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백일홍이라는 일컬어지는 식물은 두가지다.
중국 원산인 목백일홍과, 멕시코 원산인 꽃백일홍이다. 꽃백일홍은 원래 잡초에 불과했지만 독일인인 진(Zinn)이 발견한 이후 화훼가들이 개량해서 관상용으로 재배했다. 반면 동양의 문헌에 다수 등장하는 목백일홍은 배롱나무를 가리킨다. 이 ‘목백일홍’의 이름은 가슴 찡한 전설을 담고 있다.
옛날 어떤 남자가 제물로 낙점된 처녀를 구한다며 괴물과 싸우려고 떠났다. 남자는 처녀에게 ‘성공하면 흰 깃발을, 실패하면 붉은 깃발을 달고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100일 후 괴물과 한판 승부를 펼치고 돌아오던 남자의 깃발은 붉은 색이었다. 처녀는 남자가 죽은 줄 알고 크게 낙담하면서 자결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실 괴물의 피가 깃발에 물들었던 것이었다. 그 뒤 처녀의 무덤에서 피어난 붉은 꽃은 100일 동안이나 폈다고 해서 ‘백일홍(百日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동양의 목백일홍(배롱나무)이든, 서양의 꽃백일홍이든 두 식물의 공통점이 있다. 꽃이 매우 오래 피고, 매우 예민하다는 것이다. 우선 백일홍에게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성어가 통하지 않았기에 옛 사람들의 시심을 사로잡았다. 구한말 시인·학자인 황현(1855~1910)은 “매화와 국화도 오래 못가지만…날마다 붉어져 100일이나 이어지는 꽃이랴…천번을 봐도 싫증나지 않는다”(<매천집> ‘경자고·백일홍’)고 읊었다. “이름 있는 꽃은 오래가지 못하니(名花不能壽) 이런 이치 참으로 한탄스럽다.(此理良可歎) 매화와 국화도 오히려 얼마 못 가는데(梅菊尙未幾)…하물며 이렇게 날마다 붉어져(況玆日日紅) 석 달 반이나 이어지는 꽃이랴.(强及三月半) 핀 꽃이 아직 지기도 전에(開者未遽落) 꽃봉오리가 계속 이어서 터진다.(未開續續綻)…천번을 보고 보아도 싫증이 안 난다(不厭千回看) 드디어 꽃나무 중에서(遂令卉譜中) 의젓하게 으뜸을 삼게 하는구나.(儼然爲之冠)”
고려말 학자 문인인 목은 이색(1328~1396)은 “백일 내내 빨갛게 피는 선경의 꽃이 여름부터 가을까지 꽃 모습 여전히 농염하다”(<목은집> ‘시·백일홍’)고 찬양했다.
“사시 내내 푸르고 푸른 소나무 잎이라면(靑靑松葉四時同) 백일 내내 빨갛게 피는 선경의 꽃이로다(又見仙파百日紅) 새것과 옛것이 서로 이어 한 색깔을 이루다니(新故相承成一色)조물의 묘한 그 생각은 끝까지 알기 어렵구나(天公巧思진難窮)…여름부터 가을까지 꽃 모습 여전히 농염해라.(自夏조秋態自濃)”
또 백일홍은 ‘자극에 민감한 식물’로 도 알려졌다. “간지러운 것을 참지 못해 손가락으로 긁으면 흔들린다”(<산림경제>)고 해서 ‘파양수(파痒花)’라는 별명을 얻었다. 조선 전기 학자 문신인 김일손(1464~1498)은 백일홍을 간지러움을 참는 수줍은 여인에 비유했다.
“수줍은 여인, 푸른 치마 붉은 소매로 아리따움 견주는데(碧裙紅袖競언然)…풍류를 독점해서 여름 꽃 압도하고(獨占風流當夏艶) 얼굴빛은 봄꽃들도 당해내지 못한다(不將顔色競春姸) 간지럼 시키면 신선의 손톱인지 돌아보고(파痒還擬爬仙爪) 교령을 풀어도 웃음을 참고 잔치에 끼지 않네.(忍笑休敎狎禁筵)”(<탁영집> ‘칠언율시·백일홍’)
최근 미 항공우주국(NASA)가 우주정거장 실험실의 무중력 환경에서 백일홍을 꽃피웠다고 발표했다. 왜 하필 백일홍이냐.
나사 관계자는 “이 꽃이 오래 피고(60~80일) 환경변화와 빛의 특성에 민감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백일홍의 재배에 성공하면 ‘우주 식물 재배 프로젝트’에 중대한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저 옛 사람들의 시심을 자극해온 백일홍의 별난 성질이 우주실험의 안성맞춤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경향신문 논설위원
'여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치 문양과 불교 卍자는 같은 문양이다 (2) | 2016.01.22 |
---|---|
'이혼도장 찍고' 출가 해볼까 (1) | 2016.01.18 |
어느 마에스트로의 퇴장 (0) | 2015.12.31 |
올해의 단어와 혼용무도 (0) | 2015.12.28 |
대통령 수명이 짧다고? 새빨간 거짓말 (0) | 2015.1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