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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목숨 걸고 역린을 건드려라

 “내가 사심을 버리고 의견을 물은지 한 달이 지났다. 그런데도 어느 누구도 진언하는 자가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역린(逆鱗)을 건드릴까 두려워하는 것인가.”
 1491년(성종 22년) 1월 6일, 성종이 답답하다는 듯 화를 냈다. 재변이 잇달아 “내가 부덕한 탓이니 어느 누구라도 나서 무슨 말이라도 직언을 해달라”고 했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종은 “대체 내가 언급할 가치도 없는 임금으로 생각하느냐”고 다그쳤다.
 “다시 한번 고한다. 재앙을 만나서 나의 부덕함과 부족함을 듣고자 하니 기탄없이 직언해주기 바란다.”
 그 후 4년 뒤인 1495년(연산군 1년), 대간이 간언(바른 말)을 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자 사헌부와 사간원 등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대간이 잘못을 논한 것은 바로 공론입니다. 대간의 말을 듣지 않고 죄를 범한다면 누가 ‘용의 비늘을 거슬리는’(역린) 화를 자초하려 하겠습니까.”
 그러면서 “선왕(성종)은 언로를 열어 직언하는 자를 포상함에 따라 곧은 말을 과감히 전하는 자가 많이 나왔다”고 연산군을 다그쳤다.
 당초 ‘대간을 가둔 것은 그가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이라고 국문을 고집했던 연산군도 대신들이 ‘부왕의 예’를 들며 앙앙불락하자 할 수 없이 처벌의 뜻을 접었다.     

 

'역린’을 잘못 건드리면 죽을 수도 있음을 경고한 <사기> ‘노자한비열전’의 대목. 군주의 총애를 받으면 모든 것이 용서되지만 총애를 잃으면 같은 말을 해도 주륙 당할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임금에게 날린 직격탄
 확실히 성종의 치세에 바른말을 하는 신하들이 많았던 것 같다.
 1477년(성종 8년) 대사간 최한정 등의 상소를 보자.
 “신이 듣건대 <효경>에 ‘천자에게 간쟁하는 신하 7명이 있으면 도가 없더라고 천하를 잃지 않고 제후에게 간쟁하는 신하 5명만 있으면 도가 없더라고 나라를 잃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충언이 덕행에 이롭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허물을 듣기 싫어한다면 어느 누가 역린을 건드려 스스로 화를 받겠습니까.”
 최한정은 “최근 훈구대신의 잘못을 탄핵한 대간의 직언을 따르지 않는다”면서 “간언을 따르는 도량이 처음과 같지 않다”고 임금에게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1482년(성종 13년)에도 홍문과 부제학 유윤겸 등이 올린 상언에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겨있다.
 “신하로서 임금에게 말씀을 올릴 때는 철칙이 있습니다. 임금이 얼굴빛을 부드럽게 해서 신하의 간언을 받아들인다 해도 신하는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는 바를 모두 말씀 드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임금이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위엄을 떨치시면 누가 감히 역린에 맞서 화를 자초하겠나이까.”
 무슨 말인가. 서슬퍼런 임금 앞에서 직언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지를 유윤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역린을 건드려라
 여기서 공통의 표현이 있다. ‘역린(逆鱗)’이다. 모든 신하들은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있는 것이다.
 역린이 과연 무엇이기에 그토록 두려워 하는 것일까. <사기> ‘노자 한비열전’에 나오는 고사이다.
 중국의 전국시대는 한마디로 유세가들이 천하를 쥐락펴락한 시대였다. 소진과 장의와 같은 이들은 ‘세치의 혀’로 천하를 붙였다 뗐다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세치의 혀가 상황에 따라서는 복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었다. 이 때 법가사상의 대가인 한비자는 ‘세난(說難)’을 통해 세치의 혀로 군주의 마음을 얻고, 천하를 쥐락펴락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설파하고 있다.
 “유세의 어려움은 군주의 마음을 잘 알아 나의 마음을 거기에 알맞게 하는 데 있다. 예컨대 용이란 동물은 잘 길들이면 그 등에 탈 수도 있다. 그러나 목줄기 아래에 한 자 길이의 거꾸로 난 비늘이 있는데 그것을 건드리면 반드시 용은 그 사람을 죽여버린다. 따라서 간언하는 유세자는 군주의 애증을 살펴보고 난 후에 유세해야 한다.”(<사기> ‘노자한비열전’)
 한비자는 그 예로 전국시대 위나라 때의 총신 미자하를 예로 든다.
 즉 미자하는 위나라 영공이 총애했던 신하였다. 당시 위나라 국법에는 군주의 수레를 훔쳐 타는 자는 발뒤꿈치를 잘리는 월형(월刑)에 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자하의 모친이 병이 나자 미자하는 군령을 사칭해서 군주(영공)의 수레를 타고 갔다. 영공이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지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의 효성이 지극하지 않은가. 어머니를 위해 월형을 당할 위기를 감수하다니…. 대단하구나.”
 또 어느 날 영공을 수행해서 과수원에 놀러간 미자하는 복숭아를 먹어보고는 먹던 복숭아를 덜컥 영공에게 바쳤다. 그러자 영공이 미자하의 충심을 칭찬했다.
 “과인을 이토록 끔찍히 위해주다니…. 자기가 먹고 있던 일도 잊어버리고 나를 생각하는구나.” 
 그러다 미자하의 미색이 쇠해지고 군주의 총애를 차츰 잃어갔다. 그 무렵 마자하가 죄를 지었다. 그러자 위 영공은 미자하를 맹비난했다.
 “고얀 놈이로고…. 이 자(미자하)는 예전에 군명을 사칭하여 내 수레를 탔고. 먹다 남은 복숭아를 나에게 먹인 자로다.”
 사실 미자하의 행위는 전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총애를 받을 때는 ‘현명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총애를 잃자 ‘군주를 욕보인 죄’로 처벌을 받았던 것이다.
 한비자는 이렇게 미자하의 예를 들어가며 “유세가는 군주의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지 않아야 성공적인 유세를 할 수 있다”고 토로했다. 

영화 <역린>의 한 장면. 조선조 성종은 '역린을 건드릴 것을 두려워해서 직언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직언을 장려했다.  

■한비자와 세난
 한비자는 결국 군주의 마음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직언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유세의 어려움을 전했던 한비자가 군주의 마음을 휘어잡지 못한채 자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즉, 한비자의 저서를 읽은 진나라 군주(훗날 시황제)는 “한비자를 만나보고 죽는 게 소원”이라고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다. 한비자는 같은 제후국인 한나라의 공자였다. 진나라는 한비자를 얻으려고 한나라를 공격했다. 막강한 진나라의 공격을 받은 한나라를 상황이 급박해지자 한비자를 진나라 사신으로 보냈다.
 그러나 한비자의 명성을 시기한 진나라 승상 이사가 모함했다.
 “한비자는 결국 한나라의 공자일 뿐입니다. 결국 한나라를 위해 일할 것입니다. 그를 기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차라리 그의 과오를 들춰내 법대로 처형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진나라 군주는 그 말을 믿고 한비자를 옥에 가뒀다. 승상 이사는 한비자에게 사약을 보내 자살을 강요했다. 진나라 왕(시황제)이 자신의 일을 후회하고 사람을 보내 사면하려 했지만, 한비자는 이미 죽은 후였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한비자는 ‘세난’편을 저술하고도 스스로 화를 벗어나지 못했으니 슬플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그렇다. 군주를 향해 유세하고 직언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한비자를 비롯한 선현들이 말했듯 군주의 역린을 건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역린을 건드리면 끝장이니 제대로 바른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좋은 사회를 만나들려면 역시 목숨을 건 직언으로 군주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쳐가야 한다. 직언을 마다하지 않고 직언을 장려하면서 상급까지 내린 성종을 한번 닮아보라. 경향신문 사회에디터