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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발굴자도 울었던 동래성 전투현장…1592년 4월15일 무슨 일이?

햇수로 35년간 기자생활을 해온 저의 뇌리에 끔찍한 기억으로 남는 기사가 있습니다. 400여년전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에서 벌어진 끔찍한 참상을 기사로 작성할 때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습니다. 
2005년 4월 15일 부산 지하철 3호선 수안동 전철역사 예정지를 지나던 당시 경남문화재연구원 정의도 학예실장(현 한국문물연구원장)이 급히 차를 세웠습니다. 동래읍성과 불과 50m 떨어진 곳이었기에 전문가의 입회조사가 필요했기 때문에 나선 겁니다. 조사결과 과연 수상한 유구의 흔적이 보였습니다.

2005년 부산 지하철 3호선 수안역사의 공사 도중 1592년 4월15일 벌어진 동래성 전투에서 희생된 조선인의 유골이 다수 확인됐다. 이 중에는 조총을 맞은 5살 미만의 유아(왼쪽)와, 처형된 것이 분명한 20대 여성의 처참한 유골도 보였다. 김재현 동아대 교수 제공


■지하철 공사장에서 발견된 유구의 정체는
당시 발굴실무를 담당한 안성현 경남문화재연구원 조사팀장(현 중부고고학연구소 근무)는 “처음엔 이 유구가 해자(성을 보호하려고 조성한 도랑 혹은 연못)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말합니다. 
동래읍성 전투를 묘사한 <동래부순절도>(보물 392호·1760년 변박 그림)’에는 해자가 묘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발견된 유구는 해자가 분명했습니다.
이후 2년6개월간의 본격 발굴 결과 깜짝놀랄만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인골이 여기저기서 걸려나오고, 갑옷과 투구, 칼과 깍지(궁수의 엄지손가락에 끼우는 가락지), 창, 화살촉 등 정신없이 출토됐습니다. 

동래읍성 해자에서는 임진왜란 발발 초기인 1592년 4월15일 벌어진 동래성 전투 직후의 참혹한 광경을 재현할 수 있다. 죄없는 민간인들이 떼죽음을 당해 이곳에 버려졌음을 알 수 있다. 경남문화재연구원 제공


■처참한 5살 유아, 20대 여성의 유골
그 가운데서도 보는 이를 경악케한 것은 인골의 모습이었습니다.
두개골과 경추(목뼈)가 함께 확인됐고, 주관절과 팔·손뼈, 그리고 다리뼈와 무릎뼈 등이 연결된채 발견됐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인대와 근육이 붙어있는 단계로, 즉 죽은 직후에 버려진 것이 분명했습니다. 출토 인골의 분석결과 최소 81~최대 114개체가 확인됐고, 남성 59개체, 여성 21개체에 달했는데, 나이대는 10대 후반에서 4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습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남녀노소가 모두 희생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인골전문가인 김재현 동아대 교수를 놀라게 한 분석결과가 있었습니다. 
‘설마 없겠지’ 생각했던 아이 인골이 확인된 겁니다. 그 아이의 인골은 소아(小兒) 단계도 아니고, 만 5세 미만의 유아(幼兒)임이 분명했습니다. 김재현 교수는 “일본군의 조총에 맞은 흔적이 분명하다”면서 “조총의 총알이 부정형인데, 아이의 상처도 들쭉날쭉한 형태라는 점에서 그렇다”고 밝혔습니다. 

무언가에 맞아 두개골이 함몰된 채 사망한 남성(왼쪽)과 여성(오른쪽)의 유골. 처참한 최후를 웅변해주고 있다.김재현 동아대 교수 제공

그뿐인가요. 20대 여성의 두개골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 유골의 사진이 부지불식간에 떠오릅니다. 왜군은 이 힘없는 여성의 머리를 두 번이나 칼로 벤 것이 틀림없습니다. 인골을 보면 알겠지만 이른바 이마뼈는 단번의 칼놀림으로 예리하게 잘려있었습니다. 그런 뒤에 다시 정수리를 칼로 벴습니다. 상흔을 보면 왜병이 왼쪽에 서서, 꿇어 앉아있거나, 고개를 숙인 여인을 칼로 내리친게 틀림없습니다. 
아아! 이 무지막지한 왜병은 힘없는 여인을 처형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인두겁을 쓰고 그럴 수 있나구요.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칼로 사람을 베기 직전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있지 않습니까. 
이 뿐이 아니구요. 남성의 두개골 분석에서도 뒤에서, 혹은 앞에서 칼로 벤 흔적이 남아있는데요. 어떤 경우엔 칼로 베인 것 같기는 한데 그 상처의 단면이 반듯하지 않는 인골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칼이 아니라 다른 무기로 베었다는 소리죠. 이밖에 두개골이 함몰된 인골이 남녀 1개체씩 확인됐습니다. 
발굴단은 고고학자로서 일생 일대의 발굴이라고 좋아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이들도 아닌 우리 선조들이 그와같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심정에 숙연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고 합니다. 발굴을 책임진 당시 정의도 학예일장은 “이들의 넋을 달래는 진혼제를 지낼 때 눈물을 흘렸다”고 밝혔습니다.

동래읍성 해자에서 확인된 장검. 철제이며 전체 길이가 54cm였고 칼의 크기는 26cm였다. 연구결과 장검이 아니라 일본군의 무기인 국지창으로 밝혀졌다. 일본 남북조시대(1336~1392)에 장대 끝에 단검을 매달아 사용한 무기에서 착안하여 제작했다.정의도 한국문물연구원장 제공

■왜군의 시신은 없었다
그렇다면 왜군의 시신이나 흔적은 없었냐구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면 발굴된 남성인골 19개체의 평균신장은 163.6㎝, 여성 5개체의 평균신장은 153.4㎝였습니다. 이는 당대 일본 에도(江戶)시대 왜인의 평균 키(남성 155.09~156.49㎝, 여성 143.03~144.77㎝)보다 무려 8~10㎝ 컸습니다. 비슷한 시기 경기 남양주 호평에서 확인된 조선인 인골들의 평균키(남성 161.2㎝, 여성 148.7㎝)도 역시 에도인들보다는 큰 것이죠. 결국 동래읍성 해자 인골들은 절대다수가 조선인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랬겠죠. 승자인 왜군은 그들의 사상자와 무기를 여유롭게 수습했을 겁니다. 일본군의 시신과 무기는 현장에 남아있지 않았을 겁니다. 길이 54㎝ 정도인 딱 한 점만이 일본 무기인 국지창으로 판명됐습니다. 

■“싸워죽기는 쉽지만 길을 비켜주기는 어렵다”
이번에 다시 동래읍성 참상 사건을 다루려고 연락을 해본 정의도 원장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유골을 발견한 것이 2005년 4월15일인데, 살육전이 벌어진 것 또한 1592년 4월15일이었다구요. 물론 임진왜란 발발 일자는 음력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공교롭지 않습니까. 
시간을 1592년 4월13일로 돌려봅시다. 부산 앞바다가 왜선으로 가득 찼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1558?~1600)를 총사령으로 한 선봉군 2만여명은 700척의 전함에 분승,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습니다. 14일 새벽부터 벌어진 난전 끝에 부산진이 속절없이 함락했습니다. 왜군의 다음 목표는 동래성이었습니다. 
당시 동래부사는 송상현(1551~1592)이었는데요. 14일 오전 10시쯤 동래성에 이른 왜군이 선발대 100명을 보내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즉시 길을 비켜라”라고 항복을 종용합니다. 송상현 부사는 “(네 놈들과) 싸워 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假道難)”고 일축합니다. 이 와중에 경상좌병사 이각(?~1592)과 경상좌수사 박홍(1534~1593)이 성을 빠져나갑니다. 동래성은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상황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송상현 역시 “일단 물러나는 것이 어떠냐”는 권유를 받지만 “성주가 자기 성을 지키지 않고 어디를 간단 말이냐”고 일축합니다. 

해자에서 발견된 남성의 인골. 칼이 아니라 다른 흉기로 처참하게 당했다. 상처의 단면이 고르지 않다.

15일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의 전면 공세가 시작됩니다. 송상현 부사는 통나무 방패로 방어책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활 위주의 방어로는 ‘나는 새도 모두 떨어뜨릴 정도’여서 ‘조총(鳥銃)’이라는 이름을 얻은 왜군의 신무기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왜군의 총공세가 이어지고, 동래성이 뚫리기 시작합니다.
<임진동래유사>는 “성이 협소하고 사람은 많은 데다 적병 수만이 일시에 성으로 들어오니 성중은 메워져 움직일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송상현 부사도 위기에 처했습니다. 심지어 왜적 가운데 통신사로 조선을 드나들며 송부사의 후대를 받은 평조익(平調益)이라는 자가 “빨리 피하라”고 재촉했지만 송상현 부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입고, 임금이 있는 북쪽으로 4번 절한 뒤 태연히 붓을 들어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답니다. 
“외로운 성에는 달무리가 지고 다른 군진에는 기척도 없군요.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정은 가볍습니다.(孤城月暈 列鎭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
양산군수 조영규와, 송부사의 집사 신여로, 비장 송봉수·김희수, 향리 송백 등 송부사의 핵심 측근들도 모두 살해됐습니다. 동래향교 노개방과 유생 문덕겸·양조한 등도 함께 순절했습니다.

1760년(영조 36)에 다시 그린 <부산진순절도>(보물 391호). 1592년 4월13~14일 벌어진 부산진 전투를 묘사했다. 적선과 적병으로 완전 포위된 부산진은 속절없이 함락됐다.육사 육군박물관 제공


■맨손으로 싸운 백성들
그들 뿐이 아닙니다. 백성들은 칼과 낫, 곡괭이, 심지어는 맨손으로 적과 싸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힘 없는 여성과 어린아이까지 속절없이 적병의 창칼에 스러졌습니다. 
<임진유문>은 “동래부민 김상은 동네 아낙 두 사람이 깨 준 기와로 적병을 내리쳤다. 적이 떠난 뒤 김상의 어머니가 보니 김상과 두 아낙이, 적병 세 사람과 함께 죽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또 한 사람 비극의 주인공은 송상현 부사의 애첩인 김섬(金蟾)이었습니다. 
“송상현의 애첩 김섬은 함흥의 기녀였다. 송상현이 순절할 즈음에 적에게 붙잡혔다. 그녀는 사흘 동안이나 적을 꾸짖고 욕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왜적도 의롭게 여겨 송상현의 곁에 장사를 지냈다.”(<임진유문>)
이름없는 백성들은 또 얼마나 죽었습니까. 왜군자료인 <서정일기>는 “동래성 전투로 왜군은 참수 3000여명, 포로 500여명의 전과를 올렸다”고 했습니다. 일본에서 예수회 선교사로 활동했던 루이스 프로이스(Lois Frois)는 조선군 전사자가 약 5000명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물론 민간인 희생자를 포함한 수치일 겁니다.
임진왜란 후 17년 뒤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1571~1637)의 글(<맹하유감사>)을 보면 참혹합니다.
“해마다 4월15일 집집마다 곡소리가 일어나니~이날이 (동래)성이 함락된 날이라 했다. 성안 백성들이 피바다로 변하고 쌓인 시체 밑에 투신하여 천 명 중 한 두 명이 생명을 보전할 정도였다. 곡해줄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온 가족이 죽어 곡해 줄 사람조차 남지 못한 집이 얼마나 많은지….”

동래성전투를 시간대별로 묘사한 <동래부순절도>(보물 392호). 점선안은 해자 발굴지점. ①즉시 길을 비키라는 왜군의 회유에 맞서 “싸워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假道難)”는 글을 쓴 나무판을 던지는 송상현 부사. ② 겁을 먹고 도망가는 경상좌병사 이각. ③ 성이 함락되는 모습. ④ 송상현 부사의 순절 직전 모습. 조복을 입고 임금을 향해 절을 올리고 있다. ⑤ 동래부민 김상과 아낙 2명이 왜병에게 기와를 던지며 싸우고 있다. ⑥김상과 아낙 둘, 왜병 3명이 죽은 모습. ⑦송상현의 첩인 김섬은 도망가다 붙잡혔지만 사흘 동안 왜병을 꾸짖고 욕하다가 역시 살해됐다. (자료: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제공)

■영조 때도 유해가 발굴됐다
동래성 전투 후 145년이 지난 1731년(영조 7) 동래성을 고쳐 쌓던 동래부사 정언섭(1686~1748)은 경악할만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땅을 파다가 임진왜란 때 묻힌 것으로 보이는 해골들이 다수 노출된 겁니다. 최소 12명분의 인골이었습니다. 정언섭 부사는 희생자들을 위해 건립한 ‘임진전망유해지총’ 비문에 “형제를 알 수 있는 인골만 대충 열둘이지만 그 잔해의 조각조각이 떨어져 부스러진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썼습니다. 정언섭 부사의 발견 이후 다시 280년 가까이 흐른 2005~2008년 사이 이번에는 지하철 건설을 위한 공사장에서 다시금 410여 년 전의 참극의 기억이 되살아 난 겁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그 때 죽은 사람들의 혼이 수백년 마다 한번씩 되살아나는 걸까요. 그러나 다시 쳐다보기 싫은 역사라고 해도 제쳐놓을 수는 없습니다. 다시는 그러한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되새겨봐야 할 이야기입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 김승영 2021.05.21 16:04

    이러한 역사를 잊고서 아직도 친일을 외치는 넋빠진 정치하는 노 ㅁ 들은 대체 뭐란 말인지 답답합니다 선조들이 지하에서 피를 토하며 울부짓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