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표 문화유산이라면 훈민정음(국보 70호), 금동반가사유상(국보 78·83호), 석굴암(국보 24호), 백제금동대향로(국보 287호)와 신라금관을 꼽을 겁니다. 금관 중에서는 1921년 발굴된 첫번째인 금관총 금관(국보 87호)을 으뜸으로 칠 겁니다.
하지만 이 금관총 발굴이 당시 경주에서 ‘대서방’ 주인이었던 일본인 비전문가가 주도한 ‘아마추어 발굴’이었다는 기막힌 사실을 아십니까. 또 사상 처음으로 금관이 모습을 드러내자 일본학계는 “우리(일본) 영토 안에서 처음 발견된…”이라고 흥분했답니다. 정말 통탄할 노릇이죠.
■아마추어가 3~4일만에 후딱 판 금관총
시간을 1921년으로 경주로 되돌려 볼까요. 경주 노서리 마을을 순찰하던 미야케 요산(三宅與三) 순사(경주 경찰서)의 눈에 3~4명의 아이들이 쌓아놓은 흙속에서 청색 유리옥을 줍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흙의 출처를 물어봤더니 아이들이 가리키는 곳은 봉황대 고분 바로 아래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박문환의 집이었습니다. 미야케가 주막집 증축을 위한 터파기 작업을 벌이던 박문환의 집 뒷마당으로 출동했습니다. 미야케는 즉각 경주경찰서장에게 그같은 사실을 보고합니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은 이후 각종 보고 전문이나 공문서, 발굴보고서에 발견 일자와 발굴 시점 등이 자주 틀리거나 모호하게 나와았습니다. <경주 금관총 발굴 보고서>는 미야케가 24일 아침 9시 유물 현장을 목격하고 공사를 중단시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미야케 본인이 경주경찰서장에게 보낸 보고서는 분명히 25일 오전 9시라고 했습니다. 또 한가지 미심쩍은 것이 있습니다.
경북지사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에게 ‘유물 발견 전보’를 보낸 것은 그로부터 4~5일이나 지난 9월 29일과 30일이었습니다. 29일 전보는 “어제(28일) 고분을 찾아냈고 금속장신구 등 기타의 유물을 찾아냈다”는 것이었고, 30일 전보는 “경주 고분발굴물은 학술상 상당히 참고가 될 것이니 급히 전문가를 파견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10월19일 경북도지사가 조선 총독에게 보낸 저간의 발굴 보고서를 보면 심상치 않은 대목이 나옵니다.
‘9월 27일 오전 10시 현장을 발견한 뒤 발굴에 착수하여 29일에 이르렀습니다. 미야케의 보고를 받은 경찰서장 이와미 히사미쓰(岩見久光)는 일단 경주고적보존회 촉탁인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에게 통지하고 현장에 나와보니 희귀한 귀중품이며 그 수량이 많아 흩어질 우려가 있어서…채굴(발굴)에 착수하고 겨우 29일에 모든 것을 채굴했습니다.”
그러면서 발굴품 목록을 보고했는데, ‘59개의 굽은 옥이 달린 순금제 보관(금관) 1점과, 39개의 장식이 달린 허리띠 1조, 순금제 반지 12점, 순금제 귀고리 5점, 순금제 띠드리개 1점 등…’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본부, 즉 조선총독부에 보고한 것이 29일이고, 전문가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한게 30일인데 실제로 그때는 이미 ‘발굴 끝’이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발굴을 담당했다는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가 누구입니까. 경주고적보존회 촉탁이었다는데, 실은 원래 ‘대서소(행정 및 법률서류를 대신 작성해주는 직업)’ 주인이었답니다. 이 발굴에는 경주보통학교 교장인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 등도 나섰는데요.
이렇게 ‘아마추어’끼리 지지고볶은 위험천만한 발굴은 단 3~4일 만에 끝납니다. 그러니 어떻게 됐겠습니까.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유구와 유물의 출토상태가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발굴사에서 천추의 한을 남긴 거죠. 뒤늦게 전문가들이 파견되어 정식발굴작업이 펼쳐졌는데요. 발굴 후 총독부가 펴낸 <경주 금관총 발굴조사 보고서>(1926년) 역시 이런 사실을 적시합니다.
“우연히 발견되어…모로가 히데오(비전문가)의 감독 아래…풍부한 유물이 겨우 1~2평 남짓되는 곳에서 쌓여있는 것을 단시일 내에 캐내야 했기에…출토상태를 전혀 알 수 없는 유물이 적지 않았다.”
또 “(주로 경험이 일천한 발굴자인) 모로가와 오사카 등의 기억과 각서에 의존해서 되살렸지만 각자의 소견이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 유감스럽다”고 했습니다. 이 획기적인 발굴은 이렇게 ‘비전문가의 손에서 뚝딱 해치운’ 졸속 발굴의 상징이라는 오명을 안게 됩니다.
■“우리 일본 영토 안에서 발견된 첫 금관”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수습된 유물들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신라금관을 비롯한 팔찌와 관모, 귀고리, 허리띠와 허리띠 장식 등 온갖 황금제품들이 그득했기 때문이었죠.
사상 처음으로 금관이 나온 이 고분에게 ‘금관총’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당시 보고서는 “금관총 출토유물의 황금(당시 보고서는 2관, 즉 7.5㎏으로 추정)은 하인리히 슐리만(1822~1890)이 그리스 미케네에서 발견한 금제 보기(寶器)보다는 뒤지겠지만…. 중앙 아시아의 옥수스 출토품들과 견주면 그것을 능가할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보고서는 또 “이 금관총 유물은 우리 ‘일본 영토’ 안에서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또한 전세계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고분 발견 유물의 한 예”라 자랑했습니다. 어떻습니까. 보고서 내용 중 ‘일본 영토’라는 표현이 영 거슬리지 않습니까. 일제 강점기라지만 너무도 가슴 아픈 기억이죠.
■아마추어에서 ‘경주왕’이 된 모로가
‘아마추어’였던 모로가는 금관총 발굴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복장터질 노릇인데요. 금관총 발굴이 피가 되고 살이 되어서 승승장구합니다. 모로가는 조선총독부가 출토유물들을 서울로 옮긴다는 계획을 세우자 ‘경주 출토 유물은 경주에서 보관해야 한다’는 지역여론을 부추겨 금관총 유물의 서울 이송을 무산시킵니다.
시민성금으로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의 건립이 추진됐고, 결국 ‘고대의 내선관계(內鮮關係)에 몰두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설립된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의 초대 분관장(주임)이 되었답니다. 물론 조선총독부의 지원아래 관변단체인 경주고적보존회는 유지합니다.
모로가 등 일본인들이 경주의 신라 유적을 조사·보존·현창하기 위해 결성했다는 경주고적보존회는 어떤 단체일까요. 1912년 출간된 <조선총독부 월보> 2월호의 ‘경주의 고적에 대하여’를 봅시다.
“경주는 일본 신공황후가 정벌한 곳이고…일본의 옛 식민지이기 때문에 특히 관심을 끄는 곳이다.”
일본인들은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249년)조에 등장하는 “신공황후 49년 봄 3월에…신라를 격파하고…가라 7국을 평정했다”는 지긋지긋한 기록을 인용한 겁니다. 일본인들에게 경주는 신라의 천년 고도가 아니라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일본의 땅이었기 때문에 많은 자료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던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조선총독부의 지원아래 관변단체인 경주고적보존회를 만들었던 겁니다.
모로가는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초대(1910~1916)는 물론 3·5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1919~1927, 1929~31) 등 조선 총독의 경주 방문 때 직접 모시면서 친분을 쌓아 지역권력을 극대화시킵니다. 금령총과 식리총 발굴(1924년)도 모로가의 부탁이 주효했답니다. 잇단 경주 발굴로 자신의 영향력을 쌓은 거죠. 훗날 도굴문화재 매매혐의로 체포된 모로가를 보도한 신문은 ‘속칭 경주왕(慶州王)의 말로’라는 소제목을 달고 “경주지역을 좌지우지한 권력자”로 묘사했어요.
모로가는 1925년 멀쩡한 첨성대를 두고 “약간 기울었다”면서 해체·복원을 주장했다가 호응을 얻지 못해 무산됐는데요. 보존상태가 양호한 첨성대를 해체하려고 했던 이유는 있었답니다. 분황사 전탑의 해체(1915년) 과정에서 화려한 유물이 출토된 사례를 기억해낸 겁니다. 모로가에게는 한국 문화재의 보존은 안중에 없었고, 온통 유물만 보인겁니다.
■경주왕에서 도굴품매매업자로 체포
그런 모로가를 긍정평가하는 이들도 있겠죠. 모로가가 이유야 어떻든 경주박물관을 만드는데 일조하지 않았냐고요. 과연 그렇게 긍정 평가할 수 있을까요. 모로가가 금관총을 발굴했잖습니까. 그런데 당시 금관총에서 쥐도새도 모르게 반출된 유물 중 금제 장신구 8점이 그 악명높은 수집가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의 수중에 넘어갔는데요. 이때 모로가와 금관총 유물의 반출이 모종의 연관성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의심하는 일본학자들도 있었답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했던가요. 결국 모로가는 도굴품 매매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 벌금 500원형을 받습니다. 불법소장품들은 압수되고 박물관 주임(분관장)직에서도 쫓겨납니다. 압수된 모로가의 유물 중 일부는 경주박물관이 사들이고, 나머지는 일본 제실박물관(도쿄국립박물관)이 구입 인수했습니다. 이 모로가 유물은 1965년 한·일 회담으로 환수된 유물 가운데 포함됐는데요. 반환유물 중에는 ‘황남동’이라고 출토지점까지 표시된 신라유물도 있었답니다. 모로가가 사주한 도굴을 통해 탈취한 유물인거죠.
제대로 공부한 학자였고, 명색이 국립박물관장이었다면 절대 자행할 수 없었던 도굴 사주이자 도굴품 밀매업자가 아니겠습니까.
여담이 있는데요. 1927년 12월10일 밤 경주박물관에 진열돼있던 금관총 유물 중 금관을 제외한 금제유물 90여점이 감쪽같이 사라졌는데요. 범인은 6개월 후인 1928년 5월21일 경주경찰서장의 관사 앞에 순금제 반지 등 몇점을 제외한 도난유물들을 도로 갖다놨답니다. 끝내 범인은 잡지못했는데요. 이런 설이 있더라구요. 공교롭게도 도난사건이 일어난 날 모로가는 경주에서 유적조사를 수행한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의 결혼식 참석하기 위해 상경했는데요. 이게 수상하다는 겁니다. 범인이 어떻게 모로가가 박물관을 비운 바로 그날을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 석연치 않다는거죠. 그래서 금관총 유물을 어찌어찌 해볼 요량으로 모로가가 자작극을 벌인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품기도 합니다. 뭐 진실은 알 수 없죠.
■금관총의 주인은 소지왕?
이 금관총은 누구의 무덤일까요. 2013년 7월 금관총 주인공의 허리에 차고 있었던 환두대도(고리자루큰칼)를 보존처리하면서 ‘이사지왕(이斯智王)’이라는 명문을 확인했는데요. 연구자 중에는 ‘이사지왕’의 ‘이(이)’자는 사전의 의미대로 ‘그(其)’, 혹은 ‘이(此)’의 의미일 수 있으니까, ‘이사지왕’은 ‘그 분이나 혹은 이 분’인 ‘사지왕’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 따라서 ‘사지왕’은 ‘소지왕’(재위 479~500)과 동일인물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구요. 아무튼 1921년 사상 처음으로 금관을 내보낸 금관총 발굴은 이와 같은 숱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었답니다. 뭐 유쾌한 역사는 아니지만 이 역시도 우리가 알아야 할 역사 아니겠습니까.(이 기사를 쓰는 데 정인성 영남대 교수의 논문 ‘일제강점기 경주고적보존회와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 <대구사학> 95집, 2009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경주 금관총 발굴조사보고서(국역)>, 2011과 국립중앙박물관의 <경주 금관총(유구편)>, 2016년 등을 참고했습니다. 또 함순섭 국립대구박물관장과 이한상 대전대 교수의 도움말과 자료제공이 피가 되고 살이 되었습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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