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은 한국 고고학사에 매우 뜻깊은 해라 할 수 있습니다. 백제 무령왕릉이 발굴된 지 딱 50년이 지난 해이기 때문입니다. 삼국시대 고분 중 도굴이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인공을 알 수 있는 첫번째 고분이 현현했습니다. 게다가 올해는 고구려의 침략으로 임금(개로왕)이 죽임을 당한 뒤 공주로 천도한 뒤에 국력을 가다듬고는 마침내 ‘다시 강국이 되었다’는 역사서의 표현인 ‘갱위강국(更爲强國)’을 선언(521년)한 지 1500주년이 되는 해라네요. 당연히 잔칫상을 받아야 하겠네요. 아닌게 아니라 문화재청과 공주시는 올해 무령왕릉 발굴 50년과 백제 ‘갱위강국’ 선언 1500년을 맞아 다채로운 행사를 벌인다네요.
그런데 한가지 이의를 제기해야겠습니다. 아무리 무덤 주인공이 무령왕이기로소니 남편과 함께 묻혀있는 무령왕비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 소홀한게 아닌가 뭐 이런 생각이 듭니다.
물론 무령왕비와 관련해서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역사서에 나오지 않으니 사실 뭐라 언급핳 거리가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 관련 지석이나 유적 방향, 유물 등을 토대로 몇가지 짐작할 바가 있겠죠. 있습니다. 이번에는 관련 영상을 붙여 무령왕비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정지산 기와건물의 비밀
1995년 충남 공주에서는 금강을 따라 공주~부여를 연결하는 백제큰길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해발 67m인 야트막한 산(정지산)을 절단해야 했죠. 그렇지만 웅진 백제의 고도인 공주를 마구 파헤칠 수 있나요. 당연히 문화재조사가 선행되어야 했죠. 그 지표조사를 국립공주박물관이 맡았는데요. 과연 정지산 주변에서 백제시대 유물이 채집되었습니다.
그냥 넘길 수 없었죠. 이듬해인 1996년 2월부터 정식발굴조사가 시작됐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당시 발굴을 맡은 이한상 학국립공주박물관 학예사(현 대전대 교수)가 보기엔 발굴이 진행될수록 좀 이상했대요. 해발이 70m도 안된다 해도 산은 명색이 산인데 산의 정상부가 너무도 평탄했기 때문이죠.
저도 가봤는데요. 정말 그렇다라구요. 정상부의 면적은 800여평이었는데 마치 학교 운동장 같았습니다.
그 곳에서 7기의 건물터가 노출되었습니다. 그런데요. 유독 한가운데 평탄지에 있는 돌출된 중앙건물지(15.5평·8m×6.4m)가 돋보였답니다. 주변에서 기와가 발견됐으니 지체높은 기와건물이 존재했다는 얘기고요. 주변의 땅 전체를 깎아내어 건물을 높여 웅장함을 더하고 배수문제를 해결했대요.
그런데요. 다른 건물지와 달리 적심(기둥을 세우려고 초석 밑부분에 구덩이를 파고 석재를 채워놓는 일)도, 초석도 없었는데, 무려 45개의 기둥이 3열로 박혀 있었답니다. 게다가 건물의 중앙부에 다시 4개의 기둥구멍이 있고, 그 한가운데에 커다란 구덩이가 하나 파여있었데요.
좀 이상하죠. 15평 남짓되는 기와건물에 초석도, 적심도 없이 그저 맨땅에 구멍을 파고 기둥을 세웠다는 거니까요. 그랗다면 건물도 튼튼하지 않았을 거고…. 무엇보다 15평 남짓한 이 건물 안에는 사람이 활동할만한 공간이 거의 없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봤데요. 오래 사용한 건물이 아니라 일정기간 사용했던 특수목적 건물이 아니었을까. 뭐 그렇게 추론했답니다. 이상한 거 투성이죠. 대체 백제인들은 왜 이 야트막한 야산에 800평 가량의 넓은 공간을 만들어놓고 사람이 활동할 수 없는 기와건물을, 그것도 잠깐의 목적을 위해 조성했던 것일까요.
■신지와 유지는 어느 방향일까
그래서 이한상 학예사가 여러 단서를 찾기 시작했답니다. 먼저 유물을 살펴보았대요. 뭐 웅진백제 시기(475~538년)의 벽돌이 나왔고요. 장고 모양의 그릇받침(器臺) 조각도 17점 확인됐답니다.
그릇받침은 말 그대로 일반적으로 제기를 올려놓는 받침대죠. 출토된 토기들도 고급의 정품(精品)이 많았답니다. 그중에는 왜계열인 스에키(須惠器·가야 토기의 영향을 받아 5세기부터 일본에서 제작된 회색토기)와 하지키(土師器·일본의 전통적인 토기)가 보였답니다. 또 고창과 나주, 고령 등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외부 토기들이 상당수 섞여 있었답니다. 뭐 그렇다면 정지산은 제사를 지낸 곳이고, 왜국이나 가야 같은 곳에서 사절을 보내 이 제사에 참석한 것이 아닐까요.
제사유적이라구요. 아 그렇죠. 이한상 학예사의 뇌리를 스친 유적이 있었습니다. 정지산 유적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무령왕릉이었어요. 650m 정도 떨어져 있는데요. 아시다시피 무령왕릉의 주인공은 백제 25대 임금인 무령왕(재위 501~523년)과 무령왕비잖아요. 그런데 무령왕릉에서는 무령왕 부부와 관련된 이야기를 기록한 명문기록이 많이 나왔죠. 죽은 사람의 인적사항과 무덤의 소재를 기록한 돌판, 즉 지석하고요. 무덤조성을 위해 땅을 매입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알린 매매계약서인 매지권 등이 발굴됐잖아요.
무령왕의 지석과 매지권을 종합하면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사마왕(무령왕)이 나이 62세가 되는 계묘년(523년) 5월7일 돌아가셨다. ‘신지(申地)’의 땅을 사서 무덤을 조성했다. 을사년(525년) 8월12일 대묘에 안장했다.”
의문점이 또 생기죠. 24방위의 하나인 ‘신지(申地)’는 어디를 가리키는가. 이것은 서쪽에서 남으로 30도 안쪽의 방위를 말합니다. 무슨 말이냐. 무령왕이 묻힌 땅, 즉 지금의 무령왕릉이 서남쪽 땅이라는 이야기죠.
무령왕비는 어떨까요. 무령왕의 매지권을 새긴 지석의 뒷면에는 무령왕보다 3년뒤(526년) 서거한 무령왕비의 행적과 무덤 소재지를 밝힌 묘지가 적혀있었는데요. 무령왕비의 묘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병오년(526년) 12월 백제왕비가 천수를 다하고 돌아가셨다. 유지(酉地·서쪽)에서 상례를 치르고(居喪在酉地), 기유년(529년) 2월12일 다시 대묘로 옮겨 장사지냈다.”
‘유지(酉地)’는 정서쪽의 땅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무령왕과 왕비의 지석 내용을 정리해봅시다.
무령왕은 523년 5월 7일 서거했고, 27개월만인 525년 8월12일 서남쪽에 조성된 대묘(무령왕릉)에 안장됩니다. 그런 뒤 1년 4개월만인 526년 12월 부인(무령왕비)도 서거합니다.
그러나 부인은 곧바로 남편 곁에 묻히지 못합니다. 일단 ‘유지(酉地)’, 즉 정서쪽의 땅에서 장례를 치른 뒤 27개월만에 남편이 묻힌 대묘(무령왕릉)에 합장됩니다. 남편인 무령왕도, 부인인 무령왕비도 똑같이 죽은 지 27개월 뒤에 지금의 무령왕릉에 묻힌거죠. 그런데 왕비의 경우 남편 곁에 묻히기 전에 일단 상례를 치른 곳이 유지(酉地), 즉 서쪽이라 했습니다.
■조문객 맞이한 빈전?
그렇다면 방위의 기준점은 어디일까요. 아마도 국왕 부부가 생전에 거처했고, 정사를 펼쳤던 왕궁이 기준점이었겠죠. 왕궁이라면 공산성이었을 겁니다. 이한상 학예사는 공산성을 기준점으로 무령왕릉과 정지산의 방위와 각도를 재보았는데요. 과연 꼭 들어맞았답니다. 즉 공산성에서 볼 때 서남쪽(신지)에 무령왕릉이, 서쪽(유지)에 정지산이 기막히게 걸렸습니다. 그러면 어떤 해석이 가능할까요. 해발 67m 정지산 정상부 800여평 땅에 죽은 무령왕비의 빈소를 차리고 조문객을 맞이한 공간이 아니었을까요. 이곳에서 국내외 조문객의 문상을 받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생각하고 유구와 유물의 양상을 더듬어보니 얼추 맞았답니다.
즉 왕비의 시신은 기둥만 3열 45개 박아 조성한 기와건물 안에 모셨을 겁니다. 건물의 구조를 추정해봅시다. 흙으로 된 벽체는 없었으며 밀착된 기둥사이로 공기가 통하도록 배려했을 가능성이 짙어요. 내부에 세워진 4개의 기둥을 보면 건물구조가 2층일 가능성도 있지만 평상 등의 시설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시신을 보관한 자리일 수 있다는거죠.
■얼음 보관한 빙고가 존재했다
한가지 의문점이 더 생기겠죠. 무령왕비의 빈전은 27개월 동안 차려졌을 것인데, 시신은 어떻게 썩지 않게 보관했을까요. 일단 음력 12월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시신 또한 별탈없이 겨울철 한철은 날 수 있었겠죠.
그러나 여름철은 어떻게 보관했을까요. 여기에서 김길식 용인대 교수의 연구가 눈에 띄는데요. 정지산에 무령왕비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려고 조성한 빙고(氷庫)가 존재했다는 겁니다.
살펴볼까요. 정지산에는 괴상한 형태의 구덩이가 있는데요. 진흙덩어리가 두껍게 깔려있는 구덩이였는데요. 구덩이 윗부분에는 목탄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덩이 모서리에 U자형 관(배수로)이 설치됐어요. 이 관은 아래쪽으로 경사지게 연결되어 있었는데요. 배수로 끝에는 깊이 30~40㎝의 구덩이가 또 있었어요.
상상해볼까요. 구덩이의 상층부에 겹겹이 쌓인 진흙덩어리는 무엇일까요. 고체인 얼음이 서서히 녹으면서 생긴 끈끈한 점액질이 아닐까요. 혹 겨울철에 인근 금강의 얼음을 잘라 저장한 것은 아닐까요.
그래놓고 얼음이 쉽게 녹지 않도록 짚, 솔가지 등의 보냉재와 빙탄으로 사용할 목탄을 쌓아두고는 구덩이 상부를 덮은 것은 아닐까요. 얼음이 녹으면 배수관을 통해 경사진 밑에 설치된 소형구덩이로 흘렀겠죠.
또 정지산의 저장구덩이에서 특히 외부토기가 많이 출토되는데, 이것은 조문사절이 가져온 재물을 특별히 ‘보관한’ 것은 아닐까요.
■무령왕비 홀대론?
이렇게 저장한 얼음덩이를 어떻게 무령왕비 시신의 부패방지에 사용했을까요.
기와건물지 한가운데는 왕비의 관이 놓여 있었다면 어떨까요. 바로 그 관의 밑바닥에 빙반(氷盤)을 조성, 빙고에서 보관된 얼음덩어리를 부패방지용으로 깔아놓았을 가능성이 크죠. 터무니 없는 상상력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부여에서는 사람이 여름에 죽으면 모두 얼음을 채워둔다(其死 夏月皆氷)”(<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부여조’)고 했고, “505년(신라 지증왕 6년) 처음으로 얼음을 저장했다”(<삼국사기> ‘신라본기·지증왕조)고 했습니다. 부여와 신라에 존재했던 빙고가 백제에 없었을 리가 없죠.
무령왕과 무령왕비는 왜 죽은 다음 곧바로 묻히지 않은 것일까요. 중국측 기록은 <수서>를 보면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집 안에서 빈소를 차리고 3년이 지나 길일을 택해 매장한다”고 기록했어요.
‘빈(殯)’은 대체로 죽음(상·喪)에서 장례식까지의 기간 혹은 발인할 때까지 관을 모셔놓은 공간을 말합니다. 무령왕릉 지석의 내용을 토대로 계산해보면 백제왕과 왕비의 시신이 빈전에서 문상객을 받은 기간 27개월인데요. 만 3년은 아니지만 햇수로 3년이 되는 겁니다. 이처럼 무령왕릉의 지석내용을 토대로, 정지산 유적의 유구·유물 출토상황 등을 종합해보면 ‘정지산=무령왕비 빈전’ 설이 유력해보입니다.
최근에는 ‘정지산=무령왕비 빈전’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제기되고 있다. 정지산 유적이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국가시설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입니다. 이 주장은 정설로 굳어진 ‘정지산=무령왕비 빈전’설에 대한 문제제기 형식의 반론입니다. 어쨌거나 저는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을 맞아 무령왕 뿐 아니라 무령왕비와 관련된 스토리텔링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왕비의 유물도 많잖아요. 엄연히 부부묘인데 너무 무령왕에게만 관심을 둔 것 같아요.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이한상, ‘백제의 상장의례와 고대 동아시아’, <충청학과 충청문화> 19집, 충남역사문화연구원, 2014
김길식, ‘고대의 빙고와 상장례’, <한국고고학보> 47권, 한국고고학회, 2002
이병호, ‘백제왕실의 조상제사 변천에 대한 시론’, <동아시아 종묘와 무덤제사의 비교고고학> 학술대회, 문화재청 신라왕경사업추지단·성림문화재연구원 공동주최,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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