동)이 3000명이다. 갑병(甲兵)과 소·말·돼지의 숫자도 그 수와 비슷하다.”
재상이 거느리는 하인과 가축이 각각 3000이라니 입이 떡 벌어진다. <신당서>는 신라 혜공왕 때 귀숭경(712~799)이 이끄는 당나라 사신단이 목격한 8세기 중후엽 신라 귀족들의 사치향락 모습을 그대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짙다.
즉 사신단의 일원으로 경주를 방문하고 돌아간 고음(顧음)이 당나라 중앙정부에 제출한 신라풍속기, 즉 <신라국기>를 보고 옮겨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른바 ‘금입택’의 경제력을 암시하는 문헌과 금석문도 적지않다. 경북 문경의 봉암사지증대사탑비에 나오는 기록이다.
지증대사(824~882)가 사찰에 기증한 개인소유의 토지가 500결이라고 했다. 9살 때 출가한 대사가 자력으로 재산을 모았을 리 만무하다.
따라서 지증대사가 쾌척한 토지 500결은 대사의 가문이 축적한 재산 중 일부였을 것이다. 500결이 얼만큼의 땅인가. 일본 도다이지(東大寺)의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된 신라촌락문서를 보면 ‘촌락인구 463명이 경작하던 토지가 564결’이라 했다.
이 촌락문서에서 단서를 찾는다면 500결은 400명 가량이 경작하는 토지였음을 알 수 있다. 진골귀족도 아닌 지증대사의 가문이 이 정도였다면 ‘금입택’의 주인인 진골귀족의 재력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기부를 강요한 신라 임금
전남 장흥 보림사에 보조선사 탑비를 보면 의미심장하다.
“860년 헌안왕은 (금입택에 속한) 수망택과 이남택에게 교지를 내렸다. ‘보조선사 체징(804~880)의 사찰인 보림사에 황금 160분, 벼 2000곡을 희사하라’.”
1곡(斛)은 15~20말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2000곡은 2만~4만 말에 해당된다. 가마로 따지면 3000~4000가마에 이르는 양이다.
황금 160분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만만치않은 금액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평소 체징 선사를 존경하던 헌안왕은 광주의 황학이라는 절에 머물고 있던 선사에게 “가지산의 절(보림사)로 옮겨 주석하시라”는 청을 올렸다.
그러면서 헌안왕은 ‘금입택’ 수망택과 이남택에 ‘보림사에 거액을 기부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이 대목을 읽으니 기시감이 든다. 꿈에서도 만나고 싶어했던 스님을 위해 절을 꾸미고 금입택에 기부를 명령하는 교지를 내린 헌안왕….
그리고 유수 재벌에게 미르·K스포츠재단 기부를 독려한 박근혜 대통령…. 과연 헌안왕 시대의 재벌 격인 수망택·이남택은 자발적인 의지로 거액을 기부했을까. 아니면 강요에 따른 억지 기부였을까.
헌안왕은 그래도 정식명령을 내려 기부를 요청했으니 ‘적법’의 틀을 벗어나지는 않았을까. 그래도 모른다. 수망택·이남택은 임금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을 테니 강요된 기부였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기부를 대가로 어떤 혜택을 누렸는 지도 알 수 없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주보돈, '신라 금입택과 재매정택', <신라문화> 제46집, 동국대신라문화연구소, 2015
이기봉, <고대도시 경주의 탄생>, 푸른역사. 2007
이기동, '신라 금입택고', <진단학보> 제45호, 진단학회, 1978
이은석, '신라왕경의 도시계획', <나라문화재연구소 학보> 제66책, 2003
경주시청, 보도자료 '김유신 장군 고택 재매정지에서 통일신라시대 비늘갑옷 출토',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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