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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첨성대는 결국 '피사의 사탑'이 되는가

 “별기에 ‘선덕왕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축조했다(別記云是王代鍊石築瞻星臺)’는 기록이 있다.”(<삼국유사> ‘선덕여왕 지기삼사’)
 <삼국유사>에 기록된 633년(선덕여왕 2년)의 첨성대 축조기사이다.
 참으로 소락(疏略)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첨성대’가 ‘별(星)을 관찰하는(瞻) 건축물(臺)’이라는 이름이므로 천문대였음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후대의 기록들도 마찬가지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등을 보자.
 “첨성대는 선덕여왕이 쌓았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방형(方形)이고, 아래는 원형이다. 높이가 19척5촌, 둘레가 21척6촌, 아래의 둘레가 35척 7촌이다. 가운데를 통하게 하여 사람이 가운데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첨성대는 833년(선덕여왕 2년) 별(星)을 관측하는(瞻) 건축물(臺)의 이름으로 축조됐다. 첨성대는 현재 북쪽으로 200~204㎜, 서쪽으로 7㎜ 기울어져 있다. 하부구조의 불규칙 침할 인해 구조물이 균열 혹은 탈락되는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첨성대는 천문대다’
 조선 후기 문기인 이유원이 엮은 <임하필기>는 전후사정이 좀더 구체적으로 기록돼있다.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첨성대를 만들었다. 효소왕(692~702) 때는 승려 도증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천문도를 올렸고, 성덕왕(702~737) 때는 처음으로 누각(漏刻·물시계의 일종)을 만들었다.”(‘문헌지장·관측기구편’)
 첨성대를 만든 이후 신라의 천문기상학이 장족의 발전을 이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닌게 아니라 신라의 992년 역사 가운데 천문관측 기록회수는 141회인데, 이 가운데 65%에 해당되는 91회가 첨성대 축조 이후 288년 동안 이뤄졌다는 연구가 있었다.   
 1909년 일본의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는 ‘천문대설’을 재확인했다.
 즉 계단을 통해 창구까지 오른 뒤 나무 사다리를 이용, 꼭대기로 오르는 구조로 돼있다는 것. 또한 첨성대 위를 반쯤 덮고 있는 판석에 관측기구를 올려놓고 천문을 관측했으며, 그 위에는 눈비를 막기 위한 작은 목조건물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것. 미국의 천문학자인 윌 칼 루퍼스와 영국의 과학사가인 제임스 니덤 등도 와다의 학설을 맏아들여 첨성대를 천문대로 세계에 소개했다.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이 천문대설에 반기를 드는 주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유가 있었다. 첨성대를 보면 오르기가 힘들고 꼭대기 공간이 너무 좁아서 천문을 관측하기에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천문대라면 그 위에서 매일 관측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좁아터져서야 어찌 일을 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맨 위 정자석 안의 가로·세로 2.2m에 깊이 0.64m 의 공간은 온전하지 않다.
 또 첨성대 꼭대기 일부는 길이 178㎝, 너비 57㎝, 두께 20㎝의 판석으로 막혀있고 일부는 열려 있다. 이곳으로 올라가려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다가 판석을 짚고 몸을 일으켜 판석 위로 올라서야 한다. 게다가 과측기구까지 둔다면 한 명이 오르내리기도 불편하다.
 거기에 수평 잡힌 평탄한 공간은 판석이 깔린 0.3평 뿐이고 옆에 깐 판목까지 합한다 해도 1평도 안된다. 그 위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별을 바라보는 일 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규표설, 주비산경설
 이런 의문점에 대해 1964년, 전상운은 이른바 ‘규표설(圭表說)’을 제기했다. ‘규표’란 지상에 수직으로 세운 막대를 뜻한다.
 ‘규’는 ‘표’의 아래 끝에 붙어서 수평으로 북(北)을 향해 누인 자를 말한다. 즉 ‘규’는 정오 때 ‘표’의 그림자를 정확하게 측정하여 정확한 절기(節氣)와 1년의 길이를 결정하는데 쓰였다. 결국 첨성대는 4계절과 24절기를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 세운 규표라는 것. 또한 첨성대는 어느 방향에서 보나 똑같은 모양에서 보이므로 계절과 태양의 위치와 관계없이 그림자를 측정해서 시간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1974년에는 수학자 김용운이 이른바 주비산경설(周비算經說)을, 역사학자 이용범이 수미산설(須彌山說)을 각각 제기함으로써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김용운의 주비산경설은 무엇인가. 첨성대에는 고대 중국의 천문수학서인 ‘주비산경’의 수학적 원리와 함께 천문현상에 관한 상징숫자들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첨성대에는 1:3의 원주율, 3:4:5의 구고법(句股法·피타고라스 정리)이 상징적으로 숨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첨성대 몸통의 윗지름이 창구 한 변 길이의 약 3배로서 원주율 3.14에 해당된다는 것. 또 몸통 밑지름과 정자석 한 변의 길이는 약 5:3이고 몸통부의 높이와 기단석의 대각선 길이는 약 5:4라는 것. 이는 주비산경에 나오는 직각삼각형의 32+42+52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피사의 사탑 기울기의 역사. 탑은 완공당시부터 2.8도 기울어졌으며. 최종적으로는 5.6도(10% 이상)나 기울어졌다. 건축학적으로 기울기가 10%가 넘으면 붕괴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피사의 사탑은 물리학의 법칙을 부정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자료

수미산설·우물설
 역사학자 이용범의 ‘수미산설’도 흥미로운 주장이었다.
 이용범은 첨성대가 병 모양이라는 것에 착안, 수미산 모양을 본떠 만든 제단이라는 설을 제기했다. 수미산은 고대 인도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이다. 불교의 우주관에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첨성대를 보고 수미산을 떠올리기 쉽다고 한다. 따라서 이용범의 ‘수미산설’은 상당수 연구자들의 공감을 얻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우물설도 제기된다. 원통형 몸체에 우물 정(井)자 모양의 정자석 2단을 올린 모양은 우물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하기야 우물은 신라의 개국신화와 연관성이 있다. 시조 박혁거세가 나정(蘿井)이라는 우물에서 탄생했다는 신화가 있지 않은가.
 “양산 밑 나정(蘿井)이라는 우물가에 번갯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땅에 닿도록 비치고 있다.~거기에는 알 한 개가 있었다. 알을 깨고 사내아이를 얻으니~그 아이를 혁거세왕이라 이름했다.”(<삼국유사> ‘신라시조 혁거세왕’)
 그러니까 첨성대의 상단부를 우물 형태로 만든 것은 하늘과의 소통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 모든 다른 주장들에게는 결정적인 흠이 있다. <삼국유사>와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보이는 “‘첨성대’, 즉 별을 관측하는 구조물”이라는 기록을 뒤집을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전히 첨성대는 선덕여왕 때인 633년, 신라인들이 만든 천문대일 수밖에 없다.

 

 ■기울어진 첨성대
 최근 첨성대가 다시금 부각되고 있다. 첨성대가 해마다 1㎜ 기울고 있다는 감사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09~2010년 사이 첨성대를 안전점검한 뒤 그 보고서를 낸 바가 있었다.(국립문화재연구소의 <석조문화재안전관리방안 연구보고서-첨성대를 중심으로>, 2011년)
 보고서를 보면 2009년 현재 첨성대는 기단중심과 정상부에 있는 정자석 중심을 비교하면 북쪽으로 200㎜, 서쪽으로 7㎜ 정도 기울어져 있다.
 이것을 입면상의 각도로 본다면 약 1도19분이 기울어져 있다는 뜻이다.
 재미있는 것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첨성대의 기울기를 연구검토하면서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을 비교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최근 흙추출법을 활용해서 기울어지지 않은 쪽은 북쪽의 지하 흙을 36미터 가량 파내어 균형을 맞추는 방법으로 기울기를 보정했다. 이로써 피사의 사탑은 1700년대 수준인 5미터 기울기로 수정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자료

■피사 사탑의 재앙
 피사의 사탑은 1173년 8월9일 착공됐다. 그런데 위치가 문제였다. 당시 피사 지역은 매우 넓은 개펄의 중앙에 있는 섬으로 이뤄져 있었다. 강이 만나는 곳에 진흙이 쌓여 있었고, 이 축축하고 부드러운 토양 위에 피사 탑이 건립됐다. 토양이 부드러운 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다만 피사의 영광을 기리는 기념물을 건설할 피사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완벽한 장소로 여겨졌다.
 탑은 건축가 보나노 피사노가 설계·감독했다. 그런데 4층까지 쌓아 올렸을 때 문제가 생겼다. 북쪽 방향으로 탑이 기우뚱한 것이다.
 공사는 5년 만인 1178년 중단됐다. 이후 94년만인 1272년 공사가 재개됐지만 다시 6년 만인 1278년 또 다시 중단됐다.
 탑이 북쪽으로 약 7인치 기울어지고 탑이 계속 올라가자 반대방향인 남쪽 방향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석공들이 수직으로 모양을 바로 잡으려 안간힘을 쓰자 탑은 바나나 같은 형태로 변했다. 착공(1173년)-중단(1178년)-재개(1272년)-재중단(1278년)의 우여곡절을 겪은 것이다.
 피사탑은 1360년 건축가 토마소 안드레아 디 피사가 꼭대기 종루를 세우며 마지막 고비를 넘긴 뒤 10년 뒤인 1370년 비로소 완공됐다.
 전문가들은 꼭대기에 세운 작은 종류가 탑을 안정시킬 것이라 여겼다.
 남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북쪽을 더 높게 했고, 더 큰 종을 북쪽에 달았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생각은 틀렸다.
 기울어짐이 가속화한 것이다. 건물을 계속 침하했고, 19세기에 들자 1층의 일부분이 땅 속으로 10피트나 푹 들어가고 말았다.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 피사의 사탑
 1838년 이탈리아 건축가인 알레산드로 게라데스카가 탑의 기초부를 파보았다.
 재앙이었다. 물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피사의 탑은 물 위에 건설한 셈이었던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피사의 탑은 약과였다. 1902년 이탈리아에서 비극이 일어났다.
 1000년 이상 서 있었던 베니스의 성 마르코 광장의 종탑이 스르르 붕괴된 것이었다. 이틀 간의 붕괴로 1만8000t의 먼지와 조각더미가 쌓였다.
 이탈리아 정부는 베니스의 재앙을 거울삼아 피사의 사탑 붕괴를 염려하는 위원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는 못했다.
 1933년 뭇솔리니가 피사의 사탑에 관심을 갖고 대책을 마련했다. 땅속이 아닌 탑의 기초 속으로 시멘트를 주입하고자 한 것이다.
 당시 건축학자들은 탑 아래엣 솟구치는 물이 기초를 약하게 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스며나오는 물을 차단하기 위해 콘크리트로 탑의 기초를 밀폐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361개의 구멍을 탑 기초 속으로 뚫고 80여 t의 콘크리트를 주입했다.
 그러나 이 또한 독이 됐다. 탑의 균형이 깨지고 더욱 급격하게 남쪽으로 3.5인치 기울어진 것이다. 탑은 그야말로 건드리면 무너질 듯 위험해졌다. 그러나 때마침 발생한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속수무책이었다. 그 사이 탑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첨성대는 위험한 피사의 사탑과 견줄 수는 없다. 다만 첨성대의 하부구조(왼쪽)가 피사의 사탑 하부구조(오른쪽)와 달리 불규칙적으로 침하하고 있는 것이 불안하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자료

물리학의 법칙을 거부한 사탑
 이탈리아 정부는 그렇게 서서히 기울어져 가는 탑을 방치하고 있다가 1990년에 들어서야 대책을 마련했다. ‘피사의 사탑’의 문을 닫고 기술위원회를 구성한 것이다.
 사실 파사의 사탑은 1370년 완공됐을 때 이미 2m(약 2.8도) 이상 기울어져 있었다. 1990년 보수공사를 결정했을 때는 이미 5.5m(약 5.6도) 가량 기우뚱한 상태였다. 탑의 높이가 약 50m인데, 5.5m 이상 기울어져 있다는 것은 탑 높이의 10% 이상 기울어졌다는 뜻이다.
 기울기 5.6도 이상 발생했다는 것은 물리학의 법칙을 부정하는 것이다. 실제로 컴퓨터를 통해 피사사탑의 기울기를 시뮬레이션하면 5.44도 이상을 기울이면 피사의 사탑을 세울 수가 없었다. 서있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피사의 탑’ 세우기에 나선 이탈리아 정부는 갖가지 긴급조치를 단행했다.
 붕괴가능성이 가장 큰 2층 둘레에 강철케이블을 벨트처럼 감았고, 총 900t의 납웨이트를 북쪽 기초부분에 쌓아올렸다. 그러자 800년 만에 처음으로 기울어진 방향의 반대 방향(북쪽방향)으로 약 1인치 이동했다. 납 웨이트 공법은 성공적이었지만 미관상의 문제가 지적되었다.
 결국 납 웨이트를 제거하고 탑의 기초 아래 콘크리트 링을 만들어 지하 50m까지 박혀있는 10개의 케이블로 탑을 그 자리에 단단히 고정하는 작업에 나섰다.
 지표 면 아래 물이 용솟음 칠 것이 두려웠지만 땅속에 액체질소를 주입함으로써 얼리는 방법을 취했다. 땅 속의 물이 콘크리트 링을 세울 얕은 구덩이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흙 속의 수분이 얼 때 부피가 팽창되는 바람에 탑이 기울어진 반대방향으로 16분의 1인치 움직인 것이다. 

 ■5m 기울기로 보정된 사탑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좋은 것이 아닌가. 기울어진 반대방향으로 움직였다면….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얼어서 팽창된 흙이 해동되면 탑이 다시 남쪽으로 더 기울어질 것이 우려됐다. 엔지니어들은 재빨리 250t의 납웨이트를 추가했다.
 잘하려다가 더 어려움에 빠진 격이 됐다. 탑이 멈췄지만 기존의 납 웨이트보다 훨씬 많은 납웨이트가 쌓이게 된 것이다. 혹 떼려다가 혹 붙인 셈이 됐다. 
 잘못된 처방으로 탑의 상태는 더욱 악화됐다. 모든 작업이 중단됐다.
 이같은 시행착오 끝에 이탈리아 정부는 피사의 사탑 허리에 길이 340피트, 두께 2인치의 케이블을 설치했다. 케이블은 100아드 바깥의 지면에 단단히 설치됐다.
 또한 흙추출법도 적용됐다. 즉 탑의 북쪽 밑에서 흙 추출관을 이용하여 흙을 빨아들여 제거했다. 이를 통해 제거된 흙이 있던 빈공간이 탑의 무게에 의해 눌려지게 되어 빈공간만큼 기울기가 교정되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총 36m3의 흙을 빼내 탑은 5m의 기울기로 떨어졌다. 이것은 1700년대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된 것이다.

 

 ■첨성대는 피사의 사탑인가
 물론 첨성대는 피사의 사탑처럼 붕괴 위험에 처한 구조물은 아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측도 “‘피사의 사탑’과 비교할 때 첨성대 지반침하로 생기는 기울기는 매우 작으며 따라서 구조적 문제가 발생할 것 같지 않다”고 보았다.
 하지만 연구소 측이 ‘문제’라고 여기는 대목이 있다. 첨성대 하부구조가 불규칙적으로 침하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연구소는 2010년 첨성대 안전점검을 실시한 결과 기초석 북쪽 중앙부가 기준점에 비해 최대 161㎜의 침하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또 하나, 2009년에 비해 북서측 기초부에 20㎜의 처짐이 추가로 발생했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반면 피사의 사탑은 규칙적으로, 즉 선형적으로 침하해왔다. 따라서 피사의 사탑을 구성하는 석재의 상태는 매우 건전하며 상부구조물 자체에는 문제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첨성대의 경우 하부구조가 불규칙적으로 침하되다 보니 상부구조물 부재 간 벌어짐이나 균열 등 구조적인 문제들이 발생했다.
 최근 감사원의 지적사항 가운데 재미있는 대목이 바로 ‘첨성대가 해마다 1㎜ 기운다’는 발표였다.
 2014년 1월 감사 도중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함께 첨성대 기울기를 측정한 결과 2009년(200㎜) 보다 4㎜ 더 기울어진 204㎜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4㎜ 차이가 과연 그렇게 의미심장한 것일까. 측정오차를 고려한다면 200㎜나, 204㎜나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측정기구에 따라 혹은 시시 때때마다 달라지는 측정오차가 아닌가. 그렇게 본다면 감사원의 감사결과는 지나친 호들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호들갑이든 침소봉대든, 이번 감사결과로 첨성대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감사원의 공이 아닐 수 없다.
 점점 시들어가는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을 높여주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첨성대는 북쪽으로 200~204㎜, 서쪽으로 7㎜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만은 분명하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