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알고보면 역사·고고학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반 시민들이 역사에 길이 빛날 문화유산을 발견했고, 그 분들 중 일부는 그 대가로 소정의 보·포상금도 받았으니까요.
■신라 국보 비석 트리오의 발견 스토리
대표적인 케이스가 있죠. 2009년 5월11일의 일이었는데요.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 주민 김모씨는 자기 집 앞 도로공사 현장을 지나다가 크고 평평한 돌에 시선이 꽂혔답니다. 화분받침대로 제격이라 여겼던거죠. 김씨는 무거운 돌을 낑낑 대며 아파트 담벼락 아래로 일단 옮겨놓았는데요.
그런데 다음날 새벽 내린 비 때문에 붙어있던 흙이 씻겨나가자 돌 표면에서 글자가 보였습니다. 신고를 받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관계자들이 현장으로 달려갔는데요. 과연 비문 첫머리의 ‘신사(辛巳)~’라는 간지가 선명했답니다. 전문가들은 ‘501년’이나 ‘441년 신사년’에 새긴 비석일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엄청난 발견이었습니다. 501년이든, 441년이든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 고비 가운데 시대가 가장 이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석은 지역에서 일어난 ‘수조권(세금을 거둘 권리) 분쟁’을 판정한 결과를 고지한 판결문’으로 추정됩니다. 이 비석은 ‘포항 중성리비’라는 명칭으로 국보(318호)가 되었답니다.
사실 경북지역에서는 중성리비 발견 20여 년 전부터 ‘국보’ 비석이 두 번이나 발견된 바 있었습니다.
1988년 1월20일 경북 울진 죽변면 봉평리 농민 주모씨가 논둑에 박힌 커다란 바위를 굴삭기로 파내어 논두렁에 던져놓았는데요. 마을 이장 권모씨가 이 돌덩이를 대문 울타리 기둥석으로 쓰려고 마을 공터로 옮겼답니다. 그런데 역시 봄비에 흙이 씻겨나가면서 비석의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간지(갑진·524년으로 추정)가 보였습니다.
이 비석은 524년(법흥왕 11년) 법흥왕이 울진 백성들의 항쟁을 진압하고 관련자들에게 형벌을 내리는 판결문으로 해석됐습니다. 이 ‘울진 봉평신라비’ 역시 ‘국보(242호)로 지정됐습니다.
그리고 1년 여 뒤인 1989년 3월이었는데요. 포항(영일) 냉수2리 주민 이모씨는 “옛 비석을 밭에 묻어두었다”는 예전 할아버지의 말씀을 기억해냈답니다. 봉평비 발견 소식에 자극을 받은거죠. 쇠꼬챙이로 밭을 이리저리 파던 이씨는 밭 가장자리에 박혀있던 돌 하나를 드디어 발견했는데요. 그 비석이 바로 포항(영일) 냉수리비입니다.
봉평비(524년)보다 21년 빠른 503년(지증왕 2년) 조성된 것으로 보이고요. 역시 재물을 둘러싸고 일어난 분쟁의 판결문으로 추정됐습니다. 이 포항 냉수리비 역시 국보(264호)가 되었죠. 이것이 ‘신라 국보 비석 트리오’의 발견비화인데요.
■도로공사, 수도검침 중에 발견한 국보
해방 이후 평범한 시민이 국보 유물을 발견한 최초의 ‘사건’은 1963년 7월16일에 일어났습니다. 경남 의령 대의면 하촌리 마을밖 도로공사에 품팔이를 나온 마을주민 강갑순씨(당시 40세)와 큰아들 전병철군(17)이 야산 비탈의 돌무더기를 곡괭이로 파헤치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그 곡괭이 끝에서 네모반듯한 공간이 노출됐고, 그 안에 누워있는 금빛 찬란한 불상을 보았답니다. 강씨의 신고를 받고 달려간 전문가들이 경악했는데요.
높이는 16.2㎝에 불과하지만 ‘연가7년 기미년 고려국낙랑’(延嘉七年…己未高麗國樂浪)으로 시작되는 명문이 불상의 가치를 높였습니다. ‘기미년’, 즉 539년이라는 제작 연대가 있는 가장 오래된 ‘금동불’이었던거죠. 이 불상은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의 이름으로 국보(제119호)가 됐는데요.
국보 127호가 된 금동관음보살입상 ‘발견담’ 또한 기가 막힙니다. 서울 삼양동 국유지에 천막을 치고 살던 주민 박용출씨는 8식구가 근근히 살고 있었는데요. 1967년 1월 집 뒤의 산비탈이 무너져 온 식구가 깔려죽는 무서운 꿈을 꾸었답니다. 꿈자리가 사나워 불안에 떨었던 박씨는 1월28일 천막집 뒤쪽에 하수도를 깊이 파기 시작했는데요. 아 글쎄, 흙 속에서 금동불상이 나타났답니다. 높이 20.7㎝의 금동관음보살입상은 7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2009년 2월초 수도검침원인 최모씨는 경북 경주시 동부동 한 주택의 마당 수돗가에서 검침하고 있다가 희한하게 생긴 돌덩이를 발견했는데요. 판독결과 돌덩이의 한쪽면에서만 200여자의 글자가 보였답니다.
알고보니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문무왕릉비의 윗부분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경주 사천왕사에 세워졌다는 문무왕릉비는 발견(1796년)-실전-발견(1817년)-실전-아랫부분 발견(1961년)이라는 우여곡절을 겪은 뒤 드디어 비석 윗부분이 수도검침원의 눈썰미 덕분에 확인된 겁니다.
■주꾸미가 건져올린 고려 난파선
인구에 회자되는 대표적인 문화재 발견 사례가 있죠. 바로 ‘주꾸미가 건져올린 고려청자선’입니다.
2007년 5월 14일 밤이었는데요. 충남 태안 안흥항 인근에서 어민 김모씨는 바닷가에서 수영하는 꿈을 꾸었답니다. 어민들 사이에서 ‘물꿈’은 길몽이었다는데요. 다음날 아침 태안 대섬 앞바다로 조업을 나간 김씨는 과연 통발에서 주꾸미 800여 마리를 낚았데요. 그런데 그중 한마리가 푸른 빛깔의 접시를 발로 끌어안고 있었답니다. 그물에 소라 껍데기를 달아놓으면 주꾸미가 그 안에 들어가 알을 낳은 다음 입구를 자갈로 막아놓는데요.
그런데 이 주꾸미는 청자접시로 입구를 막고 있었던거죠. 이를 계기로 본격발굴에 돌입했고, 2만5000여점의 유물이 든 ‘태안선’을 찾아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 여 뒤인 2007년 7월 20일과 27일 태안 마도 인근에서 어부 심모씨의 그물에서 청자 26점이 걸렸다는 신고가 접수됐습니다. 역시 본격 발굴 끝에 고려시대 침몰선 3척(마도 1·2·3호)가 잇달아 인양됐습니다. 마도 1·2·3호선은 청자가 아닌 곡물운반선이었는데요. 이 중 ‘청자 상감국화모란유로죽문 매병 및 죽찰’과 ‘청자 음각연화절지문 매병 및 죽찰’ 등 두 점이 보물(제1783호·1784호)로 지정됐습니다.
■국보 유물을 발견한 대가는
한가지 궁금증이 생기죠. 이렇게 국보급 문화재를 찾았는데 나라에서 가만 있을까요.
아닙니다. 예전부터 ‘매장문화재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제17조와 21조 등)과 ‘유실물법’(제13조) 등은 ‘발견 유물은 신고는 7일 이내에 신고해야 하며, 발견자와 신고자, 토지 및 건물소유자에게 보상금을 균등하게 지급한다’고 규정해놓았습니다. 1963년 ‘연가 7년명 금동불’을 발견한 강갑순씨 모자와, 금동불이 출토된 땅의 임자(전모씨)에게 당시 20만원씩(쌀값 기준 요즘의 1400만원 가량)의 보상금을 지급했습니다.
발견자인 강갑순씨는 인터뷰에서 “한푼도 헛되이 쓸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시어머니에게 고기 한 근이라도 사다 드려야겠다”고 하면서도 “빚진 5000원을 갚고 나머지 돈으로 전답을 사야겠다”는 소감을 밝혔답니다. 또 여덟식구가 근근히 살다가 금동여래입상을 발견한 서울 삼양동 박용출씨는 120만원(현재 33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습니다. 불상의 가치는 240만원으로 평가됐지만 발견한 지점이 국유지여서 국가가 반(120만원), 박용출씨가 반(120만원)을 받게 된 거죠.
포항 중성리비를 발견한 김모씨는 보상금 5000만원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비석 가운데 가장 오래된 비석이라는 점이 이 유물의 가치를 높였는데요. 당시 보상금 산정위원회는 이 유물의 가치를 1억원으로 책정하고 그 반인 5000만원을 발견자인 김씨에게 지급했습니다. 발견지점이 국유지였기 때문에 보상금의 반인 5000만원은 국가소유로 돌아간거죠. 그래도 이 5000만원은 지금까지 지급된 문화재 발견 보상금 가운데 최고액입니다. 울진 봉평비의 경우 발견자와 토지 소유자에게 각 250만원씩의 보상금을 지급했구요. 포항 냉수리비의 경우 발견자 집에 300만원을 보상해주었답니다. 또 문무왕릉비의 윗부분을 발견한 수도검침원과 집주인은 각 1500만원씩 보상금을 받았답니다.
■보·포상금 최고액의 주인공은
어떤 분이 물어보더군요. 주꾸미가 건져올린 고려청자선의 경우 보상금은 어찌 되나구요.
사실 이게 좀 헷갈립니다. 본래의 보상규정(‘매장문화재 발견신고’)에 따르면 주꾸미가 건져올린 청자대접의 유물평가액은 12만원이었거든요. 그것도 바다에서 발견했으니 6만원씩 나눠가져야 할까요.
그렇다면 좀 억울하겠죠. 비록 ‘청자대접’ 1점이지만 이 청자대접을 계기로 고려청자를 가득실은 태안선을 찾아냈으니까요. 다행히 그런 법을 보완할 규정이 있습니다. 즉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제21조)에 따라 ‘발굴의 원인을 제공한 자에게는 문화재의 가치와 규모를 고려해서 포상금을 지급할 수 있다’(3항)는 ‘포상 규정’입니다.
따라서 어민 김씨는 발견문화재 신고에 따른 보상금 6만원 외에, 포상금을 더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즉 김씨의 신고가 원인이 되어 발굴한 ‘태안선과 유물’의 가치액은 1억원(1등급)으로 평가됐는데요. 포상규정에 따르면 1등급의 경우 ‘2000만원+(문화재의 평가액-1억원)×(5/100)’입니다. 이 계산이 적용되어 김씨는 보상금 6만원과 포상금 2000만원을 받았습니다. 김씨는 ‘주꾸미가 건져올린 청자대접’ 덕분에 2006만원을 받은 셈이죠. 주꾸미에게도 지분이 있는거 아니냐는 이야가도 나올 법하지만, 정작 김씨에게 행운을 안겨준 주꾸미는 곧바로 공판장으로 팔려나갔답니다.
마도 1·2·3호선 발굴의 단초를 마련한 심씨도 보상금으로는 단 10만원이 책정됐는데요. 그러나 심씨 덕분에 건져올린 난파선 3척과 인양유물의 가치는 3억7680만원(1등급)으로 평가됐습니다. 따라서 포상금 규정(1등급)대로 계산하면 ‘2000만원+(2억7680만원×5/100)=3384만원’이었습니다. 심선택씨는 결국 10만원(보상금)과 3384만원(포상금)을 합해 총 3394만원을 받았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든 보·포상금의 규모는 1억원을 넘지 못합니다.
찬란한 문화유산 운운하면서 보·포상금 이야기나 취재하고 기사 쓰는 제가 좀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보·포상금은 소중한 문화유산을 발견한 분들에게 보내는 아주 작은 성의가 아닐까요. 이것이 돈 얘기가 좀 쑥스럽지만 그분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이유입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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