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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연산군이 질탕하게 놀았던 탕춘대…왜 유네스코 세계유산 감인가

“연산군이 황음무도한 짓을 벌인 탕춘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감이라고?”
최근 문화재청이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탕춘대성을 포함한 ‘한양의 수도성곽’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신청 후보로 선정했습니다. 이에따라 올해 9월에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예비평가신청서를 유네스코에 제출할 계획입니다. 
여기서 ‘탕춘대’의 유래를 안다면 납득이 가지 않을 분들도 있을 겁니다. 왜냐면 ‘탕춘대’는 중종반정 때(1506년 9월2일) 연산군이 시녀들과 질탕하게 놀았던 ‘문제적 장소’로 지목된 곳이니까요. 

■탕춘대 돌구유에서의 음란행위 
“…큰 정자를 지어…밤낮으로 시녀들과 놀았다. 그중 가장 큰 것이 삼각산 밑 장의사동의 탕춘정인데….”(<연산군일기>)
‘탕춘정(대)’가 들어섰다는 ‘삼각산 밑 장의사동’은 세검정 초등학교 인근을 가리킵니다.
‘탕춘정(대)’ 기사는 중종반정이 일어나기 8개월 전인 1506년(연산군 12) 1월27일 처음 보입니다.
“연산군이 창의문 밖에…탕춘대를 봉우리 위에 세웠다. 봉우리 밑에 좌우로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돌기둥을 세우고…언덕을 따라 긴 회랑을 짓고 모두 청기와를 이으니 고운 색채가 빛났다.”
그러고보면 연산군이 지은 탕춘대(정)은 청기와를 이은 청와대라 할 수 있네요.

<연산군일기>는 이날 “연산군이 의정부·육조·대간들을 모두 데리고 가서 이른 봄의 흥취를 즐기며 술자리를 베풀었다”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7월2일자 <연산군일기>는 심상치않은 내용을 담았습니다.
“연산군이…탕춘대에서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와 엄명을 내렸다. ‘궐내에 출입하는 운평(궁궐에서 춤과 음악을 담당하는 기녀)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발설해서는 안된다. 누설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7월2일)
대체 탕춘대에서 무슨 짓을 벌였기에 ‘발설하지 말라’고 입단속을 했던 걸까요. 그러나 비밀은 없는 법이죠.  

불과 5일 뒤인 7월7일자 <연산군일기>에 누설됩니다.
“왕이 내구마(궁궐의 말) 1000필을 들여 흥청(연산군 시절 대궐로 들인 기녀들)을 싣고 탕춘대에 가서 나인(정5품 상궁 이하의 궁녀)과 길가에서 간음했다.”
이 무슨 망극한 짓이란 말입니까.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연산군은 탕춘대에 ‘돌 구유’(석조)를 만들고 궁녀들과 음란한 짓을 벌였다”고 좀더 구체적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랬으니 중종반정 주모자들이 ‘연산군의 음란행위’를 중요한 명분으로 꼽는 것이겠죠.

연산군 이후에도 점잖은 문인·학자들이 탕춘대를 찾아 음풍농월했다. 미수 허목은 “맑은 물과 흰 돌이 사랑스러워 시내의 돌 위를 천천히 걸어 탕춘대에 올랐다”고 읊었다. 다산 정약용은 동갑내기 벗에게 “비온 뒤 탕춘대 아래 폭포수가 한창인데, 훨훨 날아 함께 구경할 수 없는 것이 애석하다”는 편지를 보냈다.

■점잖은 문인·학자들도 감탄사 연발
그러나 탕춘대의 풍치는 대단했나 봅니다. 
훗날 학문이 깊고 점잖은 체면의 문인·유학자가 탕춘대의 절경에 흠뻑 빠져 앞다퉈 촌평을 날렸으니 말입니다.  
미수 허목(1595~1682)는 “맑은 물과 흰 돌이 사랑스러워 시내의 돌 위를 천천히 걸어 탕춘대에 올랐는데, 정오의 햇살이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따사로운 봄풀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기언별집> ‘기’)고 읊었습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동갑내기 채홍원(1762~?)에게 “괴롭고 괴로운 이조참의를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느냐”고 슬쩍 눙쳤습니다. 다산은 “비온 뒤 탕춘대 아래 폭포수가 한창인데, 훨훨 날아 함께 구경할 수 없는 것이 애석하다”는 편지를 보냈답니다. 동명 김세렴(1593~1646)은 원두표(1593~1664)·이해(1591~1670) 등과 함께 탕춘대로 ‘벙개모임’을 가졌답니다.

“장한 회포 풀지못해 답답하던 중 벗 두세명과 함께 놀이 나가니…문 나서 말에 올라 서로 보고 웃은 다음 채찍질해 곧장 바로 탕춘대로 향했네.”(<동명집>) 
약천 남구만(1629~1711)은 탕춘대의 봄경치를 운치있게 읊었습니다 
“…피어오르는 봄 경치 우리들 몫이라오…때로 이슬 내리고 산 깨끗하니 한 점의 먼지도 없어라. 못의 물고기는 따뜻한 햇볕을 맞이하고, 골짝의 새들은 새봄 노래하네….”(<약천집>)

양명학의 거두인 하곡 정제두(1649~1736) 역시 ‘탕춘대’에 흠뻑 빠졌답니다.
“물은 탕춘대를 싸고 왼쪽으로 두 골짜기를 끼고 흐른다…돌이라 물은 골골히 울며 흐르고 모래라 물은 맑고 깨끗하며…맑은 바람과 소나무는 운치를 이루니 참말로 산간의 절승(絶勝)이었다.”
“친구 5명이 술을 들고 갈 때 따라갔다”는 정재두는 “이런 곳이 아니었다면 이런 놀이를 즐길 수 없었을 것”(<하곡집> ‘탕춘대기’)이라고 했습니다.

■왜 하필 탕춘대였나
그나저나 왜 연산군이 하고 많은 이름 중에 ‘탕춘대(蕩春臺)’라 지었을까요.
정제두의 ‘탕춘대기’(1730)는 “창의문에서 5리쯤 지나면 들판이 생기었으니…두 산 사이는 우뚝하게 언덕이 되었다. 위는 넓고 평평하니 탕춘대(蕩春臺)라 했다”고 전했는데요. 
‘탕(蕩)’에는 ‘넓다’ ‘헌걸차다’는 뜻과 함께 ‘방탕하다’ ‘방종하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춘(春)’은 ‘봄’과 함께 ‘정욕’의 뜻도 갖고 있죠. 그렇다고 연산군 스스로, ‘방탕하게 봄을 즐기는 장소’라는 뜻의 이름을 지었을리는 만무합니다. 
어떤 연구자는 필시 ‘가없는 봄경치(浩蕩春光 澹蕩春光)’라는 의미로 지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더군요.  
그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어감이 좋지 않았던 것 같아요. 훗날 영조 임금이 ‘탕춘’의 의미가 좋지 않다면서 ‘군대를 교련시킨다’는 뜻의 ‘연융대(鍊戎臺)’로 개명했으니까요. <승정원일기> 1756년(영조 30) 9월2일 이렇게 말합니다.
“탕춘을 연융이라 한 이유가 있다. 연산군이 함부로 음탕한 짓을 벌일 때의 이름(燕山荒淫時名)이기 때문이다.”
본뜻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연산군이 방탕하게 즐긴 봄날(탕춘·蕩春)’이 연상되었던 것 같습니다.

■“20만 도성민을 버리고 갈 수 없다”
그럼 이런 좋지않은 어감인 탕춘대가 왜 ‘유네스코 세계유산감’이라는 말일까요. 300년전인 1700년대 초로 올라가봅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병자호란(1636년) 때 여실히 입증되었듯이 강화도와 남한산성은 더이상 임금의 도피처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같은 ‘외환’과 함께 ‘내우’도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16~18세기 전세계를 강타한 소빙하기가 조선에도 불어닥쳤습니다. 
냉해와 가뭄, 홍수, 전염병이 창궐했구요. ‘경신대기근’(1670~71)과 ‘을병대기근’(1695~96)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그 사이 요승 여환이 “미륵의 세상이 온다”는 등의 해괴한 소문을 퍼뜨렸습니다.(1688) 장길산이 출몰했으며, 정씨 성이 국왕으로 등극한다는 요사스런 설도 들렸습니다.(1697) 떼강도(명화적)가 전국에 출몰했구요.(1703)
이럴 때 변란이 일어나면 어찌될까요. 당시 상황을 더듬어 볼까요.
1648년(인조 26) 10만 명 남짓이던 서울의 인구는 1717년(숙종 43) 19만명으로 급증했습니다. 
당시 대동법의 확대시행 등으로 서울로 들어오는 세곡의 물류량이 크게 늘었습니다. 서울은 상업도시로 변모했습니다.
여기에 자연재해로 인해 대거 발생한 유민들이 먹고 살기 위해 무작정 상경하고 있었거든요. 
이럴 때 변란이 일어난다고 도성을 비운다면 수십만 서울의 백성들은 어찌 되겠습니까. 

■“북한산성에서 청야술 펼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1703년(숙종 29)부터 수도방위론과 관련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집니다.
논쟁은 ‘북한산성 축조론’과 ‘도성 사수론’ 등으로 압축됐습니다. 숙종은 ‘북한산성 축조론자’였습니다. 
숙종은 “나의 적자(赤子·백성)인 도성민들 버리고 멀리 갈 수가 없는 형세가 됐다”면서 “도성은 지키기 어려우므로 백성들과 함께 북한산성에 들어가 지킬 것”(1710년 10월 20일)이라 했다. 전란이 일어나면 임금과 백성 모두 배후의 산성에 들어가 최후항전을 벌인다는 일종의 청야전술이었습니다. 고조선·고구려 때부터 채택해온 전통의 전략·전술이었죠.

북한산성 축조 후 산성 앞 쪽에 7만석의 군량미를 보관할 칭고를 세웠다. 그것이 평창이다.

반대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위급한 시기에 20만 도성민이 어떻게 북한산성으로 들어올 수 있는가, 자칫 종묘사직과 도성민을 고스란히 적에게 내어주는 격이 아닌가, 차라리 도성수축에 힘을 쏟아야 하는게 아닌가, 뭐 이런 논리였습니다. 
7~8년이나 계속된 논쟁을 종식시킨 것은 숙종이었습니다.(1711년 2월 9일) 숙종은 “여러분의 의견 수렴을 기다리다가 이미 적군이 강을 건너겠다”(<비변사등록>)고 짜증을 내면서 산성의 축조를 최종결정했습니다.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구요. 1711년 4~11월까지 불과 7개월만에 백운대~만경대~용암봉~문수봉~원효봉~영취봉 등 깎아지른 봉우리들을 연결한 총 둘레 11.6㎞의 산성이 완성되었습니다. 산성 밑 평지에는 비상시에 대비하여 7만석 규모의 군량창고를 설치했는데요. 이것이 ‘평창(平倉)’입니다.(1715)

■“평창을 지키는 방법”
그런데 이 ‘평창’의 지세가 너무 낮다는 우려가 제기됐습니다. 
지금 봐도 인왕산~북한산(삼각산) 사이(홍지문)가 상대적으로 얕다는 생각이 들죠. 
당시에도 만약 적이 그쪽으로 와서 창고(평창)를 유린하면 대책이 없다고 걱정한 겁니다.
이에 판중추부사 이유(1645~1721)은 “탕춘대와 북한산성은 ‘입술과 이빨(순치지세·脣齒之勢)’의 관계이니 탕춘대에 토성을 쌓아야 북한산성도 지킬 수 있다”(<숙종실록> 1715년 10월30일)고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탕춘대성 축조론은 극심한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찬성론자들은 탕춘대를 잃으면 임금이 유사시에 몸을 피할 북한산성과 도성이 불통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반대론자들은 도성~탕춘대성~북한산성까지 전선이 길어지면, 도리어 어느 한쪽도 온전하게 보전되기 어렵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찬성론자 편에 선 숙종은 탕춘대성의 축성을 결정했구요. 

1718년 윤 8월26일부터 10월5일까지 40여일간 공사를 강행했습니다. 하지만 노론의 핵심이자 예조판서 민진후(1659~1720)이 제동을 걸었습니다. 예전에 북한산성과 탕춘대성 축조에 찬성했던 당초 입장을 바꿔 “제가 잘못 생각했다. 차라리 한양도성을 지키는데 전력투구해야 한다”(<숙종실록> 1718년 12월29일)고 나선겁니다. 
당시 대소신료들의 찬반양론을 분석한 연구가 있던데요. 1719년 2월4~8일 사이 탕춘대 축성의 찬반을 언급한 신료 57명을 대상으로 살펴보니 찬성이 14명(24.6%)이며, 반대가 43명(75.4%)으로 집계된다는군요. 
숙종은 “국가 대계에 따라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마당에 그만 두라니, 이게 아이들 장난이냐”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반대여론이 대세가 되었으니 어쩝니다. 탕춘대성 축조는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탕춘대성은 도성의 목구멍”
하지만 영조 즉위(1724) 후 4년 만에 국면이 달라졌습니다. 이인좌의 난(1728)이 일어나 청주성이 함락되는 위기를 겪게 된 겁니다. 뒷골이 서늘해진 영조는 “임금과 백성들이 힘을 합해 도성을 지킬 것”이라는 도성 사수의 의지를 피력했는데요.
그러나 주위가 40리나 되는 한양도성을 지키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영조는 반란 진압 뒤 “만약 반란군이 북한산성을 점령했다면 도성을 수호할 수 없었을 것”(<승정원일기>) 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역시 논쟁이 거세게 일었으나 영조는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은 도성을 지키기 위한 핵심 요처”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되니 탕춘대에 조성된 창고(평창) 역시 다시 각광을 받았고요, 그러한 평창을 지키는 미완의 탕춘대성이 재조명되었죠. <어영청등록>은 “탕춘대는 도성의 목구멍이니 지켜야 한다”(1745년 2월)고 밝혔습니다. 
영조는 급기야 1747년(영조 23) 5월7일 삼청동에 있던 총융청(수도방위사령부)을 탕춘대로 옮겨왔구요.(<비변사등록>) 
총융사(수도방위사령관)이 북한산성과 함께 탕춘대도 관장하게 됐습니다. 5월25일부터 탕춘대의 북쪽 근처에 총융청 건물을 짓는 터닦기 공사가 시작됐구요. 

1752년(영조 28) 탕춘대성 축조공사가 지지부진해자 영조는 책임자는 총융사 구성임(1693~1757)을 불러 “자네는 아무 쓸모도 없이 탕춘대에 앉아만 있는가?”라고 질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앗 뜨거워라’, 영조의 호된 꾸지람을 들은 구성임은 1753~1754년에 탕춘대성을 쌓았습니다.
이로써 삼각산(북한산)~한북문(홍지문)까지 2400보의 탕춘대성 1단계 공사가 마무리되었습니다.(<비변사등록> 1754년 9월1일) <비변사등록>은 “홍지문 남쪽~인왕산 도성 밑까지의 거리(1400보)는 추가로 쌓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탕춘대성은 석성과 토성 그리고 암반과 자연지형의 능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현재 성벽과 성문(홍지문)과 수문(오간수문), 암문, 치성이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이때 ‘탕춘대’의 이름도 ‘연융대’로 바꾼 겁니다.
지금 한양도성~북한산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의 전체 길이는 5.1km 정도입니다. 서쪽인 북한산~한북문(홍지문) 구간인데요. 북한산~북악산 구간인 동성벽의 흔적도 약 4.8㎞ 남아있는데요. 아직 연구가 필요해서 이번 유네스코 등재신청 범위에는 빠졌습니다.

■수도방위의 마지막 퍼즐
어떻습니까. 탕춘대성의 축조 의미가 다소 차이는 있다고 하죠. 
숙종은 도성~창의문~북한산성으로 통하는 국왕와 도성민의 피란길을 위해 조성할 생각을 했구요. 영조는 수도 방위를 위해 그 목구멍에 해당되는 곳에 쌓은 외곽성으로서의 기능을 중시했구요.
그러나 어떻든간에 조선왕조의 종묘와 사직, 그리고 도성민의 안위를 위해 쌓은 성이라는 의미는 다르지 않습니다.
부왕(숙종)이 어떻게 시작했던 영조에게 탕춘대성은 한양도성~북한산성을 잇는 도성 방위 체계의 완성을 위한 마지막 퍼즐이었던 셈입니다. 연산군의 황음무도한 향기가 물씬 풍기는 탕춘대에 이와같은 파란만장한 역사가 담겨있습니다.(이 기사를 위해 진영욱 서울시 문화예술과 학예연구사와 김영수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연구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기호철 문화연구소 ‘길’ 소장과 정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의 논문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기호철, ‘탕춘대성과 홍지문 명칭에 대한 고찰’, <탕춘대성 사적 지정을 위한 학술 심포지엄> 발표문, 서울시, 2022 
정해은, ‘탕춘대성의 축성과 한양도성의 배후산성으로서의 역할’, <탕춘대성 사적 지정을 위한 학술 심포지엄> 발표문, 서울시, 2022
김영수, ‘문헌과 시각자료로 보는 탕춘대성 일대의 인문학적 가치’, <탕춘대성 사적 지정을 위한 학술 심포지엄> 발표문, 서울시, 2022
조윤민, <성(城)과 왕국>, 경기문화재단 펴냄, 주류성, 2013
이근호, <18세기 전반의 수도방위론>, ‘군사(軍史)’, 국방부,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