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조성에 죄인 70만명을 동원했다. 구리물을 부어 틈새를 메워 외관을 놓았다. 모형으로 만든 궁궐과 백관, 그리고 온갖 기기묘묘한 형상의 물건들을 설치했다. 자동발사되는 활을 장치했고, 수은을 주입하여 강과 바다를 조성했다. 풀과 나무를 심은 묘지는 마치 산과 같았다.”(<사기> ‘진시황 본기’)
기원전 246년 등극한 진시황은 불멸을 꿈꾸며 37년 동안 자신의 무덤을 조성했다. 시황제의 뒤를 이은 진2세는 아버지의 장례가 끝난 뒤 무덤문을 닫아버렸다.
무덤의 구조를 알고 있던 노예들과 기술자들의 비밀누설이 두려워 모조리 질식사시킨 것이다. 이후 진시황릉 관련 기록들은 처참하다.
진나라 도읍인 함양(시안·西安)을 점령한 항우가 ‘30만명을 동원해서 진시황릉을 파헤친 뒤 발굴한 보물을 30일간 실어날라도 끝이 나지 않았다’는 기록(<수경주> ‘위수’)이 있다.
심지어는 ‘어느 목동이 잃어버린 양을 찾으려고 발굴구덩이 속에 들어갔다가 진시황의 시신이 안장돼있는 관곽을 불태웠다’는 내용(<한서> ‘유향전’)도 있다.
당나라 말기 반란군의 우두머리인 황소 역시 진시황릉 약탈을 명령한 후 금세 평정되고 말았다. 일설에는 항우와 황소는 진시황의 보복 때문에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진시황릉의 실체파악은 200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언감생심이다. 1974년 가뭄해소용 우물을 파던 농부들이 우연히 병마용갱을 발견했다.
이를 두고 ‘세계 제8대 불가사의’니 뭐니 했지만, 실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병마용갱에서 1.5㎞ 떨어진 폭 500m, 높이 70여m의 황릉은 아직 전인미답이다.
‘밖으로 항우가 파헤쳤고, 안으로 목동이 불태웠다’는 기록(<한서>)과 달리 발굴 및 도굴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다.
1981~82년 사이 중국사회과학원의 분석결과 황릉 봉토의 수은 함유량(평균 205ppb)은 인근 지역 흙(평균 30ppb)보다 약 7배 많았다. 휘발성이 매우 강한 수은 기체는 결국 침입자를 막고 시신과 부장품의 부패까지 막았던 것이다.
이렇게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진시황릉을 발굴해서 관광자원화 하자는 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이집트 피라미드 못잖은 문화유산을 자랑하고픈 중국인들의 마음을 이해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중국 당국은 최근 발굴·보존기술이 발전할 때까지 발굴을 유보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해낼 능력이 없다면 후손을 위해 남겨두는 편이 낫다”는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의 언급이 상기해본다.
필자는 이쯤에서 천년고도 신라 왕경의 발굴·복원사업이 한창인 경주로 시선을 돌려본다. 저우언라이 총리의 언급이 아니더라도 ‘발굴은 곧 파괴’라는 것은 고고학계의 금언도 떠올려본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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