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여걸’로 통한 문정왕후가 발원한 ‘회암사’명 약사여래삼존도’가 보물로 지정예고됐다, 문화재청은 24일 16세기 ‘회암사’명 약사여래삼존도」를 비롯해 조선 시대 불교 조각과 고려·조선 시대의 불교경전 등 4건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보물로 지정예고된 회암사명 약사여래삼존도.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문정왕후가 아들인 명종의 건강을 위해 제작한 불화이다.|문화재청 제공
‘회암사’명 약사여래삼존도‘는 1565년(명종 20년) 중종 계비 문정왕후(1501~1565)가 아들인 명종의 만수무강과 후손 탄생을 기원하며 제작한 400점의 불화 중 하나이다.
경기 양주 회암사의 중창에 맞춰 조성된 것이다. 문정왕후의 총애를 받은 승려 보우의 화기(畵記)에는 “당시 석가·약사·미륵·아미타불의 부처 및보살을 소재로 금니화(검은 바탕이나 풀색 바탕에 금물만으로 그린 그림)와 채색화 각 50점씩 총 400여 점의 불화를 조성했다”고 기록돼있다.
문정왕후는 ‘조선의 여주인(女主)’이라 일컬어질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왕실여성이다. 무엇보다 많은 불사(佛事)를 추진한 불교 후원자였다. 경기 양주 천보산 중턱에 있는 회암사는 원래 조선의 개국군주 태조 이성계가 머물렀던 국찰이었다. 이후 조선의 숭유억불책으로 부침을 거듭했지만 명종(1545~1567) 때, 문정왕후가 실권을 잡고 보우를 등용하면서 다시 전성기로 접어든다.
보우는 쇠락해가는 불교세력을 확장하고 왕실의 후원을 얻기 위해 1565년(명종 20년)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회암사 무차대회를 계획한다. 이 와중에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쳤으며, 보우는 ‘요승(妖僧)’으로 폄훼된다.
그러나 무차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보우가 그토록 믿었던 문정왕후가 죽자 상황이 돌변한다. <명종실록>은 “1566년(명종 21년) 송도의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주도로 유배된 보우는 끝내 맞아죽고 만다.
회암사터. 2000년부터 시작된 발굴현장 모습 그대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아마 이 무렵 회암사는 유생들에 의해 불에 탄 것으로 보인다. 이후 회암사는 폐사지로 남았고, 지금은 ‘회암사지’라는 명칭으로 사적 제128호로 지정돼있다. 2000년부터 시작된 발굴에서 소실된 회암사의 건물들이 폭삭 주저앉은채 확인되었다. 지금은 발굴된 모습 그대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예고된 불화는 가운데 본존인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왼쪽에 월광보살, 오른쪽에 일광보살을 배치한 간략한 구도로 되어있다. 월광보살과 일광보살은 약사여래보살을 보좌하는 협시보살들이다. 금니(금물)로 그려 매우 화려하고 격조 있는 품위를 보여준다. 주존불과 보살 간에 엄격한 위계를 두어 고려불화의 전통을 따랐고 갸름한 신체와 작은 이목구비 등 조선 전기 왕실 발원 불화의 특징이 잘 반영되어 있다. 문정왕후가 제작했다는 총 400점의 불화는 대부분 흩어졌고, 현재 미국과 일본 등지에 총 6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국내에는 ‘약사여래삼존도’만이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
문화재청은 이밖에도 ‘목포 달성사 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과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 권3’ 및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 권5’ 등고 보불로 지정예고했다. 문화재청은 이 4건을 두고 30일간의 예고 기간 동안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할 계획이다. 경향신문 이기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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