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노태우 전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죠. 저는 기자 시각에서 각 언론이 노 전대통령의 죽음을 어떻게 표현할지 눈여겨 보았는데요.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사망’으로, 조중동(조선·중앙·동아일보) 등은 ‘별세’라 했더군요. 조선일보는 작은 제목에서 ‘서거’라는 표현을 썼구요. 국립국어원의 표준대사전에서 검색해보니 ‘사망’은 그냥 ‘사람의 죽음’이고, ‘별세’는 ‘윗사람이 세상을 떠남’이라고 풀이했더라구요. ‘서거(逝去)’는 ‘사거(死去·죽어서 세상을 떠남)’의 높임말이라고 했구요. 왕조시대에는 ‘붕(崩·천자), 훙(薨·제후), 졸(卒·대부), 불록(不祿·선비), 사(死·백성)’(<예기> 곡례)라 했습니다.
사실 기자 입장에서 부음만큼 쓰기 까다로운 기사가 없습니다. 죽음을 맞이한 어떤 인물의 삶을, 그것도 그 사람의 공과를 요약 정리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 ‘시체에 매질할 수 있느냐’는 관대함의 미덕이 발동해서 객관성을 잃은 ‘상찬 일변도의 부음기사’가 나기기 십상입니다.
■구문공신, 한국병합의 괴뢰가 죽었다
예전에도 그랬을까요. 1926년 2월12일 동아일보는 매국노 이완용(1858~1926)의 사망소식을 속보로 냅니다.
다음날인 13일자 1면 ‘횡설수설’란에 3줄짜리 촌평이 보입니다. ‘구문공신(口文功臣) 이완용은 염라국에 입적하였으니, 염라국의 장래가 가려(可慮).’ ‘구문’는 흥정을 붙여 받는 돈이구요.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 공신(후작)이 되었다고 해서 ‘구문 후작’, 혹은 ‘구문 공신’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습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이 염라국에 갔으니 ‘그 염라국까지 팔아먹을까 걱정된다’고 비아냥댄겁니다. 그런데 ‘횡설수설’란이 실린 그 날짜 1면 톱기사가 무자비하게 삭제된 채 발행됐습니다.
동아일보는 다음날(14일자) 사고(社告)를 통해 그 이유를 밝힙니다. ‘2월13일자 신문은 당국의 기휘(금지령)에 따라 발매금지처분을 당했으므로 저촉된 기사는 삭제하고 호외로 발행배포했다’는 겁니다.
삭제된 기사는 이완용의 부음기사(‘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였습니다.
“그도 갔다. 필경 붙들려갔다. 보호순사의 겹겹 파수와 금성철벽의 견고한 엄호도 저승차사가 달려드는 것은 어찌지 못했으며…누가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능히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냐…살아서 누린 것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이제부터는 받을 일…어허! 부둥켰던 그 재물은 그만하면 내놓지! 이 책벌을 이제부터 영원히 받아야지!”
동아일보 뿐이 아닙니다. 그 날짜(2월13일자) 조선일보도 만만치 않습니다. 신문은 “이완용은 일본의 한국병합에 있어서 괴뢰가 되어…그의 간흉강퍅함은 권세에 영합하고 정세의 흐름을 타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니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돌변하고, 급기야는 이천수백만 대중에 반역하는 원악대대(큰 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비판합니다.
1926년 2월이면 언제입니까. 일제의 서슬이 시퍼렇던 때가 아닙니까. 그때의 기자들은 사관의 입장에서 식민지 백성들로부터 지탄을 받아온 매국노를 포폄하는 기사를 쓴 겁니다.
■공은 한나라를 덮었고, 죄는 온천하에 가득했다
왕조시대의 부음기사를 흔히 졸기(卒記)라 하는데요.
요동 정벌이 좌절된 뒤 참형을 당한 최영(1316~1388)의 졸기를 볼까요.
“1388년 최영이 참수된 날 개경사람들이 상가를 철시했다. 거리의 어린아이나 시골 부녀자 할 것 없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시체가 길가에 놓여 있었는데 오고가는 사람이 말에서 내렸다. 도당(고려의 최고 정무기관)에서 양식과 피륙 및 종이를 부의했다.”
졸기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見金如石)”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검약·충실·강직한 생활을 했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성질이 우직했고…사람을 멋대로 죽이고 위엄을 세우기 좋아했다”고 썼습니다.
졸기를 쓴 사관은 당대인물인 간대부 윤소종(1345~1393)의 인물평까지 인용하며 마무리합니다.
“윤소종이 최영을 논했다. ‘공(功)은 한 나라를 덮었고, 죄(罪)는 천하에 가득하다.(功盖一國 罪滿天下)’고…. 세상에서 이것을 명언이라 했다.”(<고려사> ‘열전 최영’)
<고려사>가 무엇입니까. 조선초 세종~문종 연간(1449~51년)에 편찬됐습니다. 최영은 조선의 창업주 태조 이성계(1335~1408, 재위 1392~1398)의 최대 정적이었죠.
그렇지만 최영의 졸기는 어떻습니까. 최영의 삶과 죽음, 그리고 개성은 물론 전국을 뒤덮은 애도의 물결, 정부 차원의 장례지원 등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참형을 당했는 데도 고려 충신의 이름에 걸맞은 평가를 내렸으며, 그의 단점까지 빠짐없이 썼습니다. 마지막으로 최영의 생애를 단 한줄로 정리한 명언의 촌평까지….
최영의 졸기는 지금봐도 부음기사, 즉 ‘오비추어리의 전범’이라는 평가를 들을만 합니다.
■반전에 반전…황희 정승의 부음기사
그렇다면 재상의 전범인 황희(1363~1452)의 졸기는 어떨까요. 1452년(문종 2) 2월 8일 <문종실록>을 봅시다.
“관후 침중하여 재상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다. 집을 다스림에도 검소하고~(사람들이) ‘어진 재상(賢宰相)’이라고 우러러봤다.”
게다가 ‘졸기’의 기자는 “(황희의) 홍안 백발을 바라보면 마치 신선 같았다”고 존경에 마지않았습니다.
그런데 급반전의 기사가 곧 등장합니다.
“그러나 ~제가(齊家)에 단점이 있었으며, 정권을 오랫동안 잡고 있었으므로, 자못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이 있었다.”
졸기는 ‘청렴하지 않았던’ 구체적인 예까지 듭니다.
“황희는 처남들의 범법 행위가 드러나자 ‘헛소문’이라는 글을 올려 변명했다. 또 죄 지은 아들(황치신)의 과전(관리들에게 내린 토지)이 몰수되자 몰수된 토지를 자신의 과전으로 바꿔 달라는 청탁 글을 올리기도 했다. 또 서자로 삼은 황중생이 죽을 죄를 짓자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황중생의) 성을 조씨라 했다.”
황희 정승이 누구입니까. 태종과 세종이 대를 이어 무한신뢰를 보냈던 재상이었죠. 한때 황희가 탄핵을 받고 사직을 청하자 세종이 낸 ‘불가(不可)의 변’이 두터운 신임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경(황희)은 세상을 다스리고 이끌만한 재주와, 실제 쓸 수 있는 학문을 지니고 있다. 아버님(태종)과 과인(세종)이 경을 의지하고 신뢰했다…모든 시책은 다 경의 보필에 의지했다. 어찌 뜬소문 때문에 그만 두려 하는가.”(<세종실록> 1428년 6월 25일)
그런 큰 인물이 ‘돌아가셨는데’ 일개 사관이 졸기에서 ‘감히’ 흠결을 ‘지적’한 겁니다. 아무리 임금과 백성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황희 정승였다 해도, 그 인물의 포폄은 추상 같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죠.
그래도 어떻습니까. 재상으로 18년간 국정을 보좌한 공적이 과오를 덮었습니다.
그래서 ‘사관의 흠결 거론’이 도리어 황희 정승의 인간적인 측면을 부각하는 소재로도 인용됩니다. 극찬 일변도 부음기사였다면 오히려 가식이라는 평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
이순신 장군의 졸기, 즉 부음기사는 어떨까요. <선조실록> 1598년(선조 31) 11월 27일자는 좌의정 이덕형(1561~1613)이 8일전(19일) 벌어진 이순신 장군의 노량해전 전공을 선조에게 보고하는 내용을 실었습니다. 그런데 실록의 사관이 사론을 달아 이순신 장군의 최후를 생생한 필치로 전합니다.
“기습작전 중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에 맞아 쓰러지니…순신의 아들이 울려고 하자 군사들이 당황했다…옷으로 시체를 가려놓은 다음 북을 치며 진격했다. 그러자 모든 군사들이 이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공격했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사람들은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死舜臣破生倭)고 했다.”
졸기의 기자는 이순신 장군의 재능을 100% 쓰지 못한 조정의 무능을 꼬집었습니다.
“전쟁 중에 조정이 사람을 잘못 써서 이순신이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아, 애석하도다.”
퇴계 이황(1501~1570)의 졸기를 볼까요. 우선 “이황은 겸양의 뜻으로 감히 작자를 자처하지 않아 특별한 저서가 없다”면서 “그러나 성훈(聖訓·성인의 교훈)을 밝히고 이단(異端)을 분별했으며. 논리가 정연해서 학자들이 믿고 따랐다”고 상찬합니다.
졸기는 이어 이황과, 도학정치를 꾀하던 조광조(1482~1519)를 비교합니다.
“이 세상의 유종(儒宗)으로 조광조 이후 그와 겨룰 자가 없다. 이황은 재주와 도량에서는 조광조에 미치지 못하다. 하지만 의리(義理)를 파고 들어 정미(精微)한 경지까지 이른 것은 조광조가 이황에 미치지 못하다.”
어떻습니까. 참으로 깔끔한 비교죠. 율곡 이이(1536~1584)의 졸기도 의미심장합니다.
“나라에 난리의 조짐이 있음을 분명히 알고는 항상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고 조정을 화합하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는 겁니다. 졸기의 기자는 “임진란이 일어나니 이이가 평소 염려했던 것들이 모두 사실로 밝혀졌다”고 안타까워합니다. 이이가 주장한 ‘10만 양병설’ 같은 것을 일컫는 말이겠죠.
■“벼슬은 그의 몸에 맞지않았다.”
송강 정철(1536~1593)의 졸기 역시 의미심장합니다. <선조실록>과, 그것을 수정한 <선조수정실록>의 졸기가 너무도 상반된다는 겁니다. 먼저 <선조실록>에 나오는 정철의 졸기(1593년 12월21일)를 봅시다.
“정철은 성품이 편협되고, 말이 망령되고, 농담과 해학을 좋아했으므로 원망을 자초했다…죽을 때까지 비방이 그치지 않았다.”
부정적인 이야기 일색이죠. 그런데 <선조수정실록> 1593년 12월1일자를 봅시다.
“한때 정철을 소인으로 여긴 여론이 있었다. 그러나 정철을 권간과 적신으로 지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정철이 겨우 1년 정도 정승 자리에 있었다. 임금이 전권을 행사했고, 이산해(1539~1609)와 류성룡(1542~1607)이 함께 정승으로 일했는데 무슨 권세를 부렸겠는가.”
정철을 변호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색에 젖어 술에 취하면…사람을 면전에서 꾸짖고~다른 당의 원수를 다 체포했으니 공격대상이 됐다…정철이 그저 강호산림에 있었다면 좋았을텐데…고관대작은 그에 맞는 벼슬이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정철이 누구입니까. 강원·전라·함경관찰사를 지내면서 ‘관동별곡’과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을 지은 가사문학의 대가이죠. 하지만 서인의 영수가 되어 철저하게 동인세력을 축출하는데 앞장 섰습니다. <선조수정실록>의 기자는 정철이 ‘정쟁에 빠지지 않고’ 강호산림에서 음풍농월 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워한겁니다.
그런데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에 나오는 정철의 부음기사가 상반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역시 당쟁의 산물이었습니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연간(1608~1623)에 기자헌(1562~1624)·이이첨(1560~1623) 등 북인이 편찬했습니다. 정철과 같은 서인에 대한 평가가 각박할 수 밖에 없었죠. 때문에 인조반정(1623년)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선조수정실록>을 편찬됐습니다.
그러니 정철에 대한 평가가 바뀐거죠. 중요한 착안점이 있습니다. 정권을 잡은 당파가 제 입맛대로 역사를 고쳤죠. 그것이 <선조수정실록>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존의 <선조실록>도 없애지 않았습니다. 상반된 기록을 그대로 남김으로써 후대의 평가에 맡긴 겁니다. 뭐 희대의 폭군이라는 연산군(1494~1506)도 “임금이 두려워 한 것은 사서 뿐(人君所畏者 史而己)”이라고 했잖습니까.
■98년 만에 뉴욕타임스가 쓴 유관순 부음기사
몇 년 전에 본 특별한 부음기사가 떠오르네요. 2018년 3월 미국의 뉴욕타임스에 실린 유관순 열사(1902~1920)의 부음기사였는데요. 제목도 ‘더는 간과되어서는 안될(Overlooked No More)’이었는데요. 부음기사는 열사의 수형카드와 함께 ‘16살 소녀는 평화로운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자유를 향한 민족 열망의 얼굴이 되었다’는 부제를 달았는데요. 뉴욕타임스는 지하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겪었던 17살 소녀가 순국 직전인 1920년 9월 28일 썼던 짧은 글 한편을 소개했습니다. ‘일본은 곧 패망할 것이다.’
따지고보면 ‘간과해서는 안될 부음기사’를 제대로 써야 할 언론은 뉴욕타임스가 아니었죠. 유관순 열사의 순국 당시 부음기사를 쓴 국내 언론은 없었잖아요. 그런 기회마저 외국언론에게 빼앗겼네요. 부끄럽습니다. 그나저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음기사를 읽어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 전 대통령도 역사의 포폄을 받아야겠죠. 또한 그의 부음기사를 실명으로 쓴 기자와 각 언론 역시 후대의 엄정한 평가를 받아야 할 겁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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