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흔적의 역사

고려 조선의 '덕후', 그 기묘한 '덕질'

요즘 ‘덕후’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일본어인 오타쿠(御宅)를 우리 식으로 발음한 ‘오덕후’의 줄임말이라는데요. 원래는 집이나 댁의 높임말인데 그 뜻이 바뀌어 집안에 틀어박혀 취미생활에 몰두하는 사람을 지칭했답니다. 요즘엔 특정 분야에 몰두해서 취미생활을 하는, 좋은 의미로 쓰입니다. 그런데 이런 ‘덕후’들은 왕조시대에도 있었습니다. 물론 예전에는 괴상한 취미라는 의미에서 ‘벽(癖)’이라 했습니다. 찾아보니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땅을 너무도 좋아하는 사람을 ‘전벽(田癖)’ ‘지벽(地癖)’이라 했고, 남을 고소 고발하는 게 취미인 자를 ‘소벽(疏癖)’ 이라고 했습니다. 책을 너무 좋아하면 ‘전벽(傳癖)’ 혹은 ‘서음(書淫)’ 이라 했으며, 술과 시에 탐익하는 사람을 ‘주벽’ ‘시마(詩魔)’라 했습니다. 물론 돈을 너무 좋아하는 자는 ‘전벽(錢癖)’이라 했지요. 그 뿐입니까. 어떤 이는 피부에 난 ‘부스럼 딱지 먹기’가 취미라 해서 ‘창기벽(瘡痂癖)’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와같은 ‘벽’이 없는 사람을 두고 ‘재미없고 인간미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박제가와 허균 같은 분의 이야기입니다. 두 분 뿐 아니라 이규보, 이덕무, 정약용, 김정희 등도 모두 당대의 ‘덕후’였습니다. ‘덕후’가 우대받던 시대, 그 시대의 덕후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18회는 ‘고려·조선 덕후들의 요절복통 덕질’입니다. 

1565년(명종 20년) 대사헌 이탁 등이 전 영의정 윤원형을 맹비난하는 상소를 올린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저택을 10여 채나 이어 짓고…. 해변의 간척지와 내륙의 기름진 전답을 모두 사사로이 점유하니~어찌 지벽(地癖)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윤원형의 축재와 사치생활을 비난하면서 특히 땅을 사 모으고, 저택을 마구잡이로 짓는 행태를 ‘지벽’이라 칭한 것이다.(<명종실록>)

이상이라는 인물도 있다. <숙종실록>은 1688년(숙종 14년)조에서 천안 출신 이상(李翔)의 탐욕을 전하고 있다. 특히 땅을 향한 욕심은 대단했다.

“이상은 시골에 살면서 세력으로 억압해서 남의 비옥한 토지를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반드시 빼앗았다.” 

 청나라 화가 나빙이 그린 박제가의 초상. 박제가는 ‘벽(癖)이 없는 사람은 버림받은 자’라고 말했다.

■‘부동산투기(지벽)’, ‘상소꾼(소벽)’
예컨대 빼앗을 토지를 눈여겨 본 뒤 젊은 여종을 ‘꽃뱀’으로 등장시켜 범행대상인 집주인과 정을 통하게 했다.

그런 다음 “사통한 사실을 폭로·고발하겠다”고 협박했다. 겁에 질린 땅주인은 처벌을 피하려 문서를 넘겼다.

그런 식으로 빼앗은 토지가 한 둘이 아니었다. <숙종실록>은 그런 이상을 두고 ‘전지벽(田地癖)을 가진 자’로 폄훼했다.

몇 년 전 어떤 장관 후보자의 부동산 투기가 문제가 되자 “그저 자연의 일부분인 땅을 사랑했을 뿐”이라고 해명한 것이 불현듯 떠오른다.

지금으로 치면 ‘부동산투기’를 예전엔 땅에 집착한다 해서 ‘지벽’ 혹은 ‘전지벽’이라 했던 것이다. 문제가 된 장관후보자도 <실록>의 필법대로 라면 ‘자연의 일부분인 땅을 사랑한’ 지벽(전지벽)이 되는 것이다.

상소를 일삼는 상소꾼도 있었다. 지금도 고소·고발을 남발하는 소송꾼이 있다지만 예전에 상소를 남발하는 사람을 상소꾼, 즉 ‘소벽(疏癖)’이라 했다. 1598년(선조 31년) 이귀(1557~1633년)가 상소를 올리자 <선조실록>의 기자는 ‘사론’을 붙여 비난했다.

“이귀는 벼슬이 없을 때부터 상소하기를 좋아해서 무슨 일이 일어날 때마다 즉시 소매를 걷어붙이고 상소했다. 사람들이 이를 두고 ‘상소 잘하는 벽이 있다’하여 비웃었다.(人嘗笑其有疏癖)”

■‘벽없는 자는 맛없는 자’
‘벽(癖)’이라. 사전적인 의미로 1)무엇을 치우치게 즐기는 성벽(性癖)이며, 2)고치기 어렵게 굳어버린 버릇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괴짜’라 할 수 있고, 요즘 말로 ‘마니아’라 할 수도 있고, 속어로 말한다면 ‘똘아이’의 범주에도 들어갈 수 있겠다. 가장 최근의 어법이라면 '~덕후'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癖’자의 부수는 갑골문자로 환자가 땀을 흘리고 있는 형상이다. 갑골문자의 ‘질(疾)’은 ‘침상에 누운 환자가 땀을 흘리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땀 흘리는 병자의 모습을 담은 ‘벽(癖)’도 일종의 ‘질병’, 혹은 ‘병폐’로 치부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선인들을 ‘벽’을 단순한 질병이나 병폐로만 치지 않았다.

박제가는 “벽(癖)이 없는 사람은 버림받은 사람”이라고 규정했으며, 소품문의 대가인 장대(張垈·1597~1676년)는 아예 “벽이 없는 자와는 사귀지도 마라”고 했다. 그는 그 이유를 “벽이 없으면 깊은 정도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허균(1569~1618년)도 “세상에 그 말이 맛없고 면목이 가증스러운 사람은 다 벽(癖)이 없는 무리들”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진정 벽이 없다면 거기에 빠지고 도취되어 생사조차 돌아보지 않을 것인데 어느 겨를에 돈과 벼슬의 노예노릇을 할 것인가.”(<한정록>)   

 원나라 화가 예찬(운림)의 지나친 ‘결벽’을 그린 오원 장승업의 ‘고사세동도’. 예찬은 손님이 돌아가자 오동나무에 침이 뭍었다 해서 어린 종을 시켜 오동나무를 닦도록 했다는 고사는 유명하다. 수많은 후대의 화가들이 ‘세동도’를 그렸다. |삼성미술관 리움 제공

■‘부스럼딱지’에 집착한 유옹
아닌게 아니라 동양의 문헌을 살펴보면 희한하고, 엽기스럽기까지 한 ‘벽’의 소유자가 한 둘이 아니다.

‘덕후의 끝’은 역시 중국 남송 시대의 인물인 유옹(劉邕)이다. ‘부스럼딱지먹기(瘡痂癖) 덕후’였으니까…. 맛이 복어와 비슷했다니 참 독특한 취향이다.

하루는 자창(炙瘡·화상)에 걸린 맹영휴라는 인물을 찾아가 그의 상처부위에서 떨어진 부스럼 딱지를 먹었다.

깜짝 놀란 맹영휴는 떨어지지도 않은 부스럼딱지까지 떼어 유옹에게 먹였다. 후에 맹영휴는 지인에게 쓴 편지에서 농섞인 뒷담화를 했다.

“유옹이 나를 먹어치우는 바람에 온몸에 피가 흐르는군요.”

유옹은 이같은 엽기행각을 두고 남들이 조롱하기라도 하면 ‘벽기가(癖嗜痂)’라고 받아쳤다. ‘기호의 차이일 뿐’이라고 응수한 것이다.(<송서> ‘유목지전’)

■돈 밝히는 ‘전벽(錢癖)’
진나라 완부(278~326년)라는 이는 나막신에 항상 밀랍을 반들반들하게 칠해서 싣는 괴벽의 소유자였다.

또 역시 진나라 사람인 화교(和嶠)는 국왕과 견줄 정도로 재산을 모았지만 쉼없이 돈을 세는 버릇이 있었다. 돈을 쓸 줄도 몰라 ‘전벽(錢癖)’이라는 악평을 들었다. 이런 일화가 있다.

우들이 화교가 외출한 틈을 타 화교의 집 정원을 찾아가 맛좋은 자두나무가 따먹었다. 그러나 나중에 이 일을 알아차린 화교는 아우들이 먹다 뱉어버린 자두씨를 일일이 계산해서 돈을 받아냈다.(<계핵열전(計核列傳)>)

돈만 병적으로 밝히는 ‘전벽(錢癖)’ 중에 중국 남조 양나라 때 인물인 소굉(473~526년)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양 무제의 동생이기도 한 소굉은 집안 창고 100여 칸에 무려 3억전(錢)을 모았다. 황제의 동생이라는 점을 이용, 매관매직에 앞장선 것이다. 그에게 뇌물을 건넨 자들은 승승장구했다.

그렇게 축재한 돈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돈을 쌓아둔 창고문은 닫히자마자 잠기는 특수장치를 설치해놓기도 했다. 소굉은 한때 형인 무제의 의심을 사는 바람에 역모죄로 죽을 뻔했다.

집안에 엄청난 무기를 숨겨두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쌓아놓은 것이 무기가 아니라 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는 일절 동생을 ‘터치’하지 않았다.

소굉이 얼마나 인색했는지 무제의 아들인 예장왕 소종은 돈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빗댄 <전우론(錢愚論)>을 지어 삼촌을 비웃었다.

당나라 시대 ‘부동산 투기의 귀재’, 즉 ‘지벽’인 이징이라는 인물이었다. 이징은 각종 부동산과 전답, 산림 등을 닥치는대로 사들이는데 병적으로 집착했다.

오죽했으면 조선의 <동문선>에 다음과 같은 시가 실려있을까.

“아아. 세상이 말세가 되어 순후한 사람이 없으니(噫世及衰微 人無純) 이징의 땅 모으는 욕심을 어찌 만족시키랴.(如李登之地癖兮 何厭之有) 소굉의 전우는 못내 추하도다(若蕭宏之錢愚兮 亦孔之醜).”

■주벽, 단벽, 다벽, 마벽, 석벽, 결벽…
이밖에도 희한한 벽(癖)의 소유자가 많았다.

예컨대 죽림칠현의 중심인물인 혜강(232~262년)은 ‘단벽(鍛癖)’으로 유명했다. 벼슬에 구애받지 않고 초야에서 쇠를 두들기는(鍛) 대장간을 운영하며 청렴하게 살았다.

풀무질을 유독 좋아해서 벗인 향수와 마주앉아 풀무질 하며 방약무인했다고 한다. 또 당나라 때 은둔의 선비라는 육우(陸羽·733~804년)는 ‘다벽(茶癖)’으로 유명했으며, 차 상인들로부터 ‘다신(茶神)’의 칭호를 얻었다. 

북송의 서·화가인 미전(1051~1107년)은 ‘석벽(石癖)’, 즉 돌에 미친 사람이었다. 얼마나 돌을 애호했던지 기석(奇石)을 보면 그 돌을 향해 절(拜)하면서 ‘형(兄)’이라 불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또 원나라 화가인 예찬(倪瓚·1301년~1374년)은 ‘결벽(潔癖)’으로 역사에 이름을 알렸다. 극단적으로 먼지를 싫어한 예찬은 틈나는대로 손을 씻었는데, 물과 수건을 든 시녀가 늘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심지어는 정원의 오동나무도 깨끗이 씻었다고 한다. 오동나무까지 씻을 정도의 결벽을 바탕으로 한 ‘세동고사(洗桐故事)’는 명나라 시대 이후 수많은 화가들의 그림소재가 되었다.

이밖에 역시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210~263년)은 ‘가슴에 불덩어리가 있어서 술을 부어야 한다’는 ‘주벽(酒癖)’으로, 서진의 왕제(王濟)는 지독한 말(馬)사랑으로 ‘마벽(馬癖)’으로 이름을 떨쳤다.
  
■‘좌전벽’이란?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는 자신의 벽(癖)을 못내 자랑하는 이들도 많았다.

특히나 책을 좋아하고 시 읊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서음(書淫), 혹은 전벽(傳癖), 시마(詩魔) 등으로 칭하며 은근히 자랑했다. 예컨대 진나라 시대 두예(杜預·222~284)는 <춘추좌전>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진 무제 때 대장군이 되어 오나라를 정벌하는 무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스스로는 말을 탄 적도 없고 화살이 과녁을 뚫지못할 정도로 문약(文弱)이었다.

어느 날 진무제가 “경은 무슨 버릇(癖)이 있냐”고 묻자 두예는 “저는 좌전벽(左傳癖)이 있습니다.”라고 거침없이 대답했다. 두예가 말하는 ‘좌전(左傳)’는 <춘추좌전>을 일컫는다.

<춘추좌전>은 공자의 역사서 <춘추>를 두고 노나라 좌구명이 해설한 책이다. 두예는 이 <춘추좌전>에 빠져 <좌전집해>라는 주석서를 저술했다. 이것이 가장 이른 시기의 <좌전> 주해이다. 두예는 <좌전벽>은 글깨나 읽는다는 이들이 가장 많이 인용한 ‘벽’의 모범사례이다.

술과 거문고. 시를 ‘세 친구(三友)’로 삼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772 ~ 846년)는 <취음(吹吟)>에서 술과 시에 빠진 ‘성벽(性癖)’을 읊었다.

“취한 술기운이 또 시마(詩魔)를 일으켜 정오부터 슬피 읊은 것이 저녁에 이르렀다.(酒狂又引詩魔發 日午悲吟到日西)”

두보(杜甫·712~770년)는 ‘가구(佳句·좋은 싯구)를 탐하는 벽(癖)’을 앓았다. 그는 ‘강위에서 바다 같은 물살의 기세에 힘입어 간단히 짓노라.(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에서 이렇게 다짐했다.

“나의 성격은 좋은 싯구를 몸시 탐내어 시어가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도 그만 두지 않겠노라.(爲人性癖耽佳句 語不驚人死不休)”

‘죽을 때까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싯구를 지어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뜻이니 얼마나 지독한 시벽(詩癖)인지 모르겠다.    

금석학에 빠진 스스로를 ‘금석벽’이라 한 김정희는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판독한 뒤 그 소감을 쓴 편지를 친구 조인영에게 보냈다.

■책을 읽다가 요절한 성간
어디 중국인들 뿐인가.

우리나라 지식인들도 저마다 ‘책벌레’이자 시를 짓지 않고는 못사는 ‘천생 시인’임을 자처했다.

책에 빠졌음을 뜻하는 ‘서음’의 끝은 책을 읽다가 아깝게 요절한 성간(成侃·1427∼1456년)을 꼽을 수 있다. 서거정(1420~1488년)의 <필원잡기> 등에는 성간의 일화가 남아있다.

"성간은 유경은 물론 제자백가와 천문·지리·의약·복서(卜筮)·도경(道經)·불경(佛經)·산법(算法)·역어(譯語)의 모든 법을 두루 섭렵했다. 또 누구네 집에 희귀본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반드시 구해보았다.”

하루는 서거정이 집현전에 있을 때 성간이 찾아와 “장서각에 있는 비장본을 보고싶다.”고 청했다. 그러나 서거정은 난색을 표했다. 궁중 비장본은 함부로 외부인에게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간은 집요했다. 숙직하고 있는 서거정을 찾아와 “책 좀 보여달라”고 애원했다. 마음이 약해진 서거정은 “그럼 한번 보라”고 허락했다.

그러나 성간은 등불을 켜고 뜬눈으로 밤을 새워 책을 탐독했다. 훗날 장서각 속의 서적 체제와 권질(卷帙)을 말하는 데도 조금의 착오도 없었다. 서거정의 찬사가 계속된다.

“그후 10년 후 성간이 과거에 올라 집현전에 들어왔는데 늘 장서각에 파묻혀 책을 밤낮으로 열람하니 동료들이 ‘서음(書淫)’, 혹은 ‘전벽(傳癖)’이라 놀렸다.”

성간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다는 듯 “난 서른살만 살면 족하다”고 말했는데, 과연 지나친 독서 때문에 과로하여 몸이 여위고 파리하게 되어 30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병을 뜻하는 ‘질(疾)’의 상나라 시대 갑골문. 병에 걸린 사람이 땀을 흘리고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그로고보면 벽(癖)도 일종의 질병임을 알 수 있다. |양동숙의 <갑골문 해독>, 서예문인화, 2005년에서

■‘그 놈의 문자벽’
희대의 풍운아 허균은 자신의 책읽는 버릇을 이렇게 자랑했다.

“평생에 서음으로 이름났으니(平生坐書淫) 오거서는 언제고 따라다녀라.(五車行輒隨) 상자 열어 서가에 가득 꽂으니(發협揷滿架) 펴 읽으며 스스로 기뻐한다오.(披讀以自嬉)”(<성소부부고>)

그는 “보지 못했던 책을 읽을 때에는 마치 좋은 친구를 얻은 것 같고, 이미 읽은 책을 볼 때에는 마치 옛친구를 만난 것 같다”고  했다.

“나의 천성은 손님을 접대하는 것을 즐거워하나 언행(言行)에 허물이 있을까 저어되니, 이 책들이나 의지해 문을 걸고 늙으리라.”(<한정록>)

이밖에도 세조의 조카인 강양군 이숙(1453~1499년)은 “내가 죽으면 거문고·술과 함께 <자치통감> 한 질을 반드시 묻어달라”고 할 정도로 <자치통감>을 사랑했다. 조선중기의 문신인 하응림(1536∼1567년)도 소동파의 시를 사랑한 나머지 손수 한 질을 베껴 순장토록 했다.

조선 인조대의 문신 이식(1584~1647년)의 문집인 <택당집>에는 시골생활을 하던 중 즉흥적으로 지은 시가 있는데, 예의 ‘그 놈의 문자벽’을 은근히 자랑하는 대목이 나온다.

“농사로 먹고 사는 일 어쩌면 그리 졸렬한지(耕鑿治生拙) 재미 느끼며 잘하는 건 그저 독서뿐(詩書得趣長) 아이 때부터 몸에 밴 이놈의 문자벽을(兒時文字癖) 늦은 나이 되도록 아직도 잊지 못하다니(歲晩未能忘)”

다산 정약용도 척주 도호부사 이광도의 시에 답장을 보내면서 “난 촌에 쳐박힌 불우한 늙은이이며, 뜻이 있다면 서책만을 치우치게 좋아하는 것(有志簡編지是癖)”이라 했다.

성혼(1535~1598년)의 문집인 <우계집>에서도 토함 이지함이 병든 성혼을 찾아와 “공의 병이 이과 같은데 계속해서 책을 보니 이는 거의 성벽(性癖)을 이룬 것이니 몸조리 잘하라”고 타이르는 기사가 나온다.

이지함은 여기서 책과 여색(女色)을 비교하면서 “비록 청(淸·책)과 탁(濁·여색)의 다름이 있지만 생명을 해치고 본성을 손상시키는 점에서는 책과 여색이 똑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공에게는 모든 성현의 글이 나쁜 물건”이라고 까지 했다. 가뜩이나 몸이 좋지않은 성혼에게 ‘몸조리가 최고이니 당분간 책을 멀리하라’는 충고였다.     

스스로 지독한 ‘시벽’에 걸렸음을 토로한 이규보. 그는 "죽어서야 이 시벽에서 벗어날 것"이라 했다.

■이규보의 못말리는 ‘시벽’
고려 후기의 문인 이규보(李奎報·1168~1241년)의 ‘시벽’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동국이상국후집>에는 스스로 고질화해서 고칠 수 없는 ‘시벽 ’을 주제로 한 시가 여러 편 실려있다. 

“나이 칠십 넘어(年已涉縱心)~이제는 문장을 버릴 만도 하건만(始可放雕篆) 어찌하여 그만두지 못하는가(胡爲不能辭)~떼어버릴 수 없는 시마가 있어(無奈有魔者)~날 이 지경에 만들었네.(使我至於斯)”

그는 이어 “매일같이 심장과 간을 깎아서(日日剝心肝) 몇 편의 시를 짜내니(汁出幾篇詩), 기름기와 진액이(滋膏與脂液) 다시는 몸에 남아있지 않다(不復留膚肌)”고 읊었다. 그러면서 “살거나 죽거나 오직 시를 짓는(生死必由是) 내 이 병은 의원도 고치기 어려울 것(此病醫難醫)”이라 했다.

그는 다른 시에는 “어쩌다가 딱한 이 늙은이가(奈何遮老子)는 시벽과 주벽을 함께 가졌네(俱得詩酒癖)”라 하면서 “죽은 뒤에야 이 병도 없어질 것(方死始可息)”이라 했다. 그러면서도 “시벽을 꼭 나무랄 필요가 없다”고 위안했다.

이규보의 시를 둘러싼 집착은 놀라웠다. 남이 보내온 시 한 편에 화답할 때마다 10편은 기본이고, 많을 때는 30여 편까지 보내야 직성이 풀렸다.

어떤 지인이 그런 이규보를 보고 “그런 데도 피로한 기색이 없지 않느냐”고 혀를 내둘렀다. 그러자 그는 “병이 한번 몸에 침투되면 사람마다 피하기 어렵듯 시벽도 병”이라면서 “노환(老患)과 시병(詩病)이 함께 들었으니 답답할 따름”이라고 한탄했다.(<동국이상국집>)

그러면서도 “지금의 고질병은 죽지만 않으면 낫겠지만 시벽은 멈출래야 멈출 수 없다”고 했다. 시병은 죽을 때까지 못말리는 병이라는 것이다. 

■‘금석벽’이 낳은 개가
벽(癖)으로 치면 추사 김정희(1786~1856 년)의 ‘금석벽(金石癖)’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하양고을 원님으로 가는 이두신에게 보내는 시’에서 자신의 ‘금석벽’을 실토했다.(<완당접집> 제9집)

“나는 본디 금석에 벽이 깊은데(我本癖金石) 그대는 시 노래를 절로 잘했네.(君自善歌詩)~”

가히 최고의 금석학자이자 고고학자 다운 자랑이다. 추사는 함경도 유배 생활(1851~1852) 중 고대의 석기를 연구했다. 그때까지 귀신의 조화 쯤으로 치부하던 돌도끼와 돌화살촉이 선사시대의 생활도구이자 무기임을 밝혀낸다.

또한 1816년 가을 북한산 승가사 곁의 비봉에 서있던 비가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혀낸다. 그 때까지는 무학대사의 비문으로 잘못 알려진 것을 바로 잡은 것이다. 그 때의 감격을 추사는 이렇게 전한다.(<완당전집> 제1권 ‘진흥왕의 두 비석을 상고하다(眞興二碑攷)’에서)

“이끼 가득찬 글자의 획을 따라 여러 차례 탁본한 결과~ 제1행 ‘진흥(眞興)’의 ‘진(眞)’자가 분명했다. 진흥왕의 고비(古碑)로 단정하니 무학비(無學碑)라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 금석학(金石學)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우리들이 밝혀낸 일개 금석의 인연으로 그칠 일이겠는가.”

■당신의 벽은 무엇입니까.
돌이켜보면 틀에 짜인 ‘루틴한 삶’에 재미를 돋구는 이는 ‘벽(癖)’을 가진 자의 몫이 아니던가. ‘지벽(地癖)’이나 ‘전벽(田癖 혹은 錢癖)’, ‘창가벽(瘡痂癖)’ 같은 벽은 말고….

실학자인 이덕무(1741~1793년)은 “기이하고 빼어난 기상이 없으면 어떤 사물이든지 모두 속됨에 빠진다”고 벽(癖)의 기운을 옹호했단다. ‘산에 이 기운이 없으면 기와조각이요, 물에 이 기운이 없다면 썩은 오줌’이라 했단다. 그러고보니 이덕무 또한 스스로를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인 ‘간서치(看書癡)’라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나는 무슨 ‘벽(癖)’인가.

<사기(史記)>에 빠져 <사기벽(史記癖)>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만 하고 있을 뿐….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유홍준. <완당전집>. 학고재. 2006년
박제가. <궁핍한 날의 벗>. 안대회 옮김. 태학사. 2000년
정민. <미쳐야 미친다>. 푸른역사. 2004년
양동숙. <갑골문해독>. 서예문인화. 200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