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코로나 19 때문에 전시회가 개최되는 경우가 많이 생겼는데요.
문화재청 세종대왕유적관리소에서는 27일부터 6월27일까지 ‘효공과 하멜 이야기’ 기획전시를 연다고 합니다. 전시는 ‘북벌 의지를 다졌던 효종과 조선에 억류된 네덜란드인 하멜이 무기개량 등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는 내용으로 구성했다고 합니다. <하멜표류기> 덕분이겠지만 조선 땅에 표류한 외국인 중 가장 유명한 이가 네덜란드인인 헨드릭 하멜(1630~1692)이라는 걸 부인할 수 없습니다.
■네덜란드인끼리 목놓아 울었다
하지만 하멜 말고도 상당수 외국인이 낯선 땅 조선에 표착해서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남겼습니다.
1653년(효종 4) 8월6일자 <효종실록>을 볼까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와있습니다. “예전에 조선에 온 박연이 금방 표류한 자들(하멜 일행)을 만나보고는 ‘과연 만인(蠻人·여기서는 네덜란드인)이 맞다’고 일러주었다”는 겁니다. 이 무슨 내용일까요.
팩트만 전달한 <효종실록>과 달리 <하멜표류기>와 윤행임(1762~1801)의 <석재고> 등은 ‘하멜 일행과 박연의 운명적인 만남’을 생생한 필치로 전합니다. 이때 하멜을 만난 박연이 누구냐. 6년 전인 1627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홀란디아호 선원이었다가 나가사키로 향하던 도중 표류해서 조선땅에 표착한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1595~?)라는 네덜란드 사람이었습니다. <하멜표류기>를 봅시다.
“제주목사(당시 이원진·1594~1665)가 (통역차) 옆에 앉은 ‘붉은 수염’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누구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하멜 일행)가 ‘홀란드(네덜란드) 사람 같다’고 했더니 제주목사는 껄껄 웃으며 ‘이 사람은 조선사람이다. 너희가 잘못 봤다’고 했습니다.”
윤행임의 <석재고>는 더욱 드라마틱합니다. “같은 네덜란드 사람인 것을 안 박연과 하멜 일행은 옷깃이 다 젖을 때까지 울었다”는 겁니다. 그럴만도 합니다.
벨테브레이는 26년 전인 1627년(인조 5) 나가사키로 가다가 동료 2명과 함께 식수를 구하려고 제주도에 상륙했다가 억류됐습니다. 조선에서는 ‘일본 나가사키로 가고 싶다’는 벨테브레이 등의 뜻에 따라 동래 왜관으로 이송했습니다. 그러나 왜관은 벨테브레이 일행이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인도를 거부했습니다.
벨테브레이는 박연이라는 조선 이름을 받았고, 조선인 아내와 아이까지 두었습니다. <하멜표류기>는 “조선에 정착한지 26년이 지난 벨테브레이가 모국어를 너무 잊어서 처음엔 의사 소통에 매우 어려움이 많았다. 매우 놀랐다.”고 기록했습니다. 박연은 하멜에게 “나도 ‘제발 보내달라’고 간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면서 “당신들(하멜 일행)도 조선 땅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니 포기하라”고 권유했답니다.
■조선인 박연과 네덜란드인 하멜의 차이
아닌게 아니라 조선인 박연이 된 벨테브레이 일행은 훈련도감 군사로 편입되어 투항한 일본인과 표류한 중국인들로 구성된 외인부대의 장수가 됩니다. 박연의 다른 일행인 드리크 하이스베르츠, 얀 피터스 베르바스트 등은 병자호란(1636년) 와중에 전사하고 맙니다.
박연은 북벌정책을 구체화한 효종을 보필하면서 화포제작에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박연은 아예 조선의 무과에 응시해서 당당하게 급제한 뒤 정식무관으로 활동하는데요.(1648년) <석재고>는 “1652년(효종 3) 박연은 나라를 위해 재능을 떨쳤고, 드디어 홍이포 제도를 전했으니 기이한 일”이라고 전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인을 두고 얼굴과 수염이 붉다해서 ‘홍이(紅夷)’ 혹은 ‘홍모(紅毛)’라 했는데요. 홍이포라는 이름이 바로 이 네덜란드식 대포를 가리킵니다. 조선에 최첨단 무기인 홍이포의 제작법과 조종법을 가르친 이가 바로 네덜란드 출신의 조선인인 박연이었던 겁니다.
26년 뒤 조선에 표착한 하멜 일행 역시 박연이 조장으로 있던 훈련도감의 포수가 됩니다. 북벌을 계획한 효종으로서는 대포기술자 10여명이나 포함된 하멜 일행을 활용했겠죠. 하멜 일행은 달마다 70말의 쌀과 옷, 총은 물론 호패까지 지급받았습니다. 바야흐로 조선인의 자격을 부여한 겁니다.
“표착한 남만인(네덜란드인)에게서 얻은 조총 등을 모방해서 정교한 무기를 제작했다”(<효종실록>)는 실록 기록이 있을 정도로 박연과 하멜 일행의 공이 컸습니다.
하지만 박연과 달리 하멜 일행은 조선 풍토에 끝내 적응하지 못합니다. 일행 중 2명이 조선을 방문하는 청나라 사신의 길을 막아서서 “우릴 보내달라”고 시위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1655년) 조선 조정은 하멜 일행에게 ‘유배형(전라 강진)’의 처벌을 내리는데요.(1656년) 하멜 일행은 강진에서 결국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합니다. 그때가 1666년(현종 7) 9월이었는데요. 이로써 하멜의 조선 체류는 13년 28일로 끝났습니다.
■정유재란에 참전한 흑인 용병
하멜과 벨테브레이(박연) 이전에는 조선땅에 아무도 오지 않았을까요. 가장 특이한 케이스가 있는데요.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군 가운데 포르투갈 흑인용병 4명이 참전했다는 겁니다.
1598년(선조 31) 5월26일 명나라 지원군 장사 팽신고가 “조총도 잘 쏘고 무예에 뛰어난 파랑국(포르투갈) 군인들이 있다”고 소개하는데요. <선조실록>은 “그 신병은 일명 해귀(海鬼·바다귀신)이고, 노란 눈동자에 얼굴빛은 검고 사지와 온몸도 모두 검다.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곱슬이고 검은 양모(羊毛)처럼 짧게 꼬부라졌다”라 합니다. 팽신고의 자랑이 더욱 하늘을 찌르는데요.
“이 흑인은 바다 밑에 잠수하여 적선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며칠동안 물 속에 머물면서 수중생물을 잡아 먹을 줄 압니다.”
팽신고의 말에 따르자면 이 아프리카계 용병은 바다 밑에 잠수하여 적선을 공격하는, 지금으로 치면 UDT 요원 정도는 되겠지요.
■해귀와 달자의 위력
이 포르투갈 용병을 둘러싼 당대의 관심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각종 문헌은 어느날 갑자기 등장한 ‘해귀’의 인상착의를 저마다 선정적으로 전합니다. 류성룡(1542~1607)의 <서애집>은 “낯빛이 칠처럼 까맣고, 바다 밑에 숨어 다니기도 하며 그 모양이 귀신같다 하여 해귀라고 했고, 몸집이 커서 거의 두 길이나 되었다. 말을 타지 못하고 수레를 타고 다녔다”고 했습니다.
과장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1599년(선조 32) 철수를 앞둔 명나라 군을 위한 연회의 모습을 담은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에는 그림의 맨 마지막 장면 왼쪽 하단에 수레를 탄 이른바 ‘해귀’ 4명이 보입니다. 몸집에 하도 커서 ‘말을 타지 못하고 수레를 탔다’는 <서애집>의 기록과 정확하게 부합되죠.
포르투갈 용병이 등장했다”는 뉴스는 당대에도 적진을 공포의 도가니로 빠뜨린 것 같아요.
1598년(선조 31) 9월5일 전라 관찰사 황신(1560~1617)은 “해귀와 달자(달子·몽골군)의 수를 부풀려 말했더니 왜적들이 (두려워하여) 꽁무니를 빼고 철수를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군은 이들 포르투갈 용병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은 “명나라 장군 유정(1558~1619)은 경주 전투에서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했다”면서 “왜 해귀(海鬼)의 수중작전으로 왜선을 침몰시키지 못했는지 모르겠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니까 명나라군은 해귀, 즉 포르투갈 용병의 재주를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패했다는 겁니다.
■네덜란드인은 개처럼 오줌 눈다
동양의 역사에서 흑인은 곤륜노(崑崙奴), 혹은 흑귀노(黑鬼奴) 등으로 표현됩니다. <명사(明史)>는 “네덜란드 사람이 부리던 노예는 흑귀노”라면서 “주인은 먹을 것을 말구유통 같은 그릇에 쏟아서 흑귀노에게 먹이고 목봉으로 부린다”고 기록합니다. 흑인을 동물 취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구요.
그런데 오해가 있을까봐 말씀드릴게요. 조선인들은 사람의 피부색을 가려 차별대우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백인들도 마찬가지로 취급했는데요. <하멜표류기>는 “조선인들은 우리를 괴물로 여겼다”면서 “음료를 마실 때는 코를 귀의 뒤로 돌리고 마신다든가, 금발이라 물속을 헤엄쳐 다니는 새처럼 보인다든가 하는 소문 때문이었다”고 전했습니다. 하기야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인 이덕무(1741~1793)마저도 “네덜란드 사람의 발 길이는 1척2촌(36㎝ 정도)이며, 오줌을 눌 때는 늘 한 쪽 다리를 들고 눈다”(<편서잡고(編書雜槁)>)고 했습니다. 사람을 개(犬)의 종류로 보다니….
이렇듯 조선인들이 ‘서양인’과 ‘흑인’을 ‘양귀’, 혹은 ‘흑귀노’로 낮췄는데요. 뭐 서양인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조선인은 ‘미개하고 야만적인 사람들’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효종의 사위인 정재륜(1648~1723)의 <공사견문록>은 네덜란드 출신인 박연(벨테브레이)이 전하는 끔찍한 언급을 소개합니다.
“박연이 네덜란드 본국에 있을 때 ‘고려인(조선인)들은 인육을 구워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박연이 제주도에 표류했을 때 마침 날이 어두워 조선 군사들이 횃불을 준비했다. 배안에 있던 (네덜란드) 사람들은 모두 이 불이 자신을 구워먹으려는 도구라고 여겨 하늘이 사무치도록 통곡했다고 한다.”
어떻습니까. 500년 전에도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은 늘 이렇게 서로간 오해를 불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무지에서 비롯된 터무니 없는 편견 같죠. 하지만 지금 이 순간도 피부색, 종교색, 정치색, 뭐 이런 차이 때문에 서로 증오하고, 때로는 살상도 서슴치 않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실시간으로 전세계인이 교류하고 있는 대명천지인데도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에게는 사람이 가장 무서운 존재가 아닐까 싶어요.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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