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대학입시의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대학진학을 위한 수능시험을 마친 수험생과 수험생 부모들이 그야말로 살떨리는 겨울을 맞이하시겠죠. 입시철을 맞아 조선시대 과거시험장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과거시험 하면 가장 극적인 이틀이 떠오르네요. 지금으로부터 221년 전인 1800년(정조 24) 3월21~22일의 일입니다.
당시 왕세자(순조)의 책봉을 기념하는 특별시험(경과·慶科)이 창경궁 춘당대에서 열렸는데요. 첫날(21일)엔 초시가, 둘째날(22일)에는 인일제(人日製·유생들을 대상으로 치른 특별과거)가 잇달아 열렸습니다.
그런데 이 이틀간의 시험에 응시한 수험생이 얼마나 되는 지 아십니까. 자그만치 21만5417명이었답니다.
“21일의 경과는 3곳으로 나누어 치렀는데 총 응시자는 11만1838명에 달했고, 시권(답안지)를 바친 자는 모두 3만8614명이었다. 다음날의 인일제 응시자는 모두 10만3579명이었고, 시권을 바친 자는 3만2884명이었다…”(<정조실록> <홍재전서>)
이틀간 답안지를 제출한 응시생만 해도 7만1498명에 달했는데요. 그중 첫날의 경과를 통해 10명, 이튿날 인일제에서 2명의 합격자가 선발되었으니 어떻습니까. 첫날 경과의 경쟁률은 1만1184대 1(답안지 제출한 실질경쟁률은 3861대 1)이었고, 이튿날 인일제의 경쟁률은 더 지독해서 5만1790대 1(실질 경쟁률은 1만6442대 1)이었습니다. 이중 수석과 차석을 차지한 서울의 김수종과 호서의 이남익은 둘쨋날 5만대1의 경쟁을 뚫고 최종합격증을 받은 이들이었습니다.
■조선은 시험의 나라
물론 이 응시자와 경쟁률은 조선이 ‘시험의 나라’였음을 알리는 가장 극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5살 때 과거공부를 시작한다면 무려 30년 이상 머리를 싸매야 겨우 대과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과거시험은 원칙적으로 3년마다 실시됐는데요. 수험생은 4차례의 국가시험을 거쳐야 했습니다.
우선 예비시험인 소과의 경우 초시(1400명 선발)를 거쳐 복시를 통과한 200명이 생원(100명)·진사(100명)가 됐습니다. 생원·진사가 돼야 본시험인 대과(문과)를 치를 수 있었죠. 대과 역시 1차 시험격인 초시에서 240명을 선발했고, 이 240명이 2차 시험인 복시에 응시했습니다. 이렇게 4차례의 시험에서 뽑힌 33명의 과거급제자가 꿈에 그리던 문관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죠.
물론 1800년 3월의 경우처럼 부정기적으로 실시되는 특별과거가 수시로 실시되기는 했지만 그 역시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해야 하는’ 어려운 관문이었습니다. 정기과거의 경우 한번 떨어지면 최소 3년을 기다려야 했으니 합격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죠.
■과거장 안팎을 이어놓은 노끈의 정체
그러니 어떻게 됐겠습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죠. 사생결단식의 입시부정이 심심치않게 일어났습니다.
1705년(숙종 31) 2월 18일 심상치않은 사건이 터집니다. 성균관 인근 동네에 살고 있던 여인이 나물을 캐다가 땅속에 묻힌 노끈을 발견했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한 여인이 심상치 않은 노끈을 잡아 당겨보았는데요.
이 노끈은 명륜당 뒤 산쪽에서 성균관 담장 밑을 통과해서 과거시험장 안으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긴 노끈을 이은 대나무 통을 묻고 비늘처럼 죽 이어 구멍을 통하게 한 뒤 다시 기와를 덮어 은폐한 거죠.
수사 끝에 시험장으로 이어진 노끈이 여러 개 발견된 사실만 추가확인했을뿐, 범인색출에는 끝내 실패했답니다. 이밖에도 이른바 커닝페이퍼를 콧구멍에 넣거나 종이로 만든 속옷에 글을 써서 입거나 아주 작은 책을 만들어 옷속에 숨겨 들어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답니다.
조직적인 입시부정행위가 적발되어 이미 치른 과거시험이 취소하는 불상사도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1699년(숙종 25년)의 기묘과옥과 1712년(숙종 38년)의 임진과옥입니다.
기묘과옥은 실무자인 등록관(필적 부정을 막으려고 응시자 답안을 베껴 채점관에게 넘기는 관리)과 봉미관(답안지 서명란의 봉인 담당 관리)이 청탁을 받은 답안지를 바꿔치기 하거나 고쳐써서 부정합격시켰다가 적발된 옥사입니다. 이 사건으로 관련자 전원이 절도에 유배되고, 34명이 최종합격한 과거 자체가 무효처리됐습니다.
임진과옥(1712년)의 관련자들은 얼굴에 철판을 깔았습니다. 시험관이 친구 아들과 지인에게 문제를 사전에 유출하는가 하면 답안지에 특정한 암호(앵·鶯)를 쓰게 했습니다. 실제 ‘천앵출유(遷鶯出幽)’와 ‘곡앵(谷鶯)’과 같은 ‘앵’자가 들어있는 답안지가 적발됐습니다. 시험이 끝난 다음 답지를 제출받아 부정 합격시킨 예도 있었습니다. 문제의 ‘간 큰’ 시험관은 응시생의 집을 두루 찾아다닌 사실까지 드러났습니다. 결국 과거가 전면 취소됐고, 관련자 3명은 처형당했습니다.
■만마리 개미가 쟁투하는 과거장
앞서 정조 때 치른 특별과거에서 21만명이 넘는 수험생이 응시해서 제출한 답안지가 7만여장이라 했죠.
응시생 중 3분의1만 답안지를 낸 셈인데,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시험이 너무 어려워서 답 쓰기를 포기한 이가 14만명에 달했다는 얘기일까요. 아닐겁니다. 단원 김홍도(1745~1806?)의 풍속화를 보면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미국의 개인소장가가 갖고있다가 정병모 경주대교수의 주선으로 구입 환수하여 국내 경매를 통해 경기 안산시의 품에 안긴 그림인데요.
그림 위에 ‘봄날 새벽 과거시험장(공원춘효·貢院春曉) 만 마리 개미의 싸움이 격렬하니(萬蟻戰감)…’라고 시작되는 표암 강세황(1713~1791)의 글이 적혀있어서 ‘공원춘효도’라는 제목이 붙었습니다.
이상하죠. 과거시험장인데 왜 만마리의 개미가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단원의 이 그림은 문자 그대로 ‘난장판’ 같은 ‘과거시험장의 풍경’을 적나라하게 표사했습니다. 강세황의 글을 더 읽어볼까요.
“어떤 이는 붓을 멈추고 골똘히 생각하며, 어떤 이는 책을 펴서 살펴보며, 어떤 이는 종이를 펼쳐 붓을 휘두르며, 어떤 이는 서로 만나 짝을 이루며 이야기하며, 어떤 이는 행담에 기대어 졸고있는데…등촉은 휘황찬란하고, 사람들은 왁자지껄하다.”
이게 조선 후기 과거시험장의 민낯이었습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언급한 난장판 과거시험장의 모습을 들여다볼까요.
“문장에 능숙한 자를 거벽(巨擘), 글씨에 능한 자를 사수(寫手), 자리와 우산 같은 기구를 나르는 자를 수종(隨從), 수종 중 천한 자를 노유(奴儒), 노유 중 선봉이 된 자를 선접(先接)이라 이른다.”(<경세유표>)
한마디로 과거시험을 보는 유생 1명에 최소 5명이 붙어 역할분담을 하여 도와준다는 겁니다. 수험생 한 명에 5명이 동원된 6인조 ‘입시비리단’이란 말입니다. 이들은 각자의 역할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습니다.
일단 과거장에 먼저 들어가야 유리했습니다. 요즘처럼 수험번호가 있는 것이 아니기에 무조건 먼저 들어가서 현제판(懸題板·과거 때 시험문제를 내거는 널판지)에 게시되는 문제를 잘 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차지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선접’과 ‘수종’, ‘노유’라는 인물들이 필요했는데요. 이들은 과거시험장인 창경궁(춘당대) 밖에서 등불을 밝히며 밤새워 기다렸다가 새벽에 궐문이 열리면 ‘좋은 자리 확보’를 위해 몸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강세황이 ‘새벽 과거시험장에서 만마리 개미가 격렬하게 싸운다’고 표현한 겁니다. 이들은 우산대와 말뚝, 막대기 등을 휘두르며 달려가 우산(일산)을 펴고는 ‘내 자리요!’하고 맡아놓았습니다. 다산은 이들을 두고 “노한 눈깔이 겉으로 불거지고 주먹을 어지럽게 옆으로 휘두르고 고함을 지르고 달려든다”고 표현했습니다. 물론 이들이 머리에 고양이 귀같은 검은 유건(儒巾·유생들이 쓰는 관모)을 써서 수험생으로 위장했습니다.
이렇게 살벌하게 몸싸움을 벌이니 어찌 됐겠습니까. 초정 박제가(1750~1805)는 “마당이 뒤죽박죽 되고…심한 경우에는 망치로 막대기로 상대를 때리고 찌르고 싸우며…문에서 횡액을 당하고…심지어는 남을 죽이거나 압사하는 일까지 발생한다”(<북학의>)고 고발했습니다. 괜한 걱정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1686년(숙종 12년) 4월3일 명륜당에서 실시된 과거장에 먼저 들어오겠다며 아귀다툼을 벌이던 선비 가운데 8명이나 압사하는 불상사가 일어났습니다. <숙종실록>은 이 참극을 소개하면서 “죽은 자들뿐 아니라 위독한 사람들도 많아서 성균관 주변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기록했습니다.
■6인조 입시비리단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시험장에 자리를 잡은 6인조는 어떻게 부정행위를 저질렀을까요.
단원의 ‘공원춘효도’를 자세히 봅시다. 먼저 초롱불을 켠 새벽임을 알 수 있는데요. 자리를 맡아놓은 파라솔 같은 우산(일산)과 말뚝, 쇠몽둥이, 평상, 짚자리, 책가방 등을 들고 밀고 들어온 선접과 수종, 노유 등의 모습이 보이네요.
그렇게 자리를 잡았으니 이제 그들의 역할은 끝납니다. 그림 보면 이들은 쉬고 있죠.
이제부터 응시자(거자)와, ‘문장 전문가’인 거벽, ‘글씨 담당’인 사수의 차례입니다.
문장이 뛰어난 ‘거벽’은 출제자의 의도에 따라 답안의 내용을 전문으로 지어주는 역할입니다. ‘사수’는 거벽이 지어준 문장의 글씨를 빨리, 잘 대신 써주는 사람입니다.
‘거벽’이 책가방에 숨겨온 예상답안지나 참고서를 꺼내 일필휘지로 답안을 지어내면 ‘사수’는 촌각의 지체없이 글씨를 써서 제출했습니다. 정작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인 거자는 무엇을 했을까요.
아무 것도 안했습니다. 다산도 그런 응시생들이 한심스럽다고 혀를 끌끌 찹니다.
“부잣집 자식은 입에 아직 비린내가 난다. 아직 ‘고무래 丁(정)’자도 몰라도 거벽의 글과 사수의 글씨를 빌려 시권(답안지)를 제출한다.”(<경세유표>)
1800년 두차례의 특별 과거에서 21만여명이 참여했지만 답안지 제출은 7만여장에 불과한 이유가 있었죠. 나머지 14만명 중 상당수가 바로 입시비리단 멤버였을 겁니다.
■반나절에 답안지 7만장 채점?
그래도 좀체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 있죠. 아니 채점관들이 어떻게 적게는 수천장에서 많게는 7만장이 넘는 답안지를 채점했단 말입니까. 안그래도 그것이 폐단이라는 걱정이 계속 제기되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시험관이 선착순으로 답안지를 낸 최초 300장에서 합격자를 뽑고 나머지는 다 버렸다는 상소문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조정에서는 이런 폐단을 막으려고 시험관의 명이 있기까지 답안지를 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일부러 나중에 낸 답안지에서 합격자를 뽑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백약이 무효였죠. 과거응시자가 기하급수로 늘고, 게다가 객관식도 아닌 주관식 문제를 푼 답안지 수천~수만장을 어떻게 제대로 채점한다는 말입니까. 그래서일까요. 초정 박제가를 이를 두고 “한유(768~824) 같은 문장가가 시험을 주관한다 해도 소동파(1037~1101)의 글을 번개처럼 던져버릴 것”이라고 개탄합니다. “수만명의 응시자를 두고 반나절 사이에 합격자 방을 내걸어야 한다. 그 때문에 지친 시험관은 붓을 잡기에도 신물이 나서 눈을 감은 채 답안지를 내던져버린다”(<북학의>)고 했습니다.
모든 병폐를 과거제도에 전가하기도 했습니다. 박제가는 “모든 길을 막아놓고 문을 하나(과거제)만 만들어놓으면 공자님이라도 해도 그 문을 거쳐야 할 것”이라고 한탄했습니다. 정약용도 “천거없이 과거시험으로만 인재를 뽑아 1000가지 병통과 100가지 폐단이 일어난다”고 개탄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폐단의 온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된 과거제는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됩니다. 958년(고려 광종 9년) 시작되어 936년 동안 존속해온 과거제가 역사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 대목에서 한가지 질문을 던져봅니다. 박제가나 정약용의 언급처럼 과거말고 추천제로 인재를 발탁했다면 더 좋았을까요. 또 과거제가 사라진 뒤 130년 동안 실시된 입시 및 고시제도는 과연 바람직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모든 제도와 법령은 사람이 운용하는 것이니까요. 제도가 문제라기 보다는 그것을 쓰는 사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까.(이 기사를 쓰는데 원창애 경상대 학술연구교수와 정병모 경주대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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