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스트라 연주를 보고 듣는 음악의 문외한들이 한번쯤 갖게 되는 궁금증이 있다.
작곡자도 아닌데다 악기도, 연주도, 소리도 내지 않은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향한 박수갈채를 독차지한다는 것은 일종의 사기가 아닐까.
아닌게 아니라 영국의 음악학자 한스 켈러는 “음악만 들으면 되지 지휘자는 불필요한 존재”라 주장했다. 헝가리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칼 플레시도 “지휘자처럼 사기꾼이 진입하기에 좋은 직종이 없다”고 했다.
물론 음악이 단순했던 시절에는 수석 연주자의 신호에 따라 무난히 박자를 맞췄다. 17세기 베니스에서는 오페라의 아버지로 일컫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1567~1643)를 위해 ‘마에스트로 디 카펠라’(maestro di cappella·교회 음악감독)라는 자리를 만들었다. 최고의 음악가를 고용해서 정확한 합주를 돕는다는 것이었다.
비발디·하이든·바흐·헨델 등 작곡가는 연주에 참여해서 자신이 쓴 곡을 직접 지휘했다. 장 바티스트 륄리는 루이 14세의 회복을 기원하며 작곡한 ‘테데움(Te Deum)’을 연주하고 지휘하면서 나무 막대기를 너무 세게 바닥에 내리치다가 그만 자신의 발을 찍었다. 륄리는 결국 괴저에 걸려 발을 절단한 뒤 사망했다.
작곡가가 연주와 지휘를 겸했던 전통은 낭만주의 시대에 종막을 고했다.
1808년 12월 빈에서 피아노 협주곡과 교향곡을 공개연주한 베토벤의 지휘는 한마디로 재앙이었다. 오버액션으로 피아노 양 옆에 있던 등불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두번째 스포르찬도(세게 연주) 부분에서 오른손을 힘차게 휘둘러 떨어진 등불을 잡고 곁에서 도와주던 합창단 소년의 입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다른 소년은 잽싸게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횡액을 면했다. 그 장면을 본 객석에서 '썩소'가 터졌다. 교향곡 9번 연주 때는 그야말로 패닉이었다.
청력까지 거의 상실했던 베토벤은 다른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끝난 줄도 모르고 지휘대에 서있는 굴욕까지 맛봤다. 슈만과 멘델스존, 차이콥스키도 서툰 지휘 솜씨 때문에 애를 먹었다. 베토벤 교향곡 같은 방대하고 복잡해진 곡을 준비·해석·응용하는 지휘자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음악적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작곡자나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조차 지휘자가 흔드는 마법의 지팡이에 홀려 말없이 복종했다.
단적인 예로 아르투르 니키시(1855~1922)같은 지휘자가 방에만 들어와도 오케스트라 소리가 좋아졌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독일의 유명한 호른 연주자였던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지휘자가 지휘대로 가는 발걸음이나 악보를 펴는 모습만 봐도 거장(마에스트로)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했다. 구스타프 말러는 “나쁜 오케스트라는 없다. 나쁜 지휘자만 있을 뿐이다”라 했다.
모두 마에스트로로서의 실력과 권위를 상징하는 말들이다. 그런 면에서 ‘정마에’로 통했던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씨가 중도하차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도 음악의 공과가 아니라 볼썽사나운 이전투구의 결과라니 서글픈 생각마저 든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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