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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조선판 '세월호' 참사와 태종의 '사과'

 1656년(효종 7년) 8월27일, 전라도 해안에서 엄청난 사고가 일어났다.
 전라도 해안에서 실시한 대규모 군사훈련에 참가한 전함들이 거센 비바람에 휘말려 떠내려 가거나 침몰한 것이다. 금성·영암·무장·함평·강진·부안·진도 등에서 출동한 배들이었다. 문제는 이 사고로 죽은 병사들이 1000여 명이나 됐다는 것이다. 진도군수 이태형도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사고는 전남 우수사 이익달이 저지른 전형적인 인재(人災)였다.
 즉 이익달이 “풍랑 때문에 바다로 나가서는 안된다”는 경험많은 부하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훈련을 강행했다가 참변을 부른 것이다.
 효종은 “보고를 듣고 서글퍼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다”며 “이익달 등 관련자들을 엄중 문초하라”고 지시했다. 

조선시대 조운선을 복원한 모양. <각선도본>을 근거로 만들었다. 태종 때 이 조운선이 침몰하면서 1000여명이 떼죽음을 당하고 쌀 1만석이 수장됐다. 사고원인은 거센 풍랑 때인데도 운항을 강행했고, 화물 또한 과적 상태였던 것이었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무리한 운항이 참사의 원인
 이보다 240여 년 전인 1414년(태종 14년), 전라도 운반선 66척이 태풍으로 침몰·파손돼 200여 명이 익사하고, 침수한 쌀·콩 5800석이 수장됐다.
 “7월에는 웬만하면 배를 띄우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호조가 공문을 전라수군절제사에 보내 ‘7월 그믐에 조운을 실어 8월 초에 올려보내라’고 지시했다. 문제는 수군 절제사 정간이다. 정간은 이 호조의 공문대로 배를 무리하게 띄우다 참사를 빚었다.”(<태종실록>)
 무슨 말인가. 원래 태풍이 불어닥치는 7월에는 배를 띄우지 않는 게 상식이다. 보통은 4월 쯤에 실어 배를 띄우고 5월 안에 한강에 도착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호조가 그같은 절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7월 말~8월 초에 현물세금을 실러 올려보내라는 공문을 보냈다는 것. 또 다른 문제는 기상상태를 파악해야 할 전라수군절제사가 호조의 지시대로 배를 띄웠다가 참변을 불었다는 것이다.

 

 ■재변은 사람이 부르는 것
 비슷한 참사가 1620년(광해군 12년) 8월6일 또 일어났다. 
 이날 사간원은 해운판관(충청·전라의 조운업무 담당 정5품 관직) 조길 등의 파직을 요구했다.
 “‘4월 출항, 5월 한강도착’이 조운의 관행입니다. 그런데 해운판관 조길은 사사로운 청탁을 받고 거센 풍랑이 이는 7월 출항을 강행했습니다. 정식 조운선을 버리고, 개인 배에 사사롭게 모은 베(布)를 가득 싣고 강화도에 이르러 1만석을 실은 배가 침몰했습니다. 이 사고로 80여 명이 빠져죽었습니다. 이 자를 파직하시고….” 
 이밖에도 <실록>을 비롯한 옛 문헌에는 선박사고의 기사가 적짆이 보인다.
 그런데 사고의 원인은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 인재(人災)인 것을 알 수 있다.
 1633년(인조 11년), 임금의 하교가 귓전을 때린다.
 “재변이란 까닭없이 생기지 않고, 사람이 부르는 것이다.(災不虛生 由人所召) 어떻게 구제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 하늘이 높고 높아 위에 있지만 감동이 있으면 통한다. 관리들은 고식적인 것을 따르지 말고 각각 자신의 직무에 근실하여 하늘의 견책에 보답하라.”(<인조실록>) 

조선시대 조운선 그림. 19세기 화기 유운홍의 작품이다. 조운선 운행과정에서 과적과 무리한 운항 때문에 대형참사가 잇달아 발생했다. 조선시대 임금들과 신하들은 모든 침몰사고의 책임을 임금에게 돌렸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모든 사고의 책임은 군주에게 있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기사가 있다.
 “모든 사고의 책임은 내게 있다(責乃在予)”고 자탄한 태종 임금이다.(<태종실록>)
 1403년(태종 3년) 5월5일, 큰 재난이 일어났다. 경상도의 조운선(각 지방에서 거둔 세금 현물을 운반하는 배) 34척이 배가 한가운데서 침몰한 것이다,
 참변을 보고받은 임금은 죽은 이가 몇 명이고, 잃은 쌀은 또 얼마인 지를 물었다. 하지만 정확한 피해상황도 파악할 수 없는 상태였다. 신하들이 대답하지 못하자 “대강이라도 말해보라”고 채근했다. 그러자….
 “예. 쌀은 1만 여석 되는 것 같고, 사람은 1000여 명 쯤 됩니다.”
 태종은 “이 모든 책임은 과인에게 있다”고 장탄식했다.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었구나. 출항날(5월5일)은 수사일(受死日·대흉일)이고, 풍랑마저 거센 날이어서 배를 띄우면 안되었는데…. 바람이 심한 것을 알면서 배를 출발시켰으니 이것은 백성을 몰아서 사지로 나가게 만든 것이다.”
 태종은 그러면서 “사람들이 죽은 것이 너무도 불쌍하다”고 애통해 했다.
 “쌀은 비록 많더라고 아까울 것이 없지만, 사람 죽은 것이 대단히 불쌍하구나. 그 부모와 처자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그런데 이 참사의 원인을 보면 기막힌다. 사고발생 후 3개월 후인 8월, 사간원이 올린 상소를 보자.
 “올해 조운선을 올릴 때 풍랑을 잘 파악하고, 화물적재의 중량을 제대로 감독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일을 용렬하고 간사한 무리에게 맡겨 수군 수백명을 수장시키고, 적재한 쌀 1만 여 석을 모두 물에 빠뜨렸습니다. 이로써 부모 처자가 하늘을 부르며 통곡했습니다.”
 상소문을 살펴보면 이 배는 자질이 부족한 선장이 날씨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은채 운항을 강행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과적이 사고의 큰 원인이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그럼에도 태종은 부하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깨알지시를 내리는 대신 ‘내탓이오’를 외치고 있다.
 
 ■군주를 추궁한 신하들
 신하들도 만만치 않았다. 재변이 일어나면 ‘재변의 책임은 군왕이므로 스스로 반성하고 경계하라’고 다그쳤다. 왕조시대인 데도 군주의 눈치를 보지 않고 바른 소리를 한 것이다. 1632~33년 사이에 잇달아 재변이 일어났다. 심지어는 ‘흰 무지개가 해를 뚫는 변고’까지 발생했다.
 1632년(인조 10년) 3월5일, 국왕의 자문기관인 홍문관이 올린 상소문을 보라.
 “재앙은 괜히 일어나지 않고 반드시 재앙을 초래하는 원인이 있습니다.(災不虛生 必有所召) 예부터 명철한 임금은 하늘의 경고를 맞아 경계하고 덕을 닦는 도리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홍문관이 내민 비판의 칼날은 다소 지나칠 정도로 임금을 겨눈다.
 “지금 위로는 하늘의 노여움을 사고 아래로는 민심을 잃어서 심한 재이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반드시 연유가 있을 것입니다. 초심이 위축된 것입니까. 예전의 폐단에 사로잡힌 것입니까. 혹 편파적인 사사로운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닙니까. 신상필벌에 미진한 것은 아닙니까.”
 대단한 상소문이다. 이토록 임금을 다그친단 말인가. 그런데 이 홍문관의 상소문은 약과였다. 

<각선도본>(조선 후기 조운선과 군선을 그린 도본)에 나타난 조운선. 선수(뱃머리)가 선미보다 넓고 깊이가 깊다. 세금으로 거둔 곡식의 적재량을 늘리기 위해 배의 구조를 바꾼 것이다. 이 때문에 선박사고의 위험성도 커졌으리라.|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임금이 부덕한 탓”
 1633년(인조 11년) 대사헌 강석기는 인조 임금에게 직격탄을 날린다.     
 “최근의 재앙은 진실로 전에 없는 변고입니다. 무엇이 하늘의 마음을 거슬렀는지…. 삼가 전하의 덕과 정치가 부족하고 잘못된 그런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 10년동안 불행히도 위기가 계속되어 경악할만한 변고가 다달이 생기더니 급기야….”
 강석기의 상소는 더욱 거침이 없었다.
 “지금 정책의 일관성도 없어 정책의 80~90%가 시행과 중지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법도가 없어지고, 백성의 원망을 사는 일이 많습니다. 인사도 마찬가집니다. 아래에는 백성을 구제해 갈 사람이 없고 위에는 마음을 다해 믿고 맡기는 실질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럭저럭 시간만 보내며 앉아서 그 망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꼴입니다. 인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백성의 원망을 격발하고 하늘의 노여움을 초래한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강석기는 한없이 임금을 질타하면서도 마지막으로는 임금의 할 일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 재변은 도리어 전하에게는 기회입니다. 하늘이 전하를 완전히 끊어버리셨다면 절대 이런 경고를 내리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하늘에 응답하는 방도는 ‘수성(修省)’입니다. 마음을 바르게 하시고, 몸을 닦아 풍화를 돈독히 하는 근본으로 삼으십시요. 그러면 재앙을 상서로 만들 수 있으며 화를 복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재변은 임금이 부덕해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게 강석기의 주장이다. 그러니 임금이 반성하고 덕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여에서는 국왕을 죽였다
 1563년(명종 18년) 경상도 산음현 북리에 운석이 떨어지자 <명종실록>의 기자가 쓴 논평을 보자.
 “운석이 떨어지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재변이다. 정사가 해이해지고 쇠퇴하는 날에 운석이 떨어지고, 혹은 국가가 쇠잔하고 혼란할 때도 떨어졌으니…. 그러니 군주가 허물을 반성하여 재앙을 그치게 할 때가 아닌가.”(<명종실록>)
 1657년(효종 8년), 기상이변이 이어지자 찬선 송준길이 한 말도 비슷하다.
 “모든 재변은 반드시 인사의 잘못입니다. 재변을 막는 것도 인사에 달려있습니다. 전하가 공구수성(恐懼修省·두려워하여 수양하고 반성함)하지 않으면 재변을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이 모든 자료를 종합해보면 이렇다.
 ‘재변(災變)이라는 것이 애시당초 인재(人災)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재변의 책임은 군왕에게 있다고 여긴 것이다.
 오죽했으면 “부여에서 기상이변으로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국왕을 바꾸거나 죽인다”고 했을까.(<삼국지> ‘위서·동이전’)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경향신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