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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Coreen 109' <직지>는 120년전 단돈 180프랑에 팔렸었다. 그러나…

최근 문화유산계의 화제는 단연 <직지>입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7월16일까지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전시회에 <직지>를 50년만에 공개하고 있는데요. 특별전에서 <직지>는 첫번째 유물로 소개되고 있답니다. 
<직지>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임을 재차 확인한 겁니다. 그런데 이번 특별전 기사를 준비하면서 저는 한가지 근본적인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말로만 <직지>, <직지> 했지, 과연 <직지>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두말할 것없이 <직지>는 ‘학계의 공인을 받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1377)’이죠. 
그러나 한꺼풀 벗겨보면 ‘직지’와 관련해서 잘 모르거나, 기본 팩트조차 잘못 알려진 일화가 많습니다.
<직지> 연구자인 황정하 세계직지문화협회 사무총장의 논문과 단행본 등을 토대로 자세히 알아봅니다.

■손가락으로 직접 가리킨다는 직지(直指)
<직지>의 풀네임은 <백운화상 초록 불조 직지심체요절>입니다. 고려말 선승인 백운 화상(1298~1374)이 ‘부처(불·佛)와 조사(조·祖, 고승)의 깨달음(심체·心體)을 직접 가리켜 보인(직지·直指) 중요한 항목(요절·要節)을 뽑아 엮은 책(초록·抄錄)’이라는 뜻이죠. 그냥 줄여서 <직지심체요절> 혹은 <직지>라 합니다.
그 분이 75살이던 1372년 9월 석가모니 부처를 비롯한 과거 7불과 인도·중국 고승 138인 등 모두 145가의 어록을 뽑아 두 권(상·하권)으로 엮은 것이 <직지>입니다. 
백운 화상의 입적 3년 후인 1377년(우왕 3) 7월 제자인 석찬과 달잠이 청주 흥덕사에서 묘덕이라는 비구니의 시주를 받아 금속활자로 찍어냈습니다. 두 권 중 ‘하 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남아있는 겁니다. 

<직지>의 표지와 본문 속에 끼워놓은 빈종이(간지)에 플랑시가 써놓은 메모. <직지>가 불교 교리를 담고 있으며, 1377년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한국 인쇄본’이라 했다.

■금속활자본의 증거 있나?
총 1만2304자로 찍은 <직지>에는 금속활자의 자취가 역력합니다. 우선 본문의 행과 열이 고르지 않고요. 활자의 크기와 모양, 인쇄상태도 그렇습니다. 조판이나 인쇄 때 활자가 밀리거나 맞물려 붙었기 때문이죠. 
또 글자의 먹 색깔에도 차이가 나는데요. 어떤 글자는 획의 일부가 인쇄되지 않아 붓으로 덧칠한 흔적도 역력합니다. 조판 때 수평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거나 인쇄 때 먹이 고르게 묻지않아 생긴 현상이죠. 

같은 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동일한 활자가 다른 장에서는 반복해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활자를 재활용했다는 증거죠.     
거꾸로 인쇄되었거나 빠진 글자도 보입니다. 초창기 금속활자 제작의 기술 부족으로 생긴 너덜이(쇠찌꺼기) 등도 역력합니다. 또 한 글자 때문에 다음 행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작은 활자(소자)로 대체했거나, 마지막에 두자를 나열하여 조판한 경우도 보입니다. 활자가 부족해서 ‘소자(小字)’로 대체하는 경우가 119회나 됩니다. 활자를 더 주조하지 않고, 갖고 있는 ‘작은 활자’를 활용했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현상은 목판본에서는 볼 수 없는 초창기 금속활자본의 특성입니다.  

■반출경위가 비교적 분명한 <직지>
<직지>는 구한말 프랑스 외교관인 콜랭 드 플랑시(갈림덕·葛林德·1853~1922)이 구입해 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플랑시는 파리대에서 법학학사를 받고 파리 동양어학교에서 다시 중국어를 전공한 뒤(1877)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되는데요. 조선과의 인연은 1888년 6월부터 시작됩니다. 주한 프랑스 대리공사가 되어 3년간(1891년 6월까지) 서울에 주재합니다. 이후 일본에서 5년 가까이 근무하다가 1896년 4월부터 주한공사 겸 총영사로서 두번째로 서울로 부임합니다.

플랑시는 공사관 통역이었던 모리스 쿠랑(고항·古恒·1865~1935)에게 “한국에서 간행되는 모든 서적의 목록을 만들어보라”고 권유합니다. 단순 권유에 그치지 않고요. 플랑시는 쿠랑의 <한국서적> 목록 작성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했습니다.
쿠랑은 1894~96년 사이 차례로 출간한 <한국서지>(1·2·3권)의 머리말에서 플랑시의 공을 치하합니다.
“이 작업의 발상도 플랑시가 했으며, 많은 확실한 정보를 제공하고 훌륭한 조언을 준 것도 헤아릴 수 없다.”
목록만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플랑시는 1차 부임 때(1888~1891) 수집한 고서를 모교(동양어학교)에 기증했습니다. 
그러나 <직지>는 <한국서지> 1·2·3권에도, 동양어학교 기증품에도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3738번의 비밀
쿠랑은 이후 1899년까지 추가로 조사한 목록 580건(3241~3821번)을 담아 다시 책자로 만들었는데요.
그것이 1901년 출간한 <한국서지> ‘부록판’입니다. 그중 ‘3738번’ 항목에 <직지>가 등장합니다.
“3738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1책…이 책의 마지막 설명문이 중요하다. ‘1377년 청주목 바깥의 흥덕사에서 주조된 활자로 인쇄됨.’ 이 내용이 정확하다면 활자는…조선 태종의 명(1403년 주자소 설치 및 계미자 주조)보다 26년 가량 앞서 사용….”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한국서지> ‘부록판’에 실린 <직지>가 10여 년이 지난 1911년 3월 경매시장에 나온다는 겁니다.
무엇을 뜻할까요. 플랑시가 첫번째 한국 근무(1888~1891) 때 구입한 도서는 동양어학교에 기증했죠. 

그러나 두번째 근무 때(1896~1899) 수중에 넣은 <직지>는 기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10여 년 뒤 883종의 ‘플랑시 컬렉션’ 중 하나로 경매에 출품된 겁니다. 
어떻게 해석할까요. 플랑시가 두번째로 서울에서 근무한 1896년 4월부터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잠시 프랑스에 떠났던 1899년까지가 주목됩니다. 그 사이 <직지>등을 수집하면서 쿠랑의 <한국서지> 부록판 목록에도 포함시킨 겁니다. 
“플랑시가 첫번째 조선 체류(1888~1891) 때 모았던 장서의 완결을 위해 두번째 체류(1896~1899) 때 일련의 새로운 도서를 모았다. 첫번째 장서는 파리 동양어학교에 기증됐고, 이번의 수집을 통해 분량이 더욱 풍부해졌다.”(쿠랑의 부록판 서문)

■처음부터 직지 가치를 알아본 플랑시
플랑시는 어떤 경로로 <직지>를 수중에 넣게 되었을까요.
이 대목에서 당대에 조선을 방문한 프랑스 민속학자 사를르 루이 바라(1842~1893)의 회고담이 눈길을 끕니다.
“콜랭 드 플랑시는 ‘프랑스 여행자가 매일 아침 프랑스 공사관에서 조선 토산품의 견본을 구입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상인들이 떼를 지어 오면…조선인 비서들의 도움을 받아 물건을 사들였다.”
바라는 “오후에도 조선인 비서들과 함께 서울을 누비며 민속품을 눈에 띄는 대로 사들였다”고 언급했는데요. 플랑시 역시도 조선인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직지>를 구입했을 겁니다.

플랑시는 처음부터 <직지>의 가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직지>의 표지와 속지에 남긴 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조된 글자로 인쇄된, 가장 오래된 한국 책. 연대는 1377년’(표지)
‘불교 교리 내용. 1377년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한국 인쇄본’(간지)
플랑시는 한자 이름(갈림덕·葛林德)의 ‘갈(葛)’자에 ‘플랑시의 장서표’ 명문을 인쇄해 두었습니다. ‘갈(葛)’자 위에도 연필로 ‘한국 활자본으로 가장 오래된 책, 1377년’이라 적혀 있습니다.  

<직지>는 1900년 4월15~11월15일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되는데요.
쿠랑이 만국박람회 한국관을 소개한 팜플렛(‘1900년, 서울의 추억’)을 볼까요.
“…대중은 한국에 인쇄소가 있고 문학이 번창·존재하였다는 것을 모른다…한국인들이 10세기 이전에 목판으로 인쇄했고, 조선 최초의 금속 활자인 계미자(태종 3·1403)와, 이보다 더 일찍 활자(Types mobiles)를 발명….”

■고종으로부터 태극훈장을 받은 플랑시
플랑시는 그렇게 애지중지했던 <직지>를 왜 경매에 내놓았을까요.
플랑시는 대한제국의 만국박람회(1900) 참가를 도운 공로로 고종으로부터 태극훈장(1등)까지 받았는데요.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프랑스 공관이 철수하게 되면서 조선 땅을 떠납니다. 1907년에는 30년 외교관 생활을 끝내고 은퇴하는데요. 그후 4년 만인 1911년 3월 한국·중국·일본 등에서 수집한 유물 883종을 경매에 내놓습니다. 
이때의 경매물건 중 <직지>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은퇴 이후 노후자금이 필요했던 것일까요. 
당시의 경매기록부를 보면 <직지>는 경매 물건 중 711번으로 표시되었습니다. 플랑시는 경매 카탈로그 서문에서 “구텐베르크 발명 훨씬 전에 한국이 금속 인쇄술을 알고 있었다”고 <직지>를 콕 찍어 홍보했습니다. 이때 총 경매가격은 3만4390프랑(2006년 기준 약 1억2256만원) 였답니다.

■단돈 180프랑에 개인 수장가의 품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경매물건 가운데 상당부분을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구입해가는데요.
그런데 <직지> 등 일부 유물은 국립도서관이 아닌 당대의 수집가인 앙리 베베르(1854~1943)의 수중에 들어갑니다.
이 때 베베르가 낙찰받은 <직지>의 가격이 얼마인줄 아십니까. ‘단돈 180프랑’(2006년 기준 약 64만원)이었답니다. 
이때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구입한 ‘플랑시 컬렉션’은 모두 108건이었는데요.
1번 소학집성(1444)~72번 대한형법(1905)은 서적이구요. 73~102번은 지리서적, 103~108번은 중국·한국의 왕조도표와 달력, 한글 반절표, 삼재부(악귀 쫓기 위해 쓰거나 그려넣은 부적) 등이었습니다. 
이때 구입한 책에는 모두 플랑시의 장서표인 ‘갈(葛)’자가 붙어있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죠. 파리 국제박람회에도 출품되었고, 경매 카탈로그에서도 ‘구텐베르크보다 앞선 금속활자본’으로 소개된 <직지>를 빼놓고 구입했다니 참…. 아니 <직지>가 ‘삼재부’보다 못하다는 말인가요.
뒤늦게 판단착오를 인정한 프랑스 국립도서관장이 세차례나 베베르를 찾아가 “<직지>를 기증해달라”고 간청했답니다. 
이에 베베르는 “내가 죽으면 <직지>와 <육조법보단경>(불경) 만큼은 기증하겠다”고 언급했답니다. 1943년 베베르가 죽은 뒤 그 약속이 지켜졌는데요. 베베르의 후손이 1950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측에 <직지>와 <육조법보단경>을 기증했습니다.
이때 프랑스 국립도서관측은 이 두 유물에 ‘플랑시 컬렉션’에 붙였던 고유번호(‘Coreen 109=직지’, ‘Coreen 110=육조법보단경’)를 추가했습니다.       

당시 에티엔느 덴느리 프랑스 국립도서관장은 “한국의 금속활자 기술이 3세기동안 발전을 거듭하였고, 구텐베르크보다 수십년 앞서 금속활자를 다룰 수 있게 됐다”고 소개했다.

■프랑스 현지에서 각광받은 <직지>
이렇게 처음부터 ‘한국서지’로 인정받아 보관되어온 <직지>가 재조명된 것은 1972년이었습니다.
그 해는 유네스코가 정한 제1회 세계 책의 해였는데요.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5월17~10월31일 사이 소장품 가운데 귀중본을 엄선한 특별전을 마련했습니다. 이때 <직지>는 <경국대전> 및 <여지도>와 함께 출품됩니다.
에티엔느 덴느리 도서관장은 당시 특별전 도록 서문에서 <직지>를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동양에서는 중국에서 인쇄술이 한국에 전달되어 3세기 동안 발전을 거듭하였고, 구텐베르크보다 수십년 앞서 금속활자를 다룰 줄 아는 놀라운 기술에 도달했다.”

프랑스 국영 제1TV는 ‘서양 교과서를 바꿔야 할 금속활자의 역사’로 표현합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 인쇄술의 발명가가 아니다. 자 여기 그 증거가 있다. 이것은(<직지>) 한국의 흥덕사라는 절에서 1377년에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이다. 구텐베르크 발명보다 78년 앞선다. 우리는 금속활자의 영광을 이제 동양의 한 나라(한국)에 돌려줘야 할 것이다.”
또한 당시의 전시도록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중국 책은 15세기말이다. 따라서 한국보다 늦다. 한국에서는 13세기에 금속활자가 최초로 사용되었다“고 소개했습니다.

<직지>는 1973년 ‘동양의 보물’을 주제로 한 특별전에 다시 출품된다. 전시도록은 손보기 교수(연세대)의 단행본(1971)을 인용해 “13세기부터 새로운 기술이 고려에 도입된다…인쇄술은 한국이 중국을 능가하였으며 유럽(독일)을 앞서갔다”고 소개했다.

도록은 ‘42. 직지심경, 한국. 1377년. 1권38장, 246×170mm 한국도서 109, 백운(14세기)이라는 수도승에 의해 수집된 불교승려 교육 교본. 1377년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됨’이라 표기했습니다.
<직지>는 1년 뒤인 1973년 6월부터 10월31일까지 약 4개월동안 ‘동양의 보물’을 주제로 한 특별전에 다시 출품합니다.
전시도록은 “13세기부터 새로운 기술이 고려에 도입된다…인쇄술은 한국이 중국을 능가하였으며 유럽(독일)을 앞서갔다”고 소개했습니다. 출품작인 <직지>를 소개할 때는 당시 손보기 교수(연세대)의 1971년 단행본 내용이 전제되기도 했습니다. 

<직지>는 1896~99년 플랑시가 입수할 때부터 120년이 넘도록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의 대접을 받으며 ‘한국유물’로 보관되어 있었다.

■박병선 박사의 역할
<직지> 관련 뉴스가 나올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이가 바로 고 박병선 박사(1928~2012)입니다. 
요컨대 프랑스 국립도서관 서고에 묻혀있던 <직지>를 발굴해서 그 가치를 알린 이가 바로 박병선 박사였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보았듯이 <직지>의 가치는 이미 프랑스 외교관인 플랑시가 소장했을 때부터 일관되게 알려졌습니다. 
1900년 파리 국제박람회에 출품되었을 때, 1911년 경매시장에 나왔을 때, 1950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될 때, 1972년 ‘책의 해’ 특별전 출품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직지>는 국내에 알려진 것은 1972년 5월이었습니다. 

<직지>는 특별전 개최 소식과 <직지>의 출품 사실을 특종보도한 조선일보 보도(1972년 5월28일자)로 국내에 알려졌다. 그 기사에는 ‘박병선’이라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7개월여가 지난 12월23일에는 ‘박병선=직지의 최초발굴자’로 보도된다.

특별전 개최 소식과 <직지>의 출품 사실을 처음 알린 언론(조선일보)의 특종보도(5월28일자) 덕분이었습니다. 
그 기사에서는 ‘박병선’ 이름이 보이지 않습니다. <직지> 특별전을 특종 보도한 신용석 전 조선일보 파리특파원과 통화했더니 “<직지>와 박병선 박사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확인해주더군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7개월이 지난 12월 23일자 기사에는 ‘박병선 박사를 프랑스 국립도서관 특별전에 <직지>를 발굴·소개한 인물’로 소개됐습니다. 물론 당시 파리에서 근무 중이던 신용석 특파원이 작성한 기사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당시 신용석 특파원의 말마따나 박병선 박사의 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박병선 박사의 공도 물론 있다. 1972년 전시회가 끝난 뒤 도서관측이 제공한 <직지>의 흑백사진을 국내로 가져온다. 국내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는 자료를 들고 온 박병선 박사의 공로는 무시할 수 없다.(출처:황정하의 <직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세계직지문화협회 기획, 청람, 2021에서

1972년 전시회가 끝난 뒤 도서관측이 제공한 <직지>의 흑백사진을 국내로 가져오는데요. 
국내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는 자료를 들고 온 박병선 박사의 공로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정리해볼까요. 
<직지>의 가치는 필설로 다할 수 없죠. 그런만큼 그러한 <직지>를 둘러싼 기본적인 팩트 체크 또한 반드시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직지>와 같은 문화유산을 말하면서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요소가 섞이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 이야기 할 것도 없겠네요. 저부터 반성해야 할 것 같네요. <직지>하면 별다른 검증없이 그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떠들어댔으니 말입니다. (이 기사를 위해 황정하 세계직지문화협회 사무총장이 도움말과 사진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신용석 전 조선일보 파리특파원도 <직지>의 첫보도 즈음과 관련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황정하, <직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세계직지문화협회 기획, 청람, 2021
황정하, ‘직지의 전존 경위’, <한국멀티미디어학회지> 16권2호, 한국멀티미디어학회, 2012
이진명, ‘프랑스 국립도서관 및 동양어대학 도서관 소장 한국학 자료의 현황과 연구 동향’, <국학연구> 2권, 한국국학진흥원,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