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크로켓(1786~1836)은 미국의 서부개척시대를 이끈 전쟁영웅이다.
크로켓은 1836년 벌어진 멕시코군과의 알라모 요새 전투에서 일약 미국의 레전드로 발돋움했다. 멕시코군 7000명의 포위 공격에 텍사스군 187명이 13일간이나 저항했는데, 최후의 1인으로 버티다 쓰러진 영웅이 바로 크로켓이었다는 것이다.
크로켓의 이야기는 존 웨인의 ‘알라모’(1960) 등 6번이나 영화로 제작됐다.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1968년 “나의 고조할아버지가 알라모 요새에서 전사했으며, 베트남 전쟁에서 꼭 필요한 모범적인 군인상은 바로 크로켓 같은 영웅”이라고 추앙했다.
그러나 ‘고조 할아버지 운운’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고, 크로켓의 영웅담 또한 ‘조작’이었다. 존슨 대통
령은 크로켓을 베트남 전쟁을 독려하기 위한 선전도구로 활용한 것이다.
역사가들은 ‘크로켓이 전사한게 아니라 항복해서 속절없이 살해됐다’고 본다. 당연히 영웅적인 항거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크로켓은 개척시대를 활짝 연 영웅 서사시의 주인공으로 남아 있다.
일본 ‘육탄 3용사’의 영웅담도 비슷하다. 1932년 일본군이 중국군의 방어망에 고전하자 에시타 다케지(江下武二) 등 일등병 3명이 “황군을 위해 죽겠다”며 결사대를 자원했다.
3인은 몸전체에 폭탄을 둘러매고 불을 붙인채 ‘제국 만세’를 외치며 적의 철조망을 폭파시켰다. 그러나 육군의 자체조사 결과 ‘터무니없는 과장’이었다.
죽은 3인 말고도 상관의 명을 받아 폭탄을 들고 돌진한 병사들이 더 있었다는 것. 이들은 임무를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왔지만 죽은 3인은 목표지점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폭사했다는 것.
진상을 파악한 오노 히토마토(小野一麻呂) 중령은 “죽은 3인은 그저 통상의 임무를 수행했을 뿐 무슨 결사대를 자원한 것은 아니다”라는 조사결과를 공표했다.
오노는 “전쟁터에 나선 군인은 그 자체가 결사대인데, 만약 어려운 임무때 마다 결사대를 모집한다면 그게 무슨 군대냐”고 반문했다. 백번 옳은 말 같은데 때는 늦었다.
죽은 3인은 이미 언론에 의해 ‘육탄 3용사’로 신격화된 뒤였다. 한달만에 12편의 영화가 개봉됐고, 찬양가가 쏟아졌으며, 동상과 기념물이 건립됐다.
영국의 정치인이자 작가이자 탐험가인 월터 롤리(?~1618)는 자신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사건을 다른 목격자가 전혀 다르게 기록한 것을 보았다. 롤리는 자신의 원고를 불태워 버렸다.
진실은 일어난 순간 사라지고 목격자의 주관이 남는다는 사실에 절망했다는 일화다. 진실의 기록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웅변해준다.
최근 한국전쟁 때 북한군의 자주포를 육탄으로 파괴했다며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심일 소령의 공적이 도마에 올랐다. 굳이 이제와서 까발릴 필요가 있겠느냐는 얘기도 나올 법 하다.
그러나 크로켓이나 육탄3용사의 예처럼 목격자가 믿고 싶은 기억만 역사로 기록될 수 있다. 진실이 영영 어둠 속으로 묻혀 버려서야 되겠는가.
1932년 당시 ‘육탄 3용사’의 기사를 낸 아사히 신문은 지난 2007년 이 보도가 거짓이었음을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는데 무려 75년이 흘렀다.
그만큼 진실을 기록하는게 어려운 일이다.
미국의 미식축구 스타 패트릭 틸먼의 이야기가 심금을 울린다. 틸먼은 2002년 3월 애리조나 카디널스와의 360만 달러 계약을 앞뒀지만 자원입대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한다.
2004년 4월 비극이 일어났다. “틸먼이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접경지역에서 순찰도중에 매복중이던 적과의 교전 도중에 동료병사들을 구하고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공식발표였다. 틸먼은 일약 아프간 전쟁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2007년 4월 열린 미 하원 청문회는 이런 영웅담이 조작임을 낱낱이 까발렸다. 틸먼을 적으로 오인한 미군 부대 부대장의 사격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군의 오인사격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 조작사건의 진상조사를 요구한 이가 바로 틸먼의 가족이었다는 것이 심금을 울린다.
틸먼의 어머니는 “영웅담을 조작함으로써 진정한 영웅의 의미를 축소시키고 있다”고 분노했다. ‘조작된 영웅 만들기’가 오히려 고인이 된 아들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것이다.
틸먼은 그렇게 진실이 밝혀지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났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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