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후 101년(파사왕 22년)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이라 했다. 둘레가 1023보였다.” “487년(소지마립간 9년) 월성(月城)을 수리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월성의 축성과 수리 기사입니다. 지금은 조선시대에 쌓은 석빙고만 남아있지만 경주 월성은 101년 축성이후 신라멸망(935년)까지 843년 동안 천년왕국 신라의 왕성이었습니다. 왜 달 월(月)자를 써서 월성이라 했을까요. 월성은 경주 시내 남쪽 남천(문천) 가에 위치한 토성입니다. 울산 방면에서 흘러온 남천이 북류하다가 월성의 구릉에 부딪쳐 서쪽으로 꺾여 흐르는데 그것을 감씨듯이 초승달 모양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월성이라 했던게죠. 바깥 둘레는 2340m 정도입니다. 


■1000년 신라왕국의 왕성

그런데 신라가 멸망한 이후 500년 가까이 이 월성터에는 인간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월성터를 발굴해보면 고려시대의 유물·유구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라시대 유물과 유구 바로 위가 조선시대 문화층으로 이어집니다. 왜일까요. 아마도 신라멸망 후 이 1000년 왕국의 왕성터는 금단의 땅으로 터부시되었을 겁니다. 월성발굴은 2014년 12월부터 본격 시작됐습니다. 물론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과 17년 일본 고고인류학자인 도리이 류조(鳥居龍藏·1870~1953)가 성 남벽 서쪽의 한 지점을 발굴했습니다. 또 1979년~80년 문화재연구소가 북벽 동편 동문지와 성벽을 조사했고, 이 때 바깥쪽 해자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그러니까 2014년부터의 발굴은 35년만에 재개된 조사라 할 수 있습니다.

 월성 본격 발굴은 사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 때문에 이뤄진 것입니다. 2013년 12월 석굴암을 방문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월성 발굴에 관심을 표명한 이유 추진되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0년대 경주 고도개발 사업을 펼친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1970년대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라 추진된 사업에서 천마총 황남대총 발굴되었거든요. 지금의 경주 모습은 그때의 사업결과가 반영된 것입니다.


■박근혜와 박정희

아마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버지를 의식해서 월성 발굴을 지시했을 가능성이 짙습니다. 

물론 대통령이 역사 고고학에 관심을 두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닙니다. 대통령이 발굴현장에 와서 고고학 조사단을 격려하고 관심을 표명하는 것은 좋은 일이죠. 또 박정희 전 대통령 덕분에 경주가 정비됐다는 이야기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경주가 지금 이 모습으로 정비 개발된 것이 과연 잘한 것일까요. 시내 전체가 유물밭인 경주를 싹 밀어버리고 지금의 보문단지를 만들고 한 것이 과연 옳았는지는 또다른 차원의 논쟁을 부를 수 있습니다. 여하간에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4년 경주 월성에 들러 했다는 언급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월성발굴을 체계적으로 철저히 하라”고 해놓고는 “집중해서 가시적인 성과를 도출해달라”는 당부도 곁들였거든요. 이 말이 헷갈린 해석을 낳았지요. 빨리 발굴하고 개발하라는 얘기인지, 아니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신중하게 하라는 건지…. 

그래서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발굴을 서둘러 빨리 복원한 뒤 관광자원화 하자는 측은 후자의 언급을, 시간이 걸리더라도 후회없는 학술조사로 제대로 된 역사를 복원하자는 측은 전자의 언급을 강조했습니다.

대체 박근혜 전대통령 발언의 의도가 무엇이었을까요. 알 수는 없지만 저는 이렇게 믿고싶습니다. 아무렴 대통령이라는 분이 대충대충 발굴하라고 말씀하셨겠어요. 


해자에서 출토된 주요 씨와 열매류. 1㎜ 이하의 체를 이용한 체질로 식물유체를 선별해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만파식적 보관했던 천존고는 어디? 

월성이 어떤 곳입니까. 고려시대 문화층이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834년간이나 신라의 궁성이었던만큼 그 속에 얼마나 많은 문화재가 있겠습니까. 땅밑에 무려 7개의 문화층이 존재하고 있다니 대단하지요. 

그런 7개 문화층을 발굴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습니까. 불과 74년간(710~784년) 도성이었던 일본 헤이조쿄(平城京) 유적도 50~100년을 목표로 장기발굴을 벌이고 있잖아요. 그래서 월성 발굴은 100년이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펼쳐야 할 장기사업으로 삼아야 합니다. 기록 속에 보이는 월성 내부의 유적으로는 <삼국유사> ‘만파식적조’에 등장하는 ‘천존고(天尊庫)’가 있습니다. 천존고는 신라의 보물인 만파식적을 보관한 창고입니다. 만파식적이 무엇입니까. 

죽어서 바다 용이 된 문무왕(재위 661~681)과 하늘의 신이 된 김유신(595~673)이 합심하여 동해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답니다. 그런데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재위 681~692)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에 보관했답니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는 개며,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평온해졌답니다.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으로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는 게 <삼국유사>의 기사내용입니다. 만약 이 천존고가 발굴된다면 세상이 뒤집어지겠지요.

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4~5세기 무렵의 ‘미니어처’ 배. 실제 배를 1:9로 만든 미니어처이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해자에서 쏟아진 5세기 유물들

지금 월성발굴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담당하고 있는데요. 연구소가 최근 지난해 월성 주변에 조성된 해자를 발굴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아주 흥미로운 유물과 유구가 나왔더군요. 해자(垓子)라는 곳이 어디입니까.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판 물도랑이나 연못을 가리키잖아요. 말하자면 인공연못 같은 곳이요.

월성 주변에도 그런 해자를 만들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연못은 습기가 많겠죠. 물이나 뻘 같은 곳 안에 있던 신안선이나 태안선 유물들이 수백 수천년동안 고스란히 남아있잖아요. 공기가 통하지 않게 되니까요.

바로 그런 월성 해자에서 유물이 쏟아진거죠.

우선 발굴단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제일 앞세운 유물은 나무로 만든 배입니다. 뭐 그 당시면 당연히 배를 나무로 만들었지, 철로 만들지는 않았겠죠.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발굴 배가 실물이 아니라 ‘미니어처’라는 거죠. 길이가 약 40㎝ 정도인데, 출토된 미니어처 배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는 고고학적인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물론 광주 신창동(기원전 1세기)이나 부여 쌍북리(기원후 6~7세기)에서는 뭔가 배모양 유물이 나왔는데, 이것들은 배가 아니라 배의 형태를 지닌 그릇이었대요. 또 마한 현동이나 대구 평촌리에서도 실제로 배모양 유물이 나오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이 배는 목제가 아니라 토기입니다. 

이번에 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미니어처’ 배는 실물을 축소시킨 배라는 데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실제 배를 1:9로 만들었다는 거죠. 유물 사진 보면 배의 상부에는 구조물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물론 실제 배가 출토된 예도 있기는 합니다. 창녕 비봉리에서 무려 8000년 전 신석기 시대 배가 나왔고, 김해 봉황동에서도 기원후 3세기 배가 출토됐지만, 이것들은 그냥 일부 조각만 발견된 거죠.   

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방패 2점. 손잡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1점씩 나왔다.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해서 이중동심원과 띠모양으로 밑그림을 그렸고,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칠했다. 동심원은 일반적으로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연합뉴스

■미니어처 배와 방패의 정체

그런데 신라인들은 왜 이런 미니어처 배를 만들었을까요. 혹시 아이들 장난감으로 만든 건가요.

뭐 그럴 수도 있지만 발굴단에서는 형태를 정교하게 모방하고 공을 들여 민든 이 미니어처 배를 최고위 계층인 왕실과 관련된 ‘의례용’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행사용이죠.

특히 배 안팎에 불에 그을리거나 탄 흔적이 확인된 점에 주목하고 있는데요. 민속학적으로 ‘불’과 ‘배’를 허투루 볼 수 없다는 겁니다. 즉 ‘배’는 초자연 공간과 인간세계의 소통을 의미하고, ‘불’은 민속의례에서 생산(풍요)과 제액(소멸), 정화(신성), 재생(부활)을 뜻한답니다. 왜 우리 연등행렬 같은 일련의 행사에서 작은 배에 소망을 적은 종이를 띄워 불에 태워 보내지않습니까. 사람 크기의 배를 띄워 영혼을 실어보내는 장송의례를 고대 일본에서도 볼 수 있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 확인된 불에 탄(그을린) 미니어처 배도 뭔가 이 해자에서 벌어진 행사와 관련있는 유물일 수 있다는 거죠. 

‘미니어처’ 배와 함께 출토된 방패 2점도 심상치 않은데요. 

원래 방패는 그냥 전쟁 때 쓰는 방어용 무구로 알려져 있잖습니까. 이번에 출토된 방패가 2점인데, 하나는 손잡이 있고, 하나는 없는 것입니다. 방패 표면에는 이중동심원 모양과 띠모양으로 밑그림을 그렸고, 붉은 색과 검은색 칠을 한 형태였습니다. 왜 동심원은 왜 그렸고, 색깔은 왜 붉은 색 검은색을 칠했을까요.

예전엔 동심원을 태양을 상징한다고 여겼답니다. 또 붉은 색 검은 색은 고대인들은 사악한 기운을 쫓는 색깔로 생각했답니다. 그러면 용도가 무엇일까요. 방어용일까요. 의례용일까요.

해자에서 출토된 동물뼈들. 맷돼지류, 말, 개, 소, 사슴류 등 동물뼈가 다량 나왔는데요. 바다사자뼈와 상어척추뼈, 곰뼈도 나왔다.|연합뉴스

고구려 고분인 안악3호분 벽화 보면 방패를 옆구리에 끼거나 손잡이를 들고 이동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일본 오사카(大阪) 난고우(南鄕) 유적에서는 의장용으로 세워놓은 방패 형태가 발견됐습니다.

두 사례를 단서로 해석하면 결국 방패는 방어용 무구로도, 의례용으로도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겁니다.

고구려 고분에서처럼 방패에 손잡이가 있든 없든 병사가 들고 가거나 옆구리에 끼어 전투를 치를 수도 있고, 혹은 난고우 유적에서처럼 물가에서 벌인 일련의 행사에서 의장용으로 세웠을 수도 있다는 얘기죠.

신기하게도 ‘미니어처’ 배와 방패에 대한 연대측정 결과 4세기말~5세기초였답니다. 같은 시대 유물이죠.

발굴단은 이 무렵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중국(전진)에 사신을 파견하던 시점과 일치하는것에 주목합니다.

왜냐구요. 4세기말과 5세기 초면 신라는 내물마립간 시기(356~402) 무렵인데, 삼국중 가장 더딘 발전을 보이다가 바야흐로 김씨가 왕위를 계승하는 단계로 발돋움하고 체제를 정비하고 중국에 사신을 보내던 시기거든요. 

그렇다면 4세기말 5세기 초 어느날 월성 인공연못에서 신라의 국운왕성을 기원하는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던 거 아니겠느냐. 행사 의장용으로 세운 방패가 늘어서 있은 가운데 소원을 담아 불에 태운 ‘미니어처’ 배를 띄운 게 아니겠느냐. 뭐 이런 추정을 한거죠.

경주 월성에서 출토된 곰뼈. 곰뼈 중에서도 앞발뼈와 뒤꿈치 뼈가 주로 나왔고, 아래턱뼈에서는 칼로 해체한 흔적이 보였다. 곰가죽으로 뭔가를 제작했다는 이야기다. <삼국사기>는 “곰의 뺨가죽과 팔가죽으로 군지휘관의 깃대에 꽂는 장식품을 만든다”고 기록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신라시대 씨앗과 열매로 무엇을 복원했나

또하나 발굴단에서는 이번에 해자를 둘러싼 구조물과 출토된 신라시대 씨앗 및 열매 63종, 그리고 신라시대 당시의 규조(물에 사는 식물성 플랑크톤) 등을 분석해서 해자와 주변의 식생과 주변의 경관을 복원했는데요. 그 결과가 아주 흥미롭더군요.

즉 발굴결과 해자의 기슭 흙이 유실되는 것을 방지하는 나무기둥을 1.5m 간격으로 세우고 그 사이를 판재로 연결한 흔적을 확인했습니다. 지금도 연못가 가면 사람들이 물에 빠지지 않도록 나무를 죽 박아놓고 줄로 연결하잖아요. 바로 그런 의미죠. 

무엇보다 1㎜ 이하의 고운 체질로 걸러 연구소측은 지금까지 63종의 씨와 열매류를 확인했는데 그 중에는 가시연꽃씨를 비롯해 머루와 버찌, 자두, 복숭아, 쌀, 가래, 자두, 박, 밀, 콩, 외류 등이 보였습니다. 얼마나 귀중한 자료입니까. 1600년 된 식물류잖습니까. 연구소는 출토된 씨앗과 열매, 그리고 고배율의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는 미세한 꽃가루와 규조 등의 식물자료를 토대로 5세기 어느 여름날의 풍경을 복원해냈습니다.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우선 5세기 8월 어느날 해자 안에는 가시연꽃하고 다른 수생식물이 예쁜 꽃을 피우고 있고, 해자 인접한 주변에는 초지, 즉 풀이 주로 자라는 환경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우선 발굴결과 가시연꽃 씨앗이 나왔으니까 일단 그걸 토대로 해자(연못) 안을 복원한거죠. 연분홍 가시연꽃과 그 비슷한 수생식물이 자라고 있는 연못 안…. 그리소 해자 바로 옆 주변의 경우 해자에서 출토되는 그 시대 규조류를 분석해보니 1600년전 연못 주변이 계속해서 햇빛에 노출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이것은 해자 주변에 나무가 없이 시야가 트인 공간이었음을 암시해준다는 겁니다.

또 이번에 해자에서는 느티나무 씨앗도 확인했습니다. 그것으로 미루어 연못안에는 가시연꽃이 자라고, 연못가에는 확 트인 초지가 있고, 그 바깥에는 느티나무가 늘어서 있구나 하고 추정했습니다. 지금의 계림과 소하천인 발천 일대를 중심으로 느티나무 숲이 있었다는 거죠. 

또 연구소에서는 느티나무 숲 바깥에는 참나무와 소나무 숲이 늘어서 있었다고 추정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해자에서 참나무와 소나무 꽃가루가 확인됐는데, 이 참나무와 소나무 꽃가루는 멀리 날아가는 특성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연구소측에서는 느티나무 숲 보다 멀리 떨어진 곳의 주변 산지에 참나무와 소나무 숲이 존재하는 것으로 복원한 것입니다.



■어린 돼지를 좋아한 신라인들

정리해볼까요. 해자(연못)에는 가시연꽃하고 다른 수생식물이 자라고 있고, 주변에는 탁 트인 초지이며, 그 바깥은 느티나무 숲이고 더 멀리는 참나무와 소나무 숲이라는 거죠.

뭔가 그럴듯 하지 않습니까. 이번에 발굴된 유물 중에서 맷돼지류, 말, 개, 소, 사슴류 등 동물뼈가 다량 나왔는데요. 바다사자뼈와 상어척추뼈, 곰뼈도 나왔습니다.

물론 전체의 30% 정도가 맷돼지류였습니다. 역시 한국인은 예나지금이나 돼지고기를 좋아했나봅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대목이 눈에 걸렸습니다. 6개월에서 1년 정도 키운 돼지가 40%(26개체)였다는 겁니다. 

무슨 뜻일까요. 신라인들은 돼지 중에서도 어린돼지를 좋아했고, 이렇게 어린 돼지를 먹었다는 것은 신라인들이 이미 5세기부터 안정적으로 돼지를 사육하고 관리했다는 증거라는 얘기죠.


■곰가죽으로 만든 군지휘관 장식

또하나 재미있는 것은 출토된 동물뼈 중 곰뼈가 15점 이상 나왔다는 겁니다. 한반도 남부지방에서는 서식하지 않는 곰뼈가 왜 나왔을까요. 궁금하잖아요. 그럼 곰 고기를 먹었다는 얘기인가요.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특히 앞발뼈와 뒷꿈치뼈가 주로 확인되었고, 아래턱뼈에서는 칼로 해체한 흔적이 보였거든요. 이런 점들이 수상하다는 거죠.

그래서 연구소에서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줄 알고 자료를 찾아보았답니다.

<삼국사기> ‘잡지·무관조’에 등장하는 곰 관련 기사를 주목했는데, “제감화(弟監花)는 곰의 빰가죽, 군사감화(軍師監花)는 곰의 가슴가죽, 대장척당주화(大匠尺幢主花)는 곰의 팔가죽으로 만든다”는 겁니다.

제감화와 군사감화, 대장척당주화는 대체 뭐냐고요? 어렵죠. 맹수의 가죽이나 독수리 깃털로 만들어 신라시대 각급 군 지휘관의 깃대에 다는 이른바 ‘화(花)’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무슨 얘기일까요. <삼국사기> 기록에서 언급한 제감화(아래턱뼈)와 대장척당주화(앞발뼈 부위)에 사용하는 뺨가죽(제감화)와 팔가죽(대장척당주화)과 일치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곰 가죽을 이용해서 각급 지휘관들의 장식을 제작하는 공방이 월성 근처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짙다, 뭐 이런 추정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월성 해자 발굴지점. 5새기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유물들이 쏟아졌다.

■일(一) 이(二) 팔(八) 대신 일(壹), 이(貳), 팔(捌)

해자에서는 3면 전체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 명문 목간 1점이 확인됐는데요. 

주요 내용은 ‘곡물과 관련된 사건을 당주(幢主)가 보고하거나 받았다’는 것과 ‘곡물과 연관된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문서를 올린 사람, 발생한 사건을 제보한 사람, 목간의 글을 쓴 사람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목간에 등장하는 당주라는 직책은 요즘으로 치면 군수 정도의 지방관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당주라는 직책은 6세기 금석문(국보 제198호 ‘단양 신라 적성비’)에 나오는 지방관의 명칭이거든요. 그러나 지금까지는 목간에서는 보이지 않았는데 이번에 처음 나왔다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또 목간에 벼-조-피-콩 등의 곡물이 차례로 등장하고 있는데요. 혹시 이것이 당대 신라인들에게 가장 보편적인 곡물의 순서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더듬어 볼 수도 있죠. 당시 신라인들이 가장 많이 소비한 곡물 순서가 벼-조-피-콩 등이 아닐까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특히 목간에서 신라인들이 이미 4~5세기부터 위·변조 방지 숫자(갖은자)를 썼던 것으로 확인됐는데요.

갖은자는 ‘같은 뜻을 가진 한자보다 획이 많은 글자’를 의미하는데요. 왜 우리가 한 일(一)이나 두 이(二), 석 삼(三)이라는 숫자를 그냥 쓸 경우 위·변조 등 부정 행위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일(一) 대신 일(壹), 이(二) 대신 이(貳), 삼(三) 대신 삼(參), 팔(八) 대신 팔(捌)을 쓰지 않습니까.

그런 글자를 5세기 때도 그런 갖은자 글자를 썼다는 거죠. 그럴 것 같습니다. 예를들어 백원인데 한 일(一) 자 밑에 선 하나 더 그어서 두 이(二)자라 고치면 200원이 되잖습니까. 부피도 마찬가지죠. 100말이라는 의미에서 일백두(一百斗)라 썼는데 누군가 한 일(一)자 밑에 줄을 그어서 두 이(二)라 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200두로 둔갑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계산은 똑바로 해야죠. 

이미 안압지(현재 동궁과 월지) 목간(7~8세기)에서도 갖은자가 확인된 바 있는데, 신라의 갖은자 사용 문화가 통일 이전부터 있었다는 겁니다. 이밖에도 해자에서는 수정이 가공되지 않은 원석 상태로 출토됐습니다. 수정을 예쁜 장신구로 가공하는 공방이 존재했다는 얘기죠. 

하여간에 이번에 발굴유물과 확인된 유구로 5세기 생활상을 나름 복원한 셈인 것 같아요.

이종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월성 해자는 물을 담아 성 안팎을 구분하면서 방어나 조경의 기능을 담당했고, 다양한 수변(水邊) 의례가 이뤄진 특별공간이었을 것”이라 추정했습니다.

습기가 많은 해자에서는 공기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유물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경관복원으로 바라본 5세기 신라

정리하자면 이렇죠. 내물마립간(재위 356~402) 무렵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돋움하던 5세기초 8월 여름날의 경주. 왕성(월성) 주변에 조성된 해자 안에는 가시연꽃과 다른 수생식물이 자라고 있다. 연못 주변은 풀이 자라 시야가 비교적 확 트인 공간이다. 

계림과 소하천인 발천 일대에는 느티나무가 싱그러운 녹음을 펼치고 있다. 조검 멀리 떨어진 곳에는 참나무와 소나무 숲이 늘어서 있다. 

해자에서는 신라의 국운왕성을 기원하는 행사가 벌어지고 있다. 행사 의장용으로 세운 방패가 늘어서 있은 가운데 소원을 담아 불에 태운 ‘미니어처’ 배가 동동 떠간다. 

월성에서는 인근 지역의 지방관인 당주는 곡물수확과 관련된 사건이 일어났음을 보고하고 있다. 당주는 곡물의 숫자를 정확하게 하려고 위·변조하기 쉬운 일(一)과 이(二) 대신 일(壹)과 이(貳)라 쓴 보고서를 제출하고 있다.

가죽공방에서는 날카로운 칼로 곰(熊)을 해체해 발라낸 가죽으로 군 지휘관의 장식품을 제작하고 있다. 보석공방에서는 수정 원석으로 화려하고 정교한 수정장신구를 만들고…. 한편에서는 우리에서 키운 맛좋은 6개월 산 어린 돼지를 잡고…. 

이종훈 소장은 이것을 ‘경관복원’이라 합니다. 뭐 정확한 복원인지는 모르죠. 그러나 해자에서 확인되는 유물과 구조물, 동식물상을 토대로 유적을 포함한 것이 바로 이 ‘경관의 복원’이라는 거죠. 경향신문 선임기자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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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imduhan 2019.04.12 18: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5세기의 신라 금성은 왜군에게 여러 차례 포위되어 공격된 시점이다.그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