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사건이 일어났을 때 수사요원들이 가장 먼저 챙기는 것이 있습니다. 지문과 족적입니다. 지문은 심지어 일란성 쌍둥이끼리도 다르다고 하며, 같은 지문을 가질 확률이 640억분의 1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1835~1910)은 “유일하게 지워지지 않는 서명은 사람의 지문”이라고 했답니다.
신발 발자국인 족적 또한 신원을 파악하는데 요긴하게 활용됩니다. 신발의 크기와 보폭으로 키와 연령대를 가늠하고 신발의 종류와 찍힌 족적의 방향, 걸음걸이 등을 파악해서 용의자를 특정할 수 있습니다. 아니 역사 고고학 이야기 하면서 왜 뜬금없이 지문과 족적을 들먹이냐구요
■남근처럼 보였던 흙인형이…
이유가 있습니다. 1800년 전과, 1300~1400년 전의 지문과 족적이 실제로 고고학 발굴로 확인된 이야기를 하려는 겁니다. 때는 바야흐로 1986년 7월18일이었는데요. 경주 용강동 폐고분 발굴에 참여하던 대학원생(성균관대)이 헐레벌떡 조유전 경주고적발굴단장을 찾아왔습니다.
“단장님, 이게 아무래도 안압지에서 출토된 적 있는 유물 같습니다.”
대학원생이 들고 나온 것은 무덤 속에 쌓여있던 흙더미 속에서 범벅이 된 유물 한 점이었습니다. 생김새로 보아 안압지에서도 출토된 바 있는 남근 같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상했습니다.
아니 신성한 공간인 무덤에 무슨 남근을 묻었다는 말입니까.
“그늘에서 흙을 잘 털어보도록 하지.”(조유전 단장)
과연 그랬습니다. 흙을 닦아내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남근이 아니라 목이 없어진 여성인물 흙인형(토용)이었습니다. 목은 없어졌지만 통통한 몸매에 주름치마를 입고 있었습니다. 앞면에는 붉은 칠까지 되어 있었습니다. 조사원들에게서 실소가 터졌습니다.
“아니 참 그걸 뭐라 생각한거야. 어이가 없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국내 고고학 발굴역사상 이런 인물 흙인형이 발견된 예가 없었기에 이상한 억측이 나온 겁니다. 그나저나 비상이 걸렸습니다. 부러진 목을 누가 가져갈 리가 없을테니 반드시 주변 흙에 묻혀있을 거라고 여겨 흙더미를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잠시후 이번에는 신창수 조사원(현 백두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이 “단장님!”하고 다급한 목소리로 조유전 단장을 불렀습니다. 조 단장이 무슨 사고인가 해서 달려가 보았는데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흙인형 몇 점과 석제두침(돌로 만든 머리받침) 등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습니다.
흙인형들이 이처럼 시상(무덤 내 시신을 안치하는 시설) 앞에 여러 점 모여있는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습니다. 아마 무덤 속으로 들어오는 악귀를 쫓아낸다는 뜻으로 이 흙인형들을 놓아두었겠죠. 이렇게 발굴된 폐고분에 용강동 고분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개무덤 말무덤이 신라귀족 무덤으로
7세기말~8세기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용강동 고분은 ‘신라의 어느 왕 무덤으로 추정될’ 만큼 만만치않은 위상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차례 도굴됐고, 그 사이 주변 경작지의 객토를 위한 흙채취에 사용됐으며, 생활쓰레기까지 버려지는 바람에 전형적인 폐고분으로 전락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이 고분을 개무덤·말무덤이라 했습니다. 그 사이 주변 민가의 건축에 사용된 석재가 이 폐고분의 부재들이 틀림없다는 이야기가 계속 나왔습니다. 결국 발굴이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이미 도굴이 된 고분에서 무슨 성과가 있겠느냐’는 생각에 가벼운 마음으로 진행하던 조사에서 사상 처음으로 흙인형들이 쏟아져 나온겁니다. 눈앞에서 살아 숨쉬듯 환생한 토용들….
개무덤·말무덤으로 치부된 고분은 이렇게 ‘신라 귀족급 이상의 무덤’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습니다. 무덤에서 출토된 흙인형은 남성이 15점, 여성이 13점이었습니다. 계속된 발굴에서 더욱 놀라운 성과가 이어졌습니다. 수습된 흙더미를 조사하던 중에 손마디 크기인 청동제 12지신상이 7점이나 출토된 겁니다.
도굴범들은 황금제 유물에만 눈독을 들였을 겁니다. 이처럼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흙인형과 청동제 12지신상에는 관심이 없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최초 발견 때 남근으로 오해했던 여성 토용의 머리부분은 결국 무덤 내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답니다. 도굴꾼들이 유물을 쓸어갈 때 함께 휩쓸려 들어간 것일까요.
■태껸 동작의 원형?
아무튼 함께 발견된 치아로 미루어 볼 때 고분의 주인공은 20살 미만으로 추정됐습니다.
출토된 베개의 폭이 34㎝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젊은 사람이나 여성의 무덤일 가능성도 제기됐습니다. 흙인형에 표현된 옷과 색상을 검토하면 무덤의 주인공은 ‘진골(眞骨) 이상의 상층 귀족 계급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발견된 유물 중 가장 신분이 높은 것으로 보이는 인형의 옷이 비색(緋色·붉은 비단색깔)을 띠고 있거든요. 신라 17관등제와 공복제도는 ‘비색’을 6두품(6위 아찬~9위 급찬)의 색깔로 규정되어 있답니다. 때문에 무덤 주인공은 최소한 6두품을 거느릴 수 있는 신분으로 해석된 겁니다.
흙인형 가운데는 ‘어울렁 어울렁 예끼’하는 태껸 동작을 연상케 하는 남자 무인상이 3점 있는데요. 고구려 무용총·각저총·삼실총 등에서도 비슷한 유형의 맨손 무예 모습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태껸 동작의 최초 모습일까요. 물론 무용총 벽화에서처럼 두 무사의 겨루기 동작은 대련이 아니라 여흥으로 추는 춤일 가능성도 있답니다.
■토제마에 찍힌 도공의 지문
그러나 무엇보다 흥미로운 발굴성과는 어느 신라인의 지문입니다. 발굴단은 이 고분에서 수습한 토제 말의 안장 안쪽에서 당대 도공의 흔적인 지문을 확인한 겁니다. 이 지문은 제작당시, 즉 6세기말~7세기초 신라시대 장인이 마무리 처리를 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지문감식은 당시 치안본부 수사부 감식과 체증계장인 변명식 경감이 담당했습니다.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가 ‘특종’의 냄새를 맡고는 변 경감을 대동하고 몰래 발굴현장으로 달려와 지문을 감식한 겁니다.
변 경감의 지문감식 결과 이 지문은 오른손 집게손가락(검지)의 것으로 판명됐습니다. 또 지문의 형태는 ‘와상문(소용돌이 형상)’이며 지문분류번호는 ‘9번’으로 추정했습니다. 이 와상문 지문은 한국인 100명 중 45명 정도 발견되는 가장 흔한 지문이랍니다. 나이와 성별은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지문의 융선이 많이 끊겨 있는 점 등의 특징으로 보아 예술가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지문이며, 남자 도공(陶工)의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풍납토성 성벽에서 확인된 족적
그럼 1800년 전 한성백제인의 족적을 살펴볼까요. 1999년 8월 풍납토성 성벽을 발굴 중이던 국립문화재연구소 발굴단은 뜻밖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누군가 개흙층에 남긴 발자국이었는데요.
지금으로 치면 양생 중인 콘크리트에 실수로 찍힌 발자국이었습니다. 발굴단은 “발자국의 연대는 기원후 200년 쯤”이라고 추정했습니다. 발자국의 크기는 폭 12㎝, 길이 36㎝ 정도됐습니다. 너무 크죠. 그러나 주인공의 발자국은 개흙층을 밟으면서 약간 밀려서 실제의 발 크기보다 크게 나온 것이겠죠.
대체 이 발자국의 주인공은 대체 누구였을까요. 풍납토성은 한성백제(기원전 18~기원후 475년)의 왕성입니다. 백제 시조 온조왕(기원전 18~기원후 27)은 기원전 6년 이곳 풍납동에 도읍을 정한 뒤 궁궐을 짓고 성을 쌓았습니다. 2차례 이상 쌓은 성의 규모(길이 3.5㎞, 폭 43m, 높이 11m)는 엄청났는데요. 어느 고고학자는 흙을 운반하고 성을 쌓은 연인원이 450만명 정도는 족히 됐을 것이라고 추산했습니다.
이 성벽은 송곳으로 찔러도 끄떡없는 판축 기법으로 조성되었습니다. 나무판을 하나하나 세워 틀을 만든 뒤 그 안에 진흙과 모래를 다져 쌓았습니다. 기술자들은 목봉으로 일일이 흙을 다져댔습니다. 10겹 이상 나뭇잎과 나뭇껍질을 개흙과 함께 다진 곳도 보였습니다. 바로 그곳이 발자국이 확인된 개흙층입니다.
이 공법은 김제 벽골제와 부여 나성 축조에도 활용된 선진공법이었습니다. 또 400년 뒤 쌓은 일본 규수(九州)와 오사카(大阪)의 제방에서도 확인되는 최첨단 기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발자국의 주인공은 최신 기술을 가진 한성백제 최고의 토목기술자가 남긴 것이 아닐까요. 물론 임금의 명령 때문에 할 수 없이 끌려온 힘없는 노역자일 수도 있습니다.
■봉상왕의 인두축명(人頭畜鳴)
생각해볼까요. 굳이 만리장성과 아방궁을 쌓느라 국고를 탕진한 진시황(재위 기원전 247~220)과 그 아들 진2세 호해(기원전 210~207)의 예를 들 필요도 없습니다. 진2세 호해를 빼닮은 고구려 봉상왕(재위 292~300)을 봅시다. 300년(봉상왕 9년) 봉상왕이 나이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모두 징발, 대대적인 궁실수리를 명령했습니다. 노역과 굶주림에 시달린 백성들이 떠돌아다니며 걸식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국상 창조리(생몰년 미상)가 ‘공사중단’을 간언하고 나서자 봉상왕은 “임금인 내가 마음대로 한다는 데 웬 잔말이냐”고 벌컥 화를 냈습니다.
“임금은 백성이 우러러 보는 존재이다. 궁실이 장엄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 국상이 나를 비방하는 까닭이 뭔가. 백성들에게 칭찬을 얻기 위한 것이냐.”(<삼국사기> ‘고구려본기·봉상왕조)
아니 “황제인 짐이 마음대로 하겠으니 잔말 말라”고 외치며 아방궁·만리장성 축조를 강행한 진2세 호해와 무엇이 다르다는 말입니까. 진2세 호해의 이 말을 두고 역사가 사마천(기원전 145?~86?)은 “사람의 머리를 하고 짐승의 소리를 내뱉는다(인두축명·人頭畜鳴)”고 장탄식 했습니다. 봉상왕이야말로 ‘인두축명’ 소리를 들어도 쌉니다.
■성벽을 다지다가 아차! 실수로
백제는 어떨까요. 창업주 온조왕은 기원전 4년(온조왕 15), 위례성을 쌓으면서 후대에 길이 빛날 특명을 내립니다. “도성은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게,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게 쌓아라.(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삼국사기> ‘백제본기·온조왕조’)
하지만 처음 쌓은 성벽이 불완전했던 모양입니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성을 쌓은 지 30년도 안된 기원후 23년(온조왕 41년) 15살 이상인 한강의 동북 쪽 백성들을 징발했습니다. 이후에도 성의 수축은 계속됐습니다. 풍납토성에 남긴 발자국의 주인공이 이 분들 가운데 있었던게 틀림없습니다.
흙을 다지는 작업을 벌이다가 아차 실수로 발도장을 찍어놓고는 남이 볼까봐 살짝 덮어버렸을 수도 있겠죠. 1300~1400년 전, 1800년 전에 남긴 백제인의 족적과 통일신라인의 지문은 이렇게 수많은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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