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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원균은요…', 선비 오희문의 헬조선 '임진왜란'고발기

“우수사는 이달초(7월8일) 전라 좌·우 수군과 함께 나가서 적선 80척을 나포해서 700여명의 수급을 베었다. 초 10일에도 또 적선을 만나 80여척을 사로잡았다…”

1592년(선조 25년) 7월26일 오희문(1539~1613)의 일기인 <쇄미록>에 기록된 한산대첩 승전보이다. 당연히 이순신의 승전기록일 것 같지만 다 그렇지는 않다. 일기에서 전투를 주도했다는 우수사는 바로 경상 우수사인 원균을 지칭한다. 

원균의 주도 아래 전장에 나서 대승을 도운 전라 좌·우 수군의 지휘관은 바로 이순신(전라 좌수사)과 이억기(전라 우수사)이다. <쇄미록>에 따르면 주인공은 원균이고, 조연이 이순신과 이억기 같은 느낌이 난다.

오희문이 1591년(선조 24년) 11월27일부터 1601년(선조 34년) 2월27일까지 9년 3개월간이나 써내려간 일기. 전쟁이 다 끝나고 서울로 되돌아온 뒤 일기쓰기를 멈추었니 명실상부 ‘피란일기’라 할 수 있다.|국립진주박물관 제공

이는 역사적으로 알려진 원균의 평판과 사뭇 다른 기록이다. 원균(1540~1597)은 어떤 인물인가. 성웅 이순신(1545~1598)을 모함해서 밀어내고 그의 자리를 차지했고, 조선 수군을 궤멸상태로 빠뜨린 칠천량 패전의 책임자이며, 전투에 임해서는 늘 도망만 다니는 겁쟁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기록을 찬찬히 뜯어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원균은 전쟁 후 이순신·이억기(1561~1597)와 나란히 ‘선무공신’으로 책록됐다. ‘임진왜란 승전’의 으뜸 공적은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군이라고 ‘엄지척’하며 조선군 장수들의 공을 폄훼하기에 급급했던 선조조차도 “우리나라 장수 중에는 이순신과 원균, 권율 등이 다소간의 전공을 세웠다”고 인정했다. 선조는 1592년 9월1일 장수들의 공을 재평가하면서 “원균과 이억기는 이순신과 공이 같은 사람(同功之人)”이라고 ‘동급’으로 대우했다. 


■견원지간이던 이순신과 원균

이순신과 원균의 반목과 갈등은 극심했다. 이유는 ‘전공 다툼’이었다. 

1594년(선조 27년) 11월12일 판돈녕부사 정곤수(1538~1602)는 “이순신의 부하들은 당상(정 3품)에 오른 자가 많았던 데 비해 원균의 부하 중 우치적이나 이운룡 등의 공이 큰데도 상대적으로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선조 역시 “원균이 먼저 군사를 요청했고 이순신은 따라간 것이다. 이순신이 원균보다 왜군을 많이 잡았으나 원균이 군사를 청해서 성공이 시작된 것”이라고 평가했다.(<선조실록> 1596년 11월7일)

실록에는 2년 이상 이어진 이순신·원균의 갈등 관련 이야기가 아주 구체적으로 나와있다. 그걸 찬찬히 읽어보면 원균을 소인배로 매도하기에는 너무 일방적인 평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균을 더욱 불리하게 만든 것이 있으니 바로 이순신의 <난중일기>다. 일기라는 것이 무엇인가.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쓴 글이 아니기에 자신의 심중을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러니 자신의 일기에 ‘전공 다툼’으로 관계가 틀어진 원균을 좋게 쓸리 만무하다. 누가 먼저 갈등의 단초를 제공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유재란을 명(중국)의 시각에서 그린 ‘정왜기공도’(征倭紀功圖·가로 9m, 세로 4m). 왜를 정벌한 공을 기념한 그림이다. 정유재란(1597~1598) 마지막 3개월간 육·해상에서의 전투장면을 당시 명군을 따라왔던 화가가 폭 30cm, 길이 6.5m의 두루마리에 그렸다.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이순신의 뒷담화, ‘원균은 고약한 인간이야’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순신은 여수 본영의 전라 좌수사였고, 원균은 경상우수사였다. 가뜩이나 밉상인데 매일 마주쳐야 하는 장수였던만큼 지휘권과 전공, 관할구역 등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이순신은 다름아닌 일기에 원균에 대한 감정을 거리낌없이 풀어헤쳤다. 

아닌게 아니라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원균 이야기가 80~120번 정도 언급된다. 짐작하겠지만 절대 다수가 원색적인 비난이다.  

“원균의 술주정에 배 안의 모든 장병들이 놀라고 분개하니 고약스러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1593년 5월) 

“원균이 술을 마시겠다고 해서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해서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함부로 했다. 해괴했다.”(1592년 8월26일) 

“원균이 온갖 계략으로 나를 모함하려 덤비니 이 역시 운수다. 뇌물로 실어보내는 짐이 서울 길에 잇닿아있으며, 그렇게 나를 헐뜯으니 그저 때를 못만난 것만 한탄할 따름이다.”(1597년 5월 8일)

심지어는 “원균이 공연수와 이극함이 좋아하는 여자들과 모두 관계했다”(1594년 1월 19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경기 평택시 도일동 마을 뒤편 야산 언덕 위에 자리잡은 원균의 무덤.이순신과 함께 선무 1등공신으로 책록될만큼 전공을 세웠다.

이 인용문들은 빙상의 일각이다. 원균을 흉측한 인물로 묘사하고 성격은 ‘음흉’ ‘간흉’하고 그의 이야기는 ‘흉계’이며, ‘해괴하기 이를데 없다’고 표현하기 일쑤였다. 

누차 하는 얘기지만 이순신은 누구 보라고 일기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400여년 뒤 후손들이 자신이 비밀리에 쓴 일기를 죄다 들춰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순신의 심정은 어땠을까. 자신의 속마음이 저토록 적나라하게 들춰진 것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신상이 탈탈 털리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이순신의 원색적인 비난을 받은 원균은 모함꾼, 비겁자, 술주정뱅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기록을 남기지 않은 원균에게는 실록이라는 공식역사서 외에는 달리 변명할 수단이 없다.


■‘원균도 승전의 주인공이었다.’

그것이 원균의 비극이다. 그러나 맨처음의 인용문에서 보듯 역시 동시대 임진왜란을 함께 겪은 뭇 선비 오희문의, 다름아닌 일기(<쇄미록>)에 원균의 위상을 짐작케하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나마 원균으로서는 불행중 다행이 아닌가. <쇄미록>에는 원균 관련 기록이 두 건 더 나온다.

“들으니 영남 우수사 원균이 지난달에 적선 10여척을 불태웠다 하고 이 도의 좌수사인 이순신이 이달초 여러척의 배를 이끌고 전라도 수군 절도사와 함께 적선 42척을 불태우고….”(‘임진남행일록’)

“전 만호 이충이 전에 경상 우수영에 갔다가 수군절도사 원균이 또 적선 24척을 불사르고 적병 7명의 수급을 베었다는 소식을 담은 서장을 은밀히 지니고 이 고을을 지났다. 그를 우연히 만나니 근심이 풀렸다.”(‘임진남행일록 1592년 6월2일) 

‘~들으니’로 시작되고 ‘원균의 승전보에 근심이 풀렸다’는 <쇄미록> 내용은 당대 민간의 여론을 생생한 필치로 반영하고 있다. <선조실록>에도 당대 민간의 여론이 원균에게 불리하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즉 두 장수의 갈등을 주요 안건으로 다룬 1594년 11월12일의 경연장에서 선조가 “바깥 여론이 원균을 체직(경질)시키려 하는가”라고 묻자 호조판서 김수(1547~1615)는 “별로 체직시키려는 여론이 없다”고 손사래를 친다. 이때 정탁(1526~1605)이 “원균은 사졸이 따르니 가장 쓸만한 장수이고 이순신도 비상한 장수지만 어찌 사적인 분노로 이렇게 다툴 수 있느냐”고 비판하면서도 “그럼에도 원균의 경질은 안될 일”이라고 주장한다.(<선조실록>)

“두 사람에게 글을 내려 질책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때문에 원균을 경질한다면 필시 수군이 흩어질 염려가 있을 것입니다.”

경기 용인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에 있는 오희문 묘소. 용인시 향토유적 제34호이다. 오희문은 과거에는 실패했지만 <쇄미록>을 씀으로써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자잘한 이의 떠돌이 일기

<쇄미록>은 평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선비 오희문의 일기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1년(선조 24년) 11월27일 종 2명을 거느리고 남행길에 오른 오희문이 1601년(선조 34년) 2월27일까지 9년 3개월간이나 써내려간, 이른바 ‘피란일기’라 할 수 있다. ‘쇄미(쇄尾)’라는 이름부터 그렇다. 

오희문은 <시경> ‘패풍·모구’의 “자잘하며 자잘한 이, 떠도는 사람이로다.(쇄兮尾兮 流離之子)”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또한 오희문은 전쟁이 다 끝나고 서울로 되돌아온 뒤 “종이도 다되기도 했고, 한양에 도착해서 이리 저리 떠돌아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 쓴다”는 변을 남기고 ‘일기 쓰기’를 멈춘다. 

과거에 실패한 오희문은 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장남(오윤겸·1559~1636)이 영의정에 올랐고, 손자인 오달제(1609~1637)가 그 유명한 삼학사 중 한사람이었다. 장남 덕분에 본인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니 <쇄미록>을 쓴, 그 투철한 기록정신과 문장력이 후손들의 현달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쇄미록>은 1591년 11월부터 1592년 6월28일까지는 그날그날의 일기가 아니라 추후에 한꺼번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 1591년 11월~1592년 6월28일까지의 글은 흔히 ‘임진남행일록’으로 일컫는다. 

국립진주박물관은 최근 필사본 7책 800여장 분량의 <쇄미록>(보물 제 1096호)을 총 8권1세트로 엮은 번역서를 출간했다. 


■‘이런 개·돼지 같은 무리들을 어쩌면 좋으랴’

<쇄미록>은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조선과 조선 백성들의 민낯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당시 남부 지방을 여행중이던 오희문이 임진왜란 개전(4월13일)소식을 들은 것은 사흘 후인 16일이었다.

“왜선 수백척이 부산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저녁 나절엔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말이 들려 경악을 금치못했다”(‘임진남행일록’)고 썼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자 오희문은 백성들을 팽개치고 줄행랑친 선조 임금을 원망하는 듯한 일기를 남긴다.

“만일 주상께서 도성을 굳게 지키고 장수에게 명하여 미리 준비하여 막고 강을 끼고 위 아래로 목책을 많이 설치하고 먼저 필사의 각오로 길을 끊었다면 적이 아무리 강하고 예리해도 어찌 능히 날아서 건너오겠는가. 계교가 여기에 벗어나지 않는데 스스로 먼저 퇴둔(退屯·물러나서 진을 침)하니 몹시 애석한 일이다.”(‘임진남행일록’)

오희문은 임금을 잘못 보필해서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벼슬아치들을 여러번 비판한다.

“임금의 행차가 의주에 이르렀을 때 주서 임취정 박정현과 한림 조존세 김선여가 안주로 도망갔기에…벼슬을 삭제했다. …위급함을 당한 오늘날에 임금을 헌신짝 버리듯 했으니 이런 개돼지 같은 무리를…”(1592년 8월21일)

사관인 임취정·박정현·조존세·김선여는 사초책을 불구덩이에 던져넣고 도망간 자들이다. 이 자들 때문에 선조즉위년(1567년)부터 임진왜란 개전 이전(1592년) 까지 25년의 기록이 깡그리 사라져버렸다. 오희문은 또 “조정에 풍랑이 또 일어나 자기 의견과 다른 사람은 배척한다니…반드시 나라를 망치고야 말 것”(1594년 10월22일)이라 한탄했다. 

오희문의 묘비. 오희문은 비록 현달하지는 못했지만 맏아들(윤겸)은 영의정이 됐고, 손자(달제)는 유명한 삼학사의 한사람으로 이름을 날렸다.

■육촌 친척까지 잡아먹는 지경으로… 

전쟁의 참상은 필설로 다할 수 없이 끔찍했다.

“길에서 굶어죽은 사체를 거적으로 말아서 덮어둔 것을 보았는데 그 곁에 두 아이가 울고 있었다. 물었더니 그 어미라 한다. 그 뼈를 묻으려 해도 힘이 없어 옮길 수 없으므로….”(1594년 2월24일)

이 정도의 상황은 약과였다. 심지어 ‘육촌 친척까지 잡아먹는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말그대로 ‘헬조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최근엔 걸인도 드물다. 두어달 사이에 굶어죽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 일이 많아서 육촌의 천척도 죽여 씹어먹는다 하기에….”(1594년 4월3일)

오희문은 이 대목에서 “요즘 혼자 가는 사람을 쫓아가 죽인 뒤 잡아먹는다”면서 “사람의 씨가 다 말라 갈 지경”이라고 고개를 흔들었다. 오죽하면 성주를 점령한 왜군이 관청의 곡식을 나눠주자 백성들이 “새로운 상전(왜군)이 나를 살렸다”고 했단다. 


■예나 지금이나 천인공노할 왜적들의 만행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천인공노할 왜병들의 만행을 기록한 오희문의 글을 보면 숨이 턱턱 막힌다.

“긴 나무를 죽 세워두고 우리나라 사람의 머리를 베어 무수히 걸었는데 부패해서 살과 뼈는 떨어지고 머리털만 걸려 있거나 망건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고 한다. 분한 마음을 이기기 어렵다.”(1592년 9월24일)

“왜병들이 선릉(성종과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과 정릉(중종의 무덤)을 모두 파내어 재관을 부수고 옥체(임금의 유골)을 꺼내 버려서 중종은 겨우 구렁에서 찾았고, 성종은 아직 찾지도 못했는데 혹은 말하기를 불태웠다고도 하고, 강에 띄었다고 하니….”(1593년 5월8일)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다. 왜병들이 성종 부부의 무덤인 선릉과 중종의 무덤인 정릉을 파헤쳤다는 내용이다.

왜병에게 유린당한 여성들은 또 어떤가. 오희문도 이 대목을 기록하면서 “가슴 아프고 참혹한 일”이라 했다. 필자 역시 피가 거꾸로 솟는다.

“왜적은 영남 양반가 여성 중에 얼굴이 고운 자를 뽑아 5척에 실어 일본으로 보냈다. 여인들의 머리를 빗고 분 바르고 눈썹을 칠하게 했는데…. 먼저 간음한 여자들이고 나머지는 여러 적들이 돌아가면서….”

“왜적의 포로가 된 여인이 전투 후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적들에게 돌아가며 강간을 당해 자결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치마를 들춰보니….”(‘임진남행일록’)

필자가 차마 더는 인용하지 못할 정도로 참담한 내용이다. 

남편이라는 작자가 아내와 자식을 내팽개치고 도망친 사례도 있었다.

“길에서 아이를 보니 큰 소리로 통곡하고 있고 여인 하나는 길가에 앉아 역시 얼굴을 가리고 슬피 울고 있었다. 남편이 모자(母子)를 버리고 갔다…새와 짐승이라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거늘….”(1593년 7월15일)

임진왜란 때 조선의 비밀병기로 쓰인 비격진천뢰.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다 같은 의병이 아니다

의병이라고 다 같은 의병이 아니었다. 

“죽은 우리 백성의 머리털을 깎아버리고 머리를 베어 가지고 왔는데 의병장이 그걸 알지 못하고 진짜 왜병이라고 하여 순찰사에게 바쳤다고 한다. 우스운 일이다.”(1592년 9월13일)

9월1일자 일기를 보면 더욱 한심하다.

“먼 지역에 물러나 움츠린 채 양식만 축내고 싸울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이름만 의병일 뿐 실은 도망친 관군들이 처벌이나 면하려는 수작이다. 좌도의 수군 중에는 물에서 싸우는 것이 싫어서 의병에 가담한 자도 많다.”

그러나 오희문은 당시 용맹을 떨친 의병들을 거명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의병이 곳곳에서 거병했지만 그 이름에 걸맞은 사람은 오직 영남의 곽재우와 김면, 경기의 홍계남, 충청도의 조헌, 전라도의 김천일과 고경명 뿐이다. 나머지에 공적이 현저한 인물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1592년 10월1일) 이중 전사한 고경명과 조헌을 두고는 “모두 나랏일을 위해 전사하여 죽을 자리에서 죽었으니 그 이름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만 하다”고 칭찬했다. 또한 충청도의 의병장 홍계남을 두고는 “가는 곳마다 공을 세우니 적들이 홍장군 하면서 감히 침범하지 못했고, 충청도 내지가 편한 것은 모두 홍계남의 공이니 가상한 일”(10월1일)이라 했다. 의병장 중에서 으뜸은 역시 곽재우였던 것 같다. 

오희문은 “영남의 의병장 곽재우는 왜적의 수급을 헤아릴 수 없이 베었지만 공으로 여기지 않고 몸소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다”(9월8일)고 극찬했다. 

오희문은 특히 용렬한 의병장과 곽재우 의병장을 비교하면서 “사람의 뜻과 기상의 차이를 여기서 또한 볼 수 있다”고 했다. 개전 초기 조선군이 연전연패할 때 분연히 일어나 신출귀몰하며 용맹을 떨친 곽재우의 무용담이 전설처럼 떠돌았던 것 같다. 

오희문은 “곽재우가 용감한 무사 4명을 이끌고 적선 3척을 쫓아냈고 13명을 거느리고 적선 11척을 공격해서 달아나게 했다”고 기록했다. 아마도 1592년 5월4~6일 사이에 벌어진 모종의 전투에서 거둔 승전보인 것 같다.    


■명나라군의 횡포

선조는 자칭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으뜸요인으로 ‘명나라군’을 꼽았다. 예컨대 전쟁이 끝난 뒤인 1601년(선조 34년) 3월 14일 선조는 “왜란에서 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중국 군대의 힘”이었다면서 “조선의 장사(將士)는 중국 군대의 뒤를 따르거나 혹은 요행히 잔적의 머리를 얻었을 뿐 자기 힘으로는 적병 한 명도 베지 못했다”고 폄훼했다. 하지만 조선을 도와준 중국 군대는 곳곳에서 말썽을 피웠다. 또 그 중국군대를 맞이하기 위해 들어가는 물자는 엄청났다. 오희문도 고발한다.

“호남으로 내려간 중국군사가 길가 민가에서 재물을 약탈하는 것이 끝이 없다. 마치 적 변을 당한 것과 같다.”(1593년 7월7일) “…명나라 병사들이 끊임없이 오가며 소주와 꿀, 병아리 등의 물건을 찾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큰 몽둥이로 마구 매질하여 고을 수령까지 모욕했다.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다.”(1594년 6월4일)

당시 조선에서는 “명나라는 조선을 위해 구원병을 보낸 것이 아니라 명나라를 위해 보낸 것일 뿐”이라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그 때문일까. <쇄미록>에는 당시 명나라 경략(부사령관) 송응창(1536~1606)의 언급을 실었다.

“너희 나라(조선)의 군신은 ‘중국을 위한 것이지 구원병이 아니다’라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만약 중국을 위할 뿐이라면 압록강을 지킬 일이지 뭐하러 천하의 병사를 움직이고 100만냥의 은을 소비하면서 수천리 밖에까지 원정했겠는가.”(1593년 4월19일) 

평양성 전투도. 이여송이 이끄는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한 1593년(선조 26) 1월의 전투를 그린 것이다.  1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의 전투 끝에 일본군이 항복을 선언하고 철수했다.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도망간 노비놈들 붙잡히기만 해봐라”

<쇄미록> 역시 일기인만큼 오희문의 마음 속 이야기를 가감없이 털어놓고 있다.

노비 2명이 한꺼번에, 그것도 요즘의 승용차 역할을 하는 말에 식량을 싣고 도망가자 “분통이 터진다. 붙잡으면 윗전을 사지에 몰아넣은 죄를 어찌 용서하겠느냐”고 앙앙불락한다.(1593년 2월20일)

오희문은 심부름을 하는 노비가 도중에 물건을 빼돌린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었다.

“명복(노비)이 돌아왔다.…베갯모를 팔아 벼 8말, 콩 3말 5되를 얻어 짊어지고 왔는데 다시 세어보니 1말이 모자란다. 분명 명노가 훔쳐 먹었다. 괘씸하고 얄밉다.”(1593년 10월30일)

“명복이 돌아왔다. 함열현감이 ~보냈는데 쌀 5되가 부족하다. 준치와 꿀은 길에서 빼앗겼다고 한다. 어두워서 돌아온 걸 보니 분명 고기를 찌고 밥을 지어 먹었다. 꿀은 도중에 팔아서 쓰고는 빼앗겼다고 핑계를 대는 것일게다. 괘씸하고 얄밉다.”(1594년 5월8일)

하지만 노비가 중간에 ‘꿀꺽’ 했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당시만 해도 도량형이 관가의 것과 민가의 것이 달랐다. 실제 오희문 자신이 이산 현감에게 직접 받은 벼 1섬도 돌아와 다시 보니 11말7되 남짓한 경우도 있었다.(1594년 6월4일) 또 명나라군에게 말을 뻬앗기고 구타까지 당한 노비(덕노)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고 괘씸해 하다가 나중에 사실임이 밝혀진 일도 있었다. 그러나 오희문은 덕노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기보다는 잃은 말을 아쉬워하는 심정만 토로했다.(1599년 3월5·11일) 


■‘귀여운 막내딸이 내 마음을 잡는다’

오희문은 <쇄미록> 곳곳에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았다.

“새벽에 꿈을 꾸니 아내가 집에 있는데 옛날과 같다. 막내 딸 단아는 분을 바르고 깨끗이 단장했는데 내가 무릎 위에 안고 그 볼을 만졌다.”(1592년 7월3일)  

특히 막내딸은 끔찍하게 사랑했다.

“…막내딸은 얼굴이 곱고 밝으며 성질이 몹시 단아하여 내가 몹시 사랑하던 터였다. 고운 마음과 눈매가 자나깨나 눈에 보이니 <시경>에 이른바 ‘귀여운 막내딸이 실로 내 마음을 잡는다’는 거였다. 이 두 구절을 쓰니 슬픈 눈물이 절로 옷을 적신다.”(‘임진남행일록’)

하지만 당시는 어쩔 수 없는 가부장 사회였다. 전쟁 통에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이었는데, 그나마 먹을 것이 있으면 남자들이 우선이었다.


■‘저녁밥 먹으려면 병 걸린 여자들이 나아야 할텐데…’

“아침에 나와 두 아들은 함께 콩죽 반그릇을 먹었고, 아내와 세 딸은 전혀 얻어먹지 못하고 하루종일 지냈다”(1594년 3월1일)

또한 당시는 남자가 부엌에서 밥을 짓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아내와 두 딸, 네 계집종이 모두 학질을 앓고 누워서 저녁밥 지을 사람이 없으니 그들이 덜 아프기를 기다려 짓는다면 반드시 밤이 깊을 것이다.”(1593년 9월7일)

집안 여자들이 모두 학질을 앓고 있는데, 아니 그래 저녁밥 먹지 못할 것을 걱정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조금 덜 아프기를 기다린다는 것인가. 지금 같으면 큰일 날 일이다. 일기이니만큼 마음의 소리를 가감없이 담은 것이라 변호해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 대목에서는 ‘해도 해도 너무 했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법 하다.

그래도 사관들마저 사초책을 불구덩이에 던지고 도망갔던 한심한 시절이 아닌가. 오희문은 자신의 한 몸 추스르기도 어려운 그 시절, 하루하루 꼬박꼬박 그 참혹한 역사(임진왜란)를 기록해 나갔다. 사실 오희문은 당대의 기준으로 보면 ‘실패한 인간’이었다. 과거에 실패한 뒤 평생을 포의(布衣)로 지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떤 장원급제자도 부럽지 않다. <쇄미록>을 남김으로써 오희문이라는 이름 석자 또한 영영 남겼기 때문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오희문, <쇄미록 1~8>,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황교은 옮김, 국립진주박물관, 2019

김우철, ‘쇄미록 해제’, <쇄미록 1>, 국립진주박물관,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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