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 1조4800만원.’ 훈민정음 해례본(상주본)을 갖고 있다는 배익기씨(55)가 2017년 4월12일 경북 상주·군위·의성·청송 국회의원 재선거에 출마하면서 ‘재산 1조원’을 신고하려 했다가 선거관리위원회의 제지를 받았다. “재산의 실물소유를 확인할 수 없다”는 선관위의 이의제기 때문이었다. 결국 배씨는 부동산과 예금을 비롯한 4800만원을 공식 신고했다.
그러나 배씨가 실체를 보여준다며 언론에 공개한 훈민정음 상주본의 사진은 불에 그을린 모습이었다. 2015년 3월 배씨의 집에서 일어난 화재 때문에 상주본 일부가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다시 훈민정음 상주본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종의 한글창제 원리를 설명한 책이다. 1940년까지 이 해례본을 발견하지 못했다. 18세기 조선의 실학자들이 훈민정음의 원본인 해례본을 한글로 풀어쓴 언해본을 찾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 언해본이 위작이라며 깔아뭉갰다. 해례본을 찾지 못하는 한 한글은 ‘세종이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다가 우연히 만든 글자’쯤으로 폄훼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40년 간송 전형필이 드디어 훈민정음 해례본을 찾아냈다. 간송은 당시로서는 기와집 10채 값인 1만원을 주고 해례본을 구입했다. 간송은 값으로 매길 수 없다는 무가지보(無價之寶)로 꼽힌 훈민정음 해례본을 신주단지 모시듯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품에 고이 간직한채 피난을 떠났고, 잠 잘 때도 베개 속에 넣어 끝끝내 지켜냈다. 1956년 후학들의 연구를 위해 한 장 한 장 사진을 찍어 영인본으로 공개했다.
그러던 2008년 경북 상주에서 간송본과 동일 판본으로 추정되는 해례본(상주본)이 발견됐다. 배씨가 공개한 것이었다. 간송본에 비해 보존상태가 좋고, 표제와 주석이 16세기에 새롭게 더해졌으니 학술가치는 대단했다.
상주본을 처음 공개한 배씨와 원 소유주인 조용훈씨(2012년 작고)의 소유권 분쟁이 시작됐다. 결국 대법원은 조씨의 소유권을 최종 인정했다. 조씨는 상주본을 국가(문화재청)에 기증했다. 문화재청은 2016년 승계집행문을 받았다. 따라서 훈민정음 해례본(상주분)의 적법한 소유권은 현재 문화재청에 있다. 배씨는 이 상주본을 헌책방에서 훔친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을 살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2014년 5월 “훔쳤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절도죄에 대해 무죄를 확정했다. 배씨는 이후 “문화재청이 재산가치 추정액(1조원)의 10%인 1000억원만 주면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버텼다. 훈민정음 해례본(상주본)의 재산가치가 무가지보의 문화유산이라는 뜻에서 ‘1조원의 가치’ 운운한 게 화를 부른 것이다.
그러나 법적인 소유권을 갖게 된 문화재청이 1000억원이 아니라 단돈 1원의 돈이라도 훈민정음 해례본 가격으로 지불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후 문화재청과 배씨 사이에 법정공방이 계속 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문화재청이 상주본의 강제집행을 시도하자 배씨는 청구이의의 소송을 제기했다. 1심 법원은 배씨의 소를 기각했고, 배씨가 항소해 현재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문화재청은 11월22일에 열릴 2심 판결 결과에 따라 후속 조치를 취할 예정이다.
법적인 조치 외에 현상태에서 배씨가 갖고 있다는 훈민정음 해례본(상주본)의 무사회수는 쉽지 않아 보인다
가장 바람직한 방안은 배씨가 자진반납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29일 국정감사에 출석한 배씨는 “1000억원을 받아도 되돌려주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버텼다. “문화재청이 배씨를 설득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그러나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국정감사장에서 “지난 10여년간 37차례에 걸쳐 배씨를 만나 끈질기게 반환을 부탁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이 훈민정음 해례본(상주본)의 법적 소유권자이면서도 공격적으로 대응하기란 쉽지 않다. 유물의 안전을 위해 배씨를 자극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설득 과정에서 돌발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하고 있다”고 전했다.
급기야 정재숙 청장은 “만약 배씨가 상주본을 국가에 자진 귀속시킨다면 명예회복의 방안을 마련할 수 있다”고 밝혔다. 물론 국가소유권인 문화유산을 소유한 배씨에게 무슨 명예회복 방안을 고려하느냐는 소리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배씨가 훈민정음 상주본(해례본)을 발견하고 처음 공개한 공적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행 매장문화재법 21조는 ‘발견 신고된 문화재의 발견자·습득자·소유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보상금의 상한액은 1억원이다. 정 청장은 “불법 은닉한 배씨에게 명예회복의 기회를 주고자 하는 이유가 있다”면서 “그것은 훈민정음 해례본(상주본)의 무사 귀속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배씨가 불법으로 갖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은 정상적으로 사고팔 수 없는 은닉 문화재”라면서 “지금 단계에서는 1조원은커녕 단돈 1원도 받을 수 없는 문화재라는 걸 알고 자진 반납해줄 것”을 부탁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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